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기의 『삼국유사』는 옛날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단군의 조선 개 국신화와 태백산을 기록하였다. 조선의 발상지로서 태백산은 민족의 정 체성과 정치적 정통성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삼국시기 문헌이 남아있 지 않아 태백산의 위치를 기록한 문헌들이 많지 않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백두산을 판도 안에 두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통일신라와
59) 정조,『홍재전서』,卷四十五,「禮曹判書閔鍾顯請祀靈星壽星疏批」 : “靈星,在角宿 北,距北極八十六度.老人星,在弧矢南,距南極三十八度.自周以來,祭於仲秋之月.至 漢,命縣邑,各置靈星祠.唐宋仍之.……我朝之幷祭二星者,諸侯得祭邦內分野星辰,而 漢挐山在我邦,常見老人星.至於祭靈星,天下通行之制也.祀令儀節,皆載於『五禮儀』
.……壽星秋分之見,實在箕尾之南,政當我東之分野也乎!予以重農愛日之心,思擧二 星之祀典,以復國初之令憲.上自周頌絲衣之詩,下訖歷代史志.”
60) 徐有本,『左蘓山人文集』,卷三,「與金生泳書」 : “『東國分野記』,依約謄去,世傳此是南 師古所作.……至於東國,則地與燕境相接,故倂屬之箕尾分.今又就東土彈丸之地,割裂 分繫於二十八宿,曰某州直某宿,某邑當某宿.是眞井蛙之窺天也.其說疑若鑿空杜撰,不 可措諸實用.然地球一點,在天界大圜中,不翅礨空之於大澤.……故自中國而視之,則有 中國之分野.自東國而視之,則亦有東國之分野,各隨其方位界限而各占其災祥休咎,亦 其理之不可誣者也.南師古災祥之占,百不一爽,世稱我東之康節,而其術專以星象推 測,則所著星野之記,必有自然之法象,而決非臆撰無稽之言也.”
고려시기에는 백두산을 판도 안에 두지 못하였기 때문에 임시로 판도 안 에 있는 몇몇 높은 산을 태백산에 비정하였는데, 예를 들어 묘향산이나 구월산에 백두산의 역사기억과 이미지 일부를 기탁하였다. 백두산 근처 에 살았던 여진족과 만주족이 백두산을 발상지로 여겼던 기록에서는 태 백산이 백두산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시기에 시간적으로 가까운 백두산의 역사기억은 고구려의 고토라는 것이다. 백두산은 태백 산의 역사기억과 고구려 고토의 역사기억 둘을 가지게 되었다.
백두산과 고구려 고토의 고려시기 역사기억을 보면, 고려 태조 왕건은 고토 회복을 국시로 삼았다. 서희는 993년에 거란 장군에게 강동 6주가 고구려의 땅이라고 주장하여 고토를 회복하였다. 윤관(尹瓘)은 1107년 선 춘령에 경계비를 세워 두만강 이북의 영토 곧 고구려 판도를 고려의 고토 라고 주장하였다. 도선국사의 수모목간(水母木幹) 형세론 역시 고구려 고 토의 회복 의지를 반영하였다. 고토 회복은 조선시기 학자들도 중시한 국 가적 과제였다.61) 이와 같이 고구려 고토의 회복 의지는 백두산의 역사기 억을 반영하였던 것이다.
백두산이 고려시기에 중요한 역사기억이 되었던 계기는 도선국사와 고 려 태조 왕건 부자에 얽힌 이야기다. 도선(道詵)국사(827-898)는 당나라 일행(一行, 683-727)에게 지리법을 배우고 돌아와서, 백두산에 올라갔다 가 송악산에 이르렀고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고려사,고려세 계(高麗史,高麗世系』에서 송악산의 지리적 위치에서 보면 24방위 가운데 임방(壬方, 정북에서 서쪽으로 15도 내외)의 백두산에서 내려왔고, 태연 수(太衍數)의 납읍(納音)을 보면 평양 대동강이 수모(水母)이고 송악산의
61) 이익,『성호사설』,제2권,「尹瓘碑」:“尹瓘碑,在先春嶺,豆滿江北七百里.……瓘置六 城,設公嶮鎭,……有古基,卽先春嶺之東南,白頭山之東北.……瓘使兵馬鈐轄林彦記其 事云:‘其地東至于大海,西北介于蓋馬山,南接于長定二州,山川秀麗,土地膏腴,本 高句麗之所有.其古碑遺迹尙有存.’云云.……然則不獨尹碑,尹之前,已有高勾麗之所勒 銘耳.”
