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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가의 탈시대적인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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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크로니즘’ 개념은 미술작품과 미술사가의 관계를 규정하는 용어이다. 그리 고 미술작품 속 다양한 시간들의 뒤섞임은 미술사가의 연구 조건을 이해하는 문제 와 관련이 깊다. 그것은 미술사가와 연구 대상의 관계를 규정하면서 연구의 문제, 관점, 방법을 결정짓는다. 아라스는 미술사를 오랫동안 지속된 역사적인 지층이 뒤 섞여 있다고 보고, 그 지층을 구성하는 ‘시선’에 주목하였다. ‘시선’은 미술 작품을 바라보는 주체(관람자, 예술가, 비평가 및 미술사가 등)의 행위에서 도출된 결과(인 상, 사유, 메모, 비평, 학술적인 연구 등)를 포괄한다. 시선을 분석하는 것은 미술사

145) Ralph Dekoninck, <Daniel Arasse's joyful visual science: in the intimacy of history and art>, Modern French visual theory: A critical read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13, p.

81.

146) Ibid., p. 82.

의 축적된 지식을 검토하는 일과 같다. 또한 시선의 분석은 미술작품 안에 어떠한 시간과 시대가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아라스는 아나크로 니즘 개념을 다양한 시대를 가로지르는 시선들과 연관지어, 미술작품을 분석할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한다. 본 절은 아라스가 제안한 시선들을 분석 대상으로 삼고, 이를 ‘통제’ 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a. 관조하는 시선의 시간

미술작품은 여러 시간의 층위를 갖으며, 그 속에는 다양한 시선들이 담겨있다.

미술작품에 시선을 던지는 개인은 모두 다른 연령, 지식수준, 관점과 목적을 갖는 다. 어떤 이들은 미술작품을 단순히 보기 위해서 본다. 그들은 학술적 성과를 도출 해내거나 비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는 ‘즐거움’을 향유하고자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시선은 작품을 제작했던 예술가들의 시선이다. 과거의 작품에 대한 예술가의 시선은 그가 다른 예술가의 작품 속에서 자신의 것으로 체 득하기 위한 요소들을 관찰할 경우를 말한다. 이 시선은 과거의 그림 속에서 무엇 인가를 발견하는 예술가의 시선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예술가들이 과거 작품을 보는 독특한 시선은 제임스 콜먼(James Coleman)147)의 사례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콜먼은 1970년대 이후 국제적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2003년에 루브르 박물관의 초청 작가로 선정되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데생 과 수사본(Léonard de Vinci, Dessions et Manuscrits)>이라는 전시를 준비했 다.148) 콜먼은 레오나르도의 데생과 수사본을 슬라이드와 프로젝션 이미지로 제작 147) 제임스 콜먼은 1941년에 아일랜드에서 출생한 예술가이다. 그의 작품은 사진, 영화, 연극, 그림들 을 사용해 ‘고정된 것’과 ‘움직임’을 갖는 예술 형태들을 제시한다. 그는 허구와 진실, 연극, 민속적인 소재, 문학 형식과 일상적인 사건들을 연결시킨다. 1970년대 이후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면서 콜먼은 언어, 이미지, 공간의 상호작용을 실험하는 영상 작업을 계속해왔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관람자-관 찰자’의 관계를 극대화하여, 그들을 작품의 공동-포퍼머로 만든다는 점에 있다. 콜먼에 대한 소개는 2005년에 MNAC(Museu Nacional d'Art de Catalunya)의 큐레이터 Pedro Lapa의 소개문을 참조.

148) 루브르 박물관에서 간행한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의 박물관 관계자들은 콜먼의 전시에 대한 정보와 이미지들을 아라스의 글과 함께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공동 출판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 였는지, 콜먼은 아라스의 글을 거부했다. 또한 그는 이 전시에 대한 어떤 촬영본과 전시 관련 신문기 사도 남기지 않았다. 콜먼은 전시장을 촬영하는 행위를 엄격하게 금했다. 이 전시는 큰 반향을 일으

