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북방지역에서 일어난 북방국가로서 여진족의 금나라와 청나 라 모두 백두산을 자신들의 발상지로 삼아 정체성을 나타냈다. 여진족은 금나라와 청나라를 건립하면서 중국인을 상대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밝 힐 경우에 조상이 신라에서 왔고 백두산이 발흥지라고 주장하였다. 따라 서 백두산은 한반도의 국가를 비롯하여 대소 흥안령 안쪽지역에서 일어 난 북방국가에서도 정체성을 나타내는 공동의 상징이 되었을 뿐만 아니 라 서로 쟁취해야할 지리적 개념이 되었다.
북방국가 가운데 금나라가 덕운을 논의하기에 앞서 거란족이 먼저 덕 운을 논의하였다. 거란족 요나라의 오덕종시설 논의에 관하여 최근 연구 를 보면, 흥종 연간(1031-1054) 말기부터 남송에 대하여 북조(北朝)를 자 칭하고, 태종 연간에 석경당의 진(晉)나라를 멸망시키고 받아두었던 진나 라의 국새를 가졌기 때문에 중국의 정통(正統)을 가진 왕조라고 자임하였 다. 이후에는 오덕종시설 가운데 수덕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고 송나라의 화덕을 부정하였다. 다시 말해 태종 8년(945)에 “섣달 무일(戊日)과 진일 (辰日)에 제사를 지냈다.(戊辰,臘)”는 풍속에 근거하여 수덕(水德,子祖 辰臘)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이런 풍속의 유래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북송 과 금나라 모두 요나라의 수덕을 부정하였다.100) 따라서 요나라가 처음부 터 수덕의 정통을 주장한 것은 아니고 북송과 외교관계가 깊어진 뒤부터 덕운을 논의하였던 것이다.
금나라는 세종 대정(大定) 15년(1175)에 백두산(장백산) 산신을 흥국영 응왕(興國靈應王)으로 책봉하고, “장백산은 우리나라의 금덕이시다.(闕惟 長白,載我金德)”라고 추켜세웠다.101) 또한 장종(章宗) 2년(1202)에 덕운
100) 劉浦江, 「德運之爭與遼金王朝的正統性問題」,『中國社會科學』,2004年.
101) 『大金集禮』,卷三十五,「長白山」:“大定十二年(1172)二月三日,……今來,長白山,在 興王之地,比之其餘諸州鎭山,更合尊崇,擬別議封爵,仍修廟宇.十二月一日,……奏 奉敕旨,封王仍以興國靈應爲名.”
을 논의한 뒤에 토덕으로 고쳤다. 이때 논의한 기록이 『대금덕운론(大金 德運論)』이다.102) 그런데 금덕은 단순히 흑백을 가리는 것이고 오행에 따 라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이의가 있기 때문에, 토덕으로 고치지 이전에는 과연 금덕인지 수덕인지에 관하여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다.103) 수덕 주장 은 순희 연간(1174-1189)에 귀순한 장체(張棣)가 수덕이기 때문에 전쟁 에서 흑색 깃발이 중요하였다는 설명에 근거한 것이다.104)
장종이 토덕으로 고친 이유는 북송을 멸망시켜 북송의 화덕을 이겼기 때문에 북송을 상생하여 토덕으로 바꾸었다는 견해도 있다. 금나라의 덕 운 문제는 『요사(遼史)』 편찬에서도 정통에 관한 물의가 일어나서 편찬을 중지하기도 하였다. 장종이 토덕으로 고쳤으나 일부 문인들은 여전히 금 덕을 믿었다. 예를 들어 조병문(趙秉文, 1159-1232)은 백두산을 찬양하 면서 금덕론을 암시하였다. “장백산이 높아 북극까지 이르고, 흰옷 입은 선인(白衣 仙人)105)이 나타난다.”고 노래하였다.106)
위와 같이 금나라는 초기에 백두산을 발상지의 상징으로 삼아 금덕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금나라 여진족의 조상이 신라 출신이라고 정체성을 나타냈다.107) 신라는 금덕을 내세웠다. 오덕종시설은 왕조 교체에서는 상
102) 『大金德運論』,『四庫全書』,史部十三.