목자(木子)라는 것이며 송악산에 마두명당(馬頭明堂)이 있다는 것이다.62) 수모가 평양 대동강의 수덕이라는 말은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에 보이 며 평양은 물이 풍부하고 고려 지맥의 근본이라고 설명하였다.63) 다시 말 해 송악산은 임방의 백두산에서 내려왔고 평양이 고려 지맥의 핵심이며, 평양 대동강과 개성 송악산의 상생관계(水生木)가 모자관계라는 것이다.
평양 대동강의 수덕이 강하기 때문에 개성 송악산의 목덕은 평양 대동강 수덕의 도움을 받아야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개성이 장풍지국(藏風之 局)이고 평양이 득수지국(得水之局)이므로 평양 천도와 북진정책을 반영 하였다.64) 따라서 도선국사가 백두산을 중심으로 고려 전국의 산맥을 인 식한 수모목간 형세론은 전통적 지리학의 위대한 발명이고 창조라고 높 이 평가해야한다.
충렬왕 원년(1275) 6월에 일식이 일어나자, 태사국에서 고려의 덕운(
德運)이 목위(木位)의 청색이므로 목을 상극하는 금(金)의 백색 옷을 입지 말고 청색 옷을 입자고 건의하여 실행하였다.65) 태사국의 복색 주장은 오 덕종시설(五德終始說)에 근거하여 수모목간의 덕운을 해석한 것이다. 고 려말기 우필흥의 주장과 거의 동일하고 다만 백두산의 중심의 형세론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따라서 도선국사의 비문을 보면 늦어도 통일신라 와 고려시기에는 백두산 중심의 형세론과 덕운론(德運論)이 널리 유행하 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2) 『高麗史』,「高麗世系」:“桐裏山祖師道詵,入唐,得一行地理法而還,登白頭山,至鵠嶺 .……遂與登鵠嶺,究山水之脈,上觀天文,下察時數,曰:‘此地脈,自壬方白頭山,水 母木幹來,落馬頭明堂.’”
63) 『고려사』,卷二:“癸卯二十六年(943)夏四月,御內殿,召大匡朴述希,親授「訓要」.……
其五曰:‘朕賴三韓山川陰佑,以成大業.西京,水德調順,爲我國地脈之根本,大業萬代 之地.’”
64) 최명헌, 「고려시대의 오행적 역사관」, 『한국학보』, 제4호, 1978. 29쪽. 「高麗世系」와 관 련된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65) 『高麗史節要』,卷十九,忠烈王,乙亥元年:“六月,庚子朔,日食.太史局言:‘東方,木 位,色當尙靑,而白者,金之色也.國人,自易服,多裼以白紵之衣,木制於金之象也,
請禁白色.從之.”
고려말기(1357)에 사천감 우필흥(于必興)은 도선국사의 『옥룡기(玉龍記 )』를 인용하였는데, 도선국사가 백두산부터 지리산까지 한반도 지형을 종 합하여 수근목간(水根木幹)의 형세론을 세웠고 흑색이 부모, 청색이 자식 이라고 해석하였다고 한다.66) 「고려세계」의 수모목간과 우흥필의 수근목 간을 비교하면, 전자는 송악산 위치에서 송악산과 대동강의 상생관계에 주목하였고, 후자는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전국의 산세가 수근목간(水 根木幹) 형세를 이루었다고 해석하였다. 수근목간은 오덕종시설에 근거 하여 고려의 덕운이 동방 청색이고 북방 흑색의 도움을 받아야한다고 보 았다. 따라서 수근목간은 오덕종시설 관점에서 수모목간을 쉽게 설명하 고 덕운론을 강조하였다. 중요한 것은 수모목간이 송악산과 대동강의 상 호보완관계를 설명한 것이고 수근목간은 고려 전국의 형세론이며 동시에 고려왕조의 덕운론이다. 후세에는 수근목간의 형세론과 덕운론이 더 널 리 유행하였다.
