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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통합과 농업정책의 조화: EU의 사례

시장통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협상 과정에서 국가별 농업의 특 성과 민감성을 고려하여 시장개방 일정을 조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다. 특히 시장통합의 목표를 FTA보다 진전된 형태인 공동체에 둔다면 회원 국이 공동으로 해결해야 할 여러 가지 대내 정책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 더욱 중요한 과제로 대두된다. EU는 낮은 단계의 경제통합에서 출발하여 가장 높은 단계의 지역통합을 이룬 대표적인 사례이다. 지역통합 과정에서 EU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힌 농업문제를 성공적으로 조정해왔으 며, 그 대표적인 정책이 공동농업정책(Common Agricultural Policy: CAP)이다.

여기서는 EU의 공동농업정책을 중심으로 지역통합 과정에서 농업분야의 갈등 조정 방식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는 향후 동아시아공동 체 형성에 있어서 농업문제 해결 방향 설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

2.1. 공동농업정책의 필요성

EU의 공동농업정책은 농업이라는 특정 부문에 관한 공동정책으로 EU 에서 가장 잘 알려졌고 동시에 가장 논란이 많은 정책이기도 하다. 공동농 업정책은 EU의 공동정책 중에서 가장 먼저 완성된 정책으로 이미 1963년 말 회원국 내 총 농업생산의 85%에 해당하는 농산물에 대해 공동시장기구 가 실현되었다. 공동농업정책이 수립되기 이전 EU 회원국들은 농업분야에 있어서 적극적인 개입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므로 농업분야에서 자유 로운 교역과 경쟁원리가 작동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각국의 개입주의 정책 을 제한해야 했기 때문에 공동농업정책의 도입은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공동농업정책이 이룬 성과는 주목할 만하다.

2 이 절은 박명호 교수(한국외대)가 집필한 것을 연구진이 요약, 수정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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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공동체의 창립자들은 상품, 서비스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한 단일시 장 형성을 위해 농산품도 회원국 간 관세나 수량의 제약 없이 자유롭게 이 동할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그렇지만 공산품이나 서비스와 같이 회원국 간 자유 이동을 위한 장벽을 폐지하고 동일한 경쟁에 관한 규칙을 도입하는 것만으로는 공동농업시장이 달성될 수 없다는 점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 므로 EC 조약 32조는 농산물에 대한 공동체 시장의 작동과 성장을 위해서 는 공동농업정책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농업 분야가 제조업, 서비스업과 달리 특별대우를 받는 것은 다음과 같 은 이유 때문이다. 우선 농업은 기후조건, 동식물 질병을 비롯해 통제하기 어려운 요인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생산 및 수요의 균형 달성이 일반적인 재화보다는 훨씬 어렵다는 점이다. 또한 농산물에 대한 수요는 사회적이고 동시에 정치적 특징을 지닌다는 점에서 각국 정부는 기초농산물에 대한 수 요를 합리적 가격으로 충족시켜야 할 의무를 지닌다. 그러므로 농산물을 단순히 시장의 수급 조건에만 의존해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다.

공동농업정책은 전후 농업 기반 경제에서 산업과 서비스 경제로 이행되 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공동농업정책은 회원국의 주권이 완벽하게 공동 체로 이전된 정책으로 공동체가 회원국을 대신해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재원 역시 조달한다. 그러므로 공동농업정책과 관련된 법규는 대부분이 규정의 형태를 지니며, 회원국을 거치지 않고 농업 부문 에 직접 적용된다.

2.2. EU 통합과정과 공동농업정책

2.2.1. 1950~60년대

초기 EU의 경제통합 추진 방식은 사전에 목표를 설정하고 이 목표를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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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계획을 세워 단계별로 실현해 나가는 형태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과도기간(1958~1969)의 설정이다. 로마조약은 12년간의 과도기간을 설정하고 관세동맹을 비롯해 이 기간 내 실현해야 할 공동시장 및 경제동맹의 내용을 상세하게 열거하고 있다. 과도기간은 4년 단위인 3 단계로 나뉘어 있으며 각 단계별로 EU 이사회와 유럽위원회를 비롯해 각 국들이 통합추진을 위해 담당해야 할 역할들을 명문화했다. 1960년대는 경 제통합의 기반을 확립하였던 시기로 성과 측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일례로 관세동맹은 당초 예정 기간을 1년 6개월 앞당겨 과도 기간이 끝나기 전인 1968년 7월부터 출범할 수 있었다.

