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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돌아가면 문제의 실마리가 보인다

문서에서 R&D 성공실패사례 에세이 (페이지 42-49)

처음으로 돌아가면 문제의 실마리가 보인다

ReSEAT 전문연구위원

변선호

계적으로 육군의 야외훈련에 필요한 통신선인 군용전화선 의 수요는 매우 많았다. 그래서 1970년대 초, 국내 굴지의 한 화학회사는 군용전화선의 개발에 뛰어들었다. 당시 엘리트 화공 전문가들이 이 개발에 참여하였으나, 고가의 나일론 원료를 가지고 천문학적인 스크랩1)만 만들어내고 포기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본인은 화학공학을 전공하고 G전선회사 공채1기로 입사한 뒤 서독 정부의 초청으로 기술 훈련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Hoechst사에서

1) 스크랩: 제품 폐물

처음으로 돌아가면 문제의 실마리가 보인다 39 군용전화선 제조 기술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제조 기술의 본거지라는 일본도 이를 개발할 때 엄청난 고생을 겪었고, 개발 후 생산 시에도 불량률이 높아 상당히 골치가 아팠다고 한다.

따라서 전선공업에 종사하는 화공 기술자에게 군용전화선의 생산은 반드시 정복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전선피복용 나일론 압출 관련 자료를 모으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전선 제조 시, 절연체로 사용하던 폴리에틸렌(PE)이나 PVC와 같은 통상의 상용 플라스틱을 압출 가공하는 것보다 나일론 압출 가공 작업이 더 어려운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온도가 조금만 변해도 나일론은 용융점도가 급격 하게 변하기 때문이다.

미군 규격에 의한 이 군용전화선의 구조는 간단하였다. 동선과 강선의 동심 연선 도체 위에 압출2) 피복된 PE 절연체가 있고, 외피는 나일론 으로 된 구조였다.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나일론 외피의 기계적 강인성과 마모에 대한 저항이었다. 거친 야외지형에서 전선을 끌고 다니며 포설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도체 위에 피복된 약한 물성의 PE 절연체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는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었다.

다만, 나일론의 최대 약점인 높은 수분 흡수율에 대한 대책이 필요 했는데 건조 조건을 신중하게 정할 필요가 있었다.

어느 날은 공장장의 호출을 받았다. 약 2개월 후에 육군본부 두

2) 압출: 수지를 스크루와 원통형 금속 벽 사이에서 스크루 회전에 의한 압력과 열로 연속 용융 시켜 밀어 냄

장성이 공장을 방문한다는 것이다. 방문 목적은 우리 회사가 군용 전화선을 생산할 수 있는지 없는지 현장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당시 군용 수요는 많았지만 국산품이 없던 상황에서 우리 회사의 경쟁업체가 납품을 시작한 것과 관련이 있던 걸로 기억된다.

군 시방서를 구해 동료와 함께 생산 기술 연구를 시작했다. 시방서에 지정된 나일론은 비싸기로 유명한 미국회사의 제품이었다. 나일론 성형 압출용 스크류와 외피 압출용 공구의 설계 및 제작은 절연용 방식과 다른 기술을 적용했다. 이것이 전체 개발의 핵심 기술이었다.

개발 과정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었다. 동선과 강선과는 다른 기계적 물성을 가진 선재의 연선 등 도체 제조 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수일이 걸렸다. 박막의 나일론 두께 탓에, 니플 제조도 무수히 실패하여 특수 구조 및 특수 재료로 바꿔가며 수차례 시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압출성형 스크류도 몇 개나 부러뜨렸다. 점점 자신이 없었다. 상용 고분자와 완전히 다른 압출 기술이었다. 최종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나일론 압출에 성공했다. 흑색 PE 절연체 위에 나일론이 밀착해 윤기를 내며 피복되었다. 두 눈을 의심하였다. 육군본부 팀의 공장 방문 예정일을 하루 남겨둔 시점이었다. 이런 일을 두고 기적이라고 하는구나 싶었다.

정말 아슬아슬했다.

드디어 방문 당일이 되었다. 육군본부 장군들이 확인하고 싶어 하는 공정은 군용전화선 시제품 제조 공정 중 나일론 외피를 입히는 두 번째 압출 공정일 것으로 추측 됐다. 나일론 압출이 가장 어렵고 문제가 생길

처음으로 돌아가면 문제의 실마리가 보인다 41 가능성이 높은 작업이라는 정보를 미리 알고 있다는 정보도 있었다.

마침내 두 장군이 우리 회사를 방문하여 나일론 압출 피복 현장을 보게 되었다. 반짝반짝 광택을 내며 나일론 외피가 깔끔하게 피복 되었다.

손으로 구부리거나 비틀어도 외피는 제대로 밀착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장군의 얼굴에서 흡족해 보이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첫 번째 공정이나 세 번째 공정은 궁금해 하지도 않는 눈치였다.

