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淸(명청)시기에는 이본, 만광태의 주해서가 있다.
(1) 이본『급취장주』
본서는『천경당서목』에 수록되었다.『천경당서목』은 黃虞稷(황우직 1629~1691) 이 저서로 明代(명대)의 저작 및 宋(송)·遼(요)·金(금)·元(원) 시대의 저작물을 經史
54) 戴表元 撰, 『剡源戴先生文集』 : 「家罕書籍 有急就篇一卷 漢黃門令史游所撰 唐弘文館學士顔師古所 注 又經新安朱先生仲晦所校 自謂名本 然而篇中正文 絶無音訓 注之所及 疑義尙多 窮不自量 爲之補 其遺闕 兼有異同之說 載于左方 又惟古人著書 動緣敎戒而作 此書本取急速成就其辭 以便于童習 而四 民之業 百用之宜 靡不周究 秦人以法吏爲師 公私宦學 傳相授襲 故以吏文終焉 儒者欲求漢學 惟齊魯 諸生訓注 猶近古哉.」 http://ctext. org/wiki.
子集(경사자집)의 배열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書目(서목)록이다. 千頃堂(천경당)은 황우직의 부친인 황거중이 남경에서 관리로 재직할 때 그 곳에 지은 서재의 당호이 다. 황우직은 천경당의 장서를 바탕으로『천경당서목』을 저술하였다.『명사·예문 지』는『천경당서목』을 저본으로 삼은 것이라 한다.『천경당서목』에
『급취장주』이본 찬. 이본 자는 효겸이다. 명나라 초기 은현사람이다.55)
하였다. 저자인 李本(이본)에 대하여는 鄞縣(은현) 사람인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은현은 지금의 절강성 영파시 은주구 이다.
(2) 만광태『급취편보주』
본서는 사계곤의『소학고』에 기록되었다. 저자인 萬光泰(만광태)에 대한 기록으 로는 항세준의『사과장록』에 기록이 있다.
만광태 자는 순초이다. 수수사람으로, 름생이었다. 절강총독 채정공의 천거로 박학홍 사가 되었다. 건륭 병진에 입경하여, 경조에서 치르는 추시에 합격하였다. 순초가 소 년시절부터 재질이 뛰어나 시골이 빼어나고 밝았는데 평소 하는 말이나 문장이 온화 하고 아름다워 마치 주·진시대의 문장과 같았다. 몸은 약하여 입은 옷을 이기지 못 하였으나 문장의 기백만큼은 만 사람을 압도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천진의 사씨 가문의 문객이 되었는데,『전주서언』2권『한음존정』2권『수화당류음변』1권을 지었다.56)
하였다.『소학고』는 주이존의『경의고』에서 빠진 形声训诂书(형성훈고서)의 서목 을 집성한 것으로 50권 1,180종이 수록되었다.『소학고』의 저자인 謝啓昆(사계곤 1 737년~1802년)은 청나라 건륭 26년(1761년) 진사가 되었고, 수찬을 거쳐 가경 때 광서순무를 역임한 인물이다.
2. 『급취편』법서본
55) 黃虞稷 撰, 『千頃堂書目』 : 「李本急就章注字孝謙,明初鄞縣人.」 上海古籍出版社, 2001. 178쪽.
56) 謝啓昆 撰, 『小學考』 : 「狀世駿詞科掌錄日萬光泰字循初秀木人國生闔江總督上蔡程公薦舉博學宏詞乾 圍丙屢入京華京兆秋試循初少年有高才詩骨秀期小詞圖圍圃周秦置國不勝衣而文章氣奪葛夫頤後客津門 查氏著轉注牆言一卷漢音存正一恭遂和堂類音鹽一器.」 廣文書局有限公司, 1969. 541쪽.
한자 서체는 甲骨文(갑골문), 金文(금문), 大篆(대전), 小篆(소전), 隸書(예서), 草書 (초서), 楷書(해서), 行書(행서) 등으로 구분한다. 秦(진)나라에서 쓰기 시작했던 隸 書(예서)는 漢代(한대)에 들어서 조정의 공식 서체가 되었다. 이 隸書(예서)를 빠르 게 흘려 쓴 것이 草書(초서)인데 서한시기에 쓰인 草書(초서)를 章草(장초)라 하였 다. 이 章草(장초)의 창시자가 史游(사유)이고 章草(장초)로 쓴 저서가『급취편』이 다.『급취편』은 識字(식자)서 측면에서 이전의 識字(식자) 敎材(교재)라 할 수 있는
『창힐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내용과 구성으로 저작되었는데 쓴 서체도 이전에 는 없었던 새로운 서체인 章草(장초)로 썼다.『급취편』이 왕조와 시대를 달리하면 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며 그 생명력을 생생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저서의 내 용과 구성의 창조성뿐만 아니라 서법상 획기적인 서체의 창시성에도 기인하는 것이 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역대 중국의 유명 서법가들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급취 편』을 書寫(서사)하였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1) 후한시기
後漢(후한)시기의 법서본은 최원, 장지의 법서본이 있다.