한다. 전시는 거장의 작품을 연대기와 주제별로 분류하면서, 그 사이에 자신의 작 품을 살짝 끼워 넣는 방식으로 기획되었다. 대부분의 관람자들은 레오나르도와 콜 먼의 작품을 구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라스는 이 작가가 시도한 전시 방법이 ‘비선형적’인 시간 이해를 바탕으로 여러 시간과 시대의 ‘중첩’을 만들 어냈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콜먼의 전시는 다양한 시선의 만남을 중재했다. 아라 스는 콜먼이 “자신의 시선을 주는(prêter son regard)”149) 방식으로 전시를 주도했 다는 점에 주목했다. 콜먼은 과거의 작품을 보는 예술가의 시선을 통해 익숙한 미 술작품을 다르게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아라스가 주목한 시선의 중요성을 롱고는 이렇게 정리한다. “미술작품의 현대성 이란 그 시대의 맥락에서 나오는 것일 뿐 아니라, 이후 세대의 화가들이 계속해서 지각하는 현대성에 의해 재정의된다.”150) 이는 미술작품의 가치가 후대의 화가들이 던진 시선에 따라 재평가 된다는 것이다. 시선의 시간성을 논의할 때 예술가들이 바로 이전 세대가 아닌 오랜 과거의 미술 작품을 재해석한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관찰하며 이를 작품화했던 콜먼처럼, 예술가들은 이전 시대 의 창작물보다 더 오래된 과거의 창작물로부터 독창적인 ‘장치’를 발견하곤 한다.

콜먼의 사례는 미술 양식의 변화가 ‘발전’과 ‘진보’가 아니라 예술가들의 탈시대적 인 시선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명한다.

시선은 작품 내부에도 존재한다. 아라스는 작품을 분석할 때 예술가의 시선과 작품 내부에 존재하는 시선을 구분한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의 작품 속 시선은 분석의 핵심에 있다.151) 이 화가는 <레이스 짜는 소녀>를 보는 감상자의 시선과 그림 속 인물의 시선이 일치하지 않도록 구성했다. 시선의 불일치는 그 자 체로 의미효과를 발생시킨다. 그림 속 소녀는 섬세하면서도 흐릿하게 그려진 실

킬만한 프로젝트였지만, 콜먼은 이 전시를 일시적인 경험으로만 남기려했다. 아라스는 그와 같은 콜 먼의 태도를 완고하게 명확성과 완벽함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경향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Ariane Lemieux, Les artistes contemporains au musée du Louvre : méthodes de transmission du processus créatif en regard des collections, Muséologies, vol 8, Érudit, 2015, 179 참조.

149) Daniel Arasse, Anachronique, Paris, Flammarion, 2006, p. 162.

150) Sara Longo, Voir et Savoirs, Dans la Théorie de l'art de Daniel Arasse, Université Paris I en historie de l'art, 2014. p. 349.

151) 다니엘 아라스, 류재화 역, 그림의 역사, 마로니에 북스, 2008, p. 180.

뭉치를 보고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의 원근법적 장치는 그녀의 시선보다 낮게 설정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관람자는 그림 속 소녀가 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없게 된다. 베르메르 그림의 독특함은 바로 원근법의 소실점을 조정하면서 감상자와 그 림 내부의 시선의 불일치를 드러내는 장치에 있다.152) 이 그림에서 미술 작품, 작 품 속 인물, 감상자, 예술가의 시선은 상호 작용과 유희적 특성을 드러낸다.

시선과 그 불일치는 관람자와 예술가 이외에도 미술사가나 철학자에 의해서도 산출된다. 그들은 미술 작품이 제작된 조건과 수용되어온 과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현재적 사유 체계를 작품에 대입한다.153) 철학자들이 던지는 시대착오적인 시 선은 미술작품을 이해하는 데 기여한다. 이는 철학자들이 미술작품을 그것이 제작 된 시대적 관점으로만 분석하려는 미술사가들과는 달리, 시간의 차이를 망각한 채 작품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나크로니즘은 연구 대상인 작품과 연구 주체 들이 맺는 시선의 관계에 따라 다양한 시간성을 드러낸다.

그로 인해 오랜 시간동안 축적된 시선은 관람자에게 ‘지식(savoir)’을 전달한다.

아라스는 미술사가의 시선이 독자에게 주는 지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독자는 독 자 자신의 시간성 안에서 작품을 본다. 하지만 그는 해석자의 시선에 따라, 관찰하 는 역사가의 인식경로를 통해 그림을 읽도록 초대된다.”154) 이 문장은 관람자의 시 선이 산출된 근거로 ‘지식’을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관람자는 자신이 습득한 미술 사가의 시선에 의존하며 작품을 바라보고, 보는 과정에서 일어난 반응과 인식은 그 후 역사가와 해석자의 시선을 통해 강화되거나 수정된다. 이전에 습득한 지식 을 통해 작품을 볼 경우에도 사유는 이 시선에 근거하여 생산되고 변형된다.

