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산과 서왕모가 결합된 곤륜신화는 선사시대에 탄생하여 한당시기 에 크게 유행하였고 현재까지 중국전통문화의 원형을 보존해왔다. 곤륜 신화는 중국고전신화의 중심이 되어 중국문명 근원 가운데 하나가 되었 기에, 중국학계에서는 곤륜신화를 승격시켜 ‘곤륜문화’라고 보는 주장도 나왔다.139) 곤륜신화는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각국의 각종 신화이야 기 발전에 영향을 주어 동아시아의 중요한 문화요소가 되었다. 한국문화 에서는 서쪽의 곤륜산과 서왕모 신화에 동쪽의 봉래산 신화를 더하여 하 나처럼 결합시켜서 상상하였다. 또한 백두산에 관한 지리적 형세론을 형 성하는 과정에서 곤륜산과 황하 발원지에 관한 지리학 지식의 영향을 받 았다.
한국에서는 단군의 개국신화를 비롯하여 백두산에 관한 지리학, 풍수 학, 유선(遊仙)문학 등의 상상세계와 지식에서 삼신산 신화와 함께 곤륜 신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문화에서 곤륜신화는 봉래 산 신화와 동등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곤륜신화는 일찍 동북아시아 지역 에 유입되었는데,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전설이 유입 된 시기에 함께 유입되었을 것이다.
139) 趙宗福,「論昆侖神話與昆侖文化」,『靑海社會科學』,2010.「大文化視野中的昆侖文化硏 究與文化建設」,『專家學者論昆侖』(昆侖文化硏究叢書),北京,2018.
단군신화의 태백산 이미지는 왕조의 현실적인 정치적 정통론이 강하기 때문에 동이족의 삼신산 신화를 비롯하여 서쪽 곤륜신화의 신선세계 또 는 불교 수미산의 신화와는 성격이 다르다. 따라서 한국의 유선문학은 태 백산을 대상으로 삼지 않고 활용하지도 않았다. 또한 한국문화의 도교와 신선사상에서 속세를 초탈하고 이상향에서 살려는 종교적 동경을 전개하 는 과정에서 봉래산과 곤륜신화는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한국의 유선문 학은 늦어도 최치원부터 시작되었다. 고려말기와 조선시기의 유선문학 에서는 삼신산과 곤륜산의 이상향을 상상하고 이상향의 동경을 곤륜산에 기탁하였다. 이러한 이상향 동경은 고려말기부터 청학동을 찾아내어 구 체화시켰다.
백두산에 관련하여 신라말기와 고려시기의 한반도 지리학을 대표하는 것은 도선국사의 수모목간(水母木幹) 형세론이다. 이것은 송악산의 산맥 이 백두산에서 내려왔고 평양 대동강과 개성 송악산의 지리적 상호보완 관계를 설명한 형세론이다. 그렇지만 도선국사의 형세론은 다시 백두산 에서 지리산까지 전국의 형세론으로 발전하였고 동시에 고려왕조의 덕운 이 수근목간(水根木幹)이기 때문에 복색을 청색으로 바꾸어야한다고 정 치적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조선시기 성리학자들은 오덕종시설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덕운 론을 무시하였지만, 형세론을 발전시켜서 한반도 주변의 일본열도와 바 다까지 확대시켜 동북아시아의 지리를 이해하였다. 남사고는 남해바다를 비롯하여 일본열도와 류큐열도의 지리를 이해하였다. 그런데 서양의 지 리학 지식이 도입된 뒤에 이익은 「만국전도」에 근거하여 도선국사의 수근 목간 형세론을 버리고 남북국경지역을 이해하는 목간수근의 형세론을 제 시하였다. 이와 같이 도선국사의 수모목간 형세론은 고려시기와 조선시 기의 전통지리학에서 끊임없이 개선되고 발전되었다. 따라서 도선국사의 수모목간 또는 수근목간 형세론은 한국 전통적 지리학의 커다란 발명이 며 창조라고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백두산은 한민족의 성산이며 동시에 한반도 북방지역의 여러 민족들의 발상지였다. 여진족 금나라와 만주족(생여진) 청나라 모두 백두산을 발 상지로 여기고 왕조 덕운의 근거로 삼았다. 따라서 한민족과 여진족 모두 민족과 국가의 정체성에서 백두산의 역사기억을 공유하면서도 사실상 경 쟁하였다. 금나라의 덕운은 처음에 금덕, 중간에 수덕, 나중에 토덕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여진족이 신라와 고려, 요나라, 북송과 남송을 상대하 면서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는 고구려 고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백 두산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금나라의 덕운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일부 정치가와 술수가들은 수근목간에 근거하여 고려의 복색을 청색으로 바꾸는 구체적인 실행을 주장하였다.
만주족(생여진)은 백두산을 발상지로 간주하고 숭상하였다. 청나라 강 희황제는 한족 통치를 합리화시킬 목적에서 백두산이 중국 오악의 중심 인 태산의 시원이라고 강조하고 한족 지식인들을 설득하였다. 명나라시 기 이여송은 산동반도의 봉래현과 요동반도의 여순이 열도로 연결되었다 는 것을 군사방어에 활용하려는 목적에서 주장한 것이었다. 그런데 강희 제는 더욱 확대시켜서 백두산 남쪽 줄기를 나누어 설명하여 태산의 용맥 이 백두산에서 시원하였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조선의 문인들이 백두산에 직접 올라가는 여행이 바람 불었다. 따라서 백두산에 관한 많은 시문을 짓고 남겨서 백두산 문학을 발전시켰다. 한국의 유선문학 무대를 백두산으로 옮기고 단군 신화의 역 사기억을 새롭게 편성시킨 것이다. 백두산 문학은 단군신화의 태백산과 한국 지리학 형세론을 결합하여 지정한 백두산 기억을 재구성하였다. 따 라서 서쪽 곤륜산과 동쪽 백두산이라는 대등한 지리학 인식을 갖고 있었 고, 한중 양국의 역사 병행발전 역사관을 더하여 한중 양국의 평등한 인 식을 강화시켰다. 최근 중국에서는 백두산에 많은 관심을 가진 뒤부터 유 명한 관광지가 되었고 또한 동북공정사업의 하나가 되었다. 현재 백두산 에 관하여 한국과 중국의 역사기억 편성 경쟁은 지속되고 있는데, 한국문
학사는 백두산 문학을 더욱 연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