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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흥기 : 실학의 등장부터 고종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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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 조선의 유학자들은 내부로부터 새로운 변화를 촉구하였으며, 이를 위한 획기적 조치들도 요구하였다. 이런 요구는 지금까지 조선 사회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풍조였으며, 새로운 학풍이기도 하였다. 이들은 실용적이고 합리적 인 학문 연구와 정책 수립을 요구하였으며, 새로운 사회 구조와 과학 기술의 발 전도 촉구하였다. 이는 사회적·문화적·산업적 변화를 촉구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었다. 이 시기에 이런 흐름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실학자들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실학은 실용지학으로서 실사구시의 민생과 부국강병에 목적을 둔 경세치 용 학문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은 차문화뿐만 아니라 농업과 상업 등 모든 분야 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차문화 발전 측면에서, 실학자들은 서적과 중국 여행을 통해 중국의 차문화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제적으로 차의 유통이 활발했던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차와 관련된 전문서적과 차 및 차 도구들이 조선으로 유입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직접 중국을 여행하며 차문화를 경험하였 다.157) 이런 바탕으로 성립된 실학은 왕실과 사대부 문인과 사찰에 다양한 영향 을 끼쳤다. 본 장은 실학을 중농주의와 중상주의로 구분한 후, 실학이 조선 후기 차문화의 중흥에 끼친 영향을 왕실, 문인, 사찰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57) 韓基貞, 「18·19世紀 朝鮮 知識人의 茶文化 硏究 」, 성신여자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3, p. 84.

1) 실학 중농주의와 차문화의 중흥

(1) 왕실 다례의식의 제도화와 차 소비 증가

조선 후기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조선은 문화적으로 가장 큰 변화를 겪었다.

지금까지 왕실과 문인 중심으로 발전되었던 문화 현상은 주변의 일반 백성들에 게 전파되었다. 조선 중기 전란 이후 목격되었던 사회적·정치적 변화와 외국과의 빈번한 교류와 접촉은 문화계의 키워드와 중심축을 서서히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실학이 있었으며, 실학의 등장으로 기존의 중국 중심 세계 관은 우리 것에 대한 관심과 연구로 변화되었다.

『승정원일기』를 살펴보면, 영조 시기에 차의 효능 등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 었다. 영조 20년(1744) 4월 22일에는 청차와 우전차의 효능에 대한 논의가 있었 다.158) 사실 영조는 차에 대해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그는 세자의 비만을 걱정하 였으며, 비만에 좋은 것이 무엇인지 재로에게 물었고, 재로는 청차와 우전차가 비만에 좋으며 여기에 강초를 넣어 낮에 마시면 좋다고 말했다. 이는 영조 시기 에 차문화가 비교적 활성화 되었으며, 다양한 종류의 차가 생산되고 있었음을 의 미하였다. 우리나라의 우전차는 곡우 전에 채취하여 만든 차를 지칭했지만, 중국 의 우전차는 우수에 채취하였다. 낮에 마시면 좋다고 한 것은 차의 각성작용을 유념하여 복용하라는 의미였다. 강초를 넣는 것은 차의 냉성을 약화시키고, 열성 으로 변화시켜 체지방 분해를 유도하려는 과학적 배려였다. 영조 20년 4월 24일 의 기록에 의하면,159) 차에 문외한이었던 그가 점차 차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 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세자의 비만을 치료하기 위해 차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세자에게 올리는 작설차와 우전차의 효능에 대해 신하들과 논 의하였다. 그는 작설차보다 우전차가 기를 올리거나 내리는 효능이 있다는 것으 로 파악하였으며, 지나치게 마실 경우 기 소모가 있다는 것도 이해했다. 그는 차 를 마심에 있어 무엇보다 물이 중요하다는 점도 인식하였다.

158) 『승정원일기』, 971책, 上曰 肥兒丸當無害耶 在魯曰 非助肥之劑矣 靑茶服之則好矣 上 曰 於肥爲好耶 在魯曰 彼人食肉後 必服雨前茶矣 上曰 何謂雨前茶 在魯曰 雨水前摘取者 見於方書茶注服之 (중략) 復明曰 雨前茶 則彼中亦謂名茶 煎之則色正黃 服之令人輕淸矣 159) 위의 책, 971책, 玄起鵬曰 茶雖下氣 而亦能耗氣, 只可間間進御矣 上曰 此茶與雀舌一

