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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문학에 나타난 평양의 도시 이미지의 역사적 변모

평양의 도시 이미지의 역사적 변모

1. 1950-60년대 문학에 나타난 평양의 이미지 분석

북한문학에 그려진 평양의 모습은 찬양 일변도이다. 전후 50년동안 북한 도시는 상당히 역동적인 변화를 경험해왔다. 1967년 28.9%였던 도시 인구 비중이 1993년에는 60.9%로 증가했고 수많은 신흥도시들이 탄생했는가 하면, 평양도 전후 사회주의적 도시화의 길을 밟으면서 공간 구조 및 인구 구성이 크게 바뀌었다.

1950년대 초의 한국 전쟁은 평양 시가를 철저하게 파괴했지만 역설적으로 근대화의 기 반으로 작용했다. 전후복구 건설을 통해 평양이 조선 이래의 전근대적 전통이나 일제 잔 재의 식민성을 벗고 사회주의적 근대 도시를 계획적으로 건설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 다.

한설야의 장편소설 『대동강』(1956)에서는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점령에 놓인 1950 년 겨울의 평양 시내 묘사와 인쇄공 소녀의 투쟁을 서술하고 있다. 이때 평양에 대한 북 한 작가들의 인식은 폐허와 적대감 그 자체이다. 대신 전쟁후의 새 도시 건설에 대해서 는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가령 김상오의 시 「나의 도시를」(1959)를 보면 전쟁 때 의 평양 폭격과 전후의 복구건설을 선명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나는 걷고 싶다 나의 도시를 나는 걷고 싶다 무시로!

우리가 건설한 새 거리, 새 집들 황홀한 그 모습에 눈을 팔며 가로수의 잎새에 얼굴도 스치며 창문들도 쳐다보며 손도 흔들며....

나는 또 싸우는 남녘동포들과도 그리고 아직은 태여나지 않은 우리의 먼 후대들과도

함께 우리 수도를 거닐고 싶다

나는 그들에게 어떻게 거리들이 없어졌으며 어떻게 그것들이 다시 생겼는가를 이야기하리라

나는 보여주고 싶다, 우리 도시를 아이젠하워에게 트루맨에게 맥아더에게

이 도시를 없애려고 몹시 애를 쓴 이 도시를 그렇게 야수적으로 폭격한 그 저주로운 날강도들과

그놈들을 지휘한 그 모든 인간백정들에게 이미 눈알이 썩어진 지 오랜 덜레스도 나는 무덤에서 끌어내여

그놈의 슬픔 - 우리의 도시를 보여주고 싶다(하략)

전쟁 초기부터 제공권을 장악 당해 미군 폭격에 무방비 상태에 놓여있던 북한으로서는 토굴을 파서 도시의 주요 시설들을 지하에 설치하는 지하 벙커화가 도시 재건의 관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행정기관뿐만 아니라 공장, 기업소, 다중이용시설 등과 일반 주택 까지도 지하 또는 반지하 구조물로 만들거나 항공기 폭격으로부터 은폐, 엄폐할 수 있는 곳에 건설되었다.

전시 평양이 지하요새였다는 사실은 고병삼의 전쟁 단편 「평양은 노래한다」(『평양은 노래한다』, 문예출판사, 1980)에서 극적으로 형상화된다. 작품을 보면 전쟁 중 미군의 융 단폭격 치하의 암흑 속에서도 전시 예술제를 평양 지하대극장에서 성공리에 공연해서 평 양 주민과 인민군의 사기를 크게 고양시켰다는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이때 평양 주민의 심정이야말로 미군에 대한 증오 적대감과 그에 대척되는 김일성의 예술적 여유에 대한 끝없는 찬양이 극적으로 대비될 터이다. 그럼으로써 융단폭격 아래 놓인 한계상황에서

‘평양시민의 하나됨’이라는 운명공동체적 결속력을 끈끈하게 다지는 효과를 얻을 것이다.

50년대 평양은 전후복구 건설과정에서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원조를 통해 동구식의 사회주의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그 내용은 도시를 가로 중심의 선형(線型) 개 발, 직.주(職住) 근접, 주택 건설의 표준화, 공업화, 기계화 등으로 개발하는 것인데, 여러 이유로 사회주의 도시화의 내용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그 과정이 리신현의 『전환 의 년대』, 최학수의 『평양시간』등 김일성 행적을 다룬 ‘불멸의 력사’ 총서 시리즈 장편 소설에 잘 그려져 있다.

전후 사회주의적 도시 건설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근로 대중을 위한 주택 공급 이다. 시급한 주택 부족 해결 방안으로 1953년 당 중앙위 제6차 전원회의에서 주택 및 건설에서 설계의 표준화, 건재 생산의 공업화(자재 규격화), 시공의 기계화 방안이 제시 되었다. 이는 조립식 집합 주택의 건설로 이어졌는데, 처음엔 소련식 모델이, 나중엔 북한 식의 독자 모델이 개발되었다.

전쟁 직후인 1954-1955년에는 주택 공급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공동체 생활을 부추길 목적으로 화장실과 부엌을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방별로 세대가 거주하는 방별 거주형 살 림집이 평양 등지에서 일부 건설되었는데, 북한의 생활 방식과 맞지 않아 곧 중단되었다.

