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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품의 다층적 시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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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크로니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미술작품의 시간성을 세분화하여 고찰해야 한다. 미술작품에 다양한 역사적 지층이 장기적으로 지속되며 뒤섞여 있 다는 점에서 아라스는 미술사의 시간성을 세 가지 차원으로 구분하였다.117) 먼저 미술작품은 물질적인 차원에서 시간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회화, 조각, 건축과 같 은 미술작품에는 시간의 지속이 균열, 녹, 요철, 절단, 수정 등으로 남겨져 있다.

그로 인해 감상자는 작품에 축적된 시간의 흔적을 대면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미 술작품의 복원은 시간의 흔적을 제거하면서 새로운 색과 형상을 덧씌우는 것으로

116) Daniel Arasse, "Observer l'art : Entre voir et savoirs", Le Renouvellement de l'observation dans les sciences, conférence de l'Université de touts les savoirs, Paris, Oédile Jacob, 2003, p. 105.

117) 다니엘 아라스, 류재화 역, 그림의 역사, 마로니에 북스, 2008, pp. 196-200.

‘아나크로니즘 수술(operation anachronique)’이라 할 수 있다.118) 복원 작업은 작품 이 최초에 그려진 모습을 덮어버림으로써 이후의 관람자들에게 ‘원본’을 확인할 수 없게 만든다. 그로 인해 후대의 관람자는 원본을 상실한 이미지를 봄으로써 시대 착오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물질적인 시간성보다 더 중요한 정신적인 아나크로니즘이 있다. 그것은 첫째, 미 술작품의 시간성은 재현 과정에서 다원화된다는 점이다. 예술가는 문학, 성경, 신 화를 자신의 시대에 이해될 수 있는 이야기로 각색한다. 그들은 그 이야기를 형상 화하는 과정에서 그 내용을 또 다시 변형시킨다. 게다가 미술작품은 당대의 사회·

경제·정치적 조건을 반영한다. 따라서 주제나 내용의 측면에서 미술작품은 다양한 시간성을 갖게 된다. 둘째, 미술작품은 그것을 수용하는 개인들에 의해 상이한 시 간을 갖게 된다. 작품이 제작된 목적은 최초의 수용자인 주문자를 만족시키는 것 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본래의 수용자는 사라지고 오늘날의 관람자들이 그 작품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 이처럼 아라스는 미술작품의 시간성이 다 층적으로 형성되는 여러 차원을 제시하면서 ‘아나크로니즘’ 개념에 대한 이해를 심 화시킨다. 이제부터 재현 과정에서 형성되는 시간의 층위와 미술작품을 수용하는 조건에서 발생하는 시간의 단계성을 확인해보자.

a. 재현의 진실성과 허구성

예술가의 작품 창작 과정은 미술작품에 시간의 차이를 가져온다. 그림은 과거의 텍스트를 현재화 하면서 발생한다. 고전주의 미술의 창작 과정은 ‘모방(imitation)’

을 원칙으로 하지만, 텍스트의 참조나 인용으로 인해 본래와는 다른 시간성을 갖 게 된다. 여기서 모방의 원칙이란 어떤 사태가 일어난 실제 그대로를 정확하게 묘 사해야 한다는 규약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고전주의는 ‘장르들이 뒤섞이는 것을 막 고’, ‘사회적 범주들을 존중’해야 한다.119) 하지만 아라스에 의하면, 모든 예술가들

118) Daniel Arasse, Histoires de Peintures, Gallamard, Paris, 2004, p. 294.

119) 다니엘 아라스, 이윤영 역, 디테일 : 가까이에서 본 미술사를 위하여, 숲, 2007, p. 50.

이 이 원칙을 충실히 따랐던 것은 아니었다. 예술가들은 작품 창작 과정에서 개인 의 감정, 욕구, 사유 방식을 작품 속에 형상으로 남겨둔다는 것이다.

