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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필흥의 수근목간 덕운론과 이익의 목간수근 국경론

수근목간론은 고려시기와 조선시기에도 계승되었고 많은 담당관원들과 학자들이 긍정하였고 일부 학자들만 부정하였다. 현재 구체적인 문헌자 료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학계가 수근목간론을 크게 주목하지 않고 있 다. 따라서 풍수이론의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지지 않고 글귀를 직역하고 있다. 또한 중국의 3대 용맥론이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덕운론 또는 청나라 강희황제의 태산 용맥론처럼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의 역사지리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연구는 거의 부재하다. 따라서 수근목간론에 관하여 고려시기와 조선시기의 연구 역사를 살펴보면, 고려시기의 우필흥, 조선 시기의 정안홍과 이익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려말기 1357년에 우필흥은 도선국사 수근목간론의 핵심내용 두 가지 를 들었는데, 첫째는 백두산에서 일어나 지리산에서 끝나는 지형의 형세 이고, 둘째는 오행에 따라 수근목간이 상생관계라고 해석하고 고려의 목 덕론을 주장하였다. 결론은 둘째의 덕운론을 일상생활에 적용하여 복색

73) 민병삼, 「도선국사의 풍수사상과 풍수담론」, 『국학연구』, 제27호, 2015.08.

74) 최봉문, 우리 국토, 바른 역사 찾기, 『한반도 산맥체계 재정립 연구 : 산줄기 분석을 중 심으로』, 김영표·임은선·김연준. 국토연구원, 2005.08. 김영표, 「水根木幹 한반도 산맥체계 재정립 연구」, 『국토연구원』, 2004.

을 바꾸자는 것이었다.75) 조선 문종 원년(1451)에 정안종(鄭安宗)은 도선

함께 송악산에 올라가서 지맥을 보고 수모목간 형세를 설명한 글, 충렬왕 원년(1275)의 태사국 건의, 공민왕 6년(1357)의 우필흥의 건의 모두 3개 조목을 들었다.79) 다만 고려 태조가 「훈요십조」에서 말한 조목은 인용하지 않았다. 이익은 도선국사가 874년에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와 함께 곡 령(鵠嶺, 송악산)에 올라가서 지맥을 보고 백두산에서 내려온 형세가 수 모목간이라고 설명하고 하늘의 36천(天)을 모방한 집 36구(區)를 지으면 삼한을 통일할 아들을 낳는다고 일러주었다고 한다.80) 이밖에도 고려 태 조 왕건에 관련된 수기(授記)는 최치원이 왕건을 만나 “송악산(개성)에는 소나무가 푸르게 자랄 것이고, 계림(경주)에는 잎이 누렇게 시들 것이다.(

鵠嶺靑松,鷄林黃葉)”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이익의 기본 입장은 오덕종시설에 근거하여 수근목간의 덕운론에 따라 복색을 바꾸는 소위 역복색(易服色) 주장을 반대하였다. 그는 우리나라가 은나라 기자(箕子)의 교화를 받았기 때문에 은나라처럼 백색을 여태까지 사용해왔고, 또한 별다른 폐해가 없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택리지』를 저 술한 재종손 이중환(1690-1756)에게도 중국이 복색을 바꾸더라도 또 이 세상이 끝나더라도 백색을 사용하자고 강조하였다.81) 그가 얼마나 기자를 중시하였는지는 삼국시기 정통론에도 나타냈다. 단군이 처음 개국하였더 라도 기자가 교화를 시작하였기 때문에 기자의 정통을 중시하였다. 기자

79) 이익,『성호전집』,제7권,「種穄田」:“世祖倒屣追及,一見如舊識,遂俱登鵠嶺,(道 詵)究山水之脈曰:‘此地脈,自白頭山,水根木榦,來落馬頭明堂.”

80) 이익, 『성호전집』,제7권,「種穄田」:“遂俱登鵠嶺,(道詵)究山水之脈曰:‘此地脈,自 白頭山,水根木榦,來落馬頭明堂.君又水命,宜從水之大數,作宇六六爲三十六區,則 符應天地之大數,明年必生聖子,宜名曰王建.’……‘未來統合三韓之主大原君子足下.’時 唐僖宗乾符一年(874)四月也.”

