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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국회와 내각의 예산권한

2. 예산권한 배분의 의의

앞에서 살펴본 오늘날 일본의 예산제도와 동제도의 운용을 통하여 나타나는 국회 와 내각의 예산권한 배분의 모습은 연혁적으로 볼 때 독일을 위시한 근대 서양법의 계수를 통하여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사정에 따라 현재 일본의 예산제도의 운용 현 황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예산제도의 연혁을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그러한 연혁의 고찰은 국회와 내각의 예산에 대한 권한 배분의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일본이 재정민주주의를 재정의 기 본원칙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예산을 법률과 다른 형식으로 운용함 으로써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국회와 내각의 예산 권한 배분의 연혁

일본은 프로이센 헌법의 영향을 받아 메이지(明治) 헌법의 예산제도를 수립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예산 제도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하에서는 프로이센 헌법으 로부터 오늘날까지의 일본의 예산제도에 대한 연혁을 국회와 내각의 예산 권한 배분의 변천과정의 탐색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본다.242)

1) 프로이센 헌법의 영향

1850년 프로이센 헌법 제99조 제2항은 국가의 지출(예산)은 매년 법률에 의하여 이 를 확정한다고 규정하고 있었고, 이러한 법률은 국왕과 지방의회 상하의원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형태였다. 그 후 1862년 비스마르크의 군비확장을 위한 예산안이 하원에 서 부결되는 바람에 하원의 동의없이 상원의 의결만을 거쳐 예산을 집행하는 사태가 발

242) 이하의 내용은 김세진, 예산법률주의에 관한 비교법적 연구, 앞의 책, 176면 이하, 서보건, 일본의 예산제도에 관한 역사적 논의의 전개-일본의 예산비법률주의, 주요국의 예산법률주의, 한국법제연구원 워크숍 자료집, 2010.2, 권해호, 예산법률주의, 税經社, 1995, 195면 이하 등을 주로 참고하여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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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하게 되었다(이른바 프로이센의 헌법분쟁).243) 여기에서 국왕과 국민의 대표 사이에 합 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 의회의 동의가 없더라도 국왕에게 그 이후에 조세를 징수 하고 지출할 권한이 있다고 합리화한 것이 이른바 비스마르크의 흠결설이다.

프로이센 헌법논쟁을 거친 후 P. Laband가 모든 국가권력은 군주에게 유보되어 있 지만 그 행사가 헌법에 의하여 제한된다는 군주제 원칙으로부터 국민의 대표기관은 행정행위의 하나인 예산안을 확정함에 있어서 입법자의 자유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정적인 구속 하에 행동하며244) 예산은 단순히 수지의 견적에 불과하므로 여기 에서의 법률은 실질적 의미의 법률=법규가 아니었다. 즉 본래 예산은 행정작용이었는데, 이를 의회의 의결=형식적 의미의 법률에 의해 확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이 예산이 행정작용인 결과 법률의 실시나 국가제도의 유지에 필요한 세출 의 거부가 위법하게 되었으며, 예산이 성립하지 않는 경우에도 의회의 사후승인을 조 건으로 정부에 의한 지출이 인정되는 등 의회의 예산의결권이나 예산의 법적 구속력은 공허화된다고 보았다.245) 여기에는 예산에 대한 “형식적 의미의 법률”이라는 해석론이 도입되어 실정 헌법상의 내용이 아닌 예산행정설을 뒷받침하기 위한 “국회의 지위와 국 민의 권리를 부인하는 헌법 해석”에 의한 것이었다.246) 그 결과 독일에서는 법률의 이중 개념, 즉 “실질적 의미의 법률”과 “형식적 의미의 법률” 이론을 취하고 그 중 “예산법”

중 세출부분에 대해서는 “형식적 의미의 법률”, 즉 법률이 아닌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러 한 예산법에 대한 비법률주의적 해석은 그 후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스 정권에까지 영 향을 미쳤으며, 나아가 이는 일본헌법상의 예산제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편 프로이센 헌법분쟁 이후 P. Laband의 사상이 지배하던 시기에 1882-1883년에 걸쳐서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포함한 일본의 관료들이 황실제도, 내각제도, 의회

243) 김세진, 예산법률주의에 관한 비교법적 연구, 앞의 책, 176면.

244) 홍성방, 주요국가의 재정법제연구(I)-독일의 재정관련 헌법조항을 중심으로-, 한국법제연구원, 2009, 58-59면.

245) 只野雅人, "予算の拘束力", ジュリスト刊行 憲法の争点, 有斐閣, 2008.12, 296頁.

