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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소련의 ‘어머니-노동자 모델’ 양육이념 이식

해방 후 소련군과 함께 북한지역에 들어와 정치권력으로 자리 잡은 김일성과 사회주의세력은 소련, 특히 스탈린시기 사회주의체제를 모델로 국가건설을 추진 하였다. 각종 사회제도 역시 소련의 사회제도가 모델이 되었으며, 여성과 가족 정책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더욱이 1960년대 초반까지 조선민주여성동맹(이하 여맹)의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김일성의 충실한 조력자였던 박정애는 정치세력으 로는 소련파에 속하며, 한국전쟁시기 스탈린상까지 받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등 스탈린시기 여성과 가족 정책을 북한지역에 구현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북한의 사회체제가 형성․발전되는 과정에서 김일성세력과 박정애가 주도했던 여성과 가족 정책은 한편으론 사회 안정화와 통제를 위해 가족 내 재생산 노동 이 여성의 고유한 역할로 유지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론 노동력 수급을 위해 생 산 노동을 일반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북한의 여성과 가족 정책은 소련의 여성정책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러시아혁명 시기 여성 볼셰비키들은 여성해방에 대한 치열한 논 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사회주의 여성상 구축에 직접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유력 한 여성 볼셰비키는 콜론타이(Kollontai)와 크룹스카야(Krupskaia)로 대표될 수 있다. 콜론타이는 당시 가장 강력한 여성해방론자로 볼셰비키 전통에 따라 여성 노동자와 농민을 변화의 기반으로 사고하면서도 노동자․농민으로서의 문제만 이 아니라 결혼․가족제도 등에 새로운 변화를 추구했다. 즉 여성의 전통적 역 할 변화를 모색했다. 한편 크룹스카야는 여성의 교육기회를 개선하는 문제와

‘어머니-노동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기 위한 사회적 제 조건의 개선을 추구한 여성해방론에 있어서는 온건론자였다. 이처럼 콜론타이의 신여성 모델과 크룹스 카야의 어머니-노동자 모델의 대립 논쟁은 결국, 콜론타이가 노동자 반대파 사 건으로 숙청되는 과정에서 콜론타이의 주장은 희석되면서, 이후 스탈린이 크룹 스카야의 여성론을 사회주의 여성과 가족정책으로 제도화하면서 어머니-노동자 모델은 소비에트 여성의 이상적 이미지로 굳혀졌다(차인순, 1992).

결국 남녀관계에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성의 문화적․심리적 억압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으며, 당 여성부서와 여성조직의 주요과업은 여성 의 계급의식을 일깨워 혁명과업을 이행하고 당에 충성하게 하는 것이었다(이온 죽, 1990: 171). 전통적으로 여성의 역할이라고 인식되어진 가사와 양육은 그대 로 여성의 몫이며, 거기에 노동자 역할이 중요하게 대두된 것이다. 전통적인 재 생산 노동인 출산과 양육 위에 ‘국가를 위한’ 생산과 혁명의 새세대 양육이라는 국가주의적 역할이 부가된 것이다.

크룹프스카야의 ‘어머니-노동자 모델’이념은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추진했던 후발 사회주의 국가에 이식되었고, 북한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컨대 1961년 11 월 16일 김일성은 전국 어머니대회에서 ‘자녀교양에서 어머니들의 임무’에 대한 연설을 하였다. 이 연설에서 어머니들의 임무에 대한 중요성을 밝히고, 어린이 교육과 교양에서 어머니의 책임성과 역할을 높이기 위한 방도들을 제시하였다.

또한 어머니들은 위생지식을 가져야 하며, 어머니가 어린이에게 주는 첫 교양이

잘됨으로서 그들의 성격과 습관, 품성이 좋아진다고 하였다(최민수, 1998).