81) 이익,『성호사설』,제3권,「水根木幹」:“愚(李瀷)謂:箕子殷人尙白,殷制也.箕與微等 耳,微旣白馬,則箕何獨不然?千載之下,舊俗不變,可姱不可惡也.” 이익,『성호전 집』,제49권,「擇里誌序」:“箕子受封,八條伊始.……然尙質餘敎,至今未泯,畫井,衣 白,種種足徵.愚謂男戴大冠,女紒繞首,非無所祖而爲之也.衣冠古俗,塵劫不改.勝國 時,忠烈一變而不得,辛朝再變而不得.雖以蒙古之威焉,而俄復因舊.薄海內外,毁裂冠 冕,獨此一片土,尙守先王之制.”

를 계승한 기준(箕準)이 세운 마한에 우리나라의 정치적 정통이 있다고 보았다. 백제조차도 마한에게는 야만족이라고 폄하하였다. 이것이 마한 정통론이다.82) 따라서 안정복의 비판을 불러왔다.83)

그는 왕조의 운명을 늘리기 위하여 수근목간설에 따라 복색을 흰색에서 청색으로 바꾸는 것은 우매한 백성을 속이는 것이고, 국가의 통치방법은 성현이 남긴 서적에 있기 때문에 오덕종시설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주장 하였다. 복색 교체를 반대하는 입장은 그의 여러 글에서 나타난다.84) 이러 한 입장을 가졌던 학자들은 안정복(1712-1791), 이종휘(1731-1797), 이 학규(1770-1835) 등이 있다. 이들은 국가와 백성의 통치방법이 수근목간 설에 근거한 덕운론보다 유가의 교화가 실제적인 정치라고 믿었기 때문 이다. 그래서 이익은 우리나라의 유교적 교화가 기자에서 시작되었다고 강조하고 고려의 덕운이나 조선의 덕운이 무엇인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당시 청나라 강희와 건륭 연간에 황제들도 직접 나서서 오덕종시설이 근 거도 빈약하고 주장이 황당하다고 부정하고, 왕조의 운명은 정치의 인정(

仁政) 여부에 달렸다고 주장하였다.85)

이익은 한국 지리학을 새롭게 인식하고 목간수근(“木幹而水根”)을 말하

82) 이익, 『성호전집』,제47권,「三韓正統論」:“東國之歷代興廢,略與中華相終始.檀君與 堯並興,至武王受命,而箕子定封.意者檀君之後,衰微無復君國,故箕子得而開業.其八 條之敎,所傳者三.……箕準避寇南遷,遂稱馬韓.……夫仁賢之化,實自箕子始,……是 則東方之正統不絶,……惟馬韓是已.……東土稱爲禮義仁賢久矣,說者必曰小中華.……

余故曰:‘馬韓者,卽東國之正統也.’”

83) 김경태,「이익과 안정복의 東國正統論 재검토」,『한국사학보』,제70호,2018.

84) 이익,『성호전집』,제8권,「裼白紵」:“水根木幹,欺愚蒙.歷年短長,書策中.地理,何與 汙與隆?” 『성호사설』,제18권,「松蟲」:“道詵謂:‘我東水根木榦之地,故色尙靑黑,而 務令養松.’旣剝國之鎭望,又剝宗廟之樹,是年高麗亡,是其始衰終滅,國與松同疑也.”

85) 『大金德運圖說』,四庫全書,「御製大金德運圖說序」:“五德之運說,本無稽.……德運之 論,……自漢儒始言五德迭王,遂推三皇五帝,各有所尙,後更流爲讖緯,抑又惑之甚 矣.夫一代之興,皆由積德累仁,豈遂五行之生剋,而服御所尙?” 『四庫全書』,史部 十三,「四庫提要」(乾隆四十六年,1781):“五德之運,不見六經,惟『家語』始有之,而其 書出於王肅僞撰,不可據爲典要.……仰蒙我皇上(乾隆帝)折衷垂訓,斥妄祛疑,本宅中 圖大之隆規,破讖緯休祥之謬論,闡發明切,立千古不易之定論.”

였다. 서양 지리학의 지식을 갖고 한국의 지리적 특징을 파악한 것이다.

