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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 글쓰기와 수사학

문서에서 장자 글쓰기와 그 활용 연구 (페이지 37-60)

『장자』 텍스트에 사용된 논리적 서술방식을 찾고 이것이 설득의 글쓰기로 어떻게 이어졌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장자』 텍스트가 쓰여진 당시의 글쓰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徐復觀은 “개인이 문자로 자기의 사상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은 대개 노자‧

공자의 시대 이후에 출현하여 전국시대 중기에 성행하였다”78)고 보았다. 김월회 도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글은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고 하면서, 설령 집필 된 시기가 전국시대라 하더라도 『논어』와 『노자』 등은 춘추시대의 사고를 바탕으로 한 춘추시대의 글이라 보았고,79) 『장자』의 경우는 전국시대의 글로 보았다.80) 김학주 역시도 입언의 글은 전국시대 말엽에 이르러서야 쓸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81)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전국시대 글쓰기의 특징이며, 이것이 장주의 글쓰기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보려면 무엇보다 먼저 당시의 시대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리라 보인다. 그리고 노장의 글쓰기에서 꼭 짚고 넘어가는 것이 바 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도의 개념이면서 또 언어에 대한 사유일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개념이라 언급한 탓에 장주는 언어를 뛰어넘는 표현에 대해 고 민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발현된 것이 바로 『장자』라는 책이기에 장주 의 사상과 언어관에 대한 분석 역시 필요하리라 보인다.

끝으로 『장자』의 논리적 서술방식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하기에 앞서 서 양의 고대의 수사학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논의를 진행하

78) 徐復觀, 앞의 책, p.150.

79) “전국시대 제자백가의 글쓰기가 있기 위해서는 그보다 앞선 시대의 글쓰기 경험이 요청되었고, 이에 『논어』와 『노자』가 전국시대의 글쓰기보다 ‘논리적’으로 앞선 자리에 놓이게 됐다. 그 결과 시간적으로는 전국시대에 형성된 텍스트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둘을 춘추시대 글쓰기의 산물로 보는 관념이 지배적이게 되었다.” (김월회, 「『論語』와 『老子』의 글쓰기 분석-논증 방식을 중심으로 고찰」, 『중국문학』 제51집, 2007, p.3)

80) 김월회(2008), 앞의 논문, pp.4-5 참고.

81) 김학주, 앞의 책, p.88 참고.

는 데 보다 수월하리라 판단된다. 물론 앞서 서양의 고대의 수사학이 현대의 수 사학과 다른 개념임을 언급하였으나, 구체적으로 어떠한 개념들을 포함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이에 Ⅱ장에서는 이 세 가지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면서 Ⅲ장을 위한 초석을 다지고자 한다.

1. 시대 상황과 전국시대의 글쓰기

장주는 생졸연대도 역사적 기록도 분명치 않다. 다만 사마천의 『사기‧노자 한비열전』을 통해 “장자는 蒙 지역의 사람으로, 이름은 周이며, 일찍이 몽의 漆 园의 관리였고, 梁惠王, 齊宣王과 같은 시대”82)의 인물임을 알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장주의 시대 상황은 어떠하였으며 이것이 제자백가서의 서술에 어 떠한 특징으로 나타나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주나라 왕실이 점차 쇠퇴하여 風人들이 채집을 그만두게 되었고,……志士들은 세 상의 폐혜를 구제하고자 온갖 궁리[神慮]를 다하고 자기의 지식과 견문을 동원하 였다. 그리고 제후들도 바야흐로 서로 다투며, 유세하던[遊學] 선비들을 후한 대접 으로 불러 모았는데, 어떤 이들은 군주에 영합하고 자기주장을 실행하려 하였고, 그래서 다시 이설[異家]을 극력 배척하면서 자기가 쥐고 있는 것을 중요한 원리[要 道]로 여겼으니, 논의와 주장이 종횡무진하고 저작이 구름처럼 일어났다.83)

魯迅의 언급으로 보아 전국시대에는 숱한 전쟁으로 인해 여러 제후국이 난립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상을 내세우는 志士들 역시도 이곳저곳에서 우후 죽순처럼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즉 패권을 쥐게 된 권력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제자백가들의 유세를 원하였고, 난세를 극복하고자 하는 志士들도 그들 나름의 이유로 유세를 펼쳤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유세는 자연 글쓰기 방식에도 영향을 주어 각기 다른 글쓰기

82) “莊子者, 蒙人也, 名周. 周尝为蒙漆园吏, 與梁惠王、齐宣王同时.” (司馬遷, 앞의 책, p.2143.) 83) 魯迅, 앞의 책, p.46.

양상으로 나타났음은 당연하다. 이에 대해 김학주는 “제자들은 동주의 겸병전쟁 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사회의 격변, 곧 종족제도의 파괴와 이에 따른 정치‧경제 의 성격 변화 등의 와중에서, 제각기 서로 다른 집단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 들이기 때문에 그들 사상의 표현 방식도 그 집단의 성격에 따라 성향이 다를 수 밖에 없었다”84)고 말한다.

