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2월 29일에 일련의 경제 법령에 관한 작업을 끝낸 뒤, 하원은 헌
법 개정 사안에 착수했다. 당시 전통적인 폴란드공화국으로 돌아가는 국명 개정이 단행되는 동시에, “사회 정의 원칙을 실현시키는 민주 법치 국가”가 강조됐다. 소련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연맹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조항이 헌법 전문에서 삭제됐다.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 조항은 모든 정치 정 당으로 바뀌었으며, 동시에 이들 정당은 “국가 정치 형성에 있어 민주적 방 법으로 영향을 끼치는 목적으로 폴란드공화국 시민의 자유적이고 평등한 원 칙하에” 결집된다고 표현됐다. 또한 사회주의와 계획 경제 조항도 헌법에서 삭제됐다. 이런 개정이 도입되기 전에 이미 의회가 새로운 헌법의 준비 작업
폴란드 체제 전환 연구: 원탁회의에서 대화와 타협으로 이룬 폴란드 체제 전환
에 착수했다. 12월 7일에 상원과 하원은 각기 별개의 헌법위원회 2개를 발족 시켰다.
12월에 있은 헌법 개정은 근본적으로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3개월 후에 탄생하는 헌법의 기본 골격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쿠리아 선거로 구성 된 하원이, 과연 헌법과 같은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릴만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당시 제기된 의문은 차치하고라도, 하원에서의 단 한번만의 선 거로 사회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완전한 국 가 주권을 가지는 민주 국가의 탄생은, 모든 국가 기관의 원칙적 재건이라는 엄 청난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당시 마조비에츠키 수상뿐만 아니라 자유노 조 진영의 그 누구도, 이런 재건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개론조차 제공하지 못했다. 이보다 더 최악은 출발점이 비슷해 보이던 경제 사안과는 반대로, 사회주의 구조를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에 관해 아무런 계 획도, 준비도 없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 과정은 내 부 논리성을 상실한 채 혼란스런 방법으로 진행됐으며, 그 진행 속도는 대립 하는 요인들을 나타내주었다. 국제 정세의 변화, 폴란드 공산당의 붕괴, 그리 고 바웬사가 선두에 서서 지휘하던 자유노조 급진파가 정부에 대한 공세를 강화시켜나가면서, 진행 속도가 빨라졌다. 반면 구체제(특히나 군대와 정보기 관)의 반란 가능성에 위협을 느끼며, 공산당의 노멘클라투라를 대신할 유능 한 인력풀의 부재를 우려하던, 마조비에츠키 정부 진영이 보여준 태도와 원 탁회의 방식에 지나치게 얽매인 점 등은 진행 속도를 지연시켰다. 당시 장관 이자 마조비에츠키 수상의 측근중 하나이던 알렠산데르 할 등은 후에 다음 과 같이 인정했다. “1990년 초에 정부가 계획한 민주적 개혁 일정을 만약 국 민들이 알았더라면, 확신하건대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언제 무엇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의회와 대통령 선거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치러질 것인지, 정부가 분명히 밝혀야했다.”
