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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시기

문서에서 『急就篇』硏究 (페이지 63-74)

위진남북조시기의 법서본은 종요, 삭정, 위부인, 왕희지, 소자운, 최호 등의 법서 본이 있다.

(1) 종요『급취편』

鍾繇(종요 151년~230년)는 후한 말부터 삼국시기 魏(위)에서 활약한 정치가이다.

관위는 태부에 까지 올랐고 작위를 받아 정릉후에 봉해졌다. 종요의 사적에 관해서 는 정사인『삼국지·위서·종요화흠왕랑전』에 기록되어 있다. 종요는 서법가로서도 일가를 이루어 楷書(해서)의 창시자로 추앙 받고 있으며 왕희지와 더불어 ‘鍾王(종 왕)’으로 合稱(합칭)되기도 한다.『서단』에 종요에 대한 서법가로서의 평가를 보면

종요는 글씨를 잘 썼다. 조희, 채옹, 류덕승 등에게 사사받았다. 眞書(진서)는 세상에 비견할 자가 없이 빼어났는데 그의 眞書(진서)에는 강직함과 온유함이 함께 갖추어지 고 일획일점에 색다른 정취가 풍성하여 그 깊고 오묘한 경지는 가히 넘을 수 가 없 다. 예스러우며 우아한 筆致(필치)는 秦漢(진한)이래 이 한 사람뿐이다. 비록 옛적의 선정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그 은덕을 잊지 못함이 있다하나 그의 덕을 숭상함에는 미 치지 못함이 있다. 그의 行書(행서)는 왕희지와 왕헌지의 버금이고 草書(초서)는 위관 과 삭정의 아래이나 八分(팔분)으로 쓴 魏(위)의 受禪碑(수선비)는 최고라는 칭송을

62) 黃伯思 著, 『東觀餘論』 : 「今所傳惟張芝索靖二家爲眞皆章草書 而伯英本只有鳳爵鴻鵠等數行.」 浙江 人民美術出版社, 2010.

받고 있다. 太和(태화)63)4년에 薨(훙)하니 향년 80세였다. 원상의 隷書(예서)와 行書 (행서)는 神(신)에 들고 草書(초서)와 八分(팔분)은 妙(묘)에 든다. 종요의 글씨가 12 종이 있는데 그 교묘하고 기이함이 비길 데가 없다.64)

하였다. 원상은 종요의 字(자)이다. 종요『급취편』은 안사고의『급취편·주서』에 기 록이 있다.

예전에 황상, 종요, 위부인, 왕희지 등의 서사한『급취편』을 얻게 되었다.65)

라고 기록하였다. 한편 왕응린의『옥해』본『급취편보주』에 종요의『급취장』이 소개되고 있다. 왕응린은『급취편보주』첫머리에『송태종실록』을 인용하여 종요의

『급취장』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전에 조서를 내려 선현들의 묵적을 구하라 하였는데 그 때 종요의『급취장』이 헌 상되었으나 글자들이 뒤죽박죽되어 잘못된 부분이 많았다.

하였다. 안사고는『급취편·주서』에서 황상, 종요, 위부인, 왕희지 등의 서사한『급 취편』이 온전하여 각 본들을 상세히 비교할 수 있었다고 하였는데 왕응린의 인용 한『송태종실록』에서는 종요의『급취장』이 온전하지 못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왕 응린의 인용문으로 볼 때 송태종에게 바쳐진 종요의『급취장』은 종요가 서사한 것 이 아니라 후대 사람이 모사한 것을 종요본으로 알고 헌상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 다.

(2) 삭정 장초『급취편』

索靖(삭정 239년~303년)은 西晉(서진) 武帝(무제 재위 265∼290)때에 상서랑을 거쳐 惠帝(혜제 290년~306년)때에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고 산기상시를 역임한 西 晉(서진)의 정치가이다. 삭정은 정치가로서도 이름이 나있으나 서법가로서 더욱 명 성을 떨친 인물이다. 삭정의 사적에 대해서는 정사인『진서·삭정전』에 기록되었다.

63) 太和(태화)는 삼국시기 魏(위)의 제2대 황제 명제의 두 번째 연호로 227년부터 233년까지 사용되 었다.

