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예술적 이슈에 대한 고고학적 분석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141-148)

키퍼의 작품에 대한 아라스의 분석은 아나크로니즘 개념이 동시대 예술가의 작 품에 어떤 분석틀을 제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본 연구는 아라스의 ‘통제된 아 나크로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고고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여기서 고고학이 란 고전주의 화가들이 고대의 단편들을 따로따로 모으거나 그 자체로 수집하여 가 능한 한 ‘전체로 조합(montage)하는 작업’과 유사하다.314) ‘아나크로니즘’ 개념에서

313) 다니엘 아라스, 류재화 역, 그림의 역사, 마로니에 북스, 2008, p. 81.

314) 다니엘 아라스, 이윤영 역, 디테일 : 가까이에서 본 미술사를 위하여, 숲, 2007, p. 50. 고전주의 의 고고학적 조립은 III 장의 2절을 참조할 것.

볼 때, 고고학적 분석을 한다는 것은 아라스의 단두대와 공포정치에 대한 상상

에서 소개된 ‘아카이즘(archaïsme)’이라는 개념과 관련된다. 일반적으로 아카이즘은

‘시원성’, ‘의고주의’를 뜻하지만, 아라스가 사용하는 아카이즘은 한 시대의 정신과 문화를 지칭한다. 특히 그는 과거를 탐색할 때 ‘이중의 아카이즘’을 고찰하고자 했 다. 이는 고대의 개념이나 예술적 이슈들을 ‘현재화’하는 키퍼의 작품 창작 방식을 따라 오랜 과거와 현재의 양극단을 왕복하는 것이다.

사라 밀스는 오늘날 고고학이나 계보학에 대한 언급은 대부분 푸코의 고고학으 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본다. 밀스의 설명을 참조하자면, 푸코의 고고학은 “하나의 아카이브 속에서 공인된 언술을 생산하고 조직화하고 유포하는 숨겨진 법칙의 체 계를 발굴하고 분석하는 것”315)이다. 밀스의 설명에 의하면, 고고학은 사건 자체를 탐구하기보다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과 그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던 담론 체계를 기술하는 것이다. 고대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문화 전체를 ‘아카이브’로 삼고 소재 를 길러오는 키퍼의 방식은 그와 유사하다.

고고학적 접근법은 여기서 두 가지 방법으로 적용되었다. 그 하나는 ‘기억술’을 통한 분석이며, 다른 하나는 ‘개념의 계승’을 살펴보는 방법이다.316) 이 두 방법은 모두 고대와 현재의 극단에서 그 연관성을 다룬다. 특히 ‘기억술(artes memoriae)’

은 고대의 수사학 기술 중 하나이다. 이 접근법은 고대의 수사학적 기술을 활용하 여, 미술작품의 배치를 설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두 번째 방법은 동시대 미술 속 에 어떤 고대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지 밝히는 일이다. 이는 한 작품 속에 동 시대적이면서도 비동시대적인 요소가 공존할 수 있는 근거와 조건을 조사하는 일 이다. 예컨대, 현대의 예술가가 작품 창작 과정에서 ‘모방(mimesis)’, ‘표현(expressi on)’, ‘양식(style)’과 같은 고전적인 개념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 개념이 전유 315) 고고학적 분석은 아카이브를 구성하는 담론들 속에서 어떤 언술이 권위를 부여받게 되는지를 역사 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고고학적 분석은 담론 속에 내재하는 규칙적인 유형을 설명하고 또한 하나의 언술이 다른 언술로 변형되거나 다른 언술과 차별성을 획득하는 방식을 체계화 하려 시도한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분석은 서로 상이한 언술들 사이의 관계, 즉 여러 이질적인 언술 이 어떻게 하나의 의미 덩어리로 뭉치고, 무슨 조건에서 어떤 언술들이 발생하게 되는지에 초점을 맞 춘다. 고고학적 분석은 해석을 지향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일어난 일의 의미를 파헤치기보 다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과 그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던 담론 체계를 기술할 뿐이다. 사라 밀스, 임 경규 역,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 엘피, 2008, p. 59.

316) 다니엘 아라스, 류재화 역, 그림의 역사, 마로니에 북스, 2008, p. 291.

된 방식과 근거를 밝힘으로써 복합적인 시간성을 드러낼 수 있다.