고전주의적 창작에는 묘사의 진리를 추구하려는 경향과 함께 그림을 보는 사람 의 ‘지각 행위’에서 진리성을 획득하려는 경향도 있었다. 아라스는 그 경향을 이렇 게 설명한다. “어떤 화가들은 그림에서 재현된 실체의 진리성보다, 이 실체를 지각 하는 행위의 진리성을 형상화시키려 애썼다.”120) 이 문장에서 ‘재현된 실체의 진리 성’이란 재현된 형상과 실제 사물의 유사성을 말한다. 또한 ‘지각하는 행위의 진리 성’은 관람자가 재현된 형상을 보면서 얻는 지식이나 감정을 뜻한다. 아라스는 예 술가들이 주문자의 요구를 만족시키거나 자신의 예술적 성취나 내밀한 욕망을 실 현하기 위해 모방의 원칙을 따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15세기에 유행했던 고대적 취향은 그 사실을 증명한다.

15세기의 일반적인 관행이었던 고고학은 고대의 단편들을 따로따로 모으거나 그 자체로 수집하여 가능한 한 전체로 조합(montage)하는 작업이다. 이 관행은 진품성(l 'authenticité)보다도 고대의 품격을 중요시했다. [...] 르네상스 시기의 작업이 이룩한 성취 중 하나는 ‘고대 특유’의 양식이 존재한다는 이념을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데 이 양식은 회화에서 디테일의 선택과 조합에 의해서 점증적으로 구축된 것이고, 이 디테일들의 균형과 효과에 대한 예측은 조금씩 변형된다. 15세기 전반에 걸쳐 로 마 갑옷의 역사와 고대적 요소들이 그림 속에 다시 이용된 방식의 역사를 보면 다음 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작품이 주문되고 제작되는 전반적인 상황과 그렇게 재구성 된 디테일들을 연결시키면, 이 디테일들이 변형되고 또 근사치에 가깝게 그려지면서 어떤 의미를 띠게 되는지 알 수 있다. 1425년경에 그려진 만타 성의 <헥토르>와

<알렉산드로스>가 시대착오적인 갑옷을 입고 있다고 하더라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연작은 역사적 거리(distance historique)라는 개념과 전혀 다른 역사적 시간(temp s de l'histoire)이라는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121)

15세기의 관행을 설명한 위의 인용문은 예술가들이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모방

120) 다니엘 아라스, 이윤영 역, 디테일 : 가까이에서 본 미술사를 위하여, 숲, 2007, p. 203.

121) Ibid., pp. 162-163.

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예술가들은 작품의 효과를 극대화하 기 위해서 고증에 충실하면서도 다른 시대의 산물들을 적절하게 뒤섞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시대착오적’인 디테일은 과거의 관점에서는 창조적인 ‘조합’이었 다. 이는 미술작품이 특정 시대와 완벽하기 일치하지 않으며 다양한 시대가 뒤섞 여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렇기에 르네상스 회화 속 고대 로마의 흔적은 예 술가의 실수나 고증상의 오류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예술가가 고대의 사물을 당 대에 소환하여 재구성한 독창적인 ‘창안(invention)’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 로 고대와 당대의 시간의 뒤섞임을 만들어낸 예술가의 창안은 당대의 요구일 뿐 아니라, 역사적인 시간을 다루는 예술가 개인의 자율성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그와 같은 역사적 시간의 재구성은 역사화 장르에서 흔히 발견된다.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도 비슷한 사례를 소개한다. 16세기 중반에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는 <알렉산더의 전투>를 그리기 위해 기원전 333 년경의 이수스 전투를 참조한다. 그는 이미 지나간 전투의 흐름을 충실하게 보여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더 이전 시대를 참조하는 시대착오를 범했다.122) 당시 알트 도르퍼는 터키와의 전투 중에 이 그림을 그렸고, 그 현장이 작품 구상에 영향을 주었다. 이 사례는 ‘재현된 실체의 진리성’을 중요시하기보다 관람자가 지각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감정과 회화적 효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

