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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이미지 비교를 통한 서울과 평양의 교류방안

Ⅳ. 남북한 문학에 나타난 서울과 평양의 이미지

3. 도시 이미지 비교를 통한 서울과 평양의 교류방안

- 북한 소설의 탁월한 서울 형상 분석을 중심으로

남북한이 서로 냉전의식에 사로잡혀 상대 수도인 서울과 평양에 대해 국내용뿐만 아니 라 국제 외교무대에서까지 상호비방과 폄하를 경쟁적으로 진행하는 것은 통일을 위해 바 람직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도시 이미지 비교를 통한 서울과 평양의 교류방안을 생각할 때 가장 바람직한 것은 상대 수도에 대한 이해와 교류, 협력이다. 이 를 위해 월북 작가 박태원의『갑오농민전쟁』에 나타난 서울 거리의 탁월한 형상을 통한 이미지 효과를 한 예로 분석한다.

1986년에 완간된 월북 최고의 역사소설가 박태원의 대표작 『갑오농민전쟁』(3부작 전 5권, 1977-1986)을 보면 남북한 서울과 평양의 교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다. 북한 소설에서 서울의 중심가와 북촌 골목길이 상세하게 묘사됨으로써 통일문화 의 실마리를 암시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 작가의 다음과 같은 탁월 한 서울 묘사를 보라.

고부와 륙백 리를 상거한 서울이다.

순조롭게 반복되는 삼한사온의 삼한이 어제로 끝나고 다시 사온으로 들어선 날, 낮때 가 지나서다.

남대문 안 거리는 옥작복작했다. 문밖으로 나가는 사람, 문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 짐 군, 마바리, 소바리, 소달구지...한창 붐비는 틈을 비집고 한 나그네가 문안으로 들어섰다.

맨상투 바람에 수건 동이고 굵은 무명 솜바지저고리에 짚신 감발 든든히 하고 등에는 괴 나리봇짐을 졌다. 나이는 거의 오십이나 되었을 듯 어글어글한 눈, 바로 선 코대, 두쿰한 입술, 사나이답게 잘 생긴 얼굴에 특히 구레나룻이 보기 좋았다.

문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문득 발길을 멈추고 한 곳을 바라본다. 그의 시선이 머무른 곳에 굉장히 높은 굴뚝을 가진 세 채의 벽돌집이 있었다. 이 근대적 구라파양식의 건물은 주변의 옛풍 봉건적 풍물들- 성문, 성벽, 조선 기와집, 초가집 같은 것들과는 조금도 어 울리지 않는 것이였는데 이것도 말하자면 ‘개화’의 산물이다. 1876년 2월, 무능한 봉건왕 조는 일제의 침략 앞에 문을 여는 것과 다름이 없는 ‘문호개방’을 강요당하였다. 이와 함 께 지금까지 일본을 조선 침략에로 부추겨온 미국, 영국을 비롯한 구미 자본주의 열강도

‘우호친선’의 가면을 쓰고 조선 정부에 ‘수호조약’을 강요하여 소위 ‘통상’이라는 것을 하 게 되었다. 그리하여 재래의 엽전 상평통보나 당오전은 외국인들에게 통용되지 않아 마침 내 신식화폐를 주조해낼 중대한 사명을 지니고 1886년 이 봉건왕조의 수도 서울 한 모퉁 이 남대문 안에 바로 위풍당당하게 일어선 전환국 기계창이다.26)

"이게 어디로 가는 거요.?“

동관 쪽으로 나가지 않은 것은 물론 잘한 일이다. 동관 파자교에는 바로 좌포청이 있

떠따바리군(포도청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밀정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라네.”(84쪽)

『갑오농민전쟁』에는 외세 개입의 문제와 근대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화 초기 과정이 나타난다. 여기에는 조선의 근대화를 상징하는‘개화’의 산물에 대한 비판이 나타난다. 제1부 제2장에서는 근대화 과정에 있는 서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1. 구레나 굿이 보기 좋은 사나이 서울에 들어서다’에서는 굴욕적인 문호개방의 결과물인 전환국 기 계창을 설명하고, 외세에 대해 주체적이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조선의 모습이 건축 중인 프랑스 천주성당을 통해 나타난다. 또한 일본인 노점 상인들의 근대화 상품에 대해서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현혹과 조선인을 소비자로만 전락시키려는 그들의 야욕이 나타난다. 작 가는 좌포청 포교들의 미행을 의식하면서도 여유 있게 서울의 근대화 거리를 구경하는 오수동이라는 인물을 통해 왜곡된 근대화의 모습을 설명한다. 근대화는 사람들에게 물질 이라는 새로운 것으로 유혹하지만 외세에 의한 파행적 근대화, 즉 일본자본주의의 외연적 확대에 의해 우리 민족자본이 피폐화된다는 점에서 민중생활의 몰락이라는 결론을 내리 게 한다.

