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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문학에 나타난 서울의 도시 이미지의 역사적 변모

서울의 도시 이미지의 역사적 변모

1. 1950년대 이전 문학에 나타난 서울의 이미지 분석

해방 후 남한 문학에 나타난 서울의 도시 이미지를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흥미로운 사 실은 부정적 형상의 고착화이다. 해방 직후의 희망과 혼란이 교차했던 다양한 이미지에 서 전쟁을 겪은 후 부정적 이미지로 단선화되는 것이다. 남한문학에서 서울의 도시적 이 미지는 5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부패와 타락의 온상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점철되었다는 점이다. 가령 이범선 소설 『오발탄』(1959)에 나오는 “조물주가 쏜 오발 탄”으로 상징되는 1950년대 6.25전쟁 직후의 폐허가 서울의 대표적 이미지로 자리매김된 다. 원조경제에 의존해서 전후의 참상을 이겨나가려는 노력을 긍정적으로 그린 작품을 보기 힘든 반면, 손창섭의 『잉여인간』에서 보듯이 작가들의 서울에 대한 비관적 인식 이 주류를 이룬다.

문학작품에 나타난 서울의 부정적 이미지는 근대적 도시 개편 이후의 역사적 변화에 따라 서서히 형성된 것이다. 서울의 도시계획 역사를 연구한 기존연구 성과에 의하면 서 울의 근대적 도시화는 일제시대에 그 기초가 이루어졌다.3) 총독부에 의한 식민지 건설로 인한 이중도시의 계획적 건설과 함께 민간 차원에서의 일본식 건물 축조를 통해 경성의 왜색화는 더욱 빠른 속도로 전개되었다. 이처럼 일제 치하에서는 식민지 도시화의 경로 를 밟아 전통도시 한양이 식민도시 경성으로 변신하는 일련의 과정이 전개되었던 것이 다.4)

해방은 식민지 질서의 해체와 새로운 사회건설의 신호탄이었다. 대규모 인구 유입으로, 도시 공간구조에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민족과 계층에 따른 주거지 격 리 현상이 희석되어, 이중도시의 양상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러나 도시 경관의 차원에 서 보면, 식민지 도시화의 잔재는 거의 그대로 온존되었다.

이는 해외동포와 월남민의 도시 유입으로 주택 및 각종 기반 시설의 수요는 급증하는 데 정치, 사회적 혼란과 행정적 공백으로 그 공급은 제자리걸음만 거듭한 데다가, 정부가 심각한 재정 적자 상황에 봉착해 있어, 도시공간에서 왜색을 걷어내는 것보다는 기존 시

3) 윤정섭, 『도시계획사 개론』(문운당, 1985), 146-7쪽 참조.

4) 이상의 내용, 특히 ‘이중도시’ ‘경성의 왜색화’ 등 일제시대 도시화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조해서 정리하였다. 장세훈, 「한국전쟁과 도시 경관의 변화 : 전쟁 전후 서울의 도시화를 중심으로」, 김필동 외편, 『한국 사회사 연구』, 나남출판사, 2003. 357-362쪽 참조.

설과 경관을 적절히 활용하는데 더 주력한 결과이다.5)

해방 정국에서 도시 경관의 변화를 몰고 올 또 다른 변수는 미군정의 도시정책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정치, 사회적 혼란을 수습해서 최소한의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원활한 식량공급을 통해 민생을 안정하는 데에만 주력했기 때문에, 도시 계획에 대한 사회, 경제 적 수요에 둔감했고, 도시 경관에는 아예 관심도 갖지 않았다.6)

이러한 해방 정국의 혼란스러운 서울의 모습은 이태준의 「해방 전후」나 지하련의

「도정」, 염상섭의 「두 파산」, 『효풍』, 오상원의 『황선지대』등에서 볼 수 있다. 먼저 이태준의 「해방 전후」에 나타난 서울의 이미지를 인용해보자.

현은 서울 정황에 불쾌하였다. 총독부와 일본군대가 여전히 조선민족을 명령하고 앉았 다는 것과 해외에서 임시 정부가 오늘 아침에 들어왔다, 혹은 오늘 저녁에 들어온다, 하 는 이때 그 새를 못 참아 건국에 독단적인 계획들을 발전시키며 있는 것과 문화면에 있 어서도 현 자신은 그의 꿈인가 생시인가도 구별되지 않는 이 현혹할 찰라에, 문화인들의 대부분이 아직 지방으로부터 모이기도 전에 무슨 이권이나처럼 재빨리 간판부터 내걸고 서두르는 것들이 도시 불순하고 경박해 보였던 것이다.

현은 약간 우울했다. 현은 벌써 이런 경험이 한두 번째가 아니기 때문이다. 해방 전에 는 막연한 지기여서 일조유사한 때는 물을 것도 없이 동지일 것 같던 사람들이 해방 후, 특히 정치적 동향이 보수적인 것과 진보적인 것이 뚜렷이 갈리면서부터는, 말 한두 마디 에 벌써 딴사람처럼 서로 경원이 생기고 그것이 대뜸 우정에까지 거리감을 자아내는 것 을 이미 누차 맛보는 것이었다. 7)

1945년 8월 17일 새벽에 서울에 도착한 일제시대 양심적 지식인이었던 주인공 현은 서 울의 여러 정황에 불쾌해 한다. 해방 정국의 혼란은 “또 문화인들의 대부분이 아직 지방 으로부터 모이기도 전에 무슨 이권이나처럼 재빨리 간판부터 내걸고 서두르는 것들이 도 시 불순하고 경망해 보였던”8) 현의 느낌에서 잘 드러난다.