김정희, 김승화 등 동구권 유학생 출신 건축가들은 동구 및 소련의 건축양식을 본떠 사 회주의리얼리즘에 입각해서 도시 계획을 수립하고 집합주택 및 대형 건축물을 건립하고 자 했다. 소련 풍의 벽돌식 아파트로 조성한 평양의 륜환선 거리(일명 스탈린 거리)와 통 방주택 건축 방식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은 1950년대 후반 수정주의 논쟁 과정에서 평양의 중요 거리에 외국의 촌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으며 외국의 건축양식, 심지어 생활

양식까지 통째로 받아들이려 한 사대주의자, 교조주의자로 비판받았다. 그 결과 이들 대 부분이 숙청당했고 통방주택 방식도 더 이상 확산되지 못했으며, 이들이 조성한 륜환선 거리는 전후 종파분자의 해악을 일소한다는 의미에서 완전히 철거되고 1980년과 1985년 에 두 단계에 걸쳐 완전히 새롭게 재건되어, 거리 명칭까지 ‘창광거리’로 바뀌었다. 이 과 정을 소상하게 다룬 소설이 바로 리신현의 건축가 주인공 소설 『전환의 년대』(문학예 술종합출판사, 1998)이다.

북한 당국은 이들의 숙청 이후 평양 속도전을 시발점으로 전국 대도시에 조립식 주택 건설 붐을 확산시켰다. 특히 1958년 반쯤 조립된 상태로 공급되는 ‘통방 블록’이 등장했고 주택 설계를 보다 단순화하고 규모를 축소시키면서 16분만에 주택 1채를 짓는 이른바 평 양 속도전이 전개되었다.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속도전 경쟁이 붙어, 1959년부터 지방 대도시마다 조립식 주택 건립 붐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 과정을 그린 소설이 최학수의

『평양시간』(문예출판사, 1976)이다

『평양시간』에 따르면, 보통강변 토성랑 일대의 빈민가가 일제시대 이래 매번 반복되 는 수해와 전염병 등으로 끔찍한 가난과 고통을 겪었는데, 1946,7년의 보통강 개수공사와 1954년 이후의 평양시 복구건설 총계획 시행에 따라 몰라보게 좋아졌다고 한다. 이때 나 온 것이 16분에 집 한 채씩 짓는다는 유명한 ‘평양 속도’였다. 비록 조립식이지만 내 집에 서 산다는 것이 평양 주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단한 자긍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지난 날 보통강이라면 평양의 오물구뎅이였고 빈민굴의 대명사였습니다. 보통강 사람 들이 참으로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왜놈들은 저 창광산 부근에 가시철망을 쳐놓고 호의호 식하며 살았고 미국놈들은 숭실 중학교 자리가 있는 양촌에서 살았습니다. 가난한 조선 사람들은 선조 대대로 살아오던 좋은 집터들을 다 빼앗기고 이 뚝 아래 움막집을 치고 짐승같이 살고 짐승같이 앓다가 짐승같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

“... 우리는 도시 안에 공원이 있게 할 것이 아니라 공원 속에 도시가 들어있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도시입니다. 그렇게 돼야 도시가 옷을 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양의 모든 강변들과 아름다운 구릉성 산지들을 다 잘 꾸리고 녹화해 서 평양은 어디 가나 산이 푸르고 물이 맑고 백화만발하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참 말로 평양이 천하 제일강산이 될 것입니다.”

최학수 소설에 따르면 1958년의 조립식 주택 건축현장에서 이루어진 성공적인 사업을 외국 기자들이 “폐허로부터 현대적 새 도시를 건설한 천리마 속도를 가리켜 평양속도라 고 부른다.”고 묘사하고 있다. 소설에는 당시 평양에서는 8시간이면 수도와 난방 장치가 된 주택이 건설되며 조립공들은 16분에 한 세대분씩 건축자재를 조립한다고 하였다. 그래 서 1958년 12월 15일, 드디어 2만세대 주택건설은 넘쳐 완공되었다. 2만 839세대를 마감 지은 결과 10만명 이상의 수도 시민들이 현대적 주택들에 들어갔으며 소설 주인공 상철 같이 도심 수해민의 쓰라린 경험을 지닌 수도 한복판의 반토굴집 주민들은 영원히 사라 졌다는 자랑스런 표현이 나온다. 이 무렵 당 최고지도부인 김일성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북한 주민 및 문학 영화 작품에 각인된 평양의 유일무이한 이미지일 것이다.

“평양은 조선 인민의 심장이며 사회주의 조국의 서울이며 우리 혁명의 발원지입니다.

우리는 커다란 긍지를 가지고 명년에 영웅도시 평양을 더욱 아름답고 웅장하게 건설하여 야 하겠습니다.”

평양 소년 학생궁전 1968

1960년대 이후에는 평양 건설에서 이전의 기계화 및 공업화, 설계의 표준화 및 규격화 등과 같은 구호가 점차 약해지고, 도시 공간의 개발 및 조성에서 근로 대중의 창발성과 노동력을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까지 평양속도라 자랑하며 많이

지었던 조립식 주택의 문제점이 속속 드러나자 어느 사이에 조립식 주택은 사라지게 되 었다. 문제는 평양속도전의 산물인 조립식 주택을 찬양하는 최학수 소설 같은 작품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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