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자아정체성 개념에 관한 철학적 이해
1. 자아정체성 형성의 기반이 되는 자기진실성(Authenticity)
테일러의 ‘자기진실성’ 논의는 그 개념에 대한 독일 철학자 헤르더(Johan Gottfried Herder)의 해석에서 출발한다.
헤르더는 우리들 각자는 자기 나름대로 인간적일 수 있는 근원적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제기하였다. 헤르더식으로 말하면, 각자는 자기 고유 의 ‘척도’를 가지고 있다.7) (중략) 이제는 인간적일 수 있는 특정한 방법이 존재하며, 그것이 바로 나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나는 결코 다른 사람의 것 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방식으로 내 인생을 살아가도록 소명을 받 은 것이다. (중략) 내가 나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하면 나는 내 인생의 요점 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하여 무엇을 의 미하는가에 대해 파악하지 못하는 셈이다(Taylor, 1991/ 송영배 역, 2001:
44-45)
위의 인용문에 따르면, 자기진실성 개념은 ‘우리에게는 인간이 되는 자신만 의 고유한 방식이 있음’을 전제하고, 우리에게 그 방식에 따라 ‘자기 자신
7) 개개인은, 말하자면 모든 자기의 감성적 느낌들을 서로 묶어 주는 고유한 느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유한 척도를 가지고 있다(Herder, Ideen, ⅶ.Ⅰ., in Herders Sämmtliche Werke, Bd. ⅩⅢ, hrsg. von Bernard Suphan, 15Bde.(Berlin:
Weidmann, 1877 ~ 1913): S. 291, Taylor, 1991 : 45 재인용).
에게 진실한’ 삶을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삶은 요점을 잃어버린, 인간답지 못한 삶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기 자신의 방식에 따라 의미 부여되는 삶,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고유성에 기초하여 형 성되는 정체성에 대한 강조는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나’를 강조하는 우리의 공동체 중심적 문화에서 상당히 급진적인 태도로 보일 수 있으며, 나아가 ‘어딘지 모르게’ 위험하고 불편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불편함과 두려움으로 인해 ‘나에게는 인간이 되어가는 나만의 방식이 있다’
는 주장을 거부하는 것 또한 그리 바람직한 것 같지 않다. ‘인간이 되는 자 신만의 고유한 방식이 있다’는 주장에는 어딘지 모르게 동의하게 되는 어 떤 힘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기진실성 개념이 타인의 시선과 요구에 집착하지 않고 나만의 방식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것을 요구한 다는 점에서 자아정체성에 관한 심리학적 접근이 갖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비친다. ‘나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인간이 되어가는 삶’은 과연 어떠한 삶을 의미하는 것일까?
어느 오후, 나는 투명한 창이 한 벽면을 차지하는 카페의 2층 창가에 앉 아 창밖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바쁜 걸음으로 길을 가는 사람, 옆 사 람과 대화하며 웃고 있는 사람, 거리에 펼쳐진 매대 앞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사람, 가게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 피곤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 등.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그들의 삶을 떠올리게 된다. ‘저 사람은 어딜 그리 바삐 가는 것일까?’, ‘저 둘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일까?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신이 나서 박장대소를 할 정도로 재미있게 나누고 있는 이야기는 어떤 내 용일까?’, ‘이렇게 쌀쌀한 날,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려면 얼마나 추울 까? 사람들이 그 전단지를 곧 바닥에 버리는 것을 보면 씁쓸하겠지? 저걸 다 나눠주면 저 사람은 어디로 갈까? 그가 돌아가는 그 공간은 따뜻한 곳 일까? 그렇지 않다면 참 녹록찮은 삶을 살아가고 있겠구나..’ 등. 그러다 문 득, 그들을 관찰하는 당신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당신은 따뜻한 카페에 앉아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를 즐기고 있다. 창밖의
세상은 그렇게도 분주히 흘러가지만, 당신은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비올라 선율만큼이나 찬찬히 그 순간을 즐기고 있다.
바로 이때, 상당히 흥미로운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나에게 현실은 바 로 이 한가한 순간이지만, 창밖의 그들에게는 각자가 서 있는 그 자리가 현실이 된다. 내가 나의 삶을 인식하고 경험하며 살아가듯이, 그들도 각자 의 삶을 인식하고 경험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물리적인 공간을 공유하지만, 그 동일한 공간 안에서 나는 나의 삶을,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아간다. 나 는 그의 삶에 포함될 수 있고, 그도 나의 삶에 들어올 수 있지만, 나의 삶 에 포함된 그는 나에게 인식된 그이며, 그의 삶에 포함된 나는 그에게 인 식된 나이다. 나는 그의 삶을 살 수 없고, 그는 나의 삶을 살 수 없다. 우 리가 모든 삶의 조건을 맞바꾼다 하더라도 나는 나의 새로운 삶을, 그는 그의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의 삶은 타인의 간섭으로부터 분 리된 나의 공간이다. 이 공간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유지되고, 내가 세상 을 떠나는 순간 아무도 손 댈 틈 없이 사라져버린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며 유일한 것이다. 내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는 내가 느낄 수 있는 무게 의 전부이지만, 그 역시 동일한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나와 동일 한 무게와 가치를 갖는 개별적인 존재가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에 이렇게 나 가득하다는 생각에 이르면 세상이 경이롭게 다가온다.
