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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시대 차문화산업의 육성정책과 그 현대적 수용을 고찰하기 위 해 조선시대 차문화의 발전과정을 침체기, 과도기, 중흥기로 구분하여 고찰하였 으며, 차문화산업 육성정책을 공납제도, 수매제도, 다방제도 등 차 관련 국가제도 및 기관 등으로 구분하여 고찰하였고, 마지막으로 차문화산업 육성정책의 현대적 수용을 차문화산업의 부흥, 차문화 전통의 계승, 그리고 차문화의 대중화로 나누 어 고찰하였다.

조선 초기 왕실의 차문화는 차 재배나 생산을 중심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차 상품을 다례의식 및 사신 맞이 행사에서 활용하고 소비한 단계를 통해 진행 되었다. 중국의 사신들은 조선 최고의 명차인 작설차를 선물로 받았으며, 조선 왕실을 방문하는 자리에서는 중국의 차 전매제도를 설명하고 작설차를 활용한 조선의 차 전매제도 시행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차를 좋아하 지 않았던 왕들은 차 전매제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이를 현실사회에 적 용하지도 않았다. 산업적 측면에서, 조선 초기는 고려 때 행했던 연등회나 팔관 회가 사라져 차 소비가 감소되었던 시기였고, 유교적 의례가 중시 되었던 시기였 으며, 왕실 내 다방이라는 부서가 정비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고려시대와 비교할 때 조선 초기의 차문화는 약간 쇠퇴하였지만, 완전히 붕괴된 상태는 아니었으며, 일시적으로 침체의 단계를 경험했던 시기였다.

조선 중기 왕실 차문화도 초기의 차문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기 왕실의 차문화도 거의 대부분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기 위한 다례의식의 진행을 통해 발 전하였다. 또한 조선 중기 왕실은 중국 사신들을 통해 중국의 차문화산업 현황과 차 전매제도, 그리고 차 생산을 독려하는 제도 등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었다.

하지만 중기의 왕실도 초기와 마찬가지로 국가적 차원의 실용적 차문화산업 활 성화 방안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수립하지 못했다.

조선 후기 왕실 중심 차문화는 초기나 중기와 마찬가지로 사신 맞이 다례의식 과 왕실의 행사를 통해 발전하였다. 향음주례를 중시했던 조선 사회였지만 사신 맞이 등 외국 사신에 대한 접대의식에서는 술 대신 차의 사용을 의무화하였다.

하지만 전란 이후 국가 경제와 살림살이가 어렵게 되자, 차의 재배와 생산량이 줄어들고 가격이 상승하였으며, 왕실은 차 대신 인삼탕의 사용을 고려하기도 하

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 사회와 경제가 조금씩 안정되자, 다례의식이나 사신 맞 이 의식에서 사용되었던 인삼탕은 다시 차로 대체되었다. 영조는 우리의 작설차 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차 재배와 다양한 제다 방법 등을 산업화 로 구체화하지는 못했으며, 조선 차문화산업의 발전과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왕실 내부의 차문화에 대한 관심 증대는 사대부 문인계층과 일반 백성들의 차문화 대중화를 이룩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조선 후기 실학의 등장은 조선의 차문화산업을 전반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왕 실의 중국차에 대한 관심을 조선의 차에 대한 관심으로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의 차문화가 발전을 이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또 다른 축은 사대 부 문인계층이었다. 조선 초기 문인들은 고려의 차문화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조 선 초기 문인 중심의 차문화는 왕실 중심 차문화보다 더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조선 초기의 차문화 발전을 이끈 대표적 문인은 서거정, 김시습,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이목이었다. 이목은 조선 차문화의 분수령이었으며, 김시습은 야 인으로 살면서 직접차를 재배하였다. 김종직은 직접 다원을 조성하였으며, 그의 제자들도 차문화의 발전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조선 중기 문인들은 조선 초기의 차문화를 계승하고 확산시켰다. 전란 직후에 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어려움 때문에 모든 분야가 공통적으로 발전하기는 어 려웠기 때문에 차문화도 그 영향을 받아 커다란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이로 인 해 사대부 문인들은 스스로 차를 재배하고 생산한 후 이를 교우들에게 선물로 나누어주거나 스스로 소비하기 위한 차를 만들지 못했으며, 중국에서 들어온 차 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란 이후 중국과 일본과의 외교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잦은 만남과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사절단으로 파견된 관리들이나 사행을 추구했던 문인들은 중국과 일본의 차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중국의 차 전매제도를 소개하였으며, 조선에서도 차 전매제도의 운영이 가능하다 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왕들의 차문화에 대한 무관심으로 차문화산업의 활성화 및 상호 교역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조선 후기 차문화의 발전은 실학과 함께 이루어졌다. 실학 중농학파 학자들은 직접 차를 재배하고 생산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의 차 관련 서적들을 소개하 고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의 차문화가 왕실이나 사대부 등 일부 특정 계층에게만 속하는 문화가 아니라 일반 차 애호가와 양반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보편적 문화로 발전했음을 의미하였다. 조선 후기 차문화산업이 부 흥하고 중흥하는 데는 중농주의 실학자들의 직접적인 차 농사 체험과 실용적 사 상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 후기 중상주의 실학자들은 상공업의 진흥과 기 술혁신, 그리고 차문화산업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청나라의 발달된 차문 화산업을 직접 목격하고 이를 수입하여 조선 후기의 차문화산업을 부흥시키려 하였다.

