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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북한 외교정책의 변화

냉전시대 동북아에서 미국․일본․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소련․중국․북한의 공 산주의 진영이 2개의 삼각관계로 대립하고 있었을 때, 북한은 김일성 정권하에서 공산 주의체제를 한반도 전역에 확장하려는 공세적 외교정책을 전개한 것으로 특징화 할 수 있다. 이같은 북한외교정책을 목표․전략․수단을 중심으로 한 기능적 특징과 대미․

일․중․러관계 차원에서 본 지역적 특징으로 구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13)

기능적 차원에서 볼 때, 북한은 '조선 및 세계 혁명'과 '민족 및 계급 해방'을 추구하 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은 '반제(反帝)․자주'의 대외관과 '자주․친선․평화'의 외 교이념하에서 사회주의 체제유지와 공산화통일 및 전세계 공산화를 양대 국가목적으로 설정한 후, 공산화통일에 보다 비중을 두었고, 정치적 정통성․경제적 번영․군사적 안 보․통일을 4대 외교목표로 추구하였다. 이같은 국가목적과 외교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북한은 외교원칙으로서 사회주의 국가들간의 연대성을 강조하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와 자주성을 강조하는 자주노선을 내세우고, 정치적 자주․군사적 동맹․경제적 보조 외교정책을 각각의 분야에서 추진하였으며, 협상과정에서는 의사협상과 경쟁전략 그리 고 강경한 공격전술인 벼랑끝(Brinkmanship) 전술을 구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3) 북한외교의 특징과 변화과정에 관해 허문영, 통일연구원,「북한외교의 특징과 변화 가능 성」,(2001) 자료에서 발췌하였다. 허문영은 김일성시대의 북한외교를 체제확장외교, 과도기 북한외교를 체제수호 외교, 김정일시대의 북한외교를 체제도약외교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지역적 차원에서 볼 때, 북한은 대중 협력적 동맹과 대러 보호적 동맹관계를 토 대로 한 대미균형(Balancing) 또는 핵무기개발을 통한 정면돌파(Breakthrough)전략과 대일 접근 및 적대 병행전략을 구사함으로써 명분과 실리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1990년 한․소수교와 1991년 소련붕괴, 1992년 한․중수교로 북방삼각관계가 동요하고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자, 북한은 경제난과 체제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에 북한은 1995년 '고난의 행군'과 1997년 '사회주의 강행군' 시기를 선포하고, 군사중시정책을 통 해 내부 체제결속에 주력함으로써 안정을 회복하였다. 이같은 과도기 북한은 외교정책 에 있어서도 체제수호외교를 적극 구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능적 차원에서 볼 때, 북한은 '반제․자주'의 대외관과 '자주․평화․친선'의 외교이 념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북한은 '새로운 국제질서의 수립과 유엔개혁,'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수립과 평화애호운동,' '국제주의적 원칙과 혁명적 의리' 강조 등을 통해 그 내용에 있어 체제유지를 위한 새로운 정책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북한은 국가목적의 중심을 체제유지에 두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보다 자주노선과 '3대 진지 강화론'과 같은 자력갱생노선을 강조하였다.

또한 지역적 차원에서 볼 때, 북한은 1994년 10월 북․미 기본합의문이 채택된 이후 대미관계 개선을 체제생존의 중심고리로 설정, 대미 편승(Bandwagoning)전략을 적극 추진하였다. 동시에 북한은 주변 4국의 대한반도 영향력 확대경쟁을 유발하는 유인외교 와 대중 군사동맹 및 대미 군사접촉을 통한 안보외교 그리고 경제난과 식량난을 극복하 기 위해 제한적 대외개방정책과 모든 국가로부터 지원을 서슴없이 받아드리는 원조외교 도 적극 추진하였다. 협상과정에서는 주어진 틀 내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진의협상적 자세와 문제해결전략 그리고 살라미(야금야금) 전술을 구사하는 모습을 북 한은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김일성시대에서 김정일정권시대의 변화과정이 북한의 외교정책은 목표 자체의 본질적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나, 단지 수단적 차원에서의 전술적 변화에 불과한 것 도 아님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은 외교정책에 있어 목표(국가목적과 외교목표) 내 비중상의 변화에 기초한 전략적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북한은 1998년 9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체제를 출범시킨 이후 강성대국건설 기치하에 대 외관계 개선에도 적극 나서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2000년 7월 북한은 러시아의 최고지 도자를 북․러관계 55년(구소련시대 포함) 역사상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하도록 유도하 여 무너진 북․러관계를 복원하였다. 중국과의 관계강화에도 적극 나서 2000년 5월과

2001년 1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2차례 방중을 통해 양국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또한 2000년 10월 조명록 군총정치국장을 김정일 위원장 특사자격으로 미국에 보내 클린턴 대통령과 대화케 한 후,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을 방북 초대하여 대미관계 개선 에도 적극 나섰다.

그리고 2001년 미국 부시행정부가 출범이후 미사일방어체제(MD)구축과 대북한 강경정 책을 구사하자, 북한은 러시아․중국과 함께 신 북방삼각협력관계 형성을 통해 대응하 는 한편 EU 대표단을 초청하여 유럽관계도 적극 개선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이 북한을 불량국가(Rogue State)로 규정하고 MD체제 구축을 일방적으로 진행시 키자, 러시아 중국 북한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북방삼각관계를 복원하는 모습을 보여주 고 있다. 2001년 7월 중국 장쩌민 국가주석은 모스크바를 방문,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 담을 통해 양국관계가 전략적 동반자관계임을 천명하였고, 8월 김정일 위원장이 답방차 원에서 모스크바를 방문, 북․러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관계 발전과 국제문제 공조를 강 조하였다. 그리고 9월 북․중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북한 중국 러시아 사이의 양자 정상 회담을 마무리함으로써 북․중․러 삼국관계가 전략적 동반자관계 또는 친선적 동맹관 계임을 대외적으로 과시하였다.

그러나 신북방삼각관계는 냉전기 북방삼각관계와는 그 성격에 있어 다소 차이가 있다.

냉전기 북방삼각관계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일방적 경제지원 중심의 군사적 동맹관계 특징을 지녔다. 그러나 최근 형성되고 있는 신북방삼각관계는 러시아의 시베 리아 개발의지, 중국의 사회주의 대국 건설의지, 북한의 경제강국 도약의지와 같이 실리 에 기초한 상호교류 중심의 경제적 협력관계 특징을 보다 많이 띄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미국의 MD 추진문제와 관련해서는 북한 중국 러시아가 안보적 차원의 공동 대응을 협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북한은 2001년 신년공동사설을 통해 "제국주의의 강권과 지배주의적 책동이 더는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국제사회의 대북 인권개선, 개혁․개방 확대 등 정책변화 요구에 대한 거부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자주권을 존중하는 나라와는 대외관계를 개선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 미․일 등을 비롯한 서방권과의 관계개선 등 국제무대 진출을 계속 확대할 것임도 시사하였다.14)

또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중국 상해 비공식 방문시(1.15∼20) 상해 발전상에 대해 "천 지개벽, 상상 초월" 등으로 극찬하고, "중국의 정책이 옳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

14) 「로동신문」, 2001년 1월 1일.

다.15) 그러나 북한은 강성대국 건설 방식으로 "새로운 관점과 높이에서 풀어나갈 것"을 제창하지만, 동시에 '사회주의낙원 건설'과 '종자 중시사상'16)을 제시함으로써 여전히 ' 우리식․주체식' 또는 '김정일동지식'을 강조하고 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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