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1일에 정부 대변인 우르반이 TV에 출연하며, 원탁회의에서 야루젤스
키에게 대통령직을 위임하기로 정한 사실을 밝혔다. 그 결과 전국적인 항의 물결이 일어나며, 자유노조 측도 공식으로 항의했다. 공식 협정문에는 사실 상 야루젤스키 장군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으나, 원탁회의 당시 폴란드 공산당 대표부는 국가 원수에 누가 임명돼야하는지를 대놓고 드러냈으며, 자 유노조 진영은 처음에는 반대하나 실질적으로는 이 요구에 동의했다. 자유노 조는 단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는 사안에 집중했을 뿐이다. 선거 전부터 시작된 사회 분위기가 급진적으로 바뀌어가고, 농민당과 민주당 진영의 동요 사태로 인해 야루젤스키 장군의 후보 선정이 시간이 갈수록 문제되기 시작 됐다. 이와 동시에 장차 정부의 수상직은 자유노조 진영이 차지해야한다는 의견이 등장했다. 6월 9일에 키쉬짴과 만나는 자리에서 이미 미흐닠이 이런 제의를 비추며 야권의 수상 후보로는 게레멬이 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폴란드 공산당 지도부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당시 그 어떤 핵심 권력의 상 실을 상상조차 하지 않던 키쉬짴은 이런 제의를 무시했다. 6월 16일에 열린 공산당 비서국 회의에서, 수상직을 자유노조 진영에게 넘긴다는 안에 대해, 바카를 제외한 국원 전체가 단호히 반대했다. 바카는 이런 가능성이 필수불 가결한 사항은 아니나,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다고 밝혔다. 정치국 국원인 레이코프스키는 바카보다 한발 더 나아가, 1차 선거 후 야권 지도부에게 “우
리들의 대통령, 당신들의 수상”라는 안을 제안하자고 주장했다. 이 사안에 있어 레이코프스키는 “동지들보다 훨씬 앞질러나갔다.” 이런 제안은 당시 폴 란드 공산당 지도부 그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명백했 다. 선거후 폴란드 공산당이 지지한 “대연합” 구상은, 자유노조에게 최대로 양보해서 부수상과 몇몇 장관 특히 경제와 관련한 장관직을 양보하는 것으 로 계획됐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가 신정부 구성 이전에 끝내기로 정해짐에 따라, 공산 정권은 대선에 총력을 기울였다. 자유노조 지도부를 완화시키는 결과를 목적으로, 첫 번째 조치로 가톨릭과 대화를 가지기로 결정됐다. 6월 10일에 키쉬짴 장 군은 동브로프스키 대주교에게, 만약 야루젤스키 장군이 “대통령에 선출되지 않는다면 국정 불안이라는 위기가 초래될 것이며, 그 결과 체제 전환의 모든 일정이 중단될 것입니다. 야루젤스키 외에 누군가 당선되더라도 보안 기관이 나 군대로부터 복종을 받지는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3일후 계속된 만 남에서 친정 쿠데타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장군은 대답했습니다. 그렇다 고. 쿠데타는 키쉬짴과 시비츠키 장군을 직위해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
다. 따라서 2차 선거후 조속한 정권의 안정, 특히 대통령 선거가 매우 중요
합니다. 만약 야루젤스키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하지 못한다면 드라마가 시작 될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경고가 다른 경로를 통해 시민위원회 지도부에게 전해졌다. 이런 방식으로 농민당과 민주당 지도부에게도 위협이 가해졌다. 7
월 9일에 폴란드 공산당의 원내교섭단체 위원장인 오줴호프스키는, 3일전 하
원의장에 선출된 농민당의 코자키에비츠에게 “소장파 대령들의 반란은 충분 히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키쉬짴과 다른 폴란드 공산당 대표자들이 사용한 공갈과 협박은 매우 효과 적인 것으로 드러나며, 6월 23일에 시민위원회 원내교섭단체의 첫 번째 회동 에서 대통령 출마 포기가 결정됐다. 이런 사실은 바웬사가 선거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명백히 밝혔다. 야루젤스키의 대통령 후보 출마에 관해 바웬사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말했다. “나를 포함한 우리들 중 그 누구도 고르 바초프나 호네커와 대화를 갖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이런 대화가 어떻게 진 행되는지, 조약이나 블록이 어떤 식으로 운용되는지조차도 우리는 알지 못합
폴란드 체제 전환 연구: 원탁회의에서 대화와 타협으로 이룬 폴란드 체제 전환
니다. 이제 우리는 상원과 하원에 의원 단체를 가지게 됐습니다. 이들은 타 부 시 되던 모든 주제를 가까이에서 관찰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서 언제인가 는 우리들도 이런 것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자유노조 위원장이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즉 폴란드의 지정학적 존재는 야권의 대통령 출 마와 같은 과격한 행동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유노조 지도부의 온건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야루젤스키가 선거에서 백 프로 당선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폴란드 공산당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농민당 과 민주당 소속 의원 다수가 장군을 선출할 의향이 없다는 점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야루젤스키 출마에 반대하는 국민 여론이 점차 격렬해져갔 다. 6월 30일에 반공주의 노선의 급진 단체들이 “야루젤스키는 퇴진하라”라 는 슬로건을 내걸고 시위를 벌였다.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물로 향하던 시위 대를 경찰이 해산시켰다. 같은 날 폴란드 공산당 중앙위원회 13차 총회 전반 부에서 야루젤스키 장군이 예상치 못하게 대선 출마를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그 이유로 군인과 인간의 명예가 “인위적인 정치와 상궤를 벗어난 방법을 이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 대신에 키쉬짴 장 군을 추천했다. 중앙위원회 위원들이 “야루젤스키 장군이 재고할” 것을 간곡 히 요청하는 예외적인 결의안을 채택할 정도로, 야루젤스키의 출마 사퇴 선 언은 충격적이었다.
