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복천동 일대에 위치한다. 평면형태는 동장대가 있는 동래고등학교 뒤쪽의 망월산정에서 서북쪽으로 마안산을 거쳐, 서장대가 있는 동래 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 동래지역 시가지 중심의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부산지역의 성곽(城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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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 말각방형으로,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의 성이다.
동래읍성의 전신은 고읍성(古邑城)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옛 읍성이 해운포에 있으며, 동남은 석축(石築)이고, 서북은 토축(土築)인데 둘레가 4,130척이며 지금은 퇴폐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사(高麗史)』「병지(兵志)」에는현종 12(1021)년 동래군성(東萊郡城)을 수축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이 고읍성지는 수영구 망미동 구 국군통합병원 일대에 위치하는데, 이 일대는 사방이 산으로 막혀 있는 분지상의 지형으로 남동쪽으로는 바다와 연한 해상교통의 요지이자 동남 해안 왜구방비의 최전선에 해당된다.
2002년 병무청부지에 대한 동의대학교의 시굴조사에서 토성 연장 96m와 우물 4개소가 조사되었고, 2003년과 2005년도 경남문화재연구원의 시굴조사와 발굴조사 에서 판축토성벽 135m와 통일신라시대 건물지 2개동, 담장지 1개소, 배수로 2기, 온돌유구 2기, 고려시대 건물지 1개동, 도기․기와 매납갱군(埋納坑群) 1개소, 구하도 (舊河道) 및 제방 1개소, 추정 보도 잡석열 1기, 건물지로 추정되는 석열 4기와 구상 유구 4기, 폐와무지 5개소 등이 조사되었다.
성벽은 내외 협축(夾築)의 기단석축형판축토성(基壇石築型版築土城)으로 사질토와 점질토를 이용 기단부를 내탁식으로 다진 후 2단 할석으로 들여쌓기 한 폭 870cm~
1000cm에 이르는 초축기단이 확인되었다. 또한 초축기단의 상부로는 무너진 초축 성벽을 「L자」로 정지하여 그 위로 2단 할석으로 수직 쌓기 한 폭 870~920cm에 이르는 수축(修築)기단이 조사되었다. 외벽에는 직경 20cm의 나무기둥(木柱)과 틀을 길이 400∼435cm 간격으로 기단석렬(基壇石列) 사이에 설치하여 마사토와 점토를 교대로 다져 쌓는 판축(版築)용 영정주(永定柱) 흔적이 조사되었다.
초축과 수축기단 외곽에는 기단보축이 되어 있고 내측에는 너비 4~6m, 깊이 50cm정도의 구상유구(溝狀遺構)가 확인되었다. 한편, 통일신라시대 관련 건물지, 담장지, 배수로, 온돌유구 들은 모두 정남향 및 정동향으로 배치하여 성 내부를 계획적으로 구축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구하도(舊河道)의 경우는 인위적으로 굴착과 준설을 한 점과 바닥면을 수평으로 조성한 것으로 보아 집수지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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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그림 4. 동래 고읍성 성벽 전경
그림 5. 조선전기 동래읍성 고읍성지에서는 인화문토기와 중판 선문평기와, 중판복엽연화문수막새 등이 출토 되고 있어 초축 시기는 통일신라시대 후기 전반(8~9세기) 까지 올려 볼 수 있으며, 1차 수축은 현종 12년(1021) 때 동래군성(東萊郡城)을 수축하였다는 기록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토성의 폐성 시기는 『고려사』「병지」에서 보이는 박위(朴葳)의 동래읍성 축조기사와 구상유구에서 출토된 청자상감초문임신명(靑磁象嵌草文壬申銘) 접시의 제작시기(1332년)을 감안하면 1332년~1387년 즉, 14세기 중반 경으로 추정 되며 폐성 원인은 왜구의 침입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읍성의 초축 시기가 8세기대로 소급된다면 고읍성의 위치선정과 축조배경 그리고 현재의 동래 읍성으로 옮기기까지의 정치 사회적 배경의 해석이 주목된다.
한편, 동래읍성과 관련하여 원수 박위(朴葳)가 우왕 13년(1387) 8월 19일 축성에 착수하여 한 달 이상 걸려서 완공하였는데 석축으로서 둘레가 3090척, 높이 13척으로 우물이 6개가 있었다고 하는 『신증동국여지승람』기록과 세종 28년(1446)에 석축 둘레 3,092척, 높이 15척 등의 『경상도속찬지리지』의 기록이 보인다. 이 두 기록은 시기적으로 동래 고읍성과는 별개로 보이며 임진왜란 때 함락, 폐성된 조선전기의 읍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2002년 9월~12월에 걸쳐 복천박물관에 의해 조사된 복천동 304번지의 성곽유구와 관련이 있다.
조사된 성벽은 약간 북쪽으로 기운 동서방향으로 조사지의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길이 30m가 확인되었다. 체성의 상부 성벽석은 이미 훼손되었으나 기단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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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을 증명하고 주고 있다. 또한 1차와 2차 조사에서 칼 4자루 ․ 활 ․ 자기, 화살촉, 청동숟가락 10점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고 철제 찰갑, 투모 등 다양한 전쟁유물 이 출토되었다.
해자는 『단종실록』권2, 즉위년(1452) 8월1일조에 이미 성을 쌓은 경상도의 곤양, 기장, 동래, 고성, 거제는 해자를 파지 않았고 진해, 하동은 적대를 쌓지 않았고 전라도 홍양, 순천, 광양은 옹성을 쌓지 않았으니 청컨대 본읍으로 하여금 파고 쌓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라고 하는 것으로 볼 때 1452년 이후 가까운 시점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림 7. 후기동래읍성도 그림 8 후기동래읍성 성벽 실측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던 동래읍성은 영조 7년(1731)년 당시 동래 부사 정언섭이 1월 3일에 성터를 측량, 공사를 시작하여 같은 해 4월에 성벽을, 5월에 성문을, 7월 에는 문루(門樓)가 각각 완공되었고, 8월 19일에 낙성되었다. 이 때 쌓은 읍성은 둘레 17,291척, 여장 1318타(垜), 서문, 남문, 암문이 있고,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 (翼城)을 두고 문은 전문(洗兵門)과 후문(朱鳥門)이 있어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서문, 암문, 북문밖에는 옹성을 부설하였다. 축성에는 동래를 중심으로 한 양산, 기장, 김해, 울산, 언양, 밀양 등의 농민과 노비, 군인 등이 동원되었으며, 경상감사관할 64군에서 징발된 승군 7,091명, 동래의 동 ․ 서 ․ 남 ․ 북의 4소(所)의 사병 8,199명을 포함하여 총 52,003명이 동원되었다. 성내에는 수성창(守城倉)을 두어 미석을 보관하고, 수첩청 (守堞廳)을 두어 수성의 임무를 맡게 하였다. 이후 1735년에 각 5칸으로 된 보루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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