64) 張懷瓘 著, 『書斷』 : 「繇善書師曹喜蔡邕劉德升眞書絶世剛柔備焉. 點畫之間多有異趣謂幽深無際古雅 有餘秦漢以來 一人而已. 雖古之善政遺愛結於人心未足多也. 尚德哉若其行書則羲之獻之之亞,草書則衛 索之下,八分則有魏受禪碑稱此爲最也. 太和四年薨迨八十矣. 元常隸行入神草八分入妙鐘書有十二種意 外巧妙絶倫多奇.」 浙江人民美術出版社, 2012. 69쪽.

65) 史游 撰, 『急就篇』 : 「舊得皇象鍾繇衞夫人王羲之等所書篇本.」 岳麓書社, 1989. 7쪽.

서법가로서의 삭정에 대한 기록이『선화서보』에 실렸는데 그 가운데 삭정의 장초

『급취편』이 소개되고 있다.

삭정 자는 유안이다. 돈황사람으로 장지의 누이에 손자이다. 관직은 정남사마에 이르 렀다. 어릴 적부터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 동향인인 범충·장감·삭개·삭영 등과 함 께 태학에 유학하였는데 당시 그들을 ‘敦煌五龍(돈황오룡)’이라 칭했다. 賢良方正 (현량방정)에 응시하여 對策(대책)을 묻는 과제에 높은 성적으로 합격하여 장발이 천 거하기를‘그의 재능과 기예는 따를 사람이 없다. 마땅히 대각에 있어야할 인재이 다.’하였다. 경사를 보면서 틈틈이 글쓰기를 좋아하였는데, 마침내 章草(장초)로 이 름을 날리게 되었고 배우려는 자들이 그를 존숭하고 본받으려 하였다. … 만약 삭정 이 뜻한바 대로 서법가의 길을 갔다면, 그의 필명은 왕희지와 왕헌지의 선후가 되었 을 것이다. 지금 御府(어부)에 장초본 4권이 소장되어있는데『급취편』,『월의』,『출 사송』,『칠월첩』이다.66)

하였다.『선화서보』외에도『동관여론』에서 삭정의 장초『급취편』에 대하여 언급 이 되고 있다.

삭정장군의 장초는 고금의 妙(묘)를 다하고 있다.『칠월이십육일첩』,『월의』,『급취 편』등이 저명한 글들이다. 봄의 난초 가을의 국화 두 꽃은 다르나 그 꽃 나름이 저 마다의 향취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67)

하여 삭정의 장초『급취편』을 비롯한 세편의 법첩이 각각의 필세가 있음을 소개하 고 있다. 또한『동관여론·발장초급취보망후』에도 宋代(송대)에 남아 있는 삭정 장 초『급취편』에 대하여 기록해 놓았다. 그 기록에

삭정의 글 가운데 3분의 2가 남아 있다. 없어진 것은‘母繜(모준)’이하 750字이다.

당대 사람들이 모사하면서 없어진 부분을 그대로 놓아두었기 때문에 필세가 기품이 있고 고풍이 완연하게 남아 있다. 나도 한 부를 탑본한 적이 있다. 이 탑본하는 것을 도은거는 전곽서라 하였는데 지금 세간에서는 쌍구서라 하고 있다.68)

66) 潘運告 撰, 『宣和書譜』 : 「索靖字幼安敦煌人張芝之姉孫也. 官至征南司馬,少有出群之才,與鄕人汜衷 張魁索介索永俱遊太學時稱敦煌五龍. 及擧賢良方正對策高第,張勃薦之謂靖才藝絶人宜置臺閣經史之暇 喜作字遂以章草名動一時學者宗之. …要是靖自得意處宜其刊名與羲獻相後先也. 今禦府所藏章草四急就 章,月儀,出師帖,七月帖.」 湖南美術出版社, 1999. 257쪽.

67) 黃伯思 著, 『東觀餘論』 : 「索將軍章草下筆玅古今七月二十六日帖月儀急就篇此著名書也春蘭秋菊各不 同而花花自有佳趣.」 浙江人民美術出版社, 2010.

68) 黃伯思 著, 『東觀餘論』 : 「靖所書乃有三之二其厥者自母繜而下纔七百五十字此本是已蓋唐人摹而弗塡 者神韻筆勢古風宛然予遂手搨一通陶隱居謂之塡郭書近世謂之雙鉤書. .」 浙江人民美術出版社, 2010.