바웬사가 이 돌발 상황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바웬사는 키쉬짴에게 자신 이 지지한다고 밝히며, 7월 4일에 있을 회의에서 시민위원회 상하원 의원 일 부의 지지도 약속했다. 야루젤스키보다는 키쉬짴이 폴란드 공산당에서 그 위 상이 훨씬 약했으므로, 바웬사는 정부 진영에서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 분열 이 더욱 심화되리라 기대했다. 또한 미흐닠도 자신의 구상을 구체화하는데 이 위기를 이용했다. 즉 7월 3일자 선거신문의 첫 면에 “당신들의 대통령 우 리들의 수상”이라는 제명 하에 미흐닠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서 미흐닠
은 “정부 여권 진영중의 개혁파와 민주 야권과의 연합”을 주장했는데, 이런
연합은 “폴란드 공산당 후보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수상직과 정부 구성은 자
유노조 측에 양보하는 타협”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같은 날 파리 를 방문 중이던 고르바초프의 고문인 바딤 자그와딘이, 폴란드에서 탄생될지
도 모를 자유노조 정부에 대해 모스크바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다 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 사안에 대한 결정은 폴란드 동지들 내부의 문제이 다. 우리는 폴란드에서 선출되는 그 어떤 정부와도 관계를 계속 유지할 것이 다.” 그로부터 수일 후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바르샤바조약 기구 회의에서 소련공산당 서기장인 고르바초프 자신이 “무력 또는 무력 위 협의 사용”을 제외시키며, “동지 당들의 독자적인 존중”의 필요성에 대해 말 하며, 이런 태도를 간접적으로 확인시켰다.
이런 발표는 이제 브레즈네프 독트린이 종말을 고했으며, 소련이 더 이상 은 폴란드 국내 사안으로 인해 군대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점을 확실히 밝 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정부에 야권 참여 문제를 최초로 공개적으 로 제기한, 미흐닠의 기사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자유노조 일부 인 사들이 미흐닠의 제안을 비난했다. 특히 마조비에츠키는 “천천히 서두르자”
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선거신문 편집장인 미흐닠과 논쟁을 벌였다. 마조비에 츠키로서는 예외적으로 자신의 정치 철학을 알기 쉽게 표현한 이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 진영에 경제 위기를 벗어날게 할 확실한 개념으 로서 국민들에게 대표할 수 있는 정책이 있는가. 이런 정책이 있다면 과연 즉시 실행이 가능한 것인가. ... 권력 참여를 재촉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야 권의 책임을 파괴시킬 수도, 심지어는 통치에 대한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책 임을 전혀 건설할 수도 없게 만들 수도 있다.” 야권의 최대 약점중의 하나인 경제 정책을 갖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마조비에츠키의 견해는 원칙적으로는 타당했다. 모줼레프스키가 말한 대로, 자유노조 장관들은 자유노조에 적대적 인 행정부 내에서 기능하는데 커다란 문제에 직면하며, 몇몇 부처(내무부, 외 무부, 국방부라고 마조비에츠키가 밝힘)는 공산당이 완전 장악하리라는 견해 도 맞는 말이었다. 단지 이런 의견을 가지던 정치인이 6주후에 가서 자유노 조 정부의 수상이 되기로 결정한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이런 결정을 내리기 전에 마조비에츠키는 자신의 견해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천천히 서두르자”라는 슬로건은 변함없이 계속해서 자신의 모토로 삼았다. 이것은 전후 폴란드에서 최초로 세워지는 비공산 내각의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 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