(1) 최원 임서『급취장』
최원의 臨書(임서)한『급취장』은 명나라 장축의 저술한『청하서화방』에 수록되 었다.
崔瑗(최원 78년~143년)은 후한 順帝(순제 재위 125년~144년) 때에 제북국의 재상 을 역임한 정치가이다. 그런데 최원은 정치가로서보다는 문필가로 더 이름이 나있 다. 그의『좌우명』이『소명문선』에 실리면서 후대에 文名이 나게 되었다. 특히 草 書(초서)에서 이름이 났는데 草書(초서)에 관한 書論(서론)서인『초서세』를 저술하 였다.『후한서·최인열전』에 최원의 문장에 대한 기록이 있다.
최원은 문장이 탁월하였는데 특히 書(서)·記(기)·箴(잠)·銘(명)에 뛰어났다. 賦(
부)·碑(비)·銘(명)·箴(잠)·頌(송)·七蘇(칠소)·南陽文學官志(남양문학관지)·歎辭 (탄사)·移社文(이사문)·悔祈(회기)·草書勢(초서세)·七言(칠언) 등 57편의 저서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남양문학관지에 대해서는 문장에 능한 자들이라도 스스로는 미
치지 못할 글이라 칭찬하였다.57)
라고 하여 문장가로서 빼어난 才士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최원의 臨書(임서)한『급 취장』을 수록하고 있는『청하서화방』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가사도는 서화에 관심을 기울여 집안에 천여 권의 명저를 수장하고 있었다. 그는 宣 和(선화 1119년~1125년)와 紹興(소흥 1131년~1162년)연간에 秘府(비부)의 고문서 나 골동품들을 달라고 청하여 가져가곤 하였다. 지금 이 유명한 명작들은 제외되어
『열생고적기』에는 등재되지 않았다. 등재되지 않고 숨겨진 명작들은 가사도의『열 생당수초』에 편명들을 기록해 두었다. 법서로는 최원이 임서한 사유 급취장이 있 다.58)
張丑(장축 1577년~1643년)은 명나라 말기의 서화수장가로 서화의 감식에 능하였고 집안이 4대에 이르는 장서가 집안이라 한다. 최원이 임서한 사유『급취장』을 소장 하고 있었다는 賈似道(가사도 1213~1275)는 남송의 제5대 황제인 理宗(리종 재위 1225년~1264년)의 귀비인 賈(가)귀비의 동생이다. 蔭補(음보)로 태사에까지 오른 권신이다. 고서화를 수집하였는데 그 목록을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명작 들을 소장하였으며 소장품에는 悅生(열생) 이나 秋壑圖書(추학도서) 등의 인장을 날 인하였다고 한다. 悅生(열생), 秋壑(추학)은 가사도의 호이다.『송사·간신열전·가사도 전』에 가사도의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2) 장지 장초『급취장』
張芝(장지 미상~192년)는 후한 말의 서법가이다. 후한 靈帝(영제 재위 168년~
189년)때 태상을 역임한 장환의 장자이다.『후한서·황보장단렬전』에
장환의 장자 芝(지)는 자가 백영이다. 가장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동생은 이름이 昶 (창)이고 자가 문서이다. 芝(지)와 동생인 昶(창) 두 사람 모두 草書(초서)를 잘 썼다.
지금까지도 그들이 명성이 일컬어지고 있다.59)
57) 范曄 撰. 李賢 注, 『後漢書』 : 「瑗高於文辭尤善爲書·記·箴·銘 所著賦·碑·銘·箴·頌·七蘇·南陽文學官志·
歎辭·移社文·悔祈·草書勢·七言·凡五十七篇 其南陽文學官志稱於後世 諸能爲文者皆自以弗及.」 中華書 局, 1965. 1335쪽.
