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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물산공진회와 전북관

문서에서 근대의 시작 도시개발과 종교·문화 (페이지 163-167)

(烙竹杖, 달군 쇠로 지져서 무늬를 놓거나 그림을 그린 대), 연초(煙草), 죽장(竹枕), 생강절편(軟薑 煎果), 죽각(竹刻)은 모두 고유한 물품으로 신연구를 가하야 예전의 제조에 비하면 백승(百勝)한 가 치가 있다더라. 동포여 현세 문명은 물품 제조의 발달이 문명이요, 국가와 민족의 경쟁 능력이 모두 제조 발달의 힘이니 우리나라의 고유한 물산과 고유한 민지(民智)로 각종 제조에 대하야 신연구와 신발명이 증진하면 국력의 부강….17)

자연적으로 얻어진 조선시대의『여지도서』에서 알 수 있듯 조선시대 전북의 대부분 특산품이 1차 산업을 통해 생산됐던데 비해, 1910년은 1차 산업을 통해 얻어진 생산물을 가공한 2차 산업을 강조 하고 있다. 조선 고유의 산업에 ‘신연구’와 ‘신발명’을 함으로써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하며 쌀로 대표되는 농업과 함께 양잠, 제지, 죽세공품, 생강, 연초 등을 전북지방의 특산품으로 꼽고 있 다.

1914년 전북물산공진회의 공식기록집이라 여겨지는『전라북도안내(全羅北道案內)』는 양잠에 대 해 진안군 성수면의 풍혈(風穴)을 이용해 누에알(蠶種) 저장시설 활용과 ‘묘목의 육성’, ‘누에공동사 육장’을 통해 누에의 안정적인 공급과 생산력 증대를 요구하고 있다.18) 예부터 전북의 특산물 중 하 나인 제지는 전북이 수출할 수 있는 가장 유망 분야이지만 자연적인 건조에 의지함으로써 생산량이 불균형하여 기계를 이용, 생산력을 증대시킬 것을 주문하고 있다. 또한 순창군에서 제조되는 태문지 (苔紋紙)는 장식용과 부채에 사용될 수 있으며 장래 수출품 중 가장 기대할 수 있는 분야라고 평가하 고 있다.19) 도자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도자기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발’에 그치고 있으며, 보 다 고급화하여 고려자기 등으로 만들어 중국, 만주, 외국으로 수출해야 할 품목으로 꼽고 있다. 마지 막으로 ‘한일병합’이전 조선에는 없었던 쌀가마니 제조를 적극 장려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일본 에서 대부분 수입하던 가마니는 쌀의 고장 전북에서 반드시 필요한 사업으로 조직적으로 만들 것을 주문하고 있다.20)

전북물산공진회에 맞춰 전북의 물산에 대해 기록한 『전라북도안내』에는 모든 분야에 걸쳐 공통적 으로 지적하는 사항이 눈에 띈다. 조선 전래 방식에서 탈피해 교육과 기계의 도입, 그리고 개량화를 도입한다면 대량 생산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이들 사업 대부분이 관(官)의 보조금 을 지원받고 있음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이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전북(조선)의 전통적인 산업구조가 개편되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始政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報告書

第3卷』朝鮮總督府, 1916년, 89쪽 『京城日報』 1915년 9월 17일, 2면

전북관의 구성을 중심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공진회에 참가한 대부분의 지역이 해당 지역을 축소시킨 미니어쳐를 전시, 각 지역을 대표하는 풍경을 그린 그림을 장식했다. 철도, 도로 등 도로개수를 모형화한 경기도, 등신대의 인형이 ‘한일병합’ 당시 지역의 생산액을 그린 작은 지구형 도구와 1915년 당시 생산액을 커다랗게 만든 지구의를 양손에 들며 비교하고 있는 충청북도, 38개의 공립학교의 분포 현황을 소개한 충남, 대형 상어 박제를 장식한 경 상남도, 전력을 이용해 지역 상황을 찍은 사진을 환등기를 이용해 영사(映寫)한 황해도, 전 력을 이용해 광고한 함경남도, 연해주와 간도를 잇는 교통망을 부각한 함경북도, 을밀대를 만들어 그 안내 지역 생산품을 진열한 평안남도, 주요 광물을 산 모양으로 만든 평안북도, 금강산 모형으로 장식한 강원도가 있었다.