도선국사의 풍수론이 고려와 조선의 지리학을 주도하였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훈요십조」에서 도선국사의 견해를 지키라는 정치적 보장을 받았 기 때문이었다. 왕건은 도선국사에 근거하여 두 가지를 강조하였다. 첫째 는 도선국사가 정해놓은 절터를 지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불교의 택지법 이 반영되었을 것이다.67) 둘째는 평양의 수덕이 고려 지맥의 근본이라는
66) 『高麗史』,「輿服,冠服」:“恭愍王六年(1357)閏九月 司天少監于必興上書:‘『玉龍記』云:
“我國始于白頭, 終于智異, 其勢水根木幹之地.以黑爲父母, 以靑爲身.若風俗,順土則昌, 逆土則灾.”風俗者, 君臣百姓衣服冠蓋是也.今後, 文武百官, 黑衣靑笠, 僧服, 黑巾大冠, 女服黑羅, 以順土風.’從之.”
67) 밀종에서 만다라를 세울 수 있는 곳을 찾았다. 택지법은 대략 42가지였다. 『梵天擇地 法』:“謹案『大梵天王內秘密經』云:‘如來因地時五百萬生中,作持咒仙人,每遊歷諸山,
隱居淨室,常感諸梵天而來侍衛,亦有天龍八部而來現身.雖有善相,仍被魔惱法事不 成,或爲誦咒依不梵回,或爲姥陀法行,或爲曼荼羅不得其地,以此法多不成.今案經有 四十二種擇地法,堪作曼荼羅,使持咒者如意法成,不得此法者,徒消日月.’”
것이다.68) 태조의 유훈에 따라 도선국사의 수덕을 간단히 이해하면, 수덕 은 평양의 대동강이며 평양이 고려 전국의 중심지라는 것이다. 따라서 송 악산의 개성은 대동강의 평양을 중시해야한다는 것이 수모목간이다. 태 조 왕건의 유훈은 당시 고려의 판도 안에 있는 평양과 개성의 정치지리 적 상생관계를 강조한 것이다. 백두산을 산맥의 기원으로 설정한 수근목 덕을 말하지 않았지만, 「훈요십조」와 도선국사의 수모목간은 같은 내용을 공유한 것이다.
도선국사의 풍수론은 태조 왕건의 정치적 보장을 받아 널리 유행하였지 만, 그의 수준은 고려뿐만 아니라 당시 동북아시아에서도 높게 평가받았 다. 그의 주장은 고려에서 전문교육을 받은 관원들의 실증과 평가를 거치 고 동시에 중국에서 유입된 풍수지리의 지식과 기술의 도전을 견디고 주 류의 지위를 지켜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고려시기에는 국가교육기관에서 풍수지리를 가르쳤고 여러 서적도 편찬하여 풍수신앙의 국가를 만들었다
도선국사의 풍수론은 태조 왕건의 정치적 보장을 받아 널리 유행하였지 만, 그의 수준은 고려뿐만 아니라 당시 동북아시아에서도 높게 평가받았 다. 그의 주장은 고려에서 전문교육을 받은 관원들의 실증과 평가를 거치 고 동시에 중국에서 유입된 풍수지리의 지식과 기술의 도전을 견디고 주 류의 지위를 지켜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고려시기에는 국가교육기관에서 풍수지리를 가르쳤고 여러 서적도 편찬하여 풍수신앙의 국가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