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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산과 백두산에 관한 한국의 유선문학과 수근목간 형세론-이경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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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문학과 수근목간 형세론

이경룡*

머리말

Ⅰ. 단군신화 태백산과 삼신산의 분리 및 곤륜산의 친근감

Ⅱ. 최치원 유선문학의 봉래산과 곤륜산 구분

Ⅲ. 고려말기 유선문학의 봉래산과 곤륜산 및 청학동 찾기

Ⅳ. 황하 발원의 곤륜산과 백두산의 지리학 및 분야 구분

Ⅴ. 도선국사의 수모목간 형세론과 수근목간 덕운론

Ⅵ. 우필흥의 수근목간 덕운론과 이익의 목간수근 국경론

Ⅶ. 여진족의 백두산 금덕론과 강희제의 태산 용맥론 맺음말

* 하곡학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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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요약】

단군신화의 태백산 이미지는 현실적인 정치적 정통론이 강하기 때문에 그에 관한 묘사는 동이족의 삼신산 신화를 비롯하여 서쪽 곤륜신화의 신 선세계 또는 불교 수미산의 신화와 다르다. 따라서 태백산은 한국의 유 선문학에서 크게 활용하지 않았다. 또한 한국문화의 도교와 신선사상이 속세를 초탈하고 이상향에 관한 종교적 동경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오히 려 봉래산과 곤륜신화는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한국의 유선문학은 늦어 도 최치원부터 시작되었다. 고려말기와 조선시기의 유선문학에서는 삼신 산과 곤륜산의 이상향을 상상하였고 이상향의 동경을 곤륜산에 기탁하였 다. 이러한 이상향 동경은 고려말기부터 청학동을 찾아내어 구체화시켰 다.

백두산에 관련하여 신라말기와 고려시기의 한반도 지리학을 대표하는 것은 도선국사의 수모목간(水母木幹) 형세론이다. 이것은 송악산의 산맥 이 백두산에서 내려왔고 평양 대동강과 개성 송악산의 지리적 상호보완 관계를 설명한 형세론이다. 그렇지만 도선국사의 형세론은 다시 백두산 에서 지리산까지 전국의 형세론으로 발전하였고 동시에 고려왕조의 덕운 이 수근목간(水根木幹)이기 때문에 복색을 청색으로 바꾸어야한다고 정 치적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조선시기 성리학자들은 오덕종시설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왕조 의 덕운론을 무시하였지만, 형세론을 발전시켜서 한반도 주변의 일본열 도와 바다까지 확대시켜 동북아시아의 지리를 이해하였다. 남사고는 남 해바다를 비롯하여 일본열도와 류큐열도의 지리를 이해하였다. 그런데 서양의 지리학 지식이 도입된 뒤에 이익은 「만국전도」에 근거하여 도선국 사의 수근목간 형세론을 버리고 남북국경지역을 이해하는 목간수근의 형 세론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이 도선국사의 수모목간 형세론은 고려시기 와 조선시기의 지리학에서 끊임없이 개선되고 발전되었다. 따라서 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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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의 수모목간 또는 수근목간 형세론은 한국 전통적 지리학의 커다란 발명이며 창견이라고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주제어 : 곤륜산, 백두산, 유선문학, 수근목간, 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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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백두산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이며 동북아시아 지형의 기 준점이다. 현재 백두산의 이미지에는 단군신화의 태백산 이미지를 비롯 하여 신라시기 문인들이 동인(東人)으로서 정체성을 나타냈던 봉래산과 중국의 유선문학에서 도입한 곤륜산의 이미지 등이 담겨있다. 백두산은 한민족의 역사기억이며 동시에 여진족의 역사기억이었다. 한민족은 단군 조선의 개명과 기자조선의 유교적 문명화 두 가지 역사기억을 태백산 곧 백두산과 함께 연계시켜왔다. 특히 기자조선은 거란족과 여진족의 대외 적 문화정체성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들도 기자의 유교적 문명화를 내세워 중국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신라말기 도선국사의 수모목간(水母木幹) 형세론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반도 지형을 이해한 전통적 지리학의 발명이다. 단군신화에 담긴 태백 산의 의미를 지리학 관점에서 발전시킨 발명이었다. 나아가 거란족과 여 진족의 백두산 이해와 기자조선의 역사기억을 고려하면, 도선국사의 백 두산 형세론은 동북아시아의 지형과 지리를 이해하는 전통적 역사지리학 의 위대한 발명이었다. 조선후기 남사고는 수근목간(水根木幹) 형세론을 확대시켜 남해 바다와 일본열도 및 류큐열도까지 포함시켜 이해하는 동 아시아 지리학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서양 지리학이 도입된 뒤에는 이익 은 목간수근(木幹水根) 형세론을 제시하여 조선의 남북국경지역을 설정 한 지리학으로 발전시켰다.

백두산의 역사기억은 한국의 유선문학과 역사지리학이 결합된 것이다.

불교와 도교의 이상세계를 동경하는 유선문학은 속세를 초탈하여 신선세 계를 상상하였고, 금강산을 불교의 성지로 만들었다. 뒤이어 고려말기에 는 청학동을 찾아내는 계기가 되었고 조선후기에는 백두산 문학을 만들 었다. 조선후기에는 실제로 백두산을 올라가서 답사하고 많은 시문을 짓 는 바람이 불었다. 단군 신화의 역사기억을 새롭게 편성하고 한국지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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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 지리를 인식하였다. 따라서 백두산은 조선후기 유선문학의 무대가 되어 백두산 문학을 발전시켰다. 백두산 문학은 백두산의 지위를 서쪽 곤륜산에 견주는 동쪽 곤륜산이라고 인식하였고, 한국의 역사가 단 군부터 중국의 요임금과 함께 병행하여 발전하였다는 역사관을 표현하였 다.

신라말기 도선국사는 백두산을 조산으로 삼고, 백두산에서 내려온 송악 산이 평양의 대동강과 서로 보완하는 수모목간 형세를 이루었다고 설명 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의 기업(基業)사상 가운데 하나는 고구려 고토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도선국사의 수모목간 형세론은 고려 태조의 고토 회 복정책과 결합하여 백두산의 역사적 기억과 정치적 의의를 강화시켰다.

다시 말해 도선국사의 형세론이 지리학의 지식을 제공하여 백두산의 지 리적 위상을 높였고, 고려 태조의 고토회복이라는 정치적 의지가 백두산 의 역사기억과 정치적 상징을 각성시켜주었다.

고려시기에 송악산과 대동강의 수모목간 형세론은 백두산에서 지리산 까지 전국을 조망하는 수근목간 형세론으로 발전되었다. 수근목간 형세 론은 정치적 관점의 오덕종시설에 근거하여 고려왕조의 수근목간 덕운 론으로 재해석되어 정치적 의미가 증강되었다. 고려시기의 수근목간 덕 운론은 대외적으로 당시 거란족 요나라와 여진족 금나라의 덕운론 논의 에 대응하는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치적 해석도 담고 있었다. 지리학의 지 식과 정치적 의지는 백두산을 지리학과 천문학에서 보는 객관적인 과학 적 관점을 만들었다. 결국에 단군신화와 태백산의 역사기억을 정치적이 고 지리학적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신라시기와 고려시기 의 유선문학은 봉래산과 곤륜산을 동경의 대상과 문학의 무대로 삼았다.

이것은 단군신화의 백두산을 유선문학의 봉래산과 곤륜산 둘과 구분하였 던 것이다.

신라시기 문인들이 봉래산을 동경하는 유선문학을 창작하거나, 고려시 기 지식인들이 백두산 중심의 형세론을 이해하는 배경에는 중국의 곤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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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관한 유선문학과 지리학 지식이 있었다. 한국의 유선문학은 동쪽의 봉래산을 비롯한 삼신산에 서쪽의 곤륜산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였다.

곤륜산의 삼대 용맥론과 황하의 발원지에 관한 중국의 지리학과 천문학 지식은 신라시기와 고려시기의 문인들이 중국의 지형을 이해하는 출발점 이 되었다. 아울러 중국의 지리학과 결합된 천문학과 점복학도 한국의 풍 수학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고려 초기에 편찬된 『성명총괄(星 命總括)』은 고려가 천문학과 점복학을 자립화시킨 대표적 연구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지식 위에서 도선국사가 백두산과 한반도의 지리 와 지형을 종합하여 이해하는 백두산 중심의 수모목간 또는 수근목간 형 세 이론을 창조할 수 있었다.