103) 陳學霖은 수덕이라고 주장하고 劉浦江은 여전히 금덕이라고 주장한다. 陳學霖,「金國 號之起源及其釋義」,『遼金史論集』,第3輯,北京書目文獻出版社,1987年.「大宋“國號”
與“德運”論辯述義」,『宋史論集』,台北東大圖書公司,1993年.劉浦江, 「德運之爭與遼金 王朝的正統性問題」,『中國社會科學』,2004年.
104) 張棣,『金虜圖經』:“虜人以水德,凡用師行征伐,旗幟尙黑,雖五方皆具,必以黑爲主.”
105) 백의 선인은 『신선전』의 선인 백중리(白仲理)를 말한다. 백중리가 무종산(無終山)에서 연단하여 황금 5천근을 만들어 백성을 구하였다고 전한다. 『遼史』,三十八卷,地理志 二,東京道:“仙鄕縣:本漢遼隊縣,渤海爲永豐縣.『神仙傳』云:‘仙人白仲理,能煉神 丹,點黃金,以救百姓.’戶一千五百.” 『太平禦覽』,卷四十五,河北諸山,無終山:“『神 仙傳』云:‘仙人白仲理者,遼東人也.隱居無終山中合神丹,又於山中作金五千斤,以救 百姓.’卽此山也.”
106) 趙秉文,『滏水集』,卷五,「長白山行」:“長白山雄天北極,白衣仙人常出沒.”
107) 『松漠紀聞』:“女眞酋長,乃新羅人,號完顔氏.” 『釋氏稽古略』:“女眞,金也,世本新羅 人,號完顔氏.完顔,猶漢言王也.”
생 또는 상극을 따르지만, 신라 출신의 여진족 조상이 신라의 정체성을 나타냈다면 신라의 금덕을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다. 금나라의 덕운이 금 덕에서 요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수덕으로 바뀌고, 북송을 멸망시킨 뒤에 다시 토덕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금나라의 정체성이 상대국의 상황에 따 라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금나라 초기의 금덕은 백두산뿐만 아니라 신라 출신이라는 민족 정체성도 나타냈을 것이다.
만주족(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의 강희황제는 북경에서 중국의 지형을 조망하여 좌청룡이 태산이고 우백호가 화산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중국 감여가들은 태산이 동쪽에서 독립하여 솟았는데 용맥의 발원이 어디인 지 모른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그는 1677년 백두산을 답사시켜 확인한 뒤 에 태산의 용맥이 백두산에서 발원하였다고 주장하였고, 한족 신하 이광 지(李光地, 1642-1718)의 지지를 받았다.108) 백두산의 남쪽에서 두 줄기 가 나와 한 줄기는 고려국(조선)의 산맥이 되고, 다른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흘러내려 다시 남서 두 줄기로 나뉘어 북쪽 줄기가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되고, 서쪽 줄기가 개운산(開運山)과 여순의 철산(鐵山)이 되었다. 철산의 줄기가 다시 바다를 건너 산동의 태산이 되어 중국 오악의 우두머리라고 결론지었다.109)
강희황제의 태산 용맥론은 실제로는 곤륜산의 중맥(中脈)이 흘러와서 태산이 되었다는 중국 삼대 용맥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민간전설에는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황하의 수룡(水龍)이 바다로 도망가지 못하게 막아 놓았다고 한다. 강희황제의 태산 용맥론은 사실상 한족의 삼대 용맥론을
108) 李光地,『榕村集』,卷十四,「上諭泰山脈絡恭紀」:“倘非皇上(강희제)灼知而發明之,則 遺經之指,千載夢夢也.”
109) 『聖祖仁皇帝禦制文集』,四集,卷27,『康熙幾暇格物編』,「泰山龍脈論」:“古今論九州山 脈,但言‘華山爲虎,泰山爲龍’,地理家亦僅云‘泰山特起東方,張左右翼爲障’,總未根 究泰山之龍於何處發脈.朕細考形勢,深究地絡,遣人航海測量,知泰山實發龍於長白山 也.……其南麓分爲二幹.一幹西南指者,東至鴨淥,西至通加,大抵高麗諸山,皆其支 裔也.其一幹自西而北至納綠窩集,復分二支.北支至盛京,爲天柱隆業山,折而西爲醫 巫閭山.西支入興京門,爲開運山,……至金州旅順口之鐵山.……海中伏龍於是乎陸 起,西南行八百餘里,結而爲泰山,穹崇盤屈,爲五岳首.”