조선 초기에 차의 재배와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이루어진 대표적 공간은 사찰 이었다. 불교의 선종이 차문화 발전에 끼친 영향은 선종의 승려들이 차문화를 형 성하여 보급하였다는 점과 이미 보편화된 차문화를 선승들이 수용하여 확산시켰 다는 점이다. 이처럼 사찰 중심의 차문화는 조선 초기에도 그 명맥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다. 조선 초기와 중기 임진왜란 전까지 사찰에서 차를 재배하고 다 양한 방법으로 제품을 만드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사찰 중심의 차문화산업 은 사대부 문인들과 일반 백성들의 신뢰와 교유를 바탕으로 겨우 그 명맥을 유 지하였으며, 전란으로 사찰의 차 재배와 생산을 이전의 상태로 회복하는 데는 많 은 시간이 걸렸다. 차는 사찰에서 승려들이 수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도구였 다. 또한 사찰 승려들에게 차는 유학자 문인들과 교유하며 선과 교를 소통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세상사를 접할 수 있는 유용한 매개체였다. 조선 후기 사 찰과 승려의 차문화산업은 실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승려와 유학자들 의 지속적인 소통과 교유는 사찰의 차 재배, 생산, 제다 관련 차 산업을 발전시 켰다. 실학은 조선 후기 차문화산업의 수준과 단계를 중흥과 부흥의 단계로 올려 놓았다. 조선 후기 사찰 차문화산업의 중흥과 관련하여 대둔사는 매우 중요한 역 할을 수행하였는데, 여기에는 대둔사의 차 재배 확대, 보림차 등 차 제품의 생산, 초의와 정약용 등 승려와 실학자와의 교유를 통한 차 정보 교환 및 차 소비, 그 리고 영호남 지역 사찰의 상호 차 제품 교류 등이 포함될 수 있다.

조선시대 차문화산업의 육성정책은 차 공납제도, 차 수매제도, 차 전매제도, 그 리고 다방제도, 다소제도, 다세제도, 다모제도, 군국아문제도 등 차 관련 국가제 도 및 기관의 활성화를 통해 진행되었다. 조선의 왕들은 초기 숭유억불 정책의 시행으로 고려시대의 전통과 불교의 음다 풍습으로 간주되었던 차문화나 차문화 산업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세종은 중국의 차 전매제도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으며, 영조는 차에 문외한이었지만 작설차에 대해 관심을 가 지고 있었다. 차 전매제도는 조선 중기 임진왜란 이후에도 국가경제의 활성화 방

안으로 논의되었다. 사대부와 관리들은 국가 차원에서 차를 관리하고 수매해야 할 필요성에 공감하였으며, 제도와 기관 설립을 추진하였다. 차문화산업을 부국 강병의 수단으로 활용하자는 논의는 실학의 등장과 중상주의 및 중농주의 학자 들의 중국 서적 번역과 실용주의 방식의 적용 이후 본격화되었다. 만약 조선의 왕실이 차 전매제도에 좀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조선 후기의 차문화산업은 활성 화되었을 것이며, 그 분위기는 현재의 차문화산업 활성화로 이어졌을 것이다. 우 리의 작설차를 좋아했던 중국 사신들은 만약 조선이 중국과 같이 차를 전매제도 로 수매하고 이를 판매하면 큰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하였 다. 조선 초기의 왕실이 차 전매제도의 시행에 적극적이었다면, 조선의 차문화산 업 활성화와 차를 통한 이익 창출 시기는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다. 조선의 차문 화산업과 관련하여, 차를 수매하는 국가기관과 방식은 현대 차문화산업의 활성화 방안 수립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주었다. 고종 시기부터 본격화된 차문화산업의 활성화 방안과 국가기관의 차 담당 업무는 조선의 멸망으로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이후 우리의 차문화산업은 활성화되지 못하고 중단되었으며, 일본의 영 향력 속으로 편입되어 정체성을 상실하였고, 이런 상황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현대 사회의 차음용 확대와 차문화산업 활성화는 조선시대로부터 정신적·사회 적·산업적 측면에서 다양한 시사점을 얻었다. 정신적 측면에서 현대 차문화산업 이 얻을 수 있는 중요한 키워드는 정서적 안정, 스트레스 해소, 정신적 치유이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정신적 피로감과 스트레스는 점차 증가하고 있으며, 이를 해소하고 정서적 안정을 창출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밖 에 없다. 사회적 측면에서 현대 차문화산업이 조선시대 차문화산업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중요한 키워드는 소통과 대화와 화합이었다. 차문화 및 차문화산업은 시 대와 관계없이 인간의 사회적 활동 영역 및 관계 형성의 확대, 그리고 소통과 대 화의 공간 확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산업적 측면에서 현대 차문화산업이 조선시대 차문화산업으로부터 차용할 수 있는 중요한 연결고리는 차의 공납제도 와 수매제도에 의한 차 재배 및 생산의 활성화, 다소와 다방의 운영을 통한 차 생산의 국가 관리, 다모와 다세와 군국아문제도 운영을 통한 차 관련 기구의 설 치 등이었다.

조선시대 차문화산업의 육성정책을 고찰해볼 때, 현대사회의 차문화산업이 활 성화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치들이 선행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