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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 현학과 왕필

문서에서 老子의 自然에 대한 해석 (페이지 27-30)

Ⅲ. 노자?의 자연에 대한 왕필의 해석

1. 위진 현학과 왕필

왕필의 주석은 󰡔노자󰡕의 주석 가운데 훌륭한 작품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왕필 이 󰡔노자󰡕를 주석하면서 취하고 있는 방법은 위진 현학가들이 통용하고 있는 辯 名析理의 방법이다. 辯名이란 하나의 명사마다 글자의 뜻을 부여하는 것을 말한 다. 그리고 하나의 명사에는 그 명사가 대표하는 개념이 있는데, 이 개념을 분석 하여 그 명사가 지니는 의미를 밝히는 것을 析理라고 한다. 왕필은 이러한 辯名 析理의 방법으로 󰡔노자󰡕를 주해하면서 自然을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49)

중국 고대 철학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 즉 유가적 태도와 도가적 태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유가는 자연 현상에 객관적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인간 사회의 가치나 질서를 말하기 위한 비유로 등장하였을 뿐 그 자체로 이해되고 탐구 하지 않았다. 반면 도가는 자연에 대한 관심과 관찰에 있어서 비 교적 객관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가는 항상 인문 정신을 기반으로 하 여 문명을 옹호하는 태도로 일관하였으나, 도가는 때때로 문명으로의 도피 혹은 문명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위진 시대에 들어서면서 자연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와 직접적 관련을 가지며 철학적 담론 속에 등장한다. 위진 시대의 이 논쟁을 ‘명교자연논쟁’이라 부른다. 위진 철학자들은 자연에 관한 언설이 풍부한 󰡔노자󰡕, 󰡔장자󰡕, 󰡔주역󰡕을 주된 텍스트로 하여 이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주장을 피력하곤 했다. ‘명교자연 논쟁’은 󰡔노자󰡕를 은둔주의로부터 탈출시켜보려는 ‘제도와 자연을 둘러싼 논쟁’이 라 할 수 있다.

왕필은 ‘명교는 자연에 근본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자연을 우위에 두고 있다.

왕필이 󰡔노자󰡕를 주해하면서 自然이라는 두 자를 사용하고 있는 구절은 모두 27 건에 달한다.

49) 진고응, 󰡔老子今註今譯及評介󰡕(대만상무인서관 2002), 333쪽.

왕필은 󰡔노자󰡕}17장의 “조심하여 그 말을 중히 여기고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 功을 이루고 일을 완수하여도 백성들은 알지 못하고 나는 스스로 그러하다 고 한다”는 구절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自然은 그 端兆(실마리)를 찾아볼 수 없고 그 意趣를 目覩할 수 없다. 대상이 없다면 말하기가 용이하지만 말을 함에는 반드시 그것에 대응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말을 조심하여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無爲의 일에 처하 여 말없는 가르침을 베풀 뿐 드러내어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功을 이루고 일 을 완수하여도 백성들은 그것이 그러한 까닭을 모른다.”50)

또한 왕필은 󰡔노자󰡕}23장의 “希言自然”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들 으려고 해도 들을 수 없음을 <希>라고 한다. 35장에서 말하기를 “도를 언어로써 나타내면 淡泊하여 아무 맛도 없다. 보려고 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고 해도 들을 수도 없다고 하였는데 그런 즉 아무 맛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말이 곧 自然의 至言이다.” 이러한 왕필의 해석에 대하여 大濱皓는 “왕필은 17장과 23장의 自然 을 풀이함에 있어서, 自然과 도를 同一한 것으로 보고 있다.”51)고 지적한다.

그런데 왕필은 자연을 풀이함에 있어서, 17장에서는 <不可得而見>, <不可得而 覩>라고 하고 23장에서는 <無味不足聽>이라고 하여 매우 흡사한 표현을 하고 있는데, 이는 자연이 우리의 감관에 의해 포착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 이다. 자연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감관 작용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두 가 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하나는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 의 감관 작용을 바탕으로 하는 이성적 사유에 의해서는 알려지지 않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이 같은 구분을 의식하면서 왕필의 주석에 주목해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왕필이 자연을 감관에 의해 포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존재가 아니라고 규정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 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우리의 정신능력으로는 알려지지 않는 실재로써의 도 와 같은 차원에서 자연을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가하는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50) 自然其端兆不可得而見也 其意趣不可得而覩也 無物可以易其言 言必有應 故曰 悠兮其實言也 居無 爲之事 行不言之敎 不以形立物 故功成事遂 而百姓不知其所以然也 왕필 󰡔노자주󰡕, 17장.

51) 대빈호, 󰡔노자철학연구󰡕(청계 1999), 임헌규 역, 183쪽.

있는 것이다.