비롯하여 만리장성의 풍수 역할과 화이 경계선을 무너뜨린 것이다.
강희황제의 태산 용맥론은 개인의 독창적인 견해가 아니다. 명나라 구 준(丘濬, 1421-1495)은 곤륜산맥이 북쪽을 흘러와서 요동의 여순에서 바 다를 건너 산동성 봉래현(蓬萊縣)에 상륙하여 태산이 되었다고 보았다.110) 임진왜란에 참전하였던 이여송(1549-1598)은 조선에 참전하도록 올린 글에서, 요동과 하동 지역의 산맥이 여순에서 내려왔는데 산동 봉래현의 산맥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111) 구준과 이여송은 요동반도의 여순과 산 동반도의 봉래현을 잇는 열도에 주목하였다. 이여송이 요동지역과 하북 지역의 산맥이 여순에서 내려왔다고 보는 관점은 구준의 견해를 바꾸어 놓은 것이며, 강희제의 태산 용맥론의 일부에 해당한다.
강희황제는 백두산 답사에 근거하여 구준과 이여송의 견해를 확대시키 고 태산의 용맥이 백두산에서 내려왔다고 결론지었다. 다시 말해 백두산 이 중국 오악의 중심이 되는 태산의 기원이라고 보는 관점은 만주족의 한 족 지배를 합리화시킨 것이다. 따라서 청나라 황제는 직접 길림에 가서 백두산을 바라보며 망제(望祭)를 지냈다. 건륭 황제는 1743년 9월에 길림 에 가서 직접 망제를 지내고 시를 지었다. 그는 높은 백두산을 바라보며 망제를 지내고 조상들의 마음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였다.112) 청나라 황제들은 백두산에 망제문을 직접 짓기도 하였는 데,113) 여진족의 백두산 문학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다.
110) 康熙帝,「泰山龍脈論」:“『禹貢』,李光地注云:‘岱爲嶽宗,自營州跨海而來.’ 丘濬,『山 東通志ㆍ總論』:‘岱脈由遼左旅順口,渡海入蓬萊縣境.’ 此皆傳述新論者也.”
111) 李如松(1549-1598),『經略復國要編』,卷首,「華夷沿海圖序」:“歲在赤奮(1589),余受 上命,……蜚語至京師而而朝鮮且告急矣.” 「華夷沿海圖,旅順口」:“遼左,河東諸山,自 金州衛旅順口發脈,而實始自山東登州府蓬萊諸山也.海岱之脈,又自太行王屋,徒西 南,向東北抵登州,海中跌斷起伏,鼉磯,沙門,長山,半洋諸島相接,以至旅順復發,故 此地,海運易行,無甚風波險惡,藉此各島故爾.”
112) 乾隆,「蹕吉林境,望叩長白山」:“吉林眞吉林,長白鬱嶔岑.……天作心常憶,明禋志倍 欽.”
113) 강희황제는 「望祀長白山」 시 1수와 「祭千長白文」 2편을 짓고, 건륭황제는 「祭告長白山 文」 5편을, 가경황제는 「長白山告祭祝文」 2편을 지었다.
따라서 청나라가 멸망한 뒤에 장태염(章太炎, 1869-1936)은 1914년에 유명한 지리학자 장상문(張相文, 1866-1933)에게 서신을 보내 태산 용맥 론을 부정하고 곤륜산의 중맥이라는 견해를 회복시켰다.114) 예를 들어 명 나라 왕사성(王士性, 1547-1598)은 당나라 일행의 양계론에 근거하여 곤
따라서 청나라가 멸망한 뒤에 장태염(章太炎, 1869-1936)은 1914년에 유명한 지리학자 장상문(張相文, 1866-1933)에게 서신을 보내 태산 용맥 론을 부정하고 곤륜산의 중맥이라는 견해를 회복시켰다.114) 예를 들어 명 나라 왕사성(王士性, 1547-1598)은 당나라 일행의 양계론에 근거하여 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