하였다.『동관여론』은 北宋(북송)시대의 書論書(서론서)이다. 북송시대에는 삭정의 장초『급취편』이 온전치 못한 상태로 남아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당대의 법첩과 탑본이 원본을 그대로 살려내는 것에 치중하여 부족한 부분은 부족한 그대 로 베껴놓아서 원본의 필세가 여전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塡郭書 (전곽서)는 원본 글씨를 베낄 때 원본을 밑에 놓고 그 위에 복사지를 얹어서 글씨 의 외면 윤곽을 그려내어서 그 속을 채우는 모사의 한 방법을 말한다. 雙鉤法(쌍구 법)이라 하기도 하는데 현재는 鉤勒塡彩法(구륵전채법)이라 하고 있다. 한편『동관 여론』부록으로 섭몽득의『발삭정장초급취편』이 수록되었다. 거기에 삭정의 장초

『급취편』에 관하여 비교적 자세한 기록이 있다. 그 기록에

삭정의 장초『급취편』은 1,450자이다. 759자가 빠져있다. 내가 듣기로 당대 사람이 硬黃(경황)에 臨書(임서)한 것이 오래전에 있었는데 누가 소장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 하여 구한바 오래 되었으나 얻지 못하였더니 소흥 甲子(갑자)에 우연히 옛 친구인 비 서랑 황장예가 쌍구법으로 모사한 것을 복당현에서 얻게 되었다. 西晉(서진) 이전의 것이라거나 종요, 장지, 위관, 삭정 등의 서첩이라 하여 지금 존재하는 것들에는 진본 이 없다. 지금 전하는 서첩들은 모사본들이다. 진본이라고 하여 볼 수 있는 것은 겨 우 점이나 글자의 획 같은 것이 있을 뿐이다. 장예는 옛것을 좋아하고 隷書(예서)와 楷書(해서)를 잘하였으므로 능히 古人(고인)의 필체를 따를 수 있었는데 그 필세가 古人(고인)의 필세를 방불케 하였다. 그러나 벌을 받고 병란이 일어나면서 집안에 소 장되었던 문적들이 거의 없어져 버렸다. 다행히 남아 있는 문적들도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閩(민)에는 좋은 돌이 없다. 그래서 목판에 판각한 것을 燕堂(연당)에 두 고 서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보게 하였다. 두자미가 말하기를 ‘역산의 비문은 들 불에 불살라지고 대추나무에 새긴 篆刻(전각)은 부식되어 제 모습을 잃었네!’하였는 데 예나 지금이나 진본이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은 한스러운 일이다.69)

하였다. 硬黃(경황)은 황랍을 칠해 투명하게 만든 습자용 종이를 말한다. 황장예는

『동관여론』의 저자인 황백사이다. 황백사의 字(자)가 장예이다. 閩(민)은 복건성의 옛 명칭이다. 복당현은 지금의 복주이다. ‘閩(민)에는 좋은 돌이 없다’는 말은 섭몽 득이 복당현에서 삭정의 장초『급취편』을 돌에 새기려 하였으나 복건성에는 글을 새길 질 좋은 돌이 없어서 나무에 판각하여 연당에 걸어두고 호사가들이 와서 보도

69) 黃伯思 著, 『東觀餘論』 : 「索靖章草急就篇一千四百五十字闕七百五十九字余聞世有此唐人硬黃臨本舊 矣不知藏誰氏求之久不獲紹興甲子偶得故祕書郎黃長睿雙鉤所幕于福唐兄商量則鐘張衛索書帖存于今者 大抵皆無復真墳流傳膽拓既多僅見其點畫銀長睿好古難暴楷能得古人用筆高其氣韻精彩尚可仿佛典刑兵 興以來剽剝悵爐夕餘長見奈喜一附錄長皆因阻寬註臂計涇君得以故家名流所藏殆盡幸有遺者不可去傳于 世間無姜石乃使以版刻置之燕堂以示好事者杜子美云澤山之碑野火焚棗木蒙刻肥失真古今所恨云.」 浙江

69) 黃伯思 著, 『東觀餘論』 : 「索靖章草急就篇一千四百五十字闕七百五十九字余聞世有此唐人硬黃臨本舊 矣不知藏誰氏求之久不獲紹興甲子偶得故祕書郎黃長睿雙鉤所幕于福唐兄商量則鐘張衛索書帖存于今者 大抵皆無復真墳流傳膽拓既多僅見其點畫銀長睿好古難暴楷能得古人用筆高其氣韻精彩尚可仿佛典刑兵 興以來剽剝悵爐夕餘長見奈喜一附錄長皆因阻寬註臂計涇君得以故家名流所藏殆盡幸有遺者不可去傳于 世間無姜石乃使以版刻置之燕堂以示好事者杜子美云澤山之碑野火焚棗木蒙刻肥失真古今所恨云.」 浙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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