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델은 프랑스 역사학을 주도하며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그는 1956년부 터 1968년까지 아날지의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1975년에 ‘사회과학고등연구원(Ec ole des Hautes Etudes en Sciences Sociales)’으로 재조직된 고등연구원을 이끌었 다. 20세기 후반의 역사가들 중 대부분은 그의 영향 아래에서 아날학파 3세대를 이루게 되었다.44) 그 당시에 아날학파의 연구자들이 주창한 ‘인간과학’은 경제학과 사회학, 인류학뿐만 아니라 언어학, 기호학, 문학, 예술학 나아가 정신분석학까지도 포괄하는 것이었다.45)
44) 브로델의 영향을 받은 역사가로는 조르주 뒤비, 피에르 구베르, 자끄 르 고프, 엠마뉘엘 르루아 다뒤 리 같은 인물들이 있다. 그들은 브로델의 격려 아래 세계적인 역사가로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브로 델은 미셸 푸코와 롤랑 바르트 같은 철학자, 자끄 라깡 같은 정신분석학자, 피에르 부르디외 같은 사 회학자 등을 고등연구원 6국으로 끌어들였다 월러스 커소프·필립 월런, 김응종 외 역, 20세기 프랑 스 역사가들, 삼천리, 2016, pp. 390-391 참조.
45) 김응종, 아날학파의 역사세계, 아르케, 2001, p. 26.
그런 환경 속에서 기호를 기표와 기의로 이분화한 소쉬르의 개념들은 인류학과 사회학을 넘어 문학이론과 역사 연구까지 영향을 미쳤다. 소쉬르의 기호학으로부 터 영향을 받은 이론가들은 텍스트의 비지시성과 불명확성을 이해하면서 역사적 담론의 실재를 부정하도록 만드는 데 기여했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역 사적 텍스트를 문학적 텍스트와 동일시하였고,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하 나의’ 역사를 거부하면서 ‘다수의’ 역사를 강조했다.46) 이처럼 텍스트의 절대성을 부정한 구조주의 이론가들은 역사적 시간을 불연속성, 단절, 가역성, 상대성, 이중 성 또는 다수성으로 규정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 시기의 이론가들은 공통적으로 인과관계, 총체성, 의식, 통시성을 버리고 우연성, 다층성, 무의식, 공시성을 추구했 다. 그들은 지금까지 서양에서 이해되어 온 역사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재검토했 다. 그에 따라 역사 서술은 지식과 권력에 의해 배제된 것, 이성에 의해 억압된 것, 차이나 역사적 흔적을 추적하는 경향을 보였다. 역사에서 배제된 것에 관한 민 감성과 탐구 의지는 기존에 구축된 역사 개념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방법론적 쇄신을 요구하였다.
20세기 후반의 폴 벤느(Paul Veyne)와 자끄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공통 적으로 ‘역사’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했으며, ‘아나크로니즘’ 개념에 대해 수용적 인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전통적인 역사를 지칭하는 대문자 역사(Histoire)를 거부 하고, 소문자와 복수의 역사(histoires)를 선호했다.47) 벤느는 ‘아나크로니즘’ 개념을
‘시대착오’로 규정했다. 그는 시대착오를 방지하기 위해서 시대와 맥락에 따라 변 하는 개념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면서도 벤느는 부적합한 개 념을 사용하는 시대착오가 역사 연구에서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역사 적 개념이 “변전의 상태”48)에 있기 때문이다. 벤느는 초기 연구에서 ‘아나크로니즘’
46) 프랑수아 도스, 김웅권 역, 구조주의의 역사 3, 백조의 노래 : 1967년에서 70년대, 동문선, 2003, pp. 315-321과 347-356 참조.
47) 벤느는 보편사에 관한 논고, 역사 철학 강의, 역사의 연구와 같은 역사 저술 제목이 제안하는 대문자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공표한다. 대문자 역사라는 관념은 접근 불가능한 간계나 초험적인 관념이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철학이 ‘독단적인 허상에 기대고 있는 넌센스’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역사가들이 쓸 수 있는 역사란 보다 사소하고 일상적인 사건들의 역사인 ‘무엇 무엇의 역사들’일 뿐 이라는 것이다. 폴 벤느, 이상길 외 역,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 새물결, 2004, p. 55.
48) Ibid., p. 224.
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했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아나크로니즘에 상응하는 ‘구 성적 상상력’ 개념을 내놓게 된다. 결과적으로 벤느는 역사학에서 아나크로니즘의 필요성을 간접적으로 주장했다고 할 수 있다.
철학자 랑시에르는 ‘아나크로니즘’ 개념의 기원을 고찰했다. 그는 아나크로니즘 을 ‘시대착오’라고 규정하는 역사학을 비판한다. 페브르가 아나크로니즘을 ‘죄악’으 로 간주했던 점에 대해, 랑시에르는 그가 여전히 근대적 역사 개념에 머물러 있다 고 비판하면서 블로크와 벤느의 관점을 옹호한다.49) 페브르의 주장에 따라 라블레 가 선구적인 ‘자유사상가’로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시대에 그런 범주와 조건 이 존재해야만 한다. 하지만 16세기에는 ‘무신앙’도 ‘자유사상’ 이라는 범주도 존재 하지 않았다. 랑시에르는 시대착오를 비판한 페브르가 한 시대의 범주를 자의적으 로 구성한 사실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더 나아가 랑시에르는 역사학이 죄악시한 ‘아나크로니즘’이라는 개념을 버려야한 다고 주장한다.50) 이는 페브르가 규정한 ‘시대에 반하는 오류’라는 의미의 시대착 오라는 개념 자체가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시간 교란’이라는 뜻을 지 닌 ‘아나크로니(anachronie)’를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이 개념은 ‘자신들의(leur)’ 시 대로부터 벗어난 단어, 사건, 의미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랑시에르는 ‘아나크로니 즘’ 개념을 죄악으로 간주한 역사학의 변화를 촉구하며, 오늘날 역사가들이 이 개 념을 긍정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 절은 벤느와 랑시에르 의 논의를 통해서 ‘아나크로니즘’ 개념이 시대와 시간의 ‘착오’가 아니라는 점을 명 확히 설명하고자 한다. 또한 본 절에서 ‘아나크로니즘’ 개념은 역사 연구에서 문제 를 설정하는 방식과 이를 실천하는 방법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매개념으로 다루어 질 것이다.
49) Jacques Rancière, <Le concept d'anachronisme et la vérité de l'historien>, L'Inactuel, n.6, 1996, p. 60.
50) Ibid., p. 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