전라북도는 풍남문 모형을 만들어 주요 5대 사업인 농업, 어업, 축산, 임업, 잠업을 전시 하고 있다.21) 전북관을 묘사하자면 풍남문 용마루는 연초와 혁피(革皮), 김, 생강으로 장식, 석단은 짐승의 가죽, 제지원료, 임산물로 장식했다. 또 주위에는 곡식류와 벌꿀, 밤, 마른 생선을 배치했다. 성에 창문까지 정교하게 만들어 호남제일성을 알리기 위한 효과를 실물로 나타냈다.

또한 풍남문 주위에는 전북의 5대 사업을 소개하며, 새롭게 개조한 농기구, 그물을 올리 며 풍어(豊漁)의 이미지를 표현한 어선의 모형, 군산항의 모형, 옛 쌀과 현재 쌀, 천연산 표고버섯과 인공재배 한 표고버섯, 재래 목탄과 개량목탄 등을 배치해 산업의 개량을 구체 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풍남문 좌우 벽에는 도표와 유화 등으로 전북의 산업, 교육, 농업, 양잠, 사방(砂防), 어업, 식림, 수산, 무역 등 ‘한일병합’ 이전과 1915년의 현황을 자

21) 「始政5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4) 審勢館開館」 『매일신보』 1915년 10월 16일, 1면.

전라북도 수리조합 모형 『朝鮮彙報』1915년 10월호 「전라북도 수리모형」『매일신보』1915년 9월 22일, 1면

세한 수치를 통해 비교하고 있다.22) 대부분은 철저하게 생산량을 기준으로 비교하고 있다.

경복궁의 일부를 해체하면서까지 조선의 전통을 부정했던 조선총독부의 방침과는 달리 전 북의 경우, 조선 왕조의 본향(豊沛之館)인 전주의 풍남문을 선택하고 있다. 이는 다른 지역 이 도로교통과 전기, 학교 등 근대 문화를 상징하는 매체를 이용한데 비해 전북의 경우 마 땅히 근대 문화를 상징할 매체가 없었음을 보여준 것으로 사료된다.

전라북도에서 준비한 심세관의 전북관과는 달리,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치한 동양척식관 (東洋拓植館)은 전라북도의 수리모형을 홍보하고 있었다.

동양척식관에는 전라북도의 수리모형과 함께 수원의 왕실 목장, 후지이 간타로(藤井寬太 郞)의 후지흥업주식회사(不二興業株式會社)의 대정수리조합의 모형과 함께 공사 개시 이 전의 현황과 이후가 대조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전라북도의 수리조합은 전익(全益), 임익 (臨益), 임옥(臨沃), 임익남부(臨益南部), 옥구서부(沃溝西部) 다섯 곳의 수리조합의 모형 이 배치되었다.23) 예를 들면 1909년 설립된 임익수리조합의 관개공사(灌漑工事) 후 ‘가뭄 피해 걱정 없이 홍수의 피해 또한 희박해져 안전하게 경작할 수 있게 됨으로써 수확이 3배 로 증가했다고’24)고 보고하고 있다. 이와 같이 수리조합 사업의 성과를 데이터로 제시하며 조합의 필요성을 관람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1920년대 이후 수리조합의 하천개 수, 저수지축조, 관개공사 등의 사업으로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의 빈민으 로 전락하게 되었다. 공진회에서 홍보한 자연재해에서 벗어나 안전한 경작을 통해 수확량이 증가했다는 수리조합의 사업은 자연재해에서는 벗어났지만 일본인·조선인 대지주라는 인재 (人災)를 가져왔다.

22) 「大共進會 出品槪觀(20) 審勢館(全北)」 『경성일보』 1915년 10월 10일, 1면.