한민족과 함께 여진족도 백두산을 발상지로 여겨 숭상하였고 심지어 왕 조 덕운(德運)의 근거로 삼았다. 여진족의 금나라는 조상이 신라 출신이 라고 밝히고 처음에는 백두산 발상지에 근거하여 금덕을 나타냈다. 거란 을 멸망시킨 뒤에는 수덕을 나타내고 북송을 멸망시킨 뒤에는 토덕으로 고쳤다. 금덕을 토덕으로 고칠 때 많은 반발과 논의를 정리한 『대금덕운 론(大金德運論)』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그렇지만 백두산을 발상지로 여기 는 것은 지속되었다. 여진족이 발상지로 여기는 백두산은 고려가 고토 회 복의 상징으로 삼는 백두산과 서로 일치하기 때문에 경쟁하는 대상이 되 었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고려의 정치가와 술수가들이 수근목간의 형 세론을 덕운론으로 재해석하였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만주족(生女眞)의 청나라도 백두산을 발상지로 여겼다. 그러나 오덕종 시설이 미신이며 국가통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평가하여 금나라처럼 덕운을 깊이 논의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만주족이 한족의 지배를 합리화 시키려고 새롭게 태산의 용맥론을 제시하였다. 강희황제는 중국 오악의 중심인 태산의 용맥이 백두산에서 내려온 것이라는 「태산 용맥론」을 제시 하였다. 다시 말해 백두산의 남쪽에서 두 줄기 산맥이 내려오는데, 동쪽 줄기가 내려와서 조선 산맥을 이루었고 다른 한 줄기가 요동반도 여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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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발해만 섬들을 따라 산동반도 봉래현으로 나타나서 태산의 용맥이 되 었다고 보았다. 건륭황제는 기자조선의 유교적 문명화를 강조하여 중국 의 화이론을 타파하였다. 이러한 지리직 인식과 기자조선은 만주족의 청 나라가 조선과 한족의 지배를 합리화시킨 것이다. 당연히 조선 지식인들 은 태산 용맥론을 무시하고 오히려 의무려산(醫巫閭山)의 기운이 불순하 다고 평론하여 강희황제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필자는 백두산의 단군신화 역사기억과 문학적 이미지를 동북아시아 관 점에서 신라시기부터 조선후기까지 넓게 살펴보려고 한다. 특히 신라 최 치원과 고려말기의 유선문학 변천을 살펴보고, 고려시기와 조선시기에 유행하였던 수근목간 형세론의 내용을 밝히려고 한다. 유선문학은 문학 적 이상향을 설정하는 것이고, 형세론은 지리학 지식을, 덕운론은 정치적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유선문학과 수근목간론 둘의 성격이 상이하지만 어떻게 결합되어 조선후기의 백두산 문학을 형성하였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아울러 금나라의 금덕론과 청나라의 태산 용맥론의 내용을 살펴서 고려의 정치가와 술수가를 비롯하여 조선의 문인들이 어떻게 대응하였는 지를 찾아보려고 한다. 도선국사의 수모목간 형세론이 한국의 전통적 지 리학 발전에 어떻게 공헌하였는지를 밝히려고 한다.

Ⅰ. 단군신화 태백산과 삼신산의 분리 및 곤륜산의 친근감

고조선의 단군신화는 개명신화와 건국신화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다.

『고기(古記)』에서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서 신시를 세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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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이 되어 인간세상을 이화(理化)하였다고 한다.01) 다시 말해 환웅이 천 왕으로서 오랫동안 사람을 개명시켰고, 그 뒤에 단군이 조선을 건국하고 통치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환웅의 개명시기와 단군의 건국시기 둘로 나눌 수 있다. 단군의 즉위 연도가 요임금과 같다는 뜻은 단군과 요임금 모두 사람이 개명된 뒤에 개국하였다는 것이며 한중 양국의 역사가 병행 발전하였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단군신화는 유가 역사관 가운데 맹자가 요임금부터 유가의 정통으로 삼 는 이제삼왕(二帝三王) 역사관을 수용하고, 북송시기 『황극경세서』의 편 년을 참고한 것이다. 유가의 중국고대 역사관을 보면, 삼황오제 신화는 사람이 점차 개명되고 국가를 세워 통치해오는 과정의 이야기이다. 천지 가 만들어진 뒤 삼황시기에는 사람이 짐승과 구별되지 않을 만큼 개명되 지 않았다고 한다. 요임금에 이르러 사람들이 상당히 개명되어 국가를 건 국하였다고 한다. 단군과 요임금의 동년 즉위는 사실상 동북아지역과 중 원지역의 문명화와 건국이 대등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환웅과 태백산 신화는 중국의 삼신산 신선사상과는 직접적으로 어울리 지 않는다. 더구나 단군이 기자에게 국가를 양보한 뒤에 구월산에서 승천 하였다는 것도 한국문인들은 중국의 신선사상에서 해석하지 않았다. 한 당시기 중국에서는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이라는 삼신산이 모두 발해 동 쪽 바다의 섬에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발해 동쪽의 민족들 입장에서 보 면, 삼신산이 중원지역보다 가깝지만 바다에 떠있는 삼신산의 신선세계 에 국가를 세운 것은 아니었다. 삼신산의 상상적 모습은 약을 채집하여 불로장생하는 것뿐이고 현실의 정치적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곤륜산 이나 수미산처럼 신과 신선들이 궁궐에서 살고 있는 구체화된 모습도 부 족하였다. 따라서 국가를 건국하여 통치하였다는 개국신화에서 보면, 삼

01) 『三國遺事』,「古朝鮮(王儉朝鮮)」︰“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數意天下,貪求人世。

父知子意,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乃授天符印三箇,遣往理之。雄率徒三千,降 於太伯山頂(即太伯今妙香山)神壇樹下,謂之神市,是謂桓雄天王也。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在世理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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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산은 정치적 현실을 결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문인들은 단군신화의 태백산을 이상향처럼 직접 묘사하거나 동경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삼신산과 함께 곤륜산이나 수미산의 모습을 상상하 고 동경하였다. 다시 말해 태백산은 한민족 내부의 주체적 정체성을 나타 내고 또한 현실적인 정치적 관심을 반영하는 대상이었다. 따라서 종교적 이상향을 동경하는 것은 삼신신을 비롯하여 곤륜산과 수미산에 기탁하였 다. 특히 삼신산은 신라시기와 고려시기 문인들이 중국 문인들에게 자신 을 나타내는 상대적 정체성으로 삼았다. 따라서 한국문화에는 한민족의 주체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태백산과 중국인에게 나타내는 상대적 주체성 의 삼신산 둘을 분리시켰다. 물론 유사한 점도 있다.

신라시기와 고려시기의 한국 문인들은 삼신산과 곤륜산의 이상향을 중 국 문인들과 강하게 공유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시기 문인들은 고 조선 멸망과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 이후에는 중국의 침략을 지극히 부정 하였지만, 오히려 『산해경』02)에 근거한 곤륜산과 서왕모의 신화를 더욱 친 근하게 여겼는데 까닭이 있다. 신라시기와 고려시기의 유선문학에서는 곤륜산에 관한 묘사가 삼신산만큼 많았다. 고려말기부터 조선시기까지는 청학동을 비롯하여 많은 동천복지를 곤륜산의 신선세계처럼 상상하고 동 경하였다.

중국의 문인들도 한무제의 조선 침략과 수당시기의 삼국 침략을 비난 하였다. 예를 들어 당나라 두광정(杜光庭, 850-933)은 한무제가 요동을 정벌하고 고조선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서왕모가 한무제를 다시 찾지 않 았다고 이해하였다.03) 다시 말해 당나라 문인들은 한무제의 고조선 공격 을 비난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수당 왕조가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한

02) 정재서, 「조선시대의 『산해경(山海經)』 수용 약론(略論)--문헌자료를 중심으로」, 『도교 문화연구』, 47집, 2017,11. 陳連山, 『山海經學術史考論』, 北京大學出版社, 2010.

03) 杜光庭,『墉城集仙錄』,卷之一,「聖母元君」:“其後武帝不能用王母之戒,爲酒色惑,殺 伐不休,征遼東,擊朝鮮,通西南夷,築臺榭,興土木,海內愁怨,自此失道.幸回中臨 東海三祠,王母不復降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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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도 함께 비난한 것이다. 두광정의 평론은 신라 문인들을 위로하는 뜻 이 있지만 실제로는 개인의 탈정치적인 이상을 반영한 것이다. 최치원은 곤륜산을 삼신산만큼 친근하게 묘사하였다. 따라서 당나라와 신라 양국 의 문인들이 공유하였던 삼신산의 신선사상과 유선(遊仙)문학에서 보면, 동쪽지역 삼신산의 신선세계를 파괴하려는 한무제와 수당 왕조의 무지와 폭력을 비난한 것이다.