類乎 錭曰 一類矣 彼人亦多詐僞 雖名以雨前 而安保其必爲雨前乎

영조 28년(1752) 4월 10일의 기록에 의하면,160) 그는 점차 차의 효능을 파악하 기 시작했고, 더 많은 정보를 요구했음도 알 수 있다. 그는 지속적으로 차에 대 해 관심을 가졌으며, 작설차의 효능과 산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그의 질 문에 대해 신하들은 작설차의 품질은 중국 것보다 우리나라 전라도에서 생산되 는 것이 더 좋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차 맛을 돋우는데 사탕보다는 꿀이 더 낫 다는 점도 파악하였다. 이는 영조 시기의 차문화가 재배와 생산에서 다식까지 확 대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영조 33년(1757) 3월 24일에 의하면,161) 영조 는 차를 달이는 물과 작설차에 대해 많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차를 달일 때 사용되는 물과 작설차에 대한 궁금증을 신하들과 묻고 답했 다. 그는 왕실에서 차를 달일 때 사용되는 물은 의약청 군사들이 회통문에서 길 러 와야 한다고 말했다. 의약청은 임시관청으로 왕실에서 병환이 위독할 때 특별 히 설치하여 담당자를 궁중에 상주하게 하여 투약에 신중을 기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이었다. 왕실은 회통문의 물을 사용하여 작설차를 음용했으며, 무거운 물인 중수로 물을 숙성시켜 사용하였다. 암반수에는 다양한 미네랄 성분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차를 음료보다 약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차에 대 해 잘 몰랐던 그는 실학의 영향을 받은 관료들과 많은 대화를 통해 차에 대한 정보와 설명으로 점차 해박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시기에 생산되었던 작 설차는 전라도와 경상도 등 삼남지방에서 생산되었다.

영조 44년(1768) 10월 2일의 기록에는,162) 영조가 작설차의 복용 방법에 대해서 도 언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건강 상태를 묻고 답하면서 겨울 작설차와 여름 오미자차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였다. 그는 여름 음료로 오미자차를 음용하였고, 겨울 음료로는 작설차를 복용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작설차의 효능을 직접 체험 하고 있었으며, 작설차가 비위의 기를 내리는 효험이 있다고 말했다. 이는 왕실 의 차에 대한 관심이 차 재배와 생산의 확대로 이어졌고, 차문화의 발전에도 기 여했음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승정원일기』에 언급된 내용을 살펴보면, 작설차에 관한 기록들이

160) 위의 책, 1081책, 仍下詢曰 雀舌有效乎 象漢曰 好矣 上曰 鄕材乎 若魯曰 我國人貴 遠者 而雀舌則我國種好矣 上曰 然則有雀舌田乎 象漢曰 全羅道所産矣

161) 위의 책, 1142책, 上曰 煎茶用何處水乎 履亨曰 汲水於會通門 曾備矣 (중략) 上曰 唐 雀舌根本 何如 履亨曰 每木 皆取其英而造成矣 世麟曰 別有一種 非造成也 上曰 我國雀 舌 則何如 履亨曰 亦勿論某木 繭者是也 世麟曰 別有種類 三南所産也

162) 위의 책, 1285책, 上曰 夏服五味茶 冬服雀舌茶 故不數飮熟冷矣 昌誼曰 雀舌 不宜長 服矣 (중략) 上曰 雀舌茶 似有效矣 陽澤曰 脾胃有不好底氣則服之 不然則不宜長服矣

많이 등장함을 알 수 있다. 특히 영조는 작설차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 다. 그는 작설차가 무엇이고, 작설차의 효능과 복용방법과 작설차의 산지 및 작 설차의 장려 방법 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좀 더 체계적으 로 작설차의 재배를 관리하고, 작설차의 재배 면적과 생산을 확대하는 방안을 수 립하며, 부국과 민생에 도움을 주는 차문화산업으로 활성화 시키지 못한 부분은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의 어느 왕보다 차에 대 해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영조 39년(1763) 2월 26일 기록에는, 영조가 민생의 경제 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중국 당나라의 작설차 사용 분량을 감소시켰다고 언급되 어 있다.163) 그는 왕실의 경비 절감을 위해 내국에서 올리던 중국 사향을 없애고, 작설차의 분량도 2/3를 감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차에 문외한이었던 영조가 작설차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중국의 작설차보다 우리의 작설차를 선호하였 고, 이를 통해 민생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려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조선의 차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의 차에 대한 관심은 구체적인 차문화산업, 즉 차의 재배, 생산, 산업화 증진 정책 수립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했는데, 만약 그가 이 부분까지 관심을 기울 였다면 조선 후기의 차문화산업뿐만 아니라 현재의 차문화산업은 훨씬 더 발전 된 모습을 띠었을 것이다.