좋은 결과에 자신감을 얻은 공장장은 수급에 마음이 바쁜 두 장군과 마주앉아 당일 414마일의 3개월 내 납품계약을 성사시켰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수량은 잊히지 않았다. 여하튼 그렇게 쉽고 멋있게 나일론 압출에 성공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토록 간단한 제품 개발에 실패한 국내 화학 대기업들을 떠올리며 살짝 우쭐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동료들과 함께 제조 과정에 돌입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나일론 피복 후 2주일 정도가 지나자 윤기가 흐르던 나일론 외피가 PE 절연체로부터 누렇게 들뜨기 시작했다. 나일론 외피가 흑색 절연체에 밀착되었을 때는 검게 보이지만 들뜨니 나일론의 자연색 빛깔이 드러났다. 그때 바라본 동료들의 얼굴도 모두 누렇게 떠있었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것이다. 아마 내 얼굴도 똑같이 누렇게 떴을 것이다.

이 날 이후로, 나일론 외피가 들뜬 원인을 찾아 개선하기 위한 지옥의 날들이 시작되었다. 우선 지정된 나일론은 압출 특성이 개선된

나일론 610 계통이라고 추정되는데, 흡수율은 나일론6이나 나일론66의 약 1/2 정도로 많이 개선되어있다. 그러나 대기 중에서 PE 흡수율이 약 20배에 달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최적의 건조법이 필요하다. 나일론 외피 압출 시 절연체 위에 가해지는 용융 외피 압력의 증대(밀착)를 위한 압출방식의 재검토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나일론 외피 압출 시 외피 바로 밑에 있는 PE층의 예열 방법이 중요한 검토 대상이었다.

예열 방법을 하나하나를 검토하여 시간 경과에 따른 나일론 외피 들뜸 여부를 검사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철야는 일상이 되었다.

조건을 바꿔가며 시험했지만 예정된 납기의 두 배의 시간이 흐를 때까지 해결하지 못했다. 다들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정 인자를 아무리 바꾸어도 피복 직후는 제대로 밀착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들뜸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비싼 나일론 수입품이 폐기물이 되어 산처럼 창고에 쌓여 사표 낼 염치도 없었다. 곳곳에 놓인 보빈에 감겨있는 군용전화선에서 누렇게 들뜬 나일론 피복이 보였다. 모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포자기 심정으로 회사의 조치에 따르자는 분위기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 본인의 책임을 통감하며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냉철하게 처음으로 돌아가 기본 개념부터 재검토에 착수했다.

동시에 밀착을 위한 다른 방법도 찾아보았다. 표면에 화학적 작용기가 없는 PE는 나일론과 화학적으로 계면에서 서로 밀착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경우 중간층을 넣어 양쪽과 잘 붙게 할 수 있는 화학적 방법이 있다. 그러나 이 중간층은 전기적 특성에 악영향을 주기 때문에 통신

처음으로 돌아가면 문제의 실마리가 보인다 43 케이블에는 사용될 수 없었다. 따라서 PE, 나일론 두 가지만 가지고 계면이 밀착되게 하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이를 위해 화학적으로 안정된 고분자인 PE 표면을 산화시킬 정도로 강렬한 불꽃 등에 의해 열처리 하는 방법이 동원돼야 했다. 열처리를 통해 표면에 작용기를 부여해 나일론 표면과 밀착시키는 것이다. 나일론 피복 시 물 냉각도 검토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정관리의 개선이었다. 합격 여부를 생산과 동시에 즉시 파악하는 것이다. 들뜸 현상을 손으로 비틀어 보는 검사 방법보다는 혹독하지만 보다 손쉬운 밀착성 점검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들뜸 현상이 나타나는 기간을 단축해 공정 조건을 즉시 조정해야 했다. 이제 이 방법을 찾아내는 건 나의 몫이었다. 동료들과 현장에서 동고동락하며 여러 가지 검사 방법을 검토한 끝에 드디어 최적의 방법을 찾아냈다.

이렇게 쉽고 간단한 검사 방법을 왜 이제야 알게 된 걸까. 자괴감이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나름대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검사법은 워낙 혹독한 방법이므로 이 검사에서 합격하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들뜸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품질보증부에서 반복 확인 하였다. 팀장을 잘못 만나 고생만 잔뜩 한 채 실망에 빠져 있던 동료 들의 얼굴에 비로소 화색이 돌았다. 다시 조직 내에 생기가 돌고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조직 내에서 책임자의 역할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 재차 통감한 순간이었다.

매우 효과적이고 손쉬운 이 즉석 검사법은 실제 작업자가 공정관리 에서 손쉽게 합격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로소 공정 관리에서 품질이 100% 확인된 제품만 다음 공정으로 넘어갈 수 있게

매우 효과적이고 손쉬운 이 즉석 검사법은 실제 작업자가 공정관리 에서 손쉽게 합격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로소 공정 관리에서 품질이 100% 확인된 제품만 다음 공정으로 넘어갈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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