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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강 개수사업을 둘러싼 헤게모니 투쟁

문서에서 근대의 시작 도시개발과 종교·문화 (페이지 143-147)

식민지 권력에게 심각한 상황이 위기적 상황으로 바뀔지의 여부는 지역주민측이 홍수의 원인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여기서 전기 인용문중 ‘일대 소란’에 주목하자.

‘다이쇼 9년(1920)’ 홍수에 관한 자료를 입수할 수 없어 상세히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13) 조선총독부 내무국 토목과(朝鮮総督府内務局土木課), 『조선하천조사서(朝鮮河川/査書)』(1929 년), 368~369쪽.

‘다이쇼 10년(1921)’ 홍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사정은 파악이 가능하다. 당시 신문기사에 의하면, 1921년 9월 상순, 홍수피해를 입고 9월 20일에 피해지인 전주· 익산· 김제 세 개 군, 아홉 개의 면에서 5천명의 농민이 수해대책을 요구하며 도청을 향해 몰려들었다. 한 가 구에서 한 명 비율로 나섰으며,참가자는 2, 3일분 식량을 휴대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시 위활동의 계획성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도중에 경관 약 30명에게 행진을 저지당하고 주모 자 수 명이 구속되어 조사를 받았다. 전주경찰서장이 대표자의 출두(出頭)·진정(陳情)을 제 한하자 농민측은 이를 받아들여 대표자 14명을 선정해 전라북도 당국에 진정을 한다. (동아 일보, 1921년 9월 24일, 매일신문 1921년 9월 23일, 1921년 9월 25일)

세 군(郡)의 농민들의 진정에서 수해 원인으로 세 가지 원인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 익 옥수리조합 목천리 부근의 용수로가 굽어있어 만경강 물이 불어나면 배수가 원만하지 못하 게 된다. 둘째, 전군가도(全群街道)의 표고가 높은 곳이 많아 배수가 곤란하게 된다. 셋째, 만경강 하천이 꼬불꼬불하여 배수가 용이하지 않다.(매일신보, 1921년 9월 25일) 지역 농민은 수해 원인으로 하천 상태에 덧붙여 도로· 수리조합 용수로라는 기존 인프라의 존재 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의 신문 기사만으로는 지역 농민이 기존 인프라 개수(改修)를 바랬는지 폐기를 요청했 는지 명확하지 않다. 이와 관련해 1922년 백구면장이 익옥수리조합장에게 제출한 요청문

‘만경강 연안 각리(各里) 음용수 및 기타 피해에 관한 건’14)을 살펴보기로 하자. 요청문은 익옥수리조합 공사로 인해 음용수 확보가 곤란하게 되었으니 대신 우물을 파 줄것을 익옥수 리조합에게 요청한다.한편 ‘귀 조합 도수거(물을 끌기 위한 수로)제방으로 인해 이제까지 없었던 대홍수를 다이쇼 9년 및 다이쇼 10년 두 차례나 겪고, 가옥과 전답이 떠내려가 농작 물을 모두 망쳐 극도로 격분하게 되었다’ 고 지적하며 ‘수해조합사무소(귀 조합을 본 면의 주민은 수해조합이라 말한다)를 습격한다는 둥 각종 소문이 파다하다’고도 말하고 있다.

또한 우물을 파 줄 것 등 다섯 가지 사항에 이르는 요청을 익옥수리조합에 제시했지만 이 중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요청이 각각 ‘귀 조합 도수거 중 목천포 부근에 두 곳 이상 배수교 (排水橋)를 가설할 것’, ‘강수량이 많을 때는 목천교 부근 제방을 광범위하게 무너뜨려 홍 수 참화를 미연에 방지할 것’이었다. 네 번째 요청은 수리조합 시설 개수를 통해 수해를 방 지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지만 다섯째 요청은 차라리 시설 폐기를 요청하고 있다. 요청 결말 은 명확하지 않다. 시기는 다르지만 1931년 8월에 일어난 만경강 홍수에 익산·김제군 농민

14) 익옥수리조합 ‘중요서류(제계약)(전북농지개량조합소장)’수록. 백구면장(金演植)은 조선인이지만 이 문서는 일본 고유의 문어체로 된 것으로 보아 일본인에 의해 대필된 문서로 추정된다.

수백 명이 익옥수리조합 수로제방과 만경강제방을 파괴한 것에 대해 경찰이 이를 중지하며 50여명을 구속한 사건이 발생하였다.(동아일보 1931년 8월 8일, 1931년 8월 9일) 익 옥수리조합을 ‘수해조합’으로 여긴 지역농민이 기존 인프라 시설을 실제로 파괴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만경강 중류지역에 조선인 농민들의 동향이 있었고,이와 함께,만경강 개수(改修)를 위해 일본인 대지주가 주도하는 형태로 총독부에 대한 움직임이 있었다. 우 선, 1921년 12월에 ‘만경강 개수기성회(萬頃江改修期成會)’가 결성되었다. ‘지주’ 1, 500 명이 회원으로15) 이중 10정보 이상을 소유한 지주 34명이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들 중 동산농장 대표 나카야(中屋), 호소카와농장 대표 나카하라(永原), 동양척식 대표 야노(失 野), 오하시농장 대표 야마자키(山崎), 이노우에 농장주 이노우에(井上), 다사카 농장주 다 사카(田坂), 백농장 대표 시즈야마(靜山), 이마무라 농장주 이마무라(今村), 김준희(金駿 熙), 박기순(朴基順)의 10명이 상설위원에 임명되었다(매일신보, 1921년 12월 28일).이 중 백농장16) 및 김준희·박기순이 조선인 지주이며 다른 일곱 농장은 모두 일본인이 지주였 다.