1958년 스트레자 각료이사회에서 확립된 공동농업정책은 1960년 6개국 에 의해 채택되었고, 1962년부터 공동농업정책이 발효되었다. 1960년 6월 집행위원회에서 공동시장 기구에 대한 최초의 제안을 발표함으로써 농업 마라톤협상이 각료이사회에서 시작되었다. 협상을 거듭하면서 곡물, 돼지 고기, 가금육, 달걀, 쇠고기, 과실·채소, 포도주 등 각종 농산물에 대한 공 동시장 제도들이 탄생하였다.3 공동체 출범 초기였기에 회원국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63년 말 까지 6개 회원국 농산물의 85%에 대해 공동시장 제도가 적용되었다.

그러나 1965-66년 기간 공동농업정책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여 공동체 자체를 위협하기도 하였다. 1965년 3월 집행위원회는 1968년 7월 1일까지 공산품에 대한 관세동맹과 함께 공동농업시장을 완결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각료이사회는 이 시한을 준수하지 못했고 공동체는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공동농업정책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회원국들의 농업부문 지출을 통제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EU가 농업관련 지출에 대해 통제권을 갖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당시 집행위원회는 공동 농업정책을 운영하기 위해 공동체 차원에서 모든 비용을 조달하기로 결정

3 농업관련 이슈는 각료이사회에서 격론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공동

가격정책이 경제적인 고려와 함께 정치적인 타협의 소산임을 말해준다. 이때 부터 농업관련 각료이사회는 마라톤 회의라는 별명을 지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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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그리고 공동농업정책 예산은 각국 예산 통제를 받지 않고 공동체 의 자체 예산으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유럽의회는 예산결정권을 갖고 각료 이사회는 가중다수제로 예산을 채택토록 하였다. 이런 집행위원회의 안에 대해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강력하게 반발하였고 자국의 입장을 밀어붙 이기 위해 7개월 간 이사회에 출석하지 않는 공석 정책(empty chair policy)을 강행하였다. 그 결과 동 기간 공동체 차원의 어떤 정책도 발의되 지 못했다.

당시 벨기에 외무장관인 스파크는 1966년 1월 28일 룩셈부르크에서 회의 를 소집해서 프랑스 의견대로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합의를 하였다. 그 후 1966년 5월 농업정책 재정 부담에 대해 회원 국이 합의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이를 기반으로 이사회에서 합의가 이루어 짐으로써 농산물의 실질적인 공동시장제도가 달성될 수 있었다. 1968년 7 월 1일 창설된 관세동맹에서 공동농산물 시장은 그 일부가 될 수 있었다.

1968년 집행위원회는 과감한 농업개혁안을 발표하였다. 당시 집행위원 회의 농업담당 위원인 만스홀트의 이름을 따서 만스홀트 계획으로 불리는 개혁안은 지지가격을 낮추는 한편, 농장규모의 확대, 생산 근대화 및 유통 개선 등 구조개선에 그 취지를 두었다. 특히 EU 수준에서 농가를 선별적 으로 육성해 농지규모의 확대를 시도한다는 제안은 당시에는 지나치게 과 격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만스홀트의 개혁안은 이 후 농업 부문 구조조정 정책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지침으로 활용되었다.

단일가격에 기초하고 있는 공동농업정책은 기본적으로 변동환율제와는 양립될 수 없다. 만일 회원국들이 독자적으로 환율정책을 운영한다면 시장 왜곡의 가능성으로 인해 농업 분야에서의 공동시장 운영은 불가능해진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통화통합은 공동농업정책과는 긴밀한 관계 속에서 발 전되어 왔다. 공동농업정책에서 가장 강력한 견해를 표방한 프랑스가 통화 통합의 가장 열렬한 주창자라는 사실은 우연의 소치가 아닌 것이다.4

4 EU의 통화통합 역사를 보면 통화통합 관련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 물로 프랑스의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과 레이몽 바 수상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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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통합에 관한 논의는 이미 60년대 초반 벨기에 경제학자인 트리핀이 브레튼 우즈 체제의 내재적 모순에 따른 붕괴 가능성을 지적한 후 본격적 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두 가지 대안을 고려하였다. 그 중 하나는 자크 루에프를 중심으로 하는 금본위 주창자들에 의한 금본위제도로의 복 귀였고, 다른 하나는 지스카르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공동통화제도의 창설 이었다. 자크 루에프를 위시한 시장주의자들은 금본위로의 복귀를 강조하 였지만 국제통화제도를 금본위로 다시 복귀시키는 일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였다.

공동농업정책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서는 EU 차원에서 안정적인 통화정

공동농업정책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서는 EU 차원에서 안정적인 통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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