58) 張丑 『淸河書畵舫』 「似道留心書畵 家藏名蹟多至千卷 其宣和紹興秘府故物往往乞請得之 今徐烜赫名 蹟 載 悅 生 古 蹟 記 者 不 錄 第 錄 其 稍 隱 者 著 于 篇 法 書 崔 瑗 臨 史 游 急 就 章 」 h t t p s : / / a r c h i v e . org/details/06068102. cn
59) 范曄 撰. 李賢 注, 『後漢書』 : 「長子芝字伯英最知名 芝及弟昶字文舒並善草書 至今稱傳之.」 中華書 局, 1965. 1555쪽.
하고 짤막하게 기록되었다. 장지는 중국에서 草聖(초성)이라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장지 초서『급취장』은『서단』에 기록된 것이다.
장지는 자가 백영이다. 성품이 書道(서도)를 좋아하여 집안에 있는 옷이건 천이건 간 에 모두 글씨를 써서 나중에 세탁하여 먹물을 씻어내곤 하였다. 특히 章草(장초)를 잘 썼으며 隷書(예서)도 잘 썼다. 위중장이 그를 일러 草聖(초성)이라 하며‘최원은 살이요 장지는 뼈이다.’하였다. 그의 장초『급취장』은 글자가 모두 일필로 쓴 것이 다. 백영의 草書(초서)는 神(신)에 들며 隷書(예서)는 妙(묘)에 든다.60)
하였다. 가히 서법가로서의 장지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서법에 정진 하는 것을 ‘臨池(임지)의 技(기)’라 하는데 이 말 또한 장지가 연못가 돌 위에 붓글 씨를 쓰면서 까지 書道(서도)에 정진한 것에서 나온 말이다.『후한서·황보장단렬 전』이현의 주석에 왕음의『문지』를 인용하여
못가에서 붓글씨를 학습하니 연못의 물이 온통 검어졌네.61)
라고 하였다. 이는 장지가 연못가의 돌 위에서 붓글씨를 연습하면서 붓을 씻은 연 못의 물이 먹물로 검어졌다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臨池의 技’는 여기서 나온 말이 다.『서단』은 당나라 玄宗(현종 재위 712년~756년)때에 한림원공봉이었던 張懷瓘 (장회관 생몰연대미상)이 지은 書論書(서론서)이다.『서단』의 내용은 古文(고문), 大篆(대전), 籒文(주문), 小篆(소전), 八分(팔분), 隸書(예서), 章草(장초), 行書(행서), 飛白(비백), 草書(초서) 등의 각 서체의 기원과 연혁을 서술하고, 周代(주대)의 史籒 (사주)에서 당나라 중종 때 황문시랑인 盧藏用(노장용 미상~710년)까지 유명 서법 가들을 神(신), 妙(묘), 能(능)의 삼품으로 분류하여 傳記(전기)를 실었다. 장지를 草 聖(초성)이라 극찬한 위중장은 삼국시기 魏(위)의 서법가 韋誕(위탄 179년~253년) 이다. 중장은 그의 字이다. 魏(위)나라 文帝(문제) 때에 시중을 역임하였다. 다른 한 편 北宋(북송) 때 서법가인 黃伯思(황백사 1079년~1118년)가 쓴『동관여론』에도 장지의 장초『급취장』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동관여론·발장초급취보망후』에
60) 張懷瓘 著, 『書斷』 : 「張芝字伯英性好書 凡家之衣帛皆書而後練 尤善章草又善隸書 韋仲將謂之草聖 又云崔氏之肉張氏之骨 其章草急就章 字皆一筆而成 伯英草行入神 隸書入妙.」 浙江人民美術出版社, 2012. 172쪽.
61) 范曄 撰. 李賢 注, 『後漢書』 : 「臨池學書 池水盡黑.」 中華書局, 1965. 1555쪽.
지금 전하는 것은 오직 張芝(장지)·索靖(삭정) 二家(이가)의 것만이 진품이다, 모두 章草(장초)로 쓴 것이다, 그러나 백영본에만‘鳳爵鴻鵠(봉작홍곡)’등 여러 行(행)이 있다.62)
하였다. ‘鳳爵鴻鵠(봉작홍곡)’은 통행본『급취편』제4장의 首句(수구)로 본고의 원문 번호 제270번 ‘鳳爵鴻鵠鴈鶩雉(봉작홍곡안목치)’의 문구를 이르는 것이다. ‘鳳爵鴻鵠 鴈鶩雉(봉작홍곡안목치)’는 禽獸(금수)의 종류를 나열한 章(장)의 첫 번째 句(구)이 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장지의 장초『급취장』이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宋代(송 대)까지는 실존했던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