이렇게 우리는 같은 물리적 공간을 공유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이 삶은 우리 각자가 살아가는 자신의 고유한 세계이며, 인식할 수 있는 세상 의 전부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중심에는 내가 있다. 타인, 사물, 공간, 시간 등 모든 것은 나의 인식과 경험을 통해 나의 삶의 범주 안으로 들여 진다. 즉, 나의 삶, 나의 세계는 나의 사고와 감각의 결과물이다. 그것은 내 가 보고 느끼는 것들, 내가 생각하는 것들, 내가 의미 부여하는 것들로 이 루어진다. 나는 나의 삶 이상을 살 수 없고, 나의 삶 이하도 살 수 없다.
나는 그저 나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한 카페의 2층 창가 자리에서 길거리 의 행인들을 관찰하며 그들의 삶을 상상하는 것 역시 그들이 살아가는 세
계와는 아무런 관련 없이 나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물론 테일러가 말하는 ‘인간답게 살아가는 나만의 방식’이 이와 같은 개 별적 인간 각자가 갖는 고유한 삶의 경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자기진실성’ 개념 그 자 체에 대한 실체 없는 불편함과 두려움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진실성 개념은 ‘공동체의 가치와 무관하게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가치와 개인적 가치의 문 제를 떠나 보다 근본적으로 인간과 그 인간의 삶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에 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와 그는 결코 동일할 수 없는 각자만의 삶의 경험과 방식이 있으며, 그것은 내가 혹은 그가 타 자를 무시하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그가 서로 다 른 개별적 존재라는 실존적 삶의 조건에서 파생하는 인간 삶의 조건과 관 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기진실성이 공동체적 가치와 개인적 가치 중 어느 하나만을 강 조하는 개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자기진실성이라는 개념에 대 해 문화적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테일러는 ‘자기진실성’ 개념의 등 장배경과 그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 역사적으로 고찰하는데, 이것을 살펴보 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모종의 답변을 제공할 것이다.
테일러에 따르면(Ibid, 11), 전근대의 인간은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존재 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의 거대한 고리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정하였 기에 모든 것의 중심에는 그 거대한 존재의 고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고리의 한 부분으로서 존재하는 인간은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 그 고리를 유지시킴으로써 자기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았고, 그 고리와 보다 견고히 연결됨으로써 자신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처 럼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존재의 고리로부터 독립하는 것은 전 근대의 인간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고리를 존재적 근 원으로 삼는 이 질서는 근대에 들어서며 부정되었다. 베버(Max Weber)가
‘탈주술화(disenchantment)’라고 명명한 흐름 속에서 인간은 이제 자신의
존재의 기반이 되었던 절대적인 기준인 거대한 고리에서 독립하기를 원하 였고, 그 결과 존재의 거대한 고리라는 초월적인 기준에서 떨어져 나와 개 별적인 존엄성을 가진 근대의 개인(個人)이 되었다. 근대의 인간은 절대적 의미의 상실을 받아들였고, 이제 자기 자신을 의미부여와 가치판단의 기준 으로 삼게 되었다. 근대 이전에 인간 외부에 위치했던 도덕규범의 축이 근 대의 탈주술화 과정을 통해 인간 내부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Ibid, 41-42;
Taylor, 1989: 17;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테일러는 그의 저서 『불안한 현대사회(2001)』에서 인간 내부로 이동한
‘도덕규범의 축’이 오늘날 왜곡된 형태를 갖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그에 따 르면(Taylor, 1991/ 송영배 역, 2001: 11-13, 26), 현대 서구인들은 개인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가치와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질서를 거부함에 따라 자 기 자신에게만 지나치게 몰두하는 편협한 개인주의적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각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의미를 갖게 됨에 따라 모든 가치가 축소되고 동등해지는 상대주의가 현대 서구사회의 강력 한 특성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 어떤 삶도 의미를 갖지 못 하게 되는 곤경을 겪게 된 것이다.
여러 당대의 비판가들은 이와 같이 도덕적 주관주의에 빠져 가치를 상실 해버린 현대 문화를 비관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테일러는 도덕적 주관주 의에 대해서는 이들과 함께 비판하면서도 현대 서구 문화에 내재되어 있는 또 다른 근대정신의 회복 가능성에 주목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현대 사회에서 자기실현과 같은 개념들 뒤에 숨어 있는 도덕적인 힘이다. 일단 자기실현을 일종의 이기주의나 도덕 적 해이로, 또는 더 힘들었고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되었던 과거 시대와 대비 하여 그것을 그저 자기도취에 불과하다고 일축해버린다면, 우리는 이미 문 화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옆길로 빗나간 셈이다. 현대 문화를 경멸하는
“비관론”이 바로 이런 중요한 관점을 놓치게 만든 것이다. 물론 오늘날 도 덕적 해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오직 우리의 시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설명해야 할 것은 우리 시대에만 고유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문제이다(Ibid, 200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