23) 「第1號館第2部拓植館」 『매일신보』1915년 9월 22일, 1면

24) 「臨益水利組合の沿革及事業成績」 『朝鮮彙報』 朝鮮總督府, 1915년 12월호, 58쪽.

다음으로 조선물산공진회가 역점을 둔 분야는 조선의 문화재를 새롭게 발굴해 전시하는 것이었다. 이왕직 박물관 주임이었던 스에마쓰 구마히코(末松熊彦, 1904년부터 1941년까 지 조선에 체재)사무관은 조선물산공진회의 사무국 촉탁으로 근무하며 조선의 문화재 전시 를 기획했다. 공진회 전시장 중 하나였던 미술관에서 열릴 행사를 위해, 조선 팔도를 돌며 각 지방의 문화재를 발굴, 소장자를 설득해 출품하도록 했다. 이는 양반들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문화재를 공공장소에 끌어내기 위한 기획이었다. 미술관에 출품된 작품들을 보면 관청 이 출품한 작품이 112점, 개인적으로 출품한 일본인이 116명(691점), 조선인이 100명 (243점)으로 총 1,046점이 전시되었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황해(18점), 전북(16점), 함남 (16점), 함북(15점), 경남(13점), 충남(8점), 평남(4점), 전남(3점)이다. 평안북도는 묘향산 묘향사가 소장하고 있던 서산대상의 유품을 출품했으며, 평안남도는 불상과 함께 1600년대 의 평양을 그린 작품을 포함해 총 2,402점이 출품되었다. 전라북도는 고려시대의 조종 (釣 鐘:사원에 매달아 두는 종), 향로, 남일호(南一濠)의 병풍, 낙화(燒畵, 인두화)와 함께 군산 의 한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표주박 모양의 일본 전통 도자기인 미시마자기(三島磁器)를 출품했다.25) 공진회가 기획한 전시회가 조선의 문화재뿐만 아니라 일본의 문화를 상징하는 작품까지 포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미술관에 출품의 작품수를 각 지역별 로 보면, 상위를 차지하는 황해도(조희문, 18점), 전라북도(이두황, 16점), 함경남도(신응희, 16점), 경상북도(이진호, 15점), 충청남도(박준양, 8점)의 도 장관이 조선인이라는 점이다. 일 본인이 장관이 지역이 함경북도(15점), 경상남도(13점), 평안남도(4점), 전라남도(3점)였으며 작품을 제출하지 않은 두 곳인 충청북도와 평안북도는 모두 일본인이 장관을 맡고 있던 지역 이다. 조선인 장관은 일본인 장관의 경우보다 출품에 더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인 장관의 경우,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지만, 지역 유지와 의 친분관계를 이용해 ‘지방양반 및 부호를 권유해 비장품을 출품하도록 노력’26)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각 지역의 개인들이 소중하고 있던 작품들이 관람객을 포함한 일반 대중에 게 그 존재가 알려지며 공진회(共進會)는 공진회(貢進會)가 될 가능성을 내포했다.27)

25) 「一堂에 集, 古美術의 精粹」 『매일신보』 1915년 8월 25일, 4면.

26) 『매일신보』 1915년 1월 12일

27) 어떤 이는 공진회(共進會)를 공진회(貢進會)로 오해해 소중히 소장하고 있던 서화, 골동품을 은닉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엄청난 오해이다. 공진회(貢進會)가 아닌 정확한 공진회(共進會)이기 때 문에 이와 같은 좋은 기회를 이용해 조선 고대의 문명을 자랑해 쇠퇴해 가는 조선 문명의 부흥을 계 획하는 것이 조상과 대가들에 대한 의무이지 않을까. (중략) 영원히 조선 고유의 미술이 소멸하는 기 운이 있어 이번에 특별히 미술관에 전력을 다하려고 하니 반드시 공진회(貢進會)가 되어 당국이 이를 자유롭게 처분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의심하지 말고 출품을 지원해…『매일신보』 1915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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