2001년에 진행된 아라스와 키퍼의 인터뷰에서, 키퍼는 자신의 작업이 연금술과 같다고 말했다. 연금술은 자연을 변화시키고 시간의 차원을 다르게 만든다. “나는 항상 시간에 관심을 갖고 있다. 내 관심사는 우주적인 질서의 시간, 지질학적 시간 그리고 인간의 고유한 시간들을 결합하는 것이다.”317) 키퍼는 시간을 결합하는 것 에 관심을 두고, 다양한 종교의 영원불멸한 시간과, 수백만년에 걸친 지질학적 시 간 그리고 ‘우리의 시간성’을 결합시킨다. 그는 “나의 전기는 독일의 전기다”318) 라 고 말했으면서도, 곧 다른 대목에서는 자신의 작품이 수천년 동안의 축적된 기억 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키퍼 분석의 두 가지 접근 방법 가운데, ‘기억술’에 대해 살펴보자. 기억술을 설 명하기 위해 아라스는 프란시스 예이츠(Frances A. Yates)의 기억의 예술319)을 소개한다. 기억의 예술은 수사학의 하위체계의 하나로, 기억하는 방법에 대한 체계 적인 기술이다. 기억술은 연설가가 청중 앞에서 발화할 연설을 기억 속에 새겨 넣 는 방법을 뜻한다. 본래 기억술은 웅변가, 목사나 설교자, 외교관과 같은 인물들이 말하거나 말해야 할 것들을 기억하는 방법을 지칭했다.320) 가령 고대의 한 웅변가 가 연설을 위해 습득해야 할 내용들이 있다고 가정해보면, 그는 변론을 위해 어떤 친숙한 공간 또는 건물을 상상한다. 웅변가는 ‘기억의 공간’ 또는 ‘기억의 건축물’

을 구성하면서 자신이 친숙하게 여기는 가상의 공간에 웅변할 내용들을 ‘적확한 자리(precise places, loci)’ 배치한다. 이 공간적 메타포는 고전적인 수사학에서 사 용하는 토포스(topos) 또는 로키(loci)라는 개념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수사학적 발

317) Daniel Arasse et Anselm Kiefer, Rencontres pour mémoire, France Culture-Editions du Regard, 2010, p. 72.

318) Andrea Lauterwein, Anselm Kiefer et la poésie de Paul Celan, Ed, du Regard, Paris, 2006.

Jesé Alvarez, Rencontres pour mémoire, France Culture-Editions du Regard, 2010, p. 9. 재인 용.

319) 기억은 아라스 평생의 연구 주제이자 주요한 분석도구였다. 1970년대 중반에 아라스는 이 책을 프 랑스어로 번역하면서,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작품들 속 다양한 기억술적 배치를 연구했다. 이 연구를 통해 아라스는 중세와 르네상스 미술의 근본적인 재현 체계가 기억술에서 수사학으로 이행했 음을 밝힐 수 있게 된다. 그는 1992년 루이 마랭이 작고한 후 1993년부터 2002년까지 ‘기억과 역사’

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한 바 있다. Sara Longo, Voir et Savoirs, Dans la Théorie de l'art de Daniel Arasse, Université Paris I en historie de l'art, 2014. p. 108 참조.

320) 다니엘 아라스, 류재화 역, 그림의 역사, 마로니에 북스, 2008, p. 141.

화 요소나 논거들은 ‘기억의 건축물’이라는 가상공간 안의 특정 자리에 배치된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정보들은 연설가가 원할 때에 꺼내 쓸 수 있다. 즉, 기억술은

‘이미지를 배치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의 공간 속에 이미지를 배치하는 기억의 기술은 기억할 대상을 다양한 이미 지로 ‘변환’시키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상상의 공간에 이미지들을 배치하는 방법 은 자체적으로 내부적인 질서를 갖고 있는 장소들의 병렬체계를 활용한 것이기도 하다.321) 웅변가에 의해 자의적으로 배치된 이미지들은 상상 속에서 건물을 이리 저리 옮겨 다녀도 변하지 않고, 여러 차례 꺼내 쓸 수 있도록 각인된다. 이때, 웅 변가는 ‘생동 이미지(imagines agentes)’를 사용한다. ‘심상들’로 이루어진 ‘생동 이 미지’는 기억을 소환해내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적인 이미지이다. ‘기억 이미지(me nemonic image)’라고 표현하는 이 심상은 구체적인 ‘장소’(loci)에 기록된다.

