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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와 황현은 근대 이행기 호남의 유학자로 성장하여 함께 교유하면서 학문과 시사를 토론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그들의 동학인식은 척사론은 물론이고, 개화(開化) 및 시무(時務)인식과도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다.

본고를 통하여 필자는 몇 가지 해결하지 못한 과제를 적시하면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 다.

첫째, 이기는 황현보다 먼저 서구의 신문물을 수용하는 입장을 보였고, 또 동도서기적 관 점에서 출발했지만 애국계몽운동기를 거치면서 변법자강(變法自疆)의 경지로 이미 진입했 다. 이에 비해 황현은 동도서기적 서학 인식에서 오히려 더 움츠러들어 동양의 도덕과 윤리 등을 철저히 고수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자의 사상적 차이가 동학사상과 동학교도 및 동학농민운동을 바라보는 관점에 일정한 차이점을 가져왔을 것이나, 본고는 보다 체계적 인 설명을 하지 못했다.

둘째,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까지만 해도 동학은 개화를 부정하고 철저한 척양척사9 斥洋斥邪)를 주장하였으나, 동학농민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후 내부적으로 서양의 신문물을 수용하고 새로운 민족주의를 표방하게 된다. 그 시점에서 이기와 황현이 이들 새로운 동학 도들의 출현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구체적인 자료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한 연구가

36) 같은 책

필요하다.

셋째, 이기와 황현 등 당대 호남의 주요 학맥에 속하지 않으면서 주류 학자들과는 달리, 다소 진보적, 개방적인 사고로 근대 민족운동에 기여한 유학자들의 계보를 어떻게 찾아서 정리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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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한말 유학자의 위기의식과 근대문명 담론 비판

-艮齋 田愚의 梁啓超 비판을

중심으로-김건우(전주대)

1. 머리말

근대변혁기 서구문명의 충격은 조선사회의 모든 체계를 뿌리 채 뒤흔들었다. 당시 이러한 충격에 대해 한말 지식인들의 대응양상을 衛正斥邪, 東道西器, 文明開化 등 몇 가지 범 주로 구분하여 그 역사적 의미를 논하고 있다. 그 중 위정척사 계열의 경우 서구주도의 근 대 문명세계체제를 완강히 거부하고 반외세 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위정척사 계열에 대해 그간 학계의 평가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대부분 근대 자본주의 질서체제에 대한 인식 결여와 완고한 성리학적 세계관 등을 지적하고 있다. 즉 암묵적으로 한말 근대화 과정 에서 역기능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이런 평가가 갖고 있는 구조적 문제는 서구 근대 문명을 本流라고 우선 상정하고, 여타 다양한 사상사적 대응과 모색을 支流, 合流, 또는 逆流하는 과정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평가 구도 자체가 이미 지향해야 할 방향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근대화 과정 속에서 한말 유학자의 보수사상이란 그다지 긍정적일 수 없었 던 것이다.

하지만 서구 근대문명의 폐해가 노출되는 현 시점에서 한말 근대변혁기 새로 유입된 사상 과 학문에 맞선 기존 사상계의 비판의식은 어느 정도 일정한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다. 특 히 한말 수용된 종교, 자유, 평등, 민권, 국가주의 등의 담론에 대한 한말 유학자들의 위기 의식은 어떠했으며, 그들이 어떤 시각에서 어떻게 비판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당시 위정척 사 계열의 한 측면을 정리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양계초는 중국 근대를 대표하는 걸출한 사상가이자, 정치가·문인·언론인으 로, 방대한 논설과 저술로 중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한말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애국계몽 유교지식인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1) 물론 조선에서 양계초가 큰 반

1) 한국 학계에서 양계초 관련 연구는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70년대 대표적인 연구

향을 일으켰던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아편전쟁 이후 열강에 둘러싸여 반식 민지 상태에 놓인 중국의 참혹한 실태가 당시 조선의 사정과 비슷했기에 조선 지식인에게 그의 학설은 공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한말 지식인들이 애국과 계몽, 문명개 화와 자주독립의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양계초의 사상과 저술을 접하고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양계초의 논설은 근대 인쇄매체인 新聞과 學報, 잡지 등을 통해 집 필과 동시에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까지 전달 소개되었다. 구국의 고심에 찬 양계초 의 사상과 빼어난 필력은 조선 지식인에게 ‘新學’이라는 개념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양계초의 담론을 비판하는 글을 가장 많이 남긴 한말 유학자로 艮齋 田愚를 들 수 있다.

간재 전우는 69세 때인 1909년 「梁集諸說辨」2)에서 양계초의 학설 조목조목 비판했을 뿐 만 아니라 제자들과 왕래하는 편지에서 그의 학설과 위험성에 대해 자세히 논변하였다. 물 론 한말 유학자들은 양계초 학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대개는 단편적인 수 준에 머문 경우였고, 전우만큼 양계초의 학설과 그 폐해를 지적한 경우는 많지 않다.

전우 사상과 문인들에 관해서는 1990년부터 간재학회를 중심으로 『艮齋學論叢』이 꾸준 히 발간되고 있다. 하지만 전우의 양계초 비판에 관한 논문은 아직까지 학계에 보고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전우뿐만 아니라 유학자의 입장에서 양계초의 학설을 비판한 논문 역 시 몇 편 되지 않는다.3)

본 논문은 우선 신문매체와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던 전우의 위기의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신문·잡지·학보라는 인쇄매체가 공론의 장으로 등장하면서 이전 시대와는 다른 의미 의 근대계몽기 글쓰기 양식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당시 신문매체는 특히 양계초를 비롯한 新學을 대대적으로 유통시키는 도구로, 그 대척점에 서있던 守舊의 대표 유학자인 간재 전 우와 공방을 전개하였다. 이 역시 이제까지 간재 전우 관련 논문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내용

성과로는 이광린의 「구한말 진화론의 수용과 그 영향」(『세림한국학논총』 제1집, 1977)과 엽건곤의

『양계초와 구한말 문학』(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79) 등이 있다. 그 후 수많은 논문과 저서로 성과가 소개되었는데, 양계초 사상 자체를 대상으로 한 연구와 한말 양계초 사상의 수용 양상을 대상으로 한 연구 방향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이혜경, 『천하관과 근대화론: 양계초를 중심으 로』(문학과 지성사, 2002) ; 이혜경, 『량치차오[梁啓超]: 문명과 유학에 얽힌 애증의 서사』(태학사, 2007) ; 최형욱, 「조선의 양계초 수용과 양계초의 조선에 대한 인식」 『동아시아문화연구』 제45집 (2009) 등등의 논문과 저서가 있다.

2) 유학자의 입장에서 양계초의 학설을 비판하는 글로는 유영선의 「新書論」(『玄谷集』 권9), 조긍섭의

「讀飮氷室文集」(『巖棲集』 권16), 송기면의 「妄言」(『裕齋集』 권3권) 등이 있다. 하지만 田愚의 경 우처럼 상당히 긴 편폭으로 조목조목 비판한 글은 드물다.

3) 김낙진, 「曺兢燮의 共和主義 비판과 朱子學적 근거」 -梁啓超 비판을 중심으로-」 『남명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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