아라스가 소개한 만테냐(Andrea Mantegna)도 마찬가지로, 고대적 요소를 차용 하여 회화를 독창적으로 구성한다. 1450년경 만테냐는 파도바의 한 성당에 그린

<성 야곱의 생애>의 제작 과정에서 ‘고대식 현대성(modernisme à l'antique)’123)을 추구했다. 그는 고대적 영감을 변형, 대체, 집약, 압축함으로 자신의 회화적 ‘발명’

을 보여주었다. 그의 회화는 다양한 역사적 연구에서 얻은 모티프들을 ‘조립(mont age)’하여 구축한 것이다.

122) 라인하르트 코젤렉, 한철 역, 지나간 미래, 문학동네, 1996, pp. 19-23.

123) 만테냐의 ‘고대식 현대성’은 교양 있는 예술가의 현대적인 독창성을 보여준다. 그는 과거의 산물을 현대화시킴으로써 새로운 회화적 실험을 감행한 것이다. 만테냐의 <성 야곱의 생애>는 1453년에서 55년에 걸쳐파도바 에레미타니 성당의 오베타리 예배당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로 만테냐가 19세에 그 리기 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은 다양하게 구성된 독특한 디테일로 관심을 끌었다. 다니엘 아라스, 이윤영 역, 디테일 : 가까이에서 본 미술사를 위하여, 숲, 2007, p. 164.

15세기의 회화에 중세적 요소나 고대적 요소가 뒤섞여 있다는 사실로부터, 텍스 트와 이미지의 시간은 다양한 층위를 갖게 된다. 아라스는 그와 같은 상이한 시대 의 역사적 사건을 동일한 지평에서 재구성하는 것이 예술가들만의 특권이었음을 주장한다. 그는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가 쓴 회화론으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알베르티는 이 책에서 역사화의 ‘구성(composition)’ 개념을 소개했다.

그는 역사화가가 수사학적 기술과 자율성을 발휘하여 역사화를 구성하는 능력을 중요하게 여겼다. 알베르티에게 위대한 역사화를 구성하는 방법은 “뚜렷하게 구별 되는 부분들의 점진적인 끼워 맞추기”124)를 통해서였다. 아라스는 알베르티가 강조 한 ‘수사학적 구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이 원칙을 통해 원래부터 고대의 수사법과 그 구성 부분들, 그리고 연설문과 같은 재현의 배치를 구축하려 했던 알베르티의 모델이 점차 분명하게 드러난다. 회화적 수 사법으로서 발명(invention), 구성(composition), 배치(disposition), 표현(expression),

‘의상’ 혹은 장식, 데생과 채색 등과 같은 회화의 부분들은 명칭과 양에 따라 바뀔 수 있지만 회화사 전체를 관통해 나타난다.125)

이 인용문에서 알베르티는 ‘위대한 역사화’를 구성하기 위해 수사학적 기술을 강 조하고 있다. 알베르티가 주장하는 것은 본래 역사화가 사실성과 진실성에 기초한 장르라고 해도, 작품의 수사학적 효과를 위해 예외적인 발명, 구성, 배치, 표현을 용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랑시에르 또한 역사적 이야기를 구성할 때 사용되는 시 적 방식이 고전 수사학적 방법, 즉 발명, 배치, 표현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 바 있 다. 문학, 역사, 그리고 회화가 수사학적 기술을 활용한다는 사실로 인해, 텍스트와 미술 작품의 관계가 역사적 진실성보다는 허구적 논리 위에서 탄생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아라스는 수사학적 기술과 함께 회화가 원본으로 삼는 텍스트 자체도 허구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탈리아 수태고지를 설명하면서, 텍스트와 이 미지의 허구적 관계를 보여준다.

124) 다니엘 아라스, 이윤영 역, 디테일 : 가까이에서 본 미술사를 위하여, 숲, 2007, p. 213.

125) Ibid., p.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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