순조는 즉위년(1800) 11월 24일에 인정전에서 중국 사신을 맞아 다례 의식을 행하였으며, 그 과정과 절차를 자세히 기록하였다.164)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실 에서 행하는 다례의식들이 자주 언급되어 있었다. 이들 중 순조 시기에 인정전에 서 행해졌던 다례의식의 절차는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차문화와 관련하여, 순조 시기의 다례의식 절차는 매우 중요한 스토 리텔링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이를 콘텐츠화한다면 효과적인 공연문화의 소재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순조 9년(1809) 12월 2일의 기록에 의하면,165) 도해역관 (渡海譯官) 현의순(玄義洵)과 최석(崔昔) 등은 대마도 사람들의 차 애호 정도에

163)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101권, 內局封進唐麝香永減 唐雀舌減三分之二 明欽以爲 國之急務 莫如輔導之方 節省之道 故陳此兩事 上皆從之 明欽臨退 上復執手敦勉

164)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 1권, 還御仁政殿 接見勅使 行茶禮 (중략) 兩勅曰 進茶則 當依敎 (중략) 如是慇懃 當依敎矣 仍進茶 司饔院假提調一人 捧茶甁 一人捧茶鍾

165) 위의 책, 12권, 島俗尙儉 伊豫州之山 出銅鐵 取之無竭 而切禁鍮器 日用盡是木器․木 筯 饌用海魚․海菜․鹿肉․山藥․牛蒡之屬 其味甚淡 雖賤人 茶不離身”

대해 언급하였다. 역관 현의순 등은 일본 대마도에서 보고, 듣고, 느낀 차문화의 현황을 왕실에 들어가 보고하였다. 이들은 일본 대마도 사람들이 누구나 차를 몸 에 지니고 다닌다고 말했다. 이는 일본의 차문화에 대한 정보를 순조에게 소상히 알림으로써 왕실이 중국과 일본 등 타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고종 29년(1892) 11월 7일의 기록에는 영희전에서 제기고의 물건을 잃어버린 변고가 발생하였고, 이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 출입한 관리들을 조사했던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은다종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등장한 다.166) 은다종은 차를 마시기 위한 다구의 일종이었다. 고종 시기에 영희전에서 어떤 차도구들이 사용되었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종묘대제(宗廟祭 禮)는 제사에서 차를 사용하였으며,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문화콘 텐츠화로 활용되고 있다. 종묘대제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에서 왕 이 유교 절차에 따라 집행하는 경건하고 엄숙한 제사였다. 이 제사는 1969년 복 원된 후 해마다 개최되고 있다.167) 별다례는 국상 기간 중에 절기와 시기에 따라 거행되었으며, 대상자의 결혼기념일과 존호(尊號)를 올리는 날 등에 주로 진행되 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별다례를 시행하는 횟수가 증가하였으며, 고종 시기에 별다례가 가장 많이 진행되었다고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조선 후기 왕실 중심의 차문화를 살펴보았다. 조선 후기에는 초기와 마찬가지로 다례의식이 빈번하게 개최되었다. 향음주례를 중시했던 조선 사회이 지만 사신 맞이 등 외국 사신에 대한 접대의식에서는 점차 술 대신 차의 사용이 의무화되었다. 하지만 조선 중기 전란 전후로 국가 경제와 살림이 어렵게 되었으 며, 차의 재배와 생산량이 줄어들었고, 가격도 상승하자 왕실은 차 대신 인삼탕 의 사용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 후기에 사회와 경제가 조금씩 안정되 자, 다례나 사신 접대의식에서 사용되었던 인삼탕은 차로 대체되었다. 영조는 우 리나라의 작설차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차 재배와 다양한 제다 방법 등을 구체화하지 못했으며, 조선 차문화산업의 발전과 활성화에 크게 기여

166) 위의 책, 29권, 永禧殿啓 今月初五日夜 祭器庫有偸竊之變 銀匙楪具蓋六坐、銀盞具蓋 與臺十八坐、銀茶鍾具蓋與臺六坐及飮福盞具臺二坐

167) http://www.sisu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4228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길례(吉禮)에 속하는 종묘대제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왕실 사당인 종묘에서 왕이 직접 거행하는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다. 종묘 정전 에는 역대 조선의 왕 19명과 왕비 30명 등 총 49명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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