동쪽의 삼신산과 서쪽의 곤륜산은 한국과 중국 문인들의 공통된 이상향 이 되었다. 중국 문인들은 곤륜산과 서왕모 신화를 유선문학과 곤륜문화 의 원형으로 삼았다. 그런데 한국 문인들은 단군신화의 태백산을 신선사 상이 물든 삼신산과 분리시켰고, 삼신산에 대한 이상향 동경은 오히려 곤 륜산과 서왕모를 더욱 친근하게 만들었다. 곤륜산 친근감은 지식인들에 한정되지 않고 일반인들까지 동경하는 이상향이 되었다. 일반인들은 비 록 백두산이라는 민족정체성을 나타내면서도 곤륜산을 죽은 뒤에라도 올 라가고 싶은 이상향으로 여겼다. 곤륜산과 옥경(玉京)은 장례문화에도 영 향을 주어 최근까지의 상여소리에도 남아있었다.04)

Ⅱ.최치원 유선문학의 봉래산과 곤륜산 구분

한국문학사에서 유선(遊仙)문학은 신라시기에 일어나서 고려시기에 발 전하였고 조선시기에 절정에 도달하였다가 쇠퇴하였다고 한다.05) 유선문

04)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땅다지는 소리」, 주덕읍 민요 6. “천지조정은 곤륜산이요.

수지조정은 황해수라. 곤룡산 일지맥에, 해동 조선이 마련될 제.” 성세정, 『살아있는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전자책), 영진닷컴, 2007, 12.

05) 김승환, 「고운 최치원의 시텍스트 범해와 유선가 해석」, 『한국문화연구』, 제30호, 2016. 唐路, 『張經世와 曹唐의 遊仙詩 比較硏究』, 중앙대 학위논문, 2015. 李穎利,『論 唐代的游仙詩』,山西大學,碩士學位論文,2007. 김보경, 『崑崙神話硏究』, 이화여자대 학교, 석사논문, 2006. 정민, 「조선 전기 遊仙辭賦 연구」, 『한국언어문화』, 제13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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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은 곤륜신화와 봉래산 신화를 동등한 지위로 대접하였다. 현재의 문헌 기록만 보면 곤륜신화는 최치원(857-?) 문집에 처음 나타난다고 한다.

그렇지만 최치원 혼자 유선문학을 유행시켰다는 것이 아니고 신라에서도 신선세계를 노니는 문학과 회화가 유행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삼신산 신화는 일찍이 발해 동쪽지역에 소개되었다. 신라 사람들은 자 신들이 신선의 기상을 가진 동인(東人)이라고 정체성을 인식하고 중국 사 람들을 상대하였다. 최치원은 12살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살에 급제하 였고, 다시 2년 동안 낙양에서 시사(詩詞)를 연마하고 현교(玄敎)를 배운 뒤에 고병(高騈, 821-887)의 막료가 되었고, 29살에 신라에 돌아왔다.

최치원이 귀국할 때, 동년 합격자였던 시인 고운(顧雲, ?-894)이 써준 시 에는 세 마리 자라(金鼈)가 떠받힌 봉래산이 있는 신선세계로 돌아간다고 읊었다.06) 이것은 중국 문인이 보는 신라인의 정체성을 반영한 것이다.

최치원의 문학작품은 봉래산 신화와 곤륜산 신화를 결합시켜 문학적 이 미지를 묘사하고 종교적 동경을 나타냈다. 그는 동인으로서 불교와 유가 를 존숭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냈다.07) 다시 말해 동인의 정체성을 갖고 국가와 종교를 초월하여 인도의 불교와 중국의 유가를 존 중한다는 뜻이다. 그는 동인의 정체성을 갖고 봉래산을 동인의 정체성으 로 동일시하였는데, 배경에는 신선사상이 있었다. 음력 7월 보름 중원절 (中元節)을 맞아 쓴 글에서 일찍이 마음과 기운을 모아 선천을 깨닫는 수 양공부를 하였다고 한다.08) 이와 같이 그의 신선사상에는 도교의 수련공 부 바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치원의 작품을 보면 삼신산 가운데 봉래산을 유선문학의 대상으로 삼

06) 최치원, 『고운집』, 『三國史記』,「本傳」:“顧雲以詩送別:‘我聞海上三金鰲,金鰲頭戴山 高高.山之上兮,珠宮貝闕黃金殿.’”

07) 최치원,『고운집』,卷二,「眞監和尙碑銘」︰“夫道不遠人,人無異國。是以東人之子,爲 釋爲儒。”

08) 최치원,『계원필경집』,卷十五,「中元齋詞」︰“臣才謝半千,雖慙賢路,心凝正一,早 扣玄關。齋誠於八節三元,鍊志於龍緘鳳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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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배를 타고 봉래산에 가서 약을 구하고, 가까운 봉래산에서 신선을 만나고 싶다.”고 시를 읊었고09) 신선 부구공(浮丘公)도 찾겠다고 신선세계 를 동경하였다.10) 곽박(郭璞, 276-324)의 유선문학은 그의 「유선시(遊仙 詩)」 19수가 대표하며, 부구공은 제3수에 보인다.11) 최치원의 유선문학은 위진시기의 유선문학을 대표하였던 곽박을 모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그는 「봉래산도」 그림을 축수 선물로 바다 건너 고병에게 보내기도 하 였다.12) 「봉래산도」는 신라 화가의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신 라에서 유선문학뿐만 아니라 유선 회화가 유행하였다는 뜻이다.

곤륜산에 관하여 최치원은 왕가(王嘉, ?-390)의 「습유기(拾遺記)」를 인 용하여 곤륜산 9층에 있는 지전(芝田)과 혜포(蕙圃)를 노닐면서 한없이 감상하고 싶다고 읊었다.13) 고변의 생일을 축하하는 글을 지으면서, 서왕 모가 곤륜산 연못에서 주나라 목왕에게 연회를 열어주었다는 요지(瑤池) 를 인용하였다.14) 이와 같이 그는 곤륜산 신화에 관하여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동경하였던 곳은 곤륜산이 아니고 봉래산이었다.

이밖에도 그는 「여지도(輿地圖)」의 제문에서 “곤륜산이 동쪽으로 내려 와서 오악을 이루고, 곤륜산 물이 성숙해(星宿海) 사막 땅속을 지나 북쪽 에서 흘러나와 황하가 되었다.”고 썼다.15) 이 구절을 고려와 조선의 유선 문학가들이 가장 높이 평가하였는데, 한국 유선문학 발전에 커다란 영향

09) 최치원,『고운집』,卷一,「泛海」:“乘槎思漢使,採藥憶秦童.……蓬萊看咫尺,吾且訪 仙翁.”

10) 최치원,『계원필경집』,卷十五,「下元齋詞」:“望三淸於通路,資一漑於良田.此時枕越 石之戈,暫妨高臥.他日把浮丘之袂,豈訝後來?”

11) 郭璞,「遊仙詩」,三:“左挹浮丘袖,右拍洪崖肩.”

12) 최치원,『계원필경집』,卷十八,「獻生日物狀」,「『蓬萊山圖』一面」 : “右(『蓬萊山圖』),伏 以重陽煦景,仙界降眞,雖長生標金籙之名,而衆懇祝玉書之壽.”

13) 최치원,『계원필경집』,卷十五,「中元齋詞」 : “縱賞芝田,蕙圃.” 王嘉,『拾遺記』 : “第九 層,山形漸小狹,下有芝田,蕙圃,皆數百頃,群仙種耨焉.”

14) 최치원,『계원필경집』,卷十八,「獻生日物狀」:“必坐寧環海,後當去會瑤池.五色輕 雲,鎭隨行止.千年素鶴,競效驅馳.”

15) 최치원,『고운집』,卷一,「題輿地圖」 : “崑崙東走五山碧,星宿北流一水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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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주었다. 여기에는 곤륜산에서 비롯된 오악과 황하에 관한 지리학 지식 이 요약되어 있는데, 지리학 지식에 근거하여 곤륜산의 서왕모 이미지를 구체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풍수에도 밝았던 것 같다. 명당은 땅 의 지맥이 하늘의 북두삼원 이십팔숙(三垣二十八宿) 분야를 서로 맞대응 하는 곳인데, 사세(四勢)와 팔방(八方)을 보고 명당을 찾는 방법을 언급하 였다.16) 이것은 곽박의 스승 청오(靑烏) 선생이 지었다는 『금낭경(錦囊經)』

을 인용하여 말한 것이다.17) 사실상 한국의 풍수학은 최치원보다 앞서 고 구려 무덤의 사상도(四象圖, 四神圖)에서 일찍부터 널리 유행하였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신라말기의 최치원을 통하여 유선문학과 유선 회화가 유행하였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그는 동인의 정체성을 갖고 봉래산의 신선세계를 동경하 였다. 또한 중국 문인들에게는 곤륜산을 신선세계로 묘사하였다. 그의 유 선문학은 삼신산의 봉래산과 중국의 곤륜산을 구분하면서도 신선세계로 서 동일시하였다. 그는 곤륜산과 황하에 관한 지리학 지식을 갖고 있었고 풍수학도 알고 있었다. 그의 유선문학은 신선세계의 동경뿐만 아니라 지 리학 지식과 풍수학을 담고 있다.