그러면서 김학주는 제자백가들이 대변하고 있는 집단의 성격에 따라 사상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랐다고 언급한다. 곧 ‘유가의 문장은 귀족적이고 형식을 중시 하였으며, 묵가는 문장과 내용 및 표현이 질박하고, 법가의 문장은 현실적이고 논리가 명확하며, 마지막으로 도가의 문장은 환상적이고 아름답다’85)고 분석하였 다. 물론 글쓰기 방식이 사상의 영향을 받았을 개연성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으 나, 이를 명확히 구분하여 제시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재고가 필 요하다.

단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전국시대에 다양한 사상이 출현할 수밖에 없 었던 상황과 그에 따라 글쓰기 방법 역시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김월회(2008) 역 시도 그 어느 때 보다 다양한 글쓰기 방법이 전국시대에 등장하였다고 설명하면 서86) 『장자』 글쓰기에 대해서는 “우언의 글쓰기를 주축으로 하는 변증과 논설, 布陣의 글쓰기를 부정의 방식으로 활용하였다”87)고 보았다.

그렇다면 『장자』에서 우언은 단순히 문학적 효과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다 른 제자백가들과 경쟁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설득하기 위한 글쓰기의 방법으로 사용되었음이 보다 더 분명해진다. 이러한 견해는 아래의 杨照의 글에서도 드러 난다.

84) 김학주, 앞의 책, p.88.

85) 김학주, 위의 책, pp.88-89 참고.

86) “전국시대에는 글쓰기 면에서도 ‘戰國的’이었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유형의 글쓰기가 등장하여 중원의 담론적 패권을 놓고 경쟁하였다. 『장자』‧『한비자』 등에서 도드라진 우언이나, 『맹 자』를 돋보이게 해 준 ‘論斷의 연쇄’를 통한 논지의 전개, 『순자』 등에 보이는 묘사 대상의 장황한 나열을 통한 의사의 표현, 그리고 『순자‧정명』이나 『묵경』 등에서처럼 엄밀한 개념 정의와 정치한 논증을 토대로 글을 구성하는 변증 등, 이들은 선행시기의 『논어』, 『노자』,

『묵자』에 구현된 글쓰기와 서로 길항하면서 가히 ‘글쓰기의 전국시대’를 구가한다.” (김월회 (2008), 앞의 논문, pp.4-5)

87) 김월회(2008), 위의 논문, p.5.

춘추시대의 묵가가 묵변의 전통을 열었고 전국시대에 그 갈래 가운데 하나가 명 가로 이어졌다. 이들은 어떻게 표현할지, 어떻게 설득할지, 어떻게 상대의 논리를 깨뜨리고 이길지에 대해 갈수록 정교한 전략과 전술을 구상했다. 장자의 친구 혜 시가 바로 이러한 전통에서 무척 뛰어난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장자』에 등장 하는 수많은 중요 관념은 혜시와 장자의 논리 문답과 대화에서 드러난다. 만약 장 자가 이 웅변 시대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웅변의 기술을 충분히 장악하지 못했다면 그는 이와 같은 내용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88)

杨照는 춘추시대에 시작된 글쓰기의 방법을 바탕으로 전국시대에는 웅변의 글쓰기가 등장하여 서로 자신의 사상을 놓고 경쟁하는 각축장이 되었다고 보았 는데, 이는 김월회(2007)의 견지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名 家가 등장하면서 설득에 있어서 이전 시대보다 훨씬 더 정교함을 요구하게 되었 으며, 그 선두주자로 장주의 벗인 惠施(BC.370?∼BC.309?)를 꼽았다. 그가 위에 서 장주는 ‘다양한 웅변 기술’을 구사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비단 김월회(2008)가 언급한 우언의 방법만이 아니라 다른 설득의 방법들 역시 『장자』에 나타남을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춘추시대와 달리 전국시대 제자백가서에는 확실히 논쟁 그리고 웅변의 말하 기와 어울리는 글쓰기가 그 주축을 이루었던 것 같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아 울러 춘추전국시대라 불리울 만큼 두 시대는 시기상으로는 연이어 있는데, 이처 럼 글쓰기에서는 확연히 다른 특징을 보인다. 전국이 전쟁통이라고 일컬어질 만 큼 혼란했던 춘추전국시대, 그중에서도 유독 전국시대에 설득의 글쓰기가 발전하 게 된 까닭을 앞서 김학주는 다양해진 사상의 영향 때문으로 보았고, 그 개연성 을 무시할 수 없다고도 언급하였다. 그런데 이는 관학이 사학으로 전이되는 시류 와 만났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라는 아래 서경호의 주장도 타당해 보인다.

전통적 기록에 의하면 서주 시기에 모든 지식은 왕실에 의해서 독점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 지식을 다룰 사람들의 교육도 왕실에 의해서 독점되었다고 한다. 그렇

88) 杨照, 앞의 책, pp.57-58.

기 때문에 패권의 시대가 시작될 때에는 사실상 교육받은 인재를 구하기가 어려웠 을 것이며, 사교육은 수요가 일어나면서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했다.89)

즉, 춘추시대를 겪으면서 권력이 분산되기 시작하였고, 전국시대에는 각 군주 마다 자신의 성향이나 정책에 맞는 지식인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

즉, 춘추시대를 겪으면서 권력이 분산되기 시작하였고, 전국시대에는 각 군주 마다 자신의 성향이나 정책에 맞는 지식인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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