246) 김세진, 예산법률주의에 관한 비교법적 연구, 앞의 책, 17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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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적이었으며, 재정에 관한 의회의 권한이 약해진 것은 단순히 재정에 대해서뿐만 아니 라 일반적으로 정부에 대한 의회의 권한과 비교하면 의회의 지위가 낮았으므로, 그 권한 이 약화된 것의 표현일 것이다.249)

이러한 구 일본헌법은 프로이센 헌법의 영향을 받았으며, 직접적으로는 법률고문인 헤 르만 뢰슬러(Hermann Roesler)에 의해서 구체화되었다.250) 즉 1887년 8월 甲안, 乙안과 헤르만 뢰슬러(Hermann Roesler)의 일본제국헌법초안을 검토하여 나츠시마(夏島)초안을 작성하였고, 그 후 몇 번의 수정을 거쳐서 1888년 4월 헌법초안이 완성되었다.251) 그런데 그 경위를 보다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예산의 법적 성격과 관련해서는 변천이 있었다. 이 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252)

우선 甲안, 乙안의 성립 전에는 예산이 “법률”(의 성격)로 의결되어야 하는 것이 입 헌제의 방향으로 여겨졌고, 이에 따라 헌법 기초에 앞서서 재무부로부터 회계관계 참 고제안을 받았는데, 그 제안에서는 “법률”로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견이었다. 그러 나 1887년 1월 헤르만 뢰슬러(Hermann Roesler)에게 “정부가 재정권을 장악하는 방법”

을 일곱 가지에 걸쳐서 질의한 결과 그의 재정제도 전체에 관한 포괄적 답변을 얻었 고, 결과적으로 헌법초안 “甲안”, “乙안”에 결정적 영향을 미쳐서 “예산법”이라는 사 고는 버리게 되었다. 결국 甲안, 乙안 모두 법률이 아닌 “예산”으로 의결한다는 전제 가 확립되었으므로, 예산법이 아닌 예산으로 의결하는 것 자체는 특별한 귀결이 아니 라 각국의 예산법의 제도적 외형을 특수한 정치적 목적 때문에 “의회의 의결 형식”만을 수용한 것이었다.253)

249) 佐藤功, 憲法下, 前揭書, 1087-1088頁.

250) 헤르만 뢰슬러(Hermann Roesler)는 1878년 법률고문으로 일본에 와서 1893년 본국으로 귀국할 때까지 대일본 제국헌법 제정자들의 조언자로서 헌법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251) 그 경위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김창록, 日本에서의 西洋 憲法思想의 受容에 관한 硏究-「大日本帝國憲法」의 制定에서 「日本國憲法」의 ‘出現’까지-, 앞의 논문 참조.

252) 이하의 내용은 권해호, 예산법률주의, 앞의 책, 200면 이하, 김세진, 예산법률주의에 관한 비교법적 연구, 앞의 책, 179면 이하를 주로 참조하여 정리하였다.

253) 권해호, 예산법률주의, 앞의 책, 201면. 1882~1889년 메이지(明治) 헌법이 제정되기까지 독일헌법상 “예산법”

을 “예산”으로 변형하는 과정에서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등 관련 인사들은 이 제도의 본질과 중요성을 너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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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일본 내에서는 메이지(明治) 헌법상 예산을 의회가 승인이나 의 결이 아니라 협찬의 방식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예산을 법률의 형식이 아닌 “예산”이라는 독특한 법형식을 취한 것이며 예산분쟁을 미리 회피하기 위하여 긴급재정권(구 일본헌법 제70조)을 규정하는 등 이론적으로는 프로이센 헌법에 비하여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254)

결국 예산에 대한 의회의 협찬이라는 제도는 통치구조 전체 중에서 의회가 예산조 치에 대하여 얼마나 실질적으로 관여하는지를 고찰하여야 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예 산에 관해서는 정부와 의회에 권한이 나누어져 있고,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정부와 의회 사이에 상호협조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에 예산분쟁의 발생을 제도상 저지할 수 없는 협조구조이므로 예산의 의결형식이 단일의결인지 법률인지 예산이라는 독특 한 형식인지에 관계없이 입헌군주제 하에서 예산제도로서의 연속성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도 주장된다.255)

3) 현행 일본헌법 하의 예산제도 성립

제2차 세계대전 후 예산을 포함한 재정의 헌법조항이 결과적으로 전쟁에 활용되었다 는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과 재정입헌주의의 확립으로 인하여 현행 일본헌법이 국회의 재정에 대한 통제의 제한을 철폐하며 재정민주주의를 확립하고 국가의 재정은 주권자 인 국민의 대표인 국회라는 최고의 유일한 의결기관의 권능에 속하도록 한 것은 국회의

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민주화를 두려워한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했던 것이고, 이를 집행하는 대장성 측에서도 그러한 바탕 위에서 지금까지도 집행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권해호, “헌법개정과 법률주의”, 국회 정책세미나, 2009.12.28. 참조).

254) 권해호, 예산법률주의, 앞의 책, 202면은 법을 입법부의 규제의사로 보지 않고 국가의 규제법규로 보는 논리 는 출발점에 있어서 영국, 프랑스식 예산법의 원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그 후 비교법적 관점에서 宮澤俊義 교수가 예산의 대상을 “법형식”(법규범설)으로 인식한 것은 당시로서는 놀랄만한 이론이었다고 한다.

255) 이 견해에 따르면 예산을 법률형식으로 채택한 프로이센헌법상의 제도가 우연하게 탄생된 것은 독일제도가

255) 이 견해에 따르면 예산을 법률형식으로 채택한 프로이센헌법상의 제도가 우연하게 탄생된 것은 독일제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