Ⅲ. 고려말기 유선문학의 봉래산과 곤륜산 및 청학동 찾기

고려시기 문인들은 개인적으로 이상향을 동경하는 유선문학에 심취하 였다. 주목할 것은 유선문학과 유선 회화가 함께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김부식은 북송 휘종연간 1116년에 사신 가서 휘종을 뵈었다. 휘종이 직접

16) 최치원,『고운집』,卷三,「崇福寺碑」 : “靈隧也者,頫銓坤脈,仰揆乾心,必在苞四象 于九原,……但得靑烏善視,豈令白馬悲嘶?”

17) 『靑烏子葬經』,「附集篇」:“經曰:‘地有四勢氣從八方.’寅申巳亥四勢也,震離坎兌乾坤艮 巽八方也.是故四勢之山,生八方之龍.四勢行龍,八方施生.一得其宅,吉慶榮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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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명화를 하사하여 받아왔다. 여기에는 「선산금궐도(仙山金闕圖)」, 「봉 래서애도(蓬萊瑞靄圖)」, 백옥루도(白玉樓圖)」 등이 들어있었다.18) 이자량(

李資涼)도 송나라에 사신 가서 많은 회화와 법첩을 받아왔다. 모두 천장 각(天章閣)과 보문각(寶文閣)에 보관하였다.19) 이러한 신선 그림과 봉래산 그림 등 고급 회화작품들은 고려시기의 유선 회화와 유선문학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말기에는 원나라의 침략과 사회혼란 때문에 곤륜산의 이미 지가 반드시 이상향을 동경하는 신선세계로 묘사되지 않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다.

이규보(1168-1241)는 문단을 주도할 만큼 지명도가 높았고 금나라와 원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담당하였다. 그는 42살(1209)에 쓴 시에서 곤륜산 신화의 서왕모와 복숭아 및 악기 운오(雲璈)를 빌어서 읊었다. 운 오 악기는 당나라 관원 풍휘(馮徽)의 아내 설현동(薛玄同)이 매일 『황정 경(黃庭經)』을 읽고 나중에 신선이 되어 승천할 때 연주되었다는 악기이 다.20) 이것은 곤륜산 신화를 인용하여 이상향을 동경하는 마음을 가졌다 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1238년 야율초재(耶律楚才, 1190-1244)에게 서신 2통을 보내 황 제에게 소국을 잘 대우해줄 것을 부탁하였다.21) 몽고 침략이 지속되고 사 회가 혼란하자, 그는 곤륜산 신화를 빌려 자신의 답답한 감정을 표현하였 다. 예를 들어 은퇴하여 농사짓는 모습과 남자의 기개 및 전란의 안타까 움 등을 나타냈다. 유주(劉晝, 514-565)가 읊은 “곤륜산 아래에서는 옥 이 흔하기에 귀한 옥을 던져 까마귀를 잡는다.”는 구절을 인용하여 은퇴

18) 『東文選』,卷三十五,金富軾,「謝宣示大平睿覽圖表」.

19) 고미술 연구회,「高麗時代 일반회화의 발전」,2002.

20) 이규보,『동국리상국전집』,卷十三,「(己巳年燈夕,翰林奏呈)文機障子詩」 : “三呼萬歲 神山湧,一熟千年海菓來.……西母獻來千歲壽,指呼弟子▩雲璈.” 杜光庭,『墉城集仙 錄,薛玄同』:“雖眞仙降眄,光景燭空,靈風異香.雲璈鈞樂,奏於其室,馮徽亦不知也.”

21) 劉曉,陳高華,「耶律楚材與早期蒙麗關系―讀李奎報的兩封信」,『文史』,2002年第1期,

中華書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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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농사짓는 모습을, “남자로서 곤륜산 꼭대기에 올라 황하 물을 쏟아 서 오랑캐를 잡겠다.”는 남자의 기개를, “개경이 전란을 치루는 동안에 겨 우 목숨을 건졌다.”는 안타까움을 나타냈다.22) 이와 같이 곤륜산 신화의 여러 소재를 인용하여 부정적인 감정을 나타냈다.

이제현(1287-1367)은 충선왕이 서역으로 험난한 귀양길을 출발할 때, 북경에서 곤륜산과 황하 상류를 상상하며 눈물지었다. 사실상 최치원과 이규보 모두 곤륜산 같은 높은 산악과 황하 상류를 직접 본 적은 없고, 이 제현이 처음 본 것이다. 이제현은 도중에 곤륜산처럼 높은 산악과 황하 상류를 직접 보고 황하가 중원지역의 넓은 전답에 물을 대주어 이롭다는 것을 알지만 귀양길 고생 때문에 긴장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23) 그러나 월지국 사신을 만났을 때는 오히려 원나라 황제가 순임금처럼 훌륭하여 천하를 통일하였다고 거짓 칭찬을 하였다.24) 이제현은 이규보처럼 곤륜산 과 황하 발원지의 이미지를 소극적이고 부정적으로 묘사하였다.

이곡(1298-1351)은 이제현의 문인으로서 1332년 원나라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국사원(國史院) 검열관을 지내며 원나라 문인들과 사귀었다. 이 때 고려와 원나라의 관계는 겉으로나마 평화로웠다. 그래서 그는 원나라 사람들에게 원나라의 태평성세와 고려의 평화를 곤륜신화에서 신선이 노

22) 이규보,『동국리상국전집』,卷七,「次韻李侍郞復見和」 : “玉非抵鵲柰投輕?” 北齊,劉 晝,『新論,辯施』:“昆山之下,以玉抵烏,……所豐故也.” 卷十一,「陳君復和,次韻贈 之」 : “意欲使我酣歌痛飮,不作酸寒士,謂言:人生戚戚不展眉,安用男兒爲東流之水 不須悲? 直到崑崙頂上,倒瀉河浪囚馮夷,作詩何用蟲吟苦?” 卷十三,「李進士大成邀 飮,席上走筆贈之.」 : “答云:近者王城亂,白日九街殷血新.我亦僅免崑岡焚,離流艱厄 難勝陳.”

23) 이제현,『익재난고』,卷二,「在上都,奉呈柳政丞(淸臣)、吳贊成(潛)」︰“一封譴勅下天 門,……三韓主父皇外孫,一去萬里投西蕃。界天雪嶺逋崑崙,魍魎晝嘯黃河源。廻頭却望 楡塞垣,痛哭淚盡雙眸昏。” 卷一,「黃河」︰“黃河西流自崑崙。漢使乘槎昔窮源。崑崙山高幾 千仞。天河倒瀉流渾渾。……有如楚漢戰垓下。千兵萬馬驅平原。橫流往往不可止。泛溢田野愁 黎元。……今日沙頭欲解纜。兀坐不覺驚心魂。”

24) 이제현,『익재난고』,卷二,「道見月支使者獻馬歸國」 : “紫髥君長相戒言,倔强吾非魋 髻趙.大元盛德冠百王,一劍撥亂邦基肇.……方今欲慕舜衣垂,服遠不貴用干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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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는 현포(玄圃)와 같다고 찬양하였다.25) 찬양한 까닭은 원나라가 전쟁을 멈추었다는 것이다. 그의 바람은 전쟁과 정복이 아니고 유가의 평화로운 왕도정치에 있었다.26) 그가 가졌던 왕도정치라는 정치 이념은 사실상 원 나라 말기에 정주학을 경세학으로 인식하고 보급한 성리학을 말한다.

이곡이 중국에 있을 때 고려에 돌아가는 사람에게 고려는 바다 멀리 봉 래산 신선세계에 있고 푸른 산속에 고향이 있다고 읊었다. 또한 봄에 고 려의 고향을 회상하며 봉래산과 같다고 읊었다. 귀국한 뒤에 강원도 총석 정에서 동해바다의 푸른 산이 둘러싼 바위들을 보고 곤륜산 옥경(玉京)과 같다고 여기면서 여기가 봉래산이고 곤륜산이라고 읊었다.27) 여흥지방 객 사에 머물 때는 한강의 하얀 물결과 푸른 산이 둘러싼 마을의 한가한 풍 경을 보고 곤륜산을 상상하며, 당나라 두보(杜甫, 712-770)가 화가 왕재 (王宰)의 「곤륜방호도(崑崙方壺圖)」를 보고 왕재가 열흘 동안에 강 하나를 그리고 닷새 동안 돌 하나를 그렸다고 칭찬한 이야기를 떠올렸다.28) 그가 만년에 병들었을 때는, 고향에 돌아가서 가난하더라도 곤륜산 이상향에 사는 것처럼 집안에 꽃을 싶고 개울가에 노닐며 어부와 땔나무꾼처럼 평

25) 이곡,『가정선생문집』,卷十九,「次和州壁上韻」 : “宇內已瞻新化日,海隅猶有古淳風 .仙遊處處同玄圃,俗尙家家事梵雄.須信民躋仁壽域,太平天子厭興戎.”