해방이 되자 제일 먼저 정치활동을 편 것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민족주의자들 과 함께 반일 저항 세력으로서 그 일부가 해방 전까지 투쟁을 계속해 왔기 때문에 재빨 리 파괴된 조직을 수습,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쉽게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 조직 재 건을 서둔 인물들은 주로 운동에서 이미 탈락된 부류로 지하련의 소설「도정」에서 최고 간부가 되어 나타난 기철과 같은 인물들이었다. “문득 기철이 눈앞에 나타난다. 장대한 체구에 패기만만한 얼굴이다. 돈이 제일일 땐 돈을 모으려 정열을 쏫고, 권력이 제일일 땐 권력을 잡으러 수단을 가리지 않을 사람이다.” 9)

5) 위의 책, 362-364쪽 참조.

6) 국토개발연구원 편, 『국토 50년 : 21세기를 향한 회고와 전망』, 서울프레스, 1996, 364쪽 참조.

7) 이태준, 「해방전후」, 『문학』 1946.7. 참조.

8) 이태준, 「해방전후」, 『문학』 1946.7., 22쪽.

9) 지하련 「도정」, 『문학』 1946.7., 60쪽. 그들은 일정 수의 당원과 하부 조직도 없는 상태에서 중앙 당만 먼저 조직하고 상부를 차지하고 앉는 작태를 보였다. 이러한 사상단체들의 춘추전국식 난립을 해 소하고 통일한 것은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 재건 준비위원회였다. 그럼에도 박헌영이 인민공화국을 세우고 이승만을 주석으로 세운 것을 비판하는 말처럼 좌익 및 북한의 정치적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해방직후 북조선분국은 박헌영의 지도력 하에 있을 시기이며, 장안파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의 지도력

이태준 소설의 주인공 현은 그러한 좌익 기회주의자를 비판하는 시각을 보인다. 그의 눈에 서울이란 도시는 혼란스런 가운데 기회주의자들이 날뛰는 부정부패와 부조리의 온 상으로 비쳐졌다.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를 찾은 그는 때마침 동료들이 기초하고 있 던 ‘문건’ 선언문을 읽고 발기인으로 서명한다. 울려 퍼지는 '적기가' 속에 고민하던 '현' 은 '조선 인민 공화국 절대 지지'라는 현수막 사건을 통해 자기 비판과 함께 정세를 판 단하고,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 '프로 예맹'과의 통합을 계획한다. 이는 서울의 혼란상 속 에서 양심적 지식인이 택할 길은 그래도 좌익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그러 나 현이라는 퍼소나(분신)를 통해 1930년대 최대의 작가 이태준이 택한 좌익으로의 길과 월북은 역사적으로 오류였음이 훗날 판명되었다.

월북 작가가 서울의 혼란상을 보고 좌경화와 월북을 택했다면, 중도 우파였던 1920-30 년대 대표 작가였던 염상섭은 「두 파산」(1949)에서 서울의 이미지를 비판적으로 그렸다.

이 작품은 해방 후 혼란기의 두 지식인 여성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의 물질적(정례 모친) 정신적(김옥임) 파탄의 과정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 은 서울 황포현으로, 당시 서울이란 주인공들의 눈에 보기에 정당하고 생산적인 경제 활 동보다는 부당하고 비생산적인 경제활동이 주를 이루던 혼란한 사회였다. 고율의 이자나 떼어먹는 고리 대금업이 성행하고 높은 이자로 인해 정당한 노동 행위가 불가능해지는 부패한 그려지는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해방 직후 경제적 도덕적 가치의 혼란 속을 살아간 두 여인의 생활과 현실 타협 또는 현실 적응주의 세태, 그리고 경제적 파산 과 정신적 파산이라는 두 부정적 이미지를 제시하였다. 주목할 것은 이태준이 좌익을 택 하고 월북한 데 반해, 염상섭은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하는 판단을 유보한 채 삶의 모습 을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끝내 남한의 체제내적 원로 작가로 자리잡게 된다는 점이다.

반면 비판적인 저항시인 김수영의 경우 해방 후 서울의 이미지를 밝고 긍정적인 이미 지로 포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50년대 모더니스트의 출발점이 현대 도시 문명에 대한 찬사와 문명비판적 시선이 그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보자.

아침의 유혹

나는 발가벗은 아내의 목을 끌어안았다 산림과 시간이 오는 것이다

서울역에는 화환이 처음 생기고

나는 추수하고 돌아오는 백부를 기다렸다 그래 도무지 모-두가 미칠 것만 같았다 무지무지한 갱부는 나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것은 천자문이 되는지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스푼과 성냥을 들고 여관에서 나는 나왔다 물속 모래알처럼

소박한 습성은 나의 아내의 밑소리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교과서에도 질투의 XX은 무수하다

먼 시간을 두고 물속을 흘러온 흰 모래처럼 그들은 온다

에 의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당시 박헌영은 소련과 김일성의 인정을 한 몸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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