소설의 제1부 제2장 ‘1. 구레나굿이 좋은 사나이 서울에 들어서다’를 보면 오수동이 서 울에 들어서면서 서울의 근대화를 눈으로 체험하는 과정이 나온다. 여기에는 개화기 문물 이 공간이동과 함께 나오며 일정한 역사 해석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즉 문화적 현상이 라는 공간적 체험 속에 역사적 해석을 부여하여 시공간의 절묘한 배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오수동의 이동 경로는 ‘남대문 안→전환국 기계창→→남대문 안 일본인 노점들 (장난감 가게→드팀전→왜떡 가게)→조선 모전(떡집)→수각다리께 일본인 노점(황아장수 와 청국 비단 장수의 싸움, 명동으로 가는 달구지)→청국 전신국→청국 경찰관서→북쪽 천변→광제교→청계천→장통교→수표교→새다리목→효경다리→살리무골→주자골→(남촌 일대→북촌)→사직골 막바지→안동 육거리→재골병문→좌포도대장 집→송현→화개동→돌 다리→삼청동 반찬가게→향나무 골목집(이 생원 집)’이다.

이러한 이동 경로는 근대화된 1880년대 이후 서울의 변모를 나타내는 것이며 조선의 나아갈 바를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조선의 근대화가 자생적이라기보다 강대국들의 이익에 의한 결과였음이 암시적으로 나타나며 매판자본에 대한 비판과 척양척왜의 근거 가 제시된다. 근대화의 다른 말인 ‘개화’의 산물로서의 전환국 기계창은 10년에 걸쳐 국고 를 탕진시켰으며 굴욕적 ‘문호개방’의 결과물로 설명한다. 1888년부터 나온 일본사람들의 시장 노점에서 파는 근대화 상품들에 대해서는 사람들을 현혹할 뿐이지 실속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라도의 중심인물인 오수동, 정한순 등은 서울로 올 경우 근대화를 감상하는 인물들로 변모되며 전라도에서 척왜척양의 기치를 들고 변혁운동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봉 준의 경우도 서울에서는 관찰자의 입장에 머물지만 전라도 지역에서는 사회 역사적 모순 에 항거하는 실천적 의지를 보이고 있다. 전라도라는 공간에서 비로소 영웅성과 헌신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서울과 전라도의 현실적 운동성은 당대를 관통하는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다. 서울은 시대를 설명하는 배경이 되고 전라도는 이에 준하는 농민들의 실전의

장소로 나타나고 있다. 서울이 원인 제공에 해당되고 전라도가 그 원인을 해결하는 공간 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근대성의 경험과 징후들이 문학적으로 재현될 때 문학 속 인물들의 체험과 삶 의 양상의 문제가 제기된다. 박태원은 서구와는 물론이고 다른 동아시아의 근대성과는 차 이가 있는 조선의 근대화를 ‘서울(경성)’이라는 현실적 공간을 통해 문학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 소설의 탁월한 서울 형상 분석을 중심으로 볼 때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과 같은 예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도시 이미지 비교를 통한 서울과 평양의 교류방안을 모색할 때 다음과 같은 북한 소설의 에피소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당시의 서울과 평양 모습을 다룬 북한소설 ‘불멸의 력사 시 리즈’인 『50년의 여름』의 한 대목을 보자.

6월 24일 아침의 서울.

≪쌀 사이소. 물고기 사이소.≫ 성량 좋게 웨쳐대는 머리 푸수수한 싸구려 장사들이 골 목을 누비고 신문배달의 종소리에 눈을 흡뜨며 달려나가 받아쥔 신문 1면란에서 예수의 강림처럼 어마어마하게 보이는 덜레스나 맥아더의 하품소리라도 찾아볼가 하고 급급히 살펴보는 초췌한 선비님들이 ≪륙군장교구락부 파티≫가 열리니 미남미녀들을 널리 환영 하며 맞아들인다고 한 자그마한 활자들을 보며 정세가 풀리는가부다 하고 안도의 숨을 쉴 때 계동의 고 몽양 려운형의 뒤집에서 전이 노래진 파나마모를 쓰고 단장을 짚은 60 대의 로인이 밖으로 나섰다.

쑥 빠진 키에 넓은 이마가 훤칠하여 의젓한 풍채였으나 가까이서 보면 반백이 된 머리 가 리발조차 제때에 못하여 귀바퀴를 덮고 우수와 시름에 싸인 눈은 해빛을 두려워하는 양 땅만을 좇고 있다. 멀리 이름난 학자인 성삼문의 후손으로 고고학과 력사는 물론 현대 철학에까지 론적이 없을 정도로 박식하건만 정치의 물결이 엇갈리는 속에서 좌도 우도 아닌 제 나름의 소로길을 걸어가는 것으로 우사 김규식의 말로 하면 ≪무해무익의 초인

≫이라 불리우는 성송암이였다. 허나 사람들은 그 어떤 우주인처럼 ≪이 세상의 손님≫을 표방하는 그를 존경하였고 따뜻한 미소로 맞아주었다.

인문과학의 내노라 하는 저명인사들도 성송암과의 교분을 명함처럼 휘두르는가 하면 정계의 모모한 사람들도 ≪배일애국자≫요, ≪대학자≫요 하며 송암에게 아부하기도 했으 나 송암은 려운형이 총에 맞아 비명횡사한 다음부터는 그 어디에도 머리를 내밀지 않아 이제는 점점 그 어르신네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었다. 27)

이 장면은 6.25 전쟁 발발 직전의 서울 북촌 계동의 골목길을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다.

당시 서울에선 중도파인 김규식 같은 노정객은 힘을 잃고 중도 좌파였던 여운형은 암살 당한 직후의 흉흉한 분위기가 가시지 않았다.

당시 서울에선 중도파인 김규식 같은 노정객은 힘을 잃고 중도 좌파였던 여운형은 암살 당한 직후의 흉흉한 분위기가 가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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