26) 이곡,『가정선생문집』,卷十四,「唐太宗六駿圖」 : “君不見轍迹紛紛王道,八駿曾到崑 崙巓?又不見拔山力盡騅不逝,烏江烟月漢家天?功成自古在知己,豈在蹄高幷銳耳?”

27) 이곡,『가정선생문집』,卷十七,「送金同知奉使東歸」:“捧詔辭丹陛,三韓去路長.高堂 明晝錦,寶刹散天香.滄海浮仙境,靑山出故鄕.” 卷二十,「次金山寺壁上韻」:“春到靑丘 日欲中,勝遊要及未農功.爲尋海上蓬萊境,因訪人間覩史宮.” 卷十四,「題叢石亭次 韻」:“海邊何處無靑峯,到此洗盡塵緣濃.奇岩峭拔玉束並.……盧仝浪欲蓬山去,太白誤 擬瑤臺逢.忽驚仙境已自致.”

28) 이곡,『가정선생문집』,卷十七,「驪興客舍次韻」 : “如將此景入毫端.文要蘇黃字要顔 .……白波靑嶂閭閻裏.赤岸銀河伯仲間.” 杜甫,「戲題王宰畫山水圖歌」 : “十日畵一水,

五日畵一石.……壯哉崑崙方壺圖,掛君高堂之素壁.巴陵洞庭日本東,赤岸水與銀河通,

中有雲氣隨飛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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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한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꿈꾸었다.29)

이와 같이 그는 고국의 고향이 봉래산 신선세계에 있다고 여겼지만, 이 상향을 묘사할 때에는 봉래산과 곤륜산을 구분하지 않았다. 만년에 고향 에 돌아가서 은거하고 싶은 마음을 읊으면서 신선세계를 묘사하였지만, 실제로는 성리학자로서 고향에서 은일하는 모습을 나타냈다. 그의 유선 문학에는 당송시기의 이상향 이미지와 원나라의 성리학 이미지 둘이 함 께 담겨있다. 성리학적 은일은 최치원을 비롯하여 이규보와 이제현의 이 상향 묘사와는 다른 사상적 배경을 나타낸 것이다. 사실성 고려와 조선의 유선문학은 이곡부터 성리학의 은일사상을 담고 있었다. 유선문학은 이 상향을 동경하며 속세를 초탈하고 정치적으로 벗어나는 탈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는데, 은일문학은 현실세계에서 평민과 어울리며 평온한 삶을 보 내려는 현실적 의지가 담겨있다.

이색(1328-1396)은 『주역』의 곤괘를 보고나서 두보의 「희제왕재화산 수도가(戲題王宰畫山水圖歌)」에 따라 「산수도가(山水圖歌)」를 지었다. 중 국의 지형이 서고동저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곤륜산에서 내려오는 황하가 넓은 중원지역을 감싸고 만물을 길러준다고 묘사하였다. 뒤를 이어 아이 들은 불로약을 구하려고 동쪽 바다에 들어가고 고인(高人)은 속세를 넘어 혼자 우뚝 서있다고 묘사하였다.30) 이색이 중국 지형을 이해한 지리학 지 식은 당나라 일행(一行, 683-727)이 당나라 판도의 남북경계선을 설정하

29) 이곡,『가정선생문집』,卷十七,「病中述懷」 : “無田亦可有何求?家在江村事事幽.……

園花似火疑燒鶴,溪水如藍欲染鷗.除却漁樵更無伴,肯重廻首五城樓.” 五城樓는 당나 라 시인 한굉(韓翃)이 읊었으며 곤륜산에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韓翃, 「同題仙遊 觀」:“仙台初見五城樓,風物淒淒宿雨收.”

30) 이색,『목은시고』,卷三,「山水圖歌」 : “我初讀『易』地勢坤,山自北來趨海門.黃河遠自 崑崙頭,屈折奔逸何沄沄.中原南北幾千里,興雨潤物承乾元.山童兩兩吹短笛,採藥溟 濛向深谷.晦明變化自朝暮,高人超然立於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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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화이(華夷)를 구분한 소위 양계론(兩戒論)이다.31) 일행의 「산하양계도」

를 보면 곤륜산과 민산에서 발원한 산맥 두 줄기가 X 형태를, 황하와 양 자강이 X 형태를 이루면서 동쪽으로 흘러가는 그림을 그려놓았다.32) 일행 의 양계론은 한당시기의 정치적 화이론을 반영하였다. 이색의 화이론은 일행의 양계론과 주자가 주장한 화이의 변별과 방어를 반영하였다.

그런데 “고인이 속세를 넘어 혼자 우뚝 서있다.(高人超然立於獨)”는 구 절은 송나라 곽인(郭印)이 내단을 수련하여 “속세를 초탈하여 우뚝하게 서고(超然立於獨)” 나중에 곤륜산에 올라가 신선이 되었다는 시를 인용한 것이다.33) 이색은 봉래산이나 곤륜산 같은 외부의 신선세계를 꿈꾸지 않 고 오히려 곽인처럼 마음과 몸을 수련하여 깨달음을 얻었어도 속세에서 사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지리산 아래에 있는 청학동을 찾아갔 다. 지리산을 곤륜산과 도리천(忉利天)에 비유하고 내려오면서 노래를 불 렀다고 한다.34) 그는 봉래산과 곤륜산 같은 이상향을 상상하더라도 청학

31) 『新唐書』,卷三十一,「天文志」,第二十一:“初,貞觀中,淳風撰『法象志』,因『漢書』

十二次度數,始以唐之州縣配焉.而一行以爲天下山河之象存乎兩戒.北戒自三危,積石,

負終南地絡之陰,東及太華,逾河,並雷首,厎柱,王屋,太行,北抵常山之右,乃東循塞 坦,至濊貊,朝鮮,是謂北紀,所以限戎狄也;南戒自岷山,嶓塚,負地絡之陽,東及太 華,連益山,熊耳,外方,桐柏,自上洛南逾江,漢,攜武當,荊山,至於衡陽,乃東循嶺 徼,達東甌,閩中,是謂南紀,所以限蠻夷也.故『星傳』謂北戒爲‘胡門’,南戒爲‘越門’.” 唐 曉峰,「兩幅宋代“一行山河圖”及僧一行的地理觀念」,『自然科學史硏究』,제17권 제4 기,1998.

32) 『宋本歷代地理指掌圖』(宋刻本,日本,東洋文庫),上海,上海古籍出版社,1989.「唐一 行山河兩戒圖」:“河源,自北紀之首,……分而東流,與徑,渭,濟瀆相爲表裏,謂之北河 .江源,自南紀之首,……分而東流,與漢水,淮瀆相爲表裏,謂之南河.”

33) 곽인은 도교의 내단을 수련한 도인을 묘사하였고, 당나라 유종원(柳宗元, 773-819)은 참선에 정진하는 모습을 “어부 혼자 추운 강물에 내리는 눈을 낚는 풍경(獨釣寒江雪)”

에 비유한 것과 다르다. 그러나 외부의 신선세계를 동경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수련 하는 것은 동일한 이미지라고 볼 수 있다. 郭印,『郭印詩集』,卷六,「又用前韻」:“道人 息以踵,氣馬自調伏.神爐造化馳,不畏寒暑酷.雖同一世塵,超然立於獨.飛泉上崑山,

赫日升暘谷.” 柳宗元,「江雪」:“千山鳥飛絶,萬徑人蹤滅.孤舟蓑笠翁,獨釣寒江雪.”

34) 이색,『목은시고』,卷八,「山高歌」 : “山高步至頂,崑崙猶可尋.靑石長梯上忉利,縹渺 飛步天沈沈.歸來東海有智異,峯頭夏冷氷垂陰.……我歌山高何心哉,只爲素飧衰老侵 .……宇宙悠悠自今古,山高歌闋誰知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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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라는 현실의 복지를 찾아 은일하려고 의도하였다. 이것은 이상향의 신선세계로 승천하는 것이 아니고 현실세계에서 은거하려는 성리학의 은 일사상이다.

청학동을 찾았던 연유를 살펴보면, 삼신산이 한국에 있다는 전설은 일 찍부터 유행하였다. 『지지(地誌)』에는 지리산에 태을신이 머물고 많은 신 선이 모인다고 전하였다. 신라 스님 의상(625-702)은 두류산에 일만 명 문수보살이 살고 속세의 민원을 들어준다고 설명하였다.35) 신라와 고려의 일반 문인들은 특히 두보(杜甫, 712-770) “방장산이 삼한에 있고 곤륜산 이 중국 서쪽에 있다.”36)는 말을 믿고 금강산이 봉래산, 지리산이 방장산, 한라산이 영주산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고려말기에는 두광정의 『동천복 지기(洞天福地記)』의 영향을 받아 동천복지를 직접 찾아 나섰다.