또한 왕필은 󰡔노자󰡕}14장의 “들으려고 해도 들을 수 없음을 <希>라고 한다”

는 구절과 35장의 “도를 언어로써 나타내면 淡泊하여 아무 맛도 없다. 보려고 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고 해도 들을 수 없다”고 하는 구절을 끌어들여 23장의 자연을 풀이하면서 자연을 도와 동일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위 의 14장과 23장의 구절은 도는 감관 작용을 바탕으로 하는 우리의 정신능력에 의해 대상적으로 정립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데, 17장과 23장 의 자연에 대한 왕필의 주석은 󰡔노자󰡕에 있어서의 도에 대한 설명과 전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또한 왕필은 도를 “우리의 耳, 目, 體 등의 감관으로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고 “上德之人은 그 端兆를 目覩할 수 없고 德趣를 볼 수도 없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上德之人은 곧 도를 체득한 사람을 뜻한다. 즉 體道者에 대한 설명이 자연에 대한 서술과 일치하고 있다. 이상에서 볼 때 왕필 은 자연과 도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나아가 서 그는 도를 무와 연결시키려한다는 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왕필이 󰡔노자󰡕}25장의 道法自然에 대해 주석함에 있어서는 도와 자연 을 다른 차원의 것으로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즉 왕필은 道法 自然을 풀이하여 “法는 法則이다. [...]도는 자연을 위배하지 않아서 그 性을 얻는다. 자연을 법칙으로 한다는 것은 모난 곳에서는 모난 것을 법칙으로 하고 둥근 곳에서는 둥근 것을 법칙으로 하여 자연에 위배되는 바가 없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자연이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궁극을 이르는 말이다. 智로써는 無知 에 미칠 수 없으며, 刑魄(즉 땅)은 精象(즉 하늘)에 미치지 못하며, 정상은 無形 에 미치지 못하고, 거동이 있는 것은 거동이 없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옮겨가면서 서로 본받는다. 도는 自然을 본받으니 天이 그러므로 바탕으로 삼고, 천은 도를 본받으니 地가 그래서 본받으며, 地는 천을 본받으니 人이 그래서 본 뜬다. 왕이 주인 노릇 할 수 있는 것은 그 주장하는 자가 하나이기 때문이다.”52) 라고 한다. 여기에서 보면 미세한 형상이라도 있는 것은 형상 없는 것에서 效法 하고 도는 自然에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결국 은연중에 自然이 道보다

52) 왕필 󰡔노자주󰡕, 25장. 法謂法則也...道不違自然 乃得其性 法自然者 在方而法方在圓而法圓 於自 然無所違也 自然者 無稱之言窮極之辭也 用智不及無知而形魄不及精象 精象不及無形 有儀不及無 儀 故轉相法也 道順自然 天故資焉 天法於道 地故則焉 地法於天 人故象焉 所以爲主 其之者也.

더 고차원적인 실재임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왕필은 “도는 자연을 위배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만약에 도 위에 다른 자연 이 있다면 도는 그 자연을 위배할 수가 없다. 왕필의 注는 곳곳에서 自然之道를 말하고 있는데, 이 자연지도를 人道, 地道, 天道를 총괄하여 포함하는 개념으로 삼고 있다. 왕필은 󰡔노자󰡕를 해석하면서 󰡔노자󰡕의 도를 실제로는 이미 자연으로 대체하여 말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의식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왕필은 노자가 도를 최고의 개념으로 삼은데 비해 자연을 최고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며, 절대 기준이나 목적으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때의 자연은 형 이상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도의 성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서술적 의 미를 아울러 지니고 있어서 오히려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이해하기 쉬운 도의 개 념을 잘 부연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필의 입장은 비판받기도 한다. 대빈호는 7장, 23장, 25장에 대한 왕 필주에 근거하여 “왕필은 󰡔노자󰡕의 여러 장들 속에 있어서 자연에 대한 부분들 을 해석하면서 어느 곳에서는 자연과 도를 동일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또 어느 부분에서는 자연에 대해 도보다도 높은 실제성을 인정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해 석에 모순을 보이고 있다”53)고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도와 자연 개념에 대한 왕필의 애매한 입장은 25장의 주석에서 “도는 자연을 위배하지 않아서 그 性을 얻는다”고 하고, “만물은 자연을 性으로 한다”

고 한 것에서 잘 드러나 있는데, 여기에서 왕필은 자연을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본성이나 속성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군다나 그는 자연을 배우지 않아도 能한 것이라 하여 본래부터 주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왕필이 말하는 󰡔노자󰡕에서의 자연의 궁극적인 의미는 과연 무엇인 가? 왕필의 󰡔노자󰡕}해석방식은 흔히 숭본식말의 방법으로 알려져 있는데, 왕필은

그렇다면 왕필이 말하는 󰡔노자󰡕에서의 자연의 궁극적인 의미는 과연 무엇인 가? 왕필의 󰡔노자󰡕}해석방식은 흔히 숭본식말의 방법으로 알려져 있는데, 왕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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