상설위원들은 우선 전북지사와 면담, 후일 경성으로 올라가 총독부 식산국 토목국 재무국 과 기타 담당관청을 방문했으며 후지무라(후지이-인용자)간타로· 백인기가 동반해서 정무 총감에게 진정(陳情)을 했다(매일신보 1921년 12월 28일).이때 정무총감에게 제출한 132명 연명 청원서에는 ‘최근 인문(人文)의 발달, 교통기관의 정비 등으로 인해 각 지역에 배수와 썰물이 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생겨나…’라며 기존 인프라가 수해를 유발하고 있다는 인식을 읽을 수 있다. 이어 ‘이는 단순히 관계 4군 16면 10만 농민의 번영과 멸망에 관한 중대 문제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영토를 개발하기 위해 등한시할 문제가 아니며…’로 기술해 식민지 지배자의 시점에서 과제 의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또한 ‘전북평야 백만 석 생산을 좌우하고 10만 동포생활의 안위를 좌우하며 그 외 산업 흥망, 경제 성쇠는 오직 본 하천정비 여부에 달려있다’며 주장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앞에서 소개했던 조선인 지역 농민의 주장과는 달리 이들은 하천개수를 수해를 방지하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보고 있다.

‘개발’을 통해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 식민지 권력에게 개발을 위한 인프

15) 1,500명이라는 숫자는 추정으로 조선인 자작농·자소작농이 다수 회원으로 등록된 것으로 사료된 다.

16) 백인기(白寅基)의 화성농장(華星農場)을 가리킨다고 추측된다.

라 정비가 수해피해를 가져왔다고 하는 상황은 심각한 딜레마였다. 이에 대해 조선인 지역 농민은 기존 인프라 폐기(廢棄)를 선택 중 하나로 들며 행정청에 요청하기도 하고 직접행동 을 전개했다.이와 달리 일본인 대지주가 주도하는 ‘지주’들은 하천개수 일변도의 진정(陳 情)을 거듭했다. 이른바 “개발의 모순을 새로운 ‘개발’로 해소한다”는 노선이 주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단, 만경강 개수 ‘개발’노선은 재정문제에 직면한다. 1922년에 전라북도 지사는 ‘만경강 개수문제는 연래 현안으로 내년도부터 공사를 착수하려 했지만 예산 긴축을 실행하는 현재 다대한 경비를 편성하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밝히고 있다. (매일신보, 1922년 9월 12일) 재정적 규제로 인해 식민지 권력은 만경강 개수사업에 곧바로 착수할 수 없게 된 것 이다. 1923년 기성회는 나카하라 구니히코(永原邦彦, 호소카와농장 지배인), 아오타 다케 지(青田竹治, 화성농장 지배인), 다카다 미노루(高田稔, 右近商事 지배인), 이마무라 이치 지로(今村一次郎, 이마무라 농장주) 등 대표자17)를 총독부에 파견해 정무총감과 내무국장 에게 개수공사의 예산을 편성해 줄 것을 진정한다. (동아일보, 1923년 7월 29일, 매일신보 1923년 7월 29일) 그 결과 ‘작년(1923-인용자) 편성의 예산에 공사비를 올렸지만 관동대 지진의 영향으로 결국 실현할 수 없었다’(매일신보 1924년 9월 10일) 1924년 9월, 시모오 카(下岡忠治, 1870∼1925, 1924년 7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취임) 정무총감이 호남지방 을 시찰했을 때, 동행한 총독부 하라 토목부장 및 후지이 간타로가 도중에 ‘하천정비’에 관 한 설명을 했으며 이리에 도착한 후에는 두세 명의 ‘현지 유지’가 여관으로 정무총감을 방문 해 만경강 개수문제에 대한 진정(陳情)을 했다. (매일신보, 1924년 9월 8일) 정무총감은 직접 시찰하며 관계자의 진정으로 인해 이윽고 만경강 개수공사에 대한 예산편성과 1925년 사업개시를 결단했다. 가뭄피해를 입고 생활이 곤란해진 농민의 구제책이라는 명목을 붙임 으로 조기에 사업개시를 실현했다. (동아일보 1924년 9월 21일, 시대일보 1924년 10월 7일, 매일신보 1924년 10월 7일)

17) 신문기사는 요시다 다케지(吉田竹次), 가스카 다케지(春日竹治), 다카다(高田稔銭), 이마무라 이치 로(今村一郎)로 기재하고 있지만, 아오타 다케지(青田竹治,), 다카다 미노루(高田稔), 이마무라 이 치지로(今村一次郎)로 추정했다. 나카하라(永原)와 다카다(高田)에 대해서는 히로세, 앞의 논문, 2 쪽 참조.

문서에서 근대의 시작 도시개발과 종교·문화 (페이지 143-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