고려말기의 많은 문인들은 지리산 아래에 청학동이 있다고 여겼다. 현 재 연구에 따르면 청학동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은 이인로(1152-1220)의

「유지리산(遊智異山)」이라고 한다.37) 이인로는 지리산이 백두산에서 내려 왔고 지리산이 중국의 회계산을 닮았다고 한다. 청학동에는 청학이 서식 하여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38) 조선시기 문인들은 청학동이 청나라 강희 황제도 알고 있을 만큼 중국에도 알려졌다고 자랑하였다.39) 청학동은 봉 래산과 곤륜산에 관한 신선세계의 이미지가 구현된 자연세계이다. 다시

35)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智異山辨證說」:“新羅釋義相『靑丘祕記』:‘頭流山,一萬 文殊住世,其下歲豐民愿.’ 『地誌』:‘以知異爲太乙所居,群仙所會.’”

36) 杜甫,「奉贈太常張卿二十韻」 : “方丈三韓外,昆侖萬國西.”

37) 문동규,「지리산 청학동 : 관념적 실재와 귀향적 이상향」,『哲學論叢』, 제85집, 2016.

김태준,「靑鶴洞傳說과 神仙思想」,『明大 論文集』,제9집,1976.

38) 이인로,『파한집』,「遊智異山」 : “頭流山逈暮雲低,萬壑千巖似會稽.策杖欲尋靑鶴洞,

隔林空聽白猿啼.……古老相傳云:‘其間有靑鶴洞,路甚狹纔通人行,……唯靑鶴棲息其 中,故以名焉.’”

39)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鶴洞辨證說」 : “靑鶴洞,不過東方一小洞壑,而有名於天 下.如淸聖祖『淵鑑類函』載:‘朝鮮智異山中,有靑鶴洞.’” 『淵鑑類函』,卷四百二十,「鶴 一」:“朝鮮知(智)異山中,有靑鶴洞,其境虛曠,四隅皆良田沃壤,宜播殖,惟靑鶴棲息 其中,故以爲名.” 이 글은 이인로의 글을 옮겨놓은 것이며, 동천복지 항목에 넣지 않고 학이 산다고 채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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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 고려말기 문인들은 드디어 동경하였던 유선문학의 이상향을 기탁할 수 있는 청학동을 찾아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청학동이 도화원도 아니 고 선비들이 은일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조선후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전란을 피하려고 몇몇 비기(秘記)에서 말 하는 산속의 좋은 길지(吉地)에 들어가서 거주하는 바람이 일어났다. 그 러나 대체로 거주에 실패하고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대표적 비기는 남사 고의 『십승길지(十勝吉地)』와 한세량(韓世良, 1563-1723)의 『비기』라고 한다. 따라서 개명한 지식인들은 이러한 폐해를 줄이기 위하여 많은 길지 의 실제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공개하였다. 이규경(1788-?)은 합리 적인 관점에서 길지의 조건으로 지리, 생업, 풍경 셋을 제시하였다.40) 조 선후기의 길지 은거는 고려말기의 청학동 찾기와 서로 비슷하지만, 고려 말기에는 유선문학과 은일문학이, 조선후기에는 피난이 동기였다는 것이 다르다. 따라서 조선 말기에는 전란과 사회혼란 때문에 유선문학이 쇠퇴 하였지만 복지를 찾는 바람이 크게 유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Ⅳ. 황하 발원의 곤륜산과 백두산의 지리학 및 분야 구분

황하 발원지에 관하여 현재도 논의가 끝나지 않고 여러 주장이 있었지 만 1985년 현지 답사하여 마곡(瑪曲)이 발원지라고 확정하였다.41) 곤륜산 에 관한 중국고대의 기록은 대체로 『상서,우공(禹貢)』, 『이아(爾雅)』, 『사 기』, 『한서,장건전』, 『회남자』, 『산해경』 등이 있는데 통일된 주장이 없었

40) 李圭景,『五洲衍文長箋散稿』,地理類,「樂土可作菟裘辨證說」:“南格庵師古,過小白 山兜率峯,必下馬拜贊曰:‘活人山’.撰《祕記》曰:‘大,小白兩山爲五千歲內兵火不入之地’

云.故世之俗人,必以大小白爲三災不及之福地,必欲依歸,然入居者,每每敗歸,而前 轍已覆,後轍繼至.……歷述所見聞者,以絶俗客之妄言某某處,誑誘愚人之志耳.……凡 擇里卜居,以地理爲上,生理次之,景槪又次之,三者缺其一,非樂土也.”

41) 김보경, 『崑崙神話硏究』,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 2005. 7-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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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42) 대체로 황하 발원지에 관하여 곤륜산 또는 우전(于闐)이라는 두 가 지 주장이 있었다. 곽박(郭璞, 276-324)은 둘을 종합하여 황하가 곤륜산 에서 발원하여 사막의 지하로 스며들었다가 우전국에서 여러 갈래로 흘 러나와 염택을 지나 황하가 된다고 해석하였다.

발원지를 찾는 실지 답사는 원나라 세조 연간(1280)에 사람을 보내 찾 았는데, 발원지가 성숙해(星宿海) 사막이라고 보고하였다.43) 청나라 강희 황제는 1719년에 사람을 보내 발원지를 찾았고, 1782년에는 성숙해의 지 도를 그려오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명청시기까지 많은 학자들이 곽박의 견해에 동의하였다.44) 중국에서 한나라 이후에 황하 발원지를 실지 답사 하여 찾지 못한 큰 이유는 현재 청해성 지역이 중국의 판도 안에 들어있 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원나라와 청나라 시기에는 판도 안에 있었기에 실지 답사를 할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은 신라시기와 고려시기에 백두산을 답사하지 못하였고, 조선시기에 실지를 답사하고 많은 기록을 남긴 경우 와 비슷하다.

과거에 한국 지식인들은 대체로 도연명(陶淵明, 352, 365-427)의 「독 산해경(讀山海經)」 13수에 근거하여 곤륜신화뿐만 아니라 황하의 발원지 를 이해하였다.45) 곤륜산과 황하 발원지에 관한 지리학 지식은 백두산을 지리학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청나라 강희황제와 건륭황 제가 사람을 보내 발원지를 찾은 뒤에는, 이익(李瀷)과 이규경 등이 청나 라의 새로운 문헌에 근거하여 곤륜산과 황하 발원지를 이해하였다.46) 또 한 백두산의 정계비 문제가 일어난 뒤에는 백두산에 관한 주장이 단군신

42) 萬斯同,「昆侖河源考」,『四庫全書』.청나라 雍正三年(1725)에 편찬된 『行水金鑒』 175卷 은 중국의 강물과 운하 등에 관한 역대의 자료를 모두 수집하였다.

43) 『元史』,卷65-66,地理志,第十七上下.

44) 王鏊(1450-1524),「河源辨」,『山西通志』(雍正十二年),卷二百十六:“河有兩源,一出 于闐,一出崑崙之墟.……郭璞云 : ‘河出崑崙,潛行地下,至于闐國,復分流岐出,合而 東注鹽澤,復行積石,爲中國河.’此定論也.”

45) 이규보,「山海經疑詰」. 신흠,『상촌선생집』,卷二十一,「讀山海經」.

46) 이익,『성호사설』,卷一,「星宿海」. 이규경,『오주연문장전산고』,「河源星宿海辨證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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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비롯하여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기억을 각성하는 계기로 삼아 한국 고대사를 재구성하였다.

조선후기에는 백두산과 압록강 명칭을 한국어에 근거하여 뜻을 재확인 하였다. 압록강의 한국어 명칭이 마자수(馬訾水)이며 마자가 미리이고 용 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백두산의 한국어 명칭 불함산이 밝은 하얀 뜻이라 고 보았다. 백두산의 중요한 지위를 이해한 것과 동시에 압록강의 지리적 지위도 새롭게 보았다. 중국의 회수 이북의 수계에는 황하가 있고 다른 강(江)이 없는데 오직 압록강이 있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특히 주자(朱熹 , 1130-1200)가 큰물 셋이 있는데 황하, 양자강, 압록강이라고 말한 것에 주목하여 자긍심도 커졌다.47) 백두산과 압록강 및 동해 바다에 관한 지리 학 지식이 확대되면서 동북아의 지리에 대한 자신감도 커졌다. 이러한 지 리학 지식은 한국인 입장에서 동북아시아의 지리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체계를 이루었다.