아라스는 포 대학(Univercité de Pau)의 학술대회에서 ‘아나크로니즘’ 개념과 관 련된 연구를 소개하였다. 이 연구는 역사학자와 그의 연구 대상과의 관계를 ‘시선’

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이 글에서 아라스는 도상학자의 시선과 아나크로니즘 개념 152) 다니엘 아라스, 류재화 역, 그림의 역사, 마로니에 북스, 2008, p. 183.

153) Ibid., p. 191.

154) 아라스가 제시한 예를 들어 설명해보면, 우리는 라파엘 전파나 보티첼리의 그림을 볼 때, 우리 시 선에 선행된 역사가들이나 예술가들의 평가와 연구에 근거해서 그것을 본다. 때때로 기존 연구들은 역사적으로 오류나 착오를 내포하고 있을지라도 감상자는 그에 의존해서 그림을 보게 된다. 따라서 현재의 감상자의 시선도 단일한 시간성을 갖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Sara Longo, Voir et Savoirs, Dans la Théorie de l'art de Daniel Arasse, Université Paris I en historie de l'art, 2014. p. 41.

을 용인하는 미술사가의 시선을 비교한다. 이 상반된 시선은 아나크로니즘에 대한 아라스의 문제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준다. 그는 아나크로니즘을 미술사가와 그 의 연구 대상과의 관계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서술한다. 미술사가들은 작품을 연구 할 때 종종 비정상적이고 예외적인 디테일로 인해 놀라워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미술사가는 그림 속의 예외적인 디테일이 관람자에게 미치는 효과를 학술 용어를 사용해 왜곡하고 삭감시켜버린다. 아라스는 미술사가들이 관례를 따르면서, 기존의 분석 사례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다른 작품 분석에 대입시키는 방식을 비 판한다. 그런 방식은 독특한 디테일을 평이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반면 아나 크로니즘 개념을 수용한 미술사가는 독특한 디테일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아나크로니즘 개념에 의거하여 예외적인 디테일을 바라보는 미술사가는 그 작품의 잠재적인 능력을 상승시킨다. 이를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작품이 주는 효과와 그것의 역사적 지위는 그것을 보는 시선에 따라 상이하게 드러나기 때 문이다. 작품의 효과와 지위는 자기 시대를 벗어나 다른 맥락에 놓인 미술작품을 관 조하는 기다림(attente anachroniques)의 시간으로부터 발생한다. 그것은 놀라움을 느 끼게 하는 작품 자체의 예술적인 힘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미술사가의 연구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그는 오늘날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놀라움의 오래 지속된

‘구상가능성(constructibilité)’을 사유해야 한다. 즉, 우리는 이해를 향한 기다림 속에 서 그 놀라움이 어떤 목적과 의미를 갖게 될지 실험할 필요가 있다.155)

이 단락은 아나크로니즘 개념을 인식하는 미술사가의 반응과 적극적 실천을 촉 구하기 위해 서술되었다. 아라스는 이전에 수행한 디테일 연구의 연속선상에서 미 술 작품의 역사성을 조명한다.156) 미술사가에게 가장 급진적인 아나크로니즘은 바 155) Daniel Arasse, "L'enceinte surprise de Marie. Remarques sur une Annonciation siennoise"

La Surprise, CICADA, Publications de l'Université de Pau, <Rhéthrique des Arts>, n°6, 1998, p. 71. Sara Longo, Voir et Savoirs, Dans la Théorie de l'art de Daniel Arasse, Université Paris I en historie de l'art, 2014. p. 350 재인용.

156) 아라스의 디테일은 미술 작품에 대한 아나크로니즘을 직면하면서 그 영향을 안고 있다. 아라스는 이렇게 말한다. “작품을 수용하는 현재의 조건은 때때로 우리가 볼 수 없도록 의도된 요소들, 즉 화 가들이 볼 수 없도록 그린 요소들을 보게 한다. 현재적인 시선이 작동하는 방식은 실제로 한 때 그것 을 그렸던 화가와 동일한 거리에 우리를 서게 한다. 우리는 화가가 작품과 마주했던 그 거리에 서 있 다.” 이 상황은 미술사가가 미술 작품을 연구하는 상황이 본래 시대와는 다른 맥락에서 진행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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