새 정부가 폐쇄하기로 결정한 첫 번째 국가 기관은 정보부도 검열기관
(1990년 봄에 가서야 폐쇄된다)도 아닌, 종교청이었다. 가톨릭교회와 국가 행
정 기관 사이에서 분쟁을 조정하던, 이런 기구를 폐쇄하는 것은 물론 마땅하
다. 하지만 1989년 당시 이 기관이 가지는 의미는 극히 미미한 것이고, 새로
운 시대의 시작을 국민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매우 극적인 국가 기관의 변 천 시도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가톨릭의 상태는 양호했다. 이런 시도는 구체 제의 주요 요새였던 2개 부처 즉, 국방부와 내무부의 내부 변화로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조비에츠키 정부의 초기 6개월 동안 이들 부서에 취해진 조치는, 단지 1989년 11월 23일자의 하원 결의로 시민전경자원예비대를 폐쇄 한 것뿐이다. 더군다나 이런 조치도 정부가 발의한 것이 아니고, 후의 검열 제 폐지와 마찬가지로 시민위원회 소속 의원들의 제기로 시작됐다. 시민전경 자원예비대의 폐지 사안에 대한 투표 결과(찬선 238, 반대 7, 기권 34)를 보 다시피, 계약적인 하원에서조차 무력 부서의 개혁안에 있어 정부가 상당한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줬다. 1990년 정부가 제출한 차기 예산 원안을 보면, 검열 기관에 5백억 즈워티가 할당됐다. 하지만 시민위원회 원 내교섭단체가 반대로 이런 예산 책정이 저지될 수 있었다. 1990년 1월에는 심지어 내각사무처가 새로운 “민주적인” 검열 기구를 창설한다는 안조차 작 성했다. 마조비에츠키 수상의 최측근에 속하던 내각사무처 차관은 “언론 범 죄로부터 국가를 보호해야한다”라고까지 주장했다.
마조비에츠키는 국가 기관의 변화가 가져올 결과뿐만 아니라, 공산당에 의 한 국방부와 내무부 독점을 깨는 인적 변화도 겁냈던 것이 확실하다. 마조비 에츠키는 이들 부서의 차관직 임명을 두고 오랫동안 숙고했다. 키쉬짴 장군 은 후에 악의적인 만족감으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마조비에츠키에게 차관 직 임명을 수차례 건의했으나, 수상은 “침묵하거나 아니면 반대했다”. 1990년
3월 7일에 와서야 비로소 시민위원회 출신 상원 의원이 내무부 차관에 임명
됐다. 이렇게 해서 당시가지 공산당이 전적으로 독점하던 내무부에서 자그마 한 틈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4월 3일에는 국방부에서도 이와 비슷한 변화 가 단행되며, 자유노조 출신들이 군인이 아닌 민간인으로서 최초로 차관에 임명됐다. 1990년 4월 6일에 하원이 통과시킨 3개 법안(경찰 법안이라 불리 던)이 내무부 변화를 촉진시켰다. 이 법안으로 시민전경대가 경찰로 명칭이 변경되고, 폐지되는 정보부 자리에 국가수호청이 신설됐다. 이 법안이 발효 되며 당시까지 시민전경대 대원들이 경찰로 전환됐다. 반면 정보부 요원들은 개인 심사를 거친 후에 신설되는 국가수호부에 이전됐다. 2만2천5백 명의 정
폴란드 체제 전환 연구: 원탁회의에서 대화와 타협으로 이룬 폴란드 체제 전환
보부 요원 중 1만4천 명이 신규 채용되고, 나머지 요원들은 사임하거나 55세 이상의 요원을 포함해서 자동으로 정년퇴직했다. 개별 심사에서 긍정적으로
판정된 1만 명 이상의 요원들은 국가수호부의 근간 요원들이 됐다. 1990년 7
월 6일에 수상의 발의로 하원이 키쉬짴과 시비츠키 장관을 해임했다. 그리고
는 이들을 대신해 코즈워프스키가 내무부 장관에, 해군 중장으로 당시까지 폴란드군사교육원 원장으로 있던 코워쥐에이찤이 국방부 장관에 임명됐다.