백두산 기원에 관한 주장은 크게 셋이 있었다. 첫째는 곤륜산에서 산맥 셋이 나뉘어 중국에 들어왔고, 북쪽 줄기가 연산산맥을 이루고 나머지 기 운이 백두산을 이루어 한반도의 여러 산맥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48) 이 것은 역대 중국학자들이 많이 알고 있던 지리학 지식이었다. 둘째는 당 나라 양균송(楊筠松, 834-900)의 저작이라고 전해오는 『감용경(撼龍經 ), 천옥경(天玉經)』의 견해이다. 양균송은 산맥의 기원을 곤륜산이 아니고 수미산이라고 여기고 수미산에서 동서남북 네 줄기 산맥이 뻗어 나와 4개

47) 金景善,『燕轅直指』,卷一,十一月二十一日,「鴨綠江記」︰“江在義州城西五里,不甚 深闊。『唐書』︰‘高麗馬訾水,出靺鞨之白山,色如鴨頭,故號鴨綠江。所謂白山者,卽長白 山也。’ 『山海經』稱不咸山,我國稱白頭山。白頭山爲諸江發源之祖,其西南流者爲鴨綠。『皇 輿考』云︰‘天下有三大水,黃河、長江、鴨綠江,是也。’ 陳霆,『兩山叢談』云︰‘自淮以北,

凡水皆宗大河,未有以江名者。而北之在高麗,曰鴨綠江。’(出『燕記』)” 黃胤錫,『頤齋遺 藁』,卷二十五,「華音方言字義解」︰“鴨綠江,舊名馬訾水,又名龍灣。蓋方言呼龍爲彌 里,與馬訾聲近故轉。” 明代,『人子須知』︰“朱子曰大水三處黃河,長江,鴨綠。”

48)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智異山辨證說」:“天下有三大幹龍,皆始於崑崙,分派三 條,以入中國.北條出河海爲冀,燕之山.餘氣爲白頭山,流爲朝鮮諸山.而白頭,卽『山海 經』所謂不咸山,作一國華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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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이루는데, 서쪽과 북쪽 2개 줄기가 끝내 동쪽으로 흘러 삼한(三韓 )을 거쳐 바다로 들어갔고, 남쪽 줄기만이 중국으로 흘러들어서 황하와 양자강을 이루었다고 보았다.49) 다시 말해 수미산의 서쪽과 북쪽 두 줄기 는 삼한으로 왔는데 중국의 남쪽 줄기와 상관없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비 록 백두산을 말하지 않았지만 삼한의 산맥은 처음부터 중국과 기원이 다 르다고 보았다. 두 가지 견해 모두 지리학의 객관적 관점에서 중국과 한 국의 산맥이 곤륜산이나 수미산에서 흘러나왔다고 보았다.

셋째는 곤륜산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대 체로 곤륜산의 북쪽 산맥이 황하와 압록강 사이를 지나와서 요해(遼海)에 서 끝났으며, 백두산에서 산맥이 일어나서 지리산까지 내려왔다고 보는 도선(道詵)국사(827-898)의 견해가 있고, 남사고(1509-1571)부터는 백 두대간이 조선을 거쳐 일본열도와 류큐열도까지 퍼졌다는 견해가 있다.50) 도선국사와 남사고는 한반도에 살고 있는 현지인 관점에서 백두산과 백 두대간을 종합적으로 인식하였다. 모두 곤륜산 중심의 중국 지리학에 의 지하지 않고 독자적인 백두대간을 인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사고는 한반도 남쪽을 바라보며 일본열도와 류큐열도까지 백두산에 서 흘러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견해는 임진왜란이 끝날 즈음(1598) 에 보복전쟁 계획에 사용되었다. 대마도를 거쳐 일기도(一歧島)와 평호도

49) 楊筠松,『撼龍經』,上卷:“須獼山是天地骨,……四肢分出四世界,南北西東爲四派.西 北崆峒數萬程,東入三韓爲杳冥.惟有南龍入中國,……黃河九曲爲大腸,川江屈曲爲膀 胱.分枝劈脈縱橫去,氣血鉤連逢水住.大爲都邑帝王州.” 『天玉經,外編』:“須彌山是天地 骨,中鎭天地爲巨物.如人背脊與項梁,生出四肢龍突死.四肢分出四世界,南北東西爲四 派,西北峻恫數萬程,東入三韓隔香累.惟有南龍入中國,胎宗孕祖來廳特.黃河九曲爲大 腸,川江屈曲爲膀膿.”

50) 이수광,『지봉류설』,卷二,「山」︰“我國諸山,皆發源於白頭山,自磨天、鐵嶺而南,爲 金剛、五臺、太白,至智異而盡焉。南師古常言︰‘白頭山脈,不應到此而止,當是隱伏海 中,爲日本諸島’云。其說有理,今濟州漢挐,亦其一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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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戶島)를 차례로 지나면 일본에 상륙할 수 있다고 보았다.51) 조선의 보 복전쟁 계획은 일본이 조선과 연합하여 중국을 공격하자는 임진왜란의 프레임을 부정한 것이며 당시 조선이 국제정세를 반영한 주도적인 전략 이다. 뒤에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들도 남사고 주장에 근거하여 후지산이 백두산의 자손이라고 이해하였다.52) 조선후기의 몇몇 학자들은 백두산의 서쪽을 바라보며 북경의 진산이 백두산에서 흘러나온 것이라고 믿었다.

여진족은 한 발 더 나아가서 청나라 강희황제를 비롯하여 몇몇 중국학자 들도 백두산에서 산맥이 흘러내려 요동반도를 거쳐 북경의 진산이 되고 산동에 있는 태산이 되었다고 보았다.

주목할 것은 태백산과 동해 바다를 새롭게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구봉 서(1596-1644)는 백두산 정맥이 태백산에 맺혀졌고 태백산에서 동해 바 다를 바라보며 동해 바다가 태백산의 궤상이라고 보았다. 여기에는 동해 바다가 조선왕조의 발상지라고 보는 견해도 포함되었다.53) 허목(1595- 1682)은 태백산이 옛날 신라왕조의 북악(北嶽)이고 진번(眞番)의 땅이며 앞에는 6-7백리 넓은 동해 바다가 있고 영실(營室) 별자리에 해당한다고 기록하였다.54) 사실상 태백산은 신라의 역사기억이며, 신라 입장에서 백 두대간과 동해 바다를 이해한 것이다.

이들은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내려가는 중간에 있는 태백산이 동해 바 다를 관장하는 주산이라고 보았다. 신라의 관점에서 태백산을 중심으로 동해 바다와 울릉도 및 우산도를 인식하였다. 동해 바다와 울릉도에 관한

51) 『조선실록』,宣祖31年12月21日 : “苟能選浙兵七八千,與我舟師,協勢進駐,一擧渡 海,掩其無備,賊之驚潰也必矣,所謂疾雷,不及掩耳者也.……議者或以爲,諸島之 賊,必將來救,是則有說焉.對馬之距一歧,幾五百里,自一歧至平戶島,又一百三十 里,彼以快船飛報,而援兵出來,須俟便風.若能疾攻,我可以得志矣.”

52) 趙曮,『海槎日記』(四),甲申二月十二日甲午 : “今者富士山,亦白其頭,頂上又有澤 云,其或是白頭山之兒孫耶.”

53) 『조선실록』,仁祖十八年(1640)七月十五日 : “白頭山正脈結於太白,以東海爲案,黃池 乃爲發福興王之大地,國家王業本由於此.”

54) 許穆,『記言』,제28권,하편,「太白山記」:“太白山,新羅北嶽.……眞番之域.……東極 滄海,積翠六七百里.……孟春日在營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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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 이해는 그동안 산맥에 한정되었던 관점을 뛰어넘어 바다와 섬까 지 이해하는 새로운 견해이다. 종합하면 지리학 관점에서 남사고는 남해 바다와 일본열도 및 류큐열도를 이해하였고 허목과 구봉서는 동해 바다 와 울릉도를 이해하였다.

서양의 「만국전도」와 예수회 알레니(Giulio Aleni, 1582-1649)의 『직 방외기(職方外紀)』 서적이 들어온 뒤에는 동해 바다를 보는 인식이 달라 졌다. 이익은 지구가 둥글고 마젤란이 확인하였다는 것도 알고, 위도와 경도, 대동양(태평양)과 대서양, 아시아와 유럽 등을 이해하고 있었다.55) 이익은 72살(1752)에 서양 지리학 지식에 근거하여 이중환에게 보낸 서 신에서 동해 바다의 형세를 다르게 인식하고 있었다. 백두산의 산맥이 흑 룡강을 따라 흘러가서 일본의 지맥이 되어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서쪽으 로 돌려서 대마도가 되었다. 대마도는 우리나라 영남지방을 지키는 관문 이다. 동해 바다는 백두산 산맥이 흘러내려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되었고 그 가운데 커다란 바다가 동해라는 것이다. 동해 바닷물은 동남쪽 태평양 에서 흘러들어온 것이라고 보았다.56) 이와 같이 이익은 서양 지리학 지식 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선국사와 남사고의 전통 지리학 지식을 대 체로 긍정하지만 배경지식이 달랐다.

전통적 지리학은 반드시 천문학의 분야와 결합시켜서 이해하였다. 중국 의 분야설은 일찍부터 발달하여 정치와 점복에 이용하였다. 산해관 동쪽

55) 이익,『성호전집』,제55권,「跋職方外紀」:“今按艾儒略『職方外紀』云大西洋,極大無際 涯.……又有墨瓦蘭(마젤란)者,復從東洋,達於中國大地,於是一周.……自歐羅巴之西 福島,至中國之東亞泥俺峽,恰爲一百八十度,則實四萬五千里而地之半周也.……亞細 亞,實爲天下第一大州.……又按「萬國全圖」,自中國西藩,距歐羅巴最東,不過六十餘 度.”