이처럼 양육은 미래의 노동자이며 혁명가를 양성하기 위한 국가사업이고, 학 교와 가정은 이를 실행하는 구체적 공간이며 양육은 여성의 역할이었다. 가정에 서뿐만 아니라 대학교와 전문학교를 제외한 양육과 교육기관에서 ‘혁명적 사회 주의자’를 양성하는 주체가 대부분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북한을 비롯한 현존 사회주의는 여성에게 이중역할을 강제한 것이다. 더욱이 소련과 동유럽 사 회주의에 비해 여권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갈등을 경험하지 못한 북한정권은 소련과 같은 논쟁도 없이 체제안정화와 경제발전을 위해 ‘위로부터’, ‘강력하고 급속하게’ 어머니-노동자 모델을 여성에게 교육하고 강제했다(박영자, 2004).

나. 주체사상

이처럼 정권 수립 초기에는 북한의 양육이념은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국가의 이념을 그대로 수용하였으나, 1970년대에 주체사상이 확립되고 부터는 김일성의 교시를 근간으로 하여 양육이념을 재설정하였다. 김일성은 맑스-레닌주의의 일 반적인 사회주의는 혁명운동의 경험을 통해 자국의 특수성에 자주적으로 재구 성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게 된다.

주체를 세우는 것은 혁명과 건설의 모든 문제를 독자적으로 자기 나라의 설정에 맞게, 그리고 주로 자체의 힘으로 풀어가는 원칙을 견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교조주의를 반대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일반적 진리와 국제 혁명 운동 의 경험을 자기 나라의 역사적 조건과 민족적 특성에 맞게 적용하여 나가는 현 실적이고 창조적인 입장이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의존심을 버리고, 자기의 문제 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책임을 지고, 풀어가는 자주적인 입장이다.(조선노동당출 판사, 1967; 양옥승․오미경, 1995 재인용)

1976년도에 제정된 ‘어린이보육교양법’에서도 이와 같은 북한의 주체사상을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하여 위대한 주체사상을 지도사상으로 삼는다고 명시함 으로서 북한의 양육이념이 주체사상으로 재정립되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어린이보육공양법은 맑스-레닌주의를 우리나라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 조선로동당의 위대한 주체사상을 유일한 지도사상으로 삼는 다.(어린이보육교양법 제5조)

「사회주의교육에 관한 테제」(1977년)에서도 김일성은 북한만의 고유한 사회 주의 교육제도를 설파하였다.

우리나라 사회주의 교육제도의 력사적뿌리는 항일 혁명투쟁시기에 마련되었다.

우리는 항일혁명투쟁시기에 주체사상에 기초한 혁명적인 교육로선을 내놓고 그 것을 구현하여 독창적인 형식과 방법으로 교육사업을 진행하였다. 그 과정에 혁 명인재육성의 고귀한 경험이 창조되었으며 우리 당의 영광스런 혁명적 교육전통 이 이루어졌다. 항일혁명투쟁시기에 창조된 새로운 교육제도는 우리나라 사회주 의교육제도의 원형으로 되었다.……우리는 실생활을 통하여 그 우월상과 생활력 이 뚜렷이 확증된 우리나라 사회주의 제도를 더욱 공고 발전시키고 완성하여야 한다.(김일성, 1977)

북한 양육이념에 주체사상이 접목되면서 북한의 어린이는 공산주의 건설의 후비대이자 동시에 김일성과 당에 충성하는 주체형 혁명적 인간으로 육성되어 야 할 당위성이 마련되었다. 1976년 이래 표방해온 “국가는 어린이들을 「하나 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집단주의 정신으로 교양한다”는 기본 목표를 보다 구체화하여 오늘날에는 김일성 부자에 대한 ‘충성동이’, '효자 동이‘로 육아하는 것을 보육교양 정책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다음의 구절은 이 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조국의 미래이며 공산주의 건설의 후비대이며 우리 혁명 위엄의 계승자들인 어 린이들을 어려서부터 보육교양함으로써 그들을 김일성과 영광스러운 당중앙에 끝없이 충직한 주체형의 혁명적 새인간으로 키운다.(내외통신 48, 1993; 양옥승․

오미경, 1995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