이것은 중대한 변화였으며, 이와 동시에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는 군대, 경찰, 보안 기구 개혁의 시작에 불과했다. 야루젤스키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 다. 5월에서 6월로 넘어가는 시기에 마조비에츠키가 키쉬짴과 시비츠키의 해 임을 자신에게 알릴 때, “그 순간 난 결심했다. 나 또한 내 장관들과 함께 물러나겠다고. 이 결심을 마조비에츠키에게 말했다. 난 정말이지 이런 말을 하길 원치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위협감으로 인해, 부분적으로는 “국가 질 서”를 수호해야한다는 확신 하에, 마조비에츠키 정부는 하급 장교들을 진급 시키는 방식으로 폴란드 군대 장군단의 일부라도 바꾸자는 주장을 절대적으 로 거부했다. 만약 이렇게 됐다면 군대로부터 더한 충성을 받았을 것이고, 군대가 직면한 새로운 임무를 실현하는데 더 알찬 준비를 했을 것이다. 게다 가 혁신적인 성격을 띠는 장교단으로의 변화도 없었다. 코모로프스키 차관이 국방부 산하 교육부장에 대령을 임명하자, “국방부 지도부로부터 만장일치의 절대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장군들은 이 결정에서 군대 직책에 대한 급진 적인 혁명 조치를 인지했다.” 이외에도 정보기관을 새로이 세우자는 밑으로 부터의 요구에 대해서도, 마조비에츠키 정부는 유능한 인력 부족을 이유로 내세우며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외세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획득하는 국가나, 독재 정권을 종식시키는 국가에서 이런 조치들이 실행에 옮겨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려하지 않았다.
인적 변화에 있어서 정부가 보여준 온건한 자제심으로, 공산주의 시대의 사회 분열이 청산되리라는 기대는 환상으로 드러났다. 실제에 있어서도 새로 운 체제에 대한 지지자와 반대자로의 분열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마키아 벨리의 저 유명한 표현대로 변화의 완만함은 오직 분할을 더욱 강화시킬 뿐 이었다. 공산당 소속 당원과 그 지지자들에게 정보부 요원의 심사 과정, 정
부 행정 기관과 사법부에서의 인적 변화는 정치 보복을 뜻하는 것이었다. 권 좌에 새로 오른 사람들 입에서 자주 “유능한 전문가, 하지만 당원”라는 언사 가 튀어나왔다. 이는 인원을 선발하는 방식이 예전 공산주의 시대와 비교할 때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실상에 있어 자유노조 정부 또한 새로운 노 멘클라투라를 만들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상실당 한 공산주의 체제 관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평가는 물론 이해할 수 있 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마조비에츠키 정부가 단행한 인적 변화의 규모, 특 히 그 속도는 혁명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를 들면 1990년 6월까지 49 명의 주지사중 단지 23명이 자리에서 물러났을 뿐이다. “굵은 선” 전략이라 불리던 마조비에츠키 내각의 인적 타협 정책은, 자유노조 진영 내부에서 충 돌과 격돌이 일어나는 주요 원인중의 하나로 작용했다. 공산주의 체제의 정 보기관에 대해 마조비에츠키 정부가 보여준 취약함 내지는 무능함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다음가 같은 사실로 알 수 있다. 즉 내무부와 국방부 산하 정 보국 문서고 서류들이 처한 운명을 그 증거로 들 수 있다. 이들 문서고에 보 관 중이던 비밀문서들에 대한 대대적인 파기 작업이 1989년 여름부터 시작 되고, 이는 곧 공공연한 비밀이 됐다. 1990년 1월 26일에 선거신문이 이에 대한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한편 이에 대한 유일한 반응은 내무부 중앙문 서고 책임자와 정보부 부국장의 기자회견이었다. 이 자리에서 양인은 모두 문서 파기는 규정에 따라 제한적으로 실시되고 있으며, 진행 중인 내무부 구 조 조정에 의거한 것이라며 기자들을 안심시켰다. 그 후 수개월동안 언론은 다수에 걸쳐 여러 쓰레기장에서 타다만 정보부와 내무부 문서 조각들이 발 견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런 문서 폐기 작업은 연속적인 금지 명령에도 불
구하고 1990년 말까지 계속됐다. 1990년에 국가수호청 산하 문서고에서 8만3
천여 개의 파일이 사라지고, 국방부 정보국에서는 1945-1988년에 관련된 파
일 4만여 개가 사라졌다.
1990년 1월에 마조비에츠키 정부는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앞당기기로 결정
했다. 체제 변화에서 보여준 완만함과 비교할 때, 이 결정은 내부 정책 분야 에서 마조비에츠키 정부가 거둔 최대의 성공작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체제 시절에 지방자치단체 역할을 하던, 기존의 민족위원회의 회기가 1992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