56) 이익,『성호전집』,제33권,「答族孫輝祖(李重煥)」(壬申, 1752):“白頭之水,北入黑龍 江,黑龍外亦甚曠遠.日本地脈,恐根連於此.其地逶迤南下復西,抱爲對馬諸島,與我 國嶺南爲捍門.其間便成一大湖,潮汐者最盛於赤道下.隨氣西走,湧如山岳.今中國之 潮,不過旁勢推蕩,故曰:‘潮自東南來.’嶺東之水,障蔽東南,潮安得至哉? 凡水在地 面,四到涵泳,又安得倒懸長流? 若然,其源之渴涸已久.君曾過東北海,其有一分流動 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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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은 항성의 12개 별자리 가운데 석목(析木) 별자리에 해당하며 석목에 는 기(箕)와 미(尾) 2개 항성이 있다. 고려시기 이승휴(1224-1300)는 『제 왕운기』에서 “요동지역부터는 중국과 다른 별도의 천하이며, 따라서 북극 성의 삼원(三垣)부터 중국과 나누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57) 이것은 동북 아시아 하늘의 분야를 중국과 분리시켜 독자적인 세계를 이해한 견해이 다.

하늘의 분야를 중국과 분리시키지 않았을 경우에는 석목 별자리에 무슨 징조가 일어나면 중국 왕조가 간섭하는 빌미로 삼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 어 당나라 고종 총장(總章) 원년 4월에 필숙(畢宿) 별자리의 5개 별에 혜 성이 나타났다. 당시 허경종(許敬宗, 592-672)은 동북쪽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으니까 군대를 일으켜서 고구려를 정벌하자고 건의하였다. 고종 황제는 황제의 잘못을 작은 번국에게 전가시킬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58) 이와 같이 분야는 정치적 간섭이나 침략을 일으키는 이유가 되었다. 따라 서 이승휴가 항성의 별자리를 중국과 상관없이 분리시키자는 주장은 타 당성을 갖고 있었다.

분야는 하늘에 지내는 제사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고려시기에는 고려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하고 명나라에 제후 국을 자처한 뒤부터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영조임금에 이르러 영성(靈星)과 노인성(老人星)에 지내는 제사를 회복시켰다. 제후로서 제 후국 분야에 있는 별자리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유를 들었 다. 또한 영성은 옛날부터 지내왔던 유래가 있고, 노인성은 기미(箕尾)의 남쪽에 있고 제주도에서 보이니까 조선의 분야에 해당하므로 제사를 지

57) 이승휴, 『動安居士集』,「與晉陽書記鄭玿書」:“遼東別有一乾坤(上은 오자).” 『帝王韻 紀』,卷下,「東國君王開國年代(地理記幷序)」:“遼東別有一乾坤,斗與中朝區以分.”

58) 『舊唐書』,卷三十六,「天文下」,「災異」:“總章元年(668)四月,彗見五車,上避正殿,

減膳,令內外五品已上上封事,極言得失.許敬宗曰:‘星雖孛而光芒小,此非國眚,不足 上勞聖慮,請禦正殿,復常膳.’不從.敬宗又進曰:‘星孛於東北,王師問罪,高麗將滅之 征.’帝曰:‘我爲萬國主,豈移過於小蕃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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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야한다고 주장하고 제사를 회복시켰다.59)

그러나 서양의 지구설이 도입된 뒤에는 분야설을 아예 부정하는 주장도 나왔다. 서유본(1762-1822)은 남사고가 지었다는 『동국분야기(東國分野 記)』가 좁은 한반도 지역을 잘게 나누어 하늘의 분야에 대응시켰는데, 재 이(災異)의 점복이 실제상황에서 맞지 않고, 더구나 둥근 지구설에서 보 면 지역에 따라 28숙(宿)의 분야를 정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중국이나 조선의 분야라고 주장할 수 없다고 분야설을 반대하였다.60) 위와 같이 서 양 지리학이 도입된 뒤에는 중국과 조선의 전통적 지리학 지식과 천문학 지식은 선택적으로 긍정되었지만 대체로 부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Ⅴ.도선국사의 수모목간 형세론과 수근목간 덕운론

고려시기의 『삼국유사』는 옛날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단군의 조선 개 국신화와 태백산을 기록하였다. 조선의 발상지로서 태백산은 민족의 정 체성과 정치적 정통성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삼국시기 문헌이 남아있 지 않아 태백산의 위치를 기록한 문헌들이 많지 않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백두산을 판도 안에 두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통일신라와

59) 정조,『홍재전서』,卷四十五,「禮曹判書閔鍾顯請祀靈星壽星疏批」 : “靈星,在角宿 北,距北極八十六度.老人星,在弧矢南,距南極三十八度.自周以來,祭於仲秋之月.至 漢,命縣邑,各置靈星祠.唐宋仍之.……我朝之幷祭二星者,諸侯得祭邦內分野星辰,而 漢挐山在我邦,常見老人星.至於祭靈星,天下通行之制也.祀令儀節,皆載於『五禮儀』

.……壽星秋分之見,實在箕尾之南,政當我東之分野也乎!予以重農愛日之心,思擧二 星之祀典,以復國初之令憲.上自周頌絲衣之詩,下訖歷代史志.”

60) 徐有本,『左蘓山人文集』,卷三,「與金生泳書」 : “『東國分野記』,依約謄去,世傳此是南 師古所作.……至於東國,則地與燕境相接,故倂屬之箕尾分.今又就東土彈丸之地,割裂 分繫於二十八宿,曰某州直某宿,某邑當某宿.是眞井蛙之窺天也.其說疑若鑿空杜撰,不 可措諸實用.然地球一點,在天界大圜中,不翅礨空之於大澤.……故自中國而視之,則有 中國之分野.自東國而視之,則亦有東國之分野,各隨其方位界限而各占其災祥休咎,亦 其理之不可誣者也.南師古災祥之占,百不一爽,世稱我東之康節,而其術專以星象推 測,則所著星野之記,必有自然之法象,而決非臆撰無稽之言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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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기에는 백두산을 판도 안에 두지 못하였기 때문에 임시로 판도 안 에 있는 몇몇 높은 산을 태백산에 비정하였는데, 예를 들어 묘향산이나 구월산에 백두산의 역사기억과 이미지 일부를 기탁하였다. 백두산 근처 에 살았던 여진족과 만주족이 백두산을 발상지로 여겼던 기록에서는 태 백산이 백두산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시기에 시간적으로 가까운 백두산의 역사기억은 고구려의 고토라는 것이다. 백두산은 태백 산의 역사기억과 고구려 고토의 역사기억 둘을 가지게 되었다.

백두산과 고구려 고토의 고려시기 역사기억을 보면, 고려 태조 왕건은 고토 회복을 국시로 삼았다. 서희는 993년에 거란 장군에게 강동 6주가 고구려의 땅이라고 주장하여 고토를 회복하였다. 윤관(尹瓘)은 1107년 선 춘령에 경계비를 세워 두만강 이북의 영토 곧 고구려 판도를 고려의 고토 라고 주장하였다. 도선국사의 수모목간(水母木幹) 형세론 역시 고구려 고 토의 회복 의지를 반영하였다. 고토 회복은 조선시기 학자들도 중시한 국 가적 과제였다.61) 이와 같이 고구려 고토의 회복 의지는 백두산의 역사기 억을 반영하였던 것이다.

백두산이 고려시기에 중요한 역사기억이 되었던 계기는 도선국사와 고 려 태조 왕건 부자에 얽힌 이야기다. 도선(道詵)국사(827-898)는 당나라 일행(一行, 683-727)에게 지리법을 배우고 돌아와서, 백두산에 올라갔다 가 송악산에 이르렀고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고려사,고려세 계(高麗史,高麗世系』에서 송악산의 지리적 위치에서 보면 24방위 가운데 임방(壬方, 정북에서 서쪽으로 15도 내외)의 백두산에서 내려왔고, 태연 수(太衍數)의 납읍(納音)을 보면 평양 대동강이 수모(水母)이고 송악산의

61) 이익,『성호사설』,제2권,「尹瓘碑」:“尹瓘碑,在先春嶺,豆滿江北七百里.……瓘置六 城,設公嶮鎭,……有古基,卽先春嶺之東南,白頭山之東北.……瓘使兵馬鈐轄林彦記其 事云:‘其地東至于大海,西北介于蓋馬山,南接于長定二州,山川秀麗,土地膏腴,本 高句麗之所有.其古碑遺迹尙有存.’云云.……然則不獨尹碑,尹之前,已有高勾麗之所勒 銘耳.”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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