그는 도선국사의 수근목간설에 근거하여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파악하 는 수근목간 형세론을 사실상 버렸다. 먼저, 그는 산수의 음양이 동등하 게 순역(順逆)하지만 산(山)과 양(陽)이 주도적이고, 수(水)와 음(陰)이 부 차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수근(水根)의 뜻은 글자대로 산에서 나오는 물줄기라고 보고,86) 사방 가운데 북방 또는 덕운의 수덕(水德)으로 이해하 지 않았다. 그는 수근목간에 관하여 풍수관점에서 어떤 풀이도 하지 않았 는데, 풍수설이나 오덕종시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심지어 충렬 왕 원년(1275)에 태사국이 복색을 바꾸자는 건의에서 도선국사를 언급하 지 않았고 불교 스님조차 흰옷을 입는 것에 주목하여 수근목간설은 나중 에 위작된 것이라고 추측하였다.87) 이러한 이해에는 서양 지리학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목할 것은 그의 목간수근(“木幹而水根”) 주장이다. 한국의 산세의 기 원을 백두산에 두지 않고 북쪽 두만강 변경지역(北塞)에 두었고, 남쪽의 경계선을 지리산이 아니고 제주도에 두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쪽 서 울에서 방위를 보면, 북쪽 두만강의 변경지역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내 려와서 금강산이 되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서 지리산이 되고, 또다시 바다를 건너 제주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두만강 변경지역이 북쪽의 국경 선이고 제주도가 남쪽의 국경선이고 중간의 동쪽에는 천지조화의 이상세

86) 이익,『성호사설』,제28권,「山水」:“山之朝嶽,如水之朝海,形雖不動,氣常歸向也 .……水根於兩山之間,山止于兩水之合.”

87) 이익,『성호사설』,제21권,「白衣」:“忠烈王元年(1275),太史局言:‘東方木位,色當 尙靑,而白者金也.國人多裼以白紵,木制於金之象也,請禁白色.從之.’又不及道詵.恭愍 六年(1357),司天少監于必興上言:『玉龍記』云.……愚謂木幹之說,後人見其尙白,傅 會而爲之也.果如其言,白色尙禁,器什銅銕必將並禁,而後方可耳.”

계(元化洞天)라는 금강산이 있다는 것이다.88) 이러한 지리적 인식에서 그 의 목간수근을 풀어보면, 목간은 이상세계가 있는 동쪽의 금강산이 중요 하다는 뜻이고, 수근은 사실상 북쪽 두만강과 남쪽 태평양의 물을 말한다 고 볼 수 있다.

남북국경지역과 금강산에 관한 그의 감상을 보면 그의 지리적 인식을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북쪽 두만강 강가에서는 군마를 기르고 활을 쏘며 군대 사기를 진작시키고, 윤관이 북방을 개척하고 선춘령에 국 경선 비석을 세웠다는 것을 회상하였다. 동쪽 금강산에서는 신선이 하늘 에 타고 올라가는 학과 용이 살기에 적송자처럼 유선(遊仙)하고 싶다는 생각을 나타냈다. 남쪽 제주도의 한라산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기자의 정 통을 계승한 마한과 백제의 옛터가 있고, 동쪽에는 일본이 있고, 서쪽에 는 중국의 절강지역이 있고, 남쪽에는 대동양(大東洋, 태평양)이 있기에 커다란 배를 타고 멀리 나가보고 싶다고 희망하였다.89)

남북국경지역과 금강산에 관한 그의 감상을 보면 그의 지리적 인식을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북쪽 두만강 강가에서는 군마를 기르고 활을 쏘며 군대 사기를 진작시키고, 윤관이 북방을 개척하고 선춘령에 국 경선 비석을 세웠다는 것을 회상하였다. 동쪽 금강산에서는 신선이 하늘 에 타고 올라가는 학과 용이 살기에 적송자처럼 유선(遊仙)하고 싶다는 생각을 나타냈다. 남쪽 제주도의 한라산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기자의 정 통을 계승한 마한과 백제의 옛터가 있고, 동쪽에는 일본이 있고, 서쪽에 는 중국의 절강지역이 있고, 남쪽에는 대동양(大東洋, 태평양)이 있기에 커다란 배를 타고 멀리 나가보고 싶다고 희망하였다.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