알라이드 아스만(Aleida Assmann)의 기억의 공간에서 소개하는 생동 이미지 는 심상으로 된 기억 문자를 뜻한다. 수사학의 하위체계의 하나였던 기억술은 웅 변가 고유의 시각적인 기억 문자를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아스만은 생동 이미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고대 기억술에서 이 개념을 나타내는 것은 ‘생동 이미지’, 곧 강한 영향을 미치는 심상들이다. 생동 이미지는 그 인상의 힘이 강해 쉽게 잊히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희 미한 개념을 기억해야 하는 경우 일종의 보완 장치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로 마의 기억술에서 정념은 기억을 뒷받침해 주는 가장 중요한 보완장치로 거론된다.322)

321) 기억술은 중세의 재현 체계를 독점했다. 이 체계는 중세에서 르네상스 시기 사이의 과도기를 거쳐 수사학 체계로 이행한다. 아라스는 르네상스가 각 표상 공간을 설정해 그 안에서 인물들이 움직이도 록 만든 또 다른 체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이며, 기억술과 반대되는 회화의 수사학적 개념이 등장했다 고 설명한다. 그림은 무언가를 기억해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게 된다. 그림은 관람자를 교육하고 설득 하고 감동시켜야 한다. 새로운 회화적 공간 재현법을 보여주는 르네상스는 기억술과 수사학이라는 재 현 체계가 혼합·연속·단절을 겪는 과도기적 단계였다. 기억 구조에서 수사학적 구조로의 공존과 변천 과정은 14세기와 16세기까지 이어지면서 다양한 작품들을 양산했다. 이 두 체계의 공존은 오늘날의 미술에서도 유효한 조건이다. 과거에는 종교화나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었던 기억술과 수사학이 현대 적 이미지나 매체들과 결합하면서 고전적인 현대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아라스는 기억술적 이미지 의 병렬관계를 산타마리아노벨라 교회의 안드레아 디 보나이우토(Andrea di Bonaiuto)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승리>를 통해 예시한다. Ibid., p. 144 참조.

322) 알라이드 아스만, 채연숙 역, 기억의 공간: 문화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 그린비, 2011, p. 300.

위의 인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생동 이미지’의 기본적인 원칙은 ‘강한 영향을 미치는 심상’이다. 즉 생동 이미지는 강력한 정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야 한다.

망각을 극복하기 위해, 고대 로마의 수사학자들은 기억 될 내용과 인상적인 이미 지를 결합하는 해법을 내놓았다. 정념과 결합된 독특한 이미지들은 기억의 건축물 에 배치되면서 더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이 기억 이미지는 기억술에 있어서 단순 히 기억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넘어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역할까지 수행한다.

고대에서부터 전해져 온 기억술을 통해 동시대 예술가들이 생산한 이미지를 분석 하는 접근법은 그 속에 담긴 다양한 시간성을 사유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적용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아라스는 키퍼 작품이 갖는 기억술적인 특징을 설명한다.

키퍼의 ‘회상 없는 기억’에 관한 논의에서 그리고 그가 회상 없는 사물들로부터 기 억을 창조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과 관련하여, 평등하게 망각으로 사라지는 무의 식적인 기억의 현시로서 ‘기억하기(remembering)’와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는 능력으 로서의 ‘기억’(the memory)의 차이가 밝혀져야 한다. [...] 키퍼의 기억은 ‘인공적인 기억(artificial memory)’이다. 이것은 키퍼의 작업이 예상할 수 없고 독특하게 구성 된 ‘기억의 예술(artes memoriae)’의 고대적 기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 역사가의 시각에서 볼 때, 기억의 예술과 키퍼의 예술적 실행을 비교하는 것은 자의적으로 보 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연관성은 키퍼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착수했던 기억에 관 한 작업과 결부된 독특한 방법을 제공한다. 이 20년 동안 키퍼는 기억의 무대(memo ry theatre)를 계속 구성했으며, 그가 간접적으로만 알고 있던 독일 과거의 기억들을 기억의 무대의 내용으로 사용했다. 기억의 예술을 언급하는 것은 그것 안에 건축적 장소와 이미지의 결합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한 논리를 제시하는 데 유용하다.323)

이 인용은 기억의 예술과 키퍼 작품의 연관성을 드러내준다. 아라스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기억의 예술은 키퍼 작품의 내적 논리에 들어맞는다. 그것은 수수께 끼 같은 성격을 띤 키퍼 작품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던져준다. 기억의 예술

323) Daniel Arasse, Anselm Kiefer, Thomas & Hudson Ltd, London and Harry N. Abrams Inc., New york, 2001, p. 79.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141-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