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교육학적 함의
1. 자기진실성의 재해석: 자기 이방인화(Self-Defamiliarization)
테일러에게 한 개인이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진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본 연성과 독자성을 진실하게 마주하고 그것을 명백히 표현해내는 것을 의미 한다. 스스로에게 진실한 개인은 자신의 본연성과 독자성, 즉 자신이 추구 하는 선과 가치를 담은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세상과 자기 자신을 해석하 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 해석과 이해의 과정을 통해 개인의 자아정체성이 형성된다. 바로 그 자아정체성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는 것이 자기진실성이 다.
테일러는 이러한 자아정체성의 형성을 위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지도록 요청한다. 그에 따르면, 자아정체성에 대한 철학적 탐색은 이 질문을 던짐으로써 시작되고, 이 질문에 답을 함으로써 전개된다. 따라서 학교 현장에서 이와 같은 탐색으로서 자아정체성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학생들로 하여금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진지하 게 추구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아이들로 하여금 이 질문을 스스 로에게 던지게 하고, 이를 추구하도록 할 수 있을까? 교실에 앉아 있는 아 이들에게 “너는 누구냐?”를 물으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나는 누구인가?”
를 고민해 보는 과제를 내주면 되는 것일까? 중요한 것은 그 질문을 진지 하게 받아들이는 것, 즉 그 질문에 답을 할 수밖에 없는 자리로 아이들을 이끄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테일러는 정치철학자이기 때문에, 교육적 맥락에서 이 질문을 던지는 방 식, 혹은 개인을 이 질문의 자리로 이끄는 방법 등에 관해 일차적으로 관 심이 없고 구체적으로 논의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 질문을 탐구하는 데에 있어 유의해야할 한 가지를 강조할 뿐이다. 그는 그 질문에 대해 ‘내 마음 대로’ 혹은 ‘내가 원하는 대로’ 답을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 에 귀를 기울이고 그 진실한 목소리를 명백히 표현하는 방식으로 답을 하 도록 요청한다. 따라서 어떤 답을 하든지 그것이 ‘진정으로 나의 진실한 답
인지’를 다시 묻고 반성하는 과정이 요청된다. 우리는 어떻게 아이들로 하 여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진실로 궁금해 하게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언제 자신의 답이 진정으로 진실된 것인지 되물을 수 있을까?
아실라는 자신의 글, “For the Stranger in My Home: Self-Knowledge, Cultural Recognition, and Philosophy of Education(1995)”에서 테일러의 논의를 교육학적 관점으로 재조명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답을 암시받을 수 있다. 그는 테일러가 주장하는 ‘진정한 자기 이 해’의 의미를 재해석함으로써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테일러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진술에 대해 반성하고 그 진술이 타인과의 대화로부터 어떤 영향 을 받는지 반성해봄으로써 그 진술의 일관성을 파악하고 그 진술의 진실성 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아실라는 테일러의 이 생각이 ‘유용’하다 고 본다. 하지만 아실라는, 만약 그 진술에 일관성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진정한 자아’를 이해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다고 주장 한다(Arcilla, 1995/ 곽덕주 외 역, 2010: 351). 아실라는 다음과 같이 이를 정리한다.
나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들이 서로 모순되고 진정성이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는 경우를 한 번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이러한 자각을 어떻게 기술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자각 때문에 나 자신, 즉 총체적인 나 는 내가 배운 진정성이 결여된 인식의 언어, 즉 갈등하는 정체성을 표현하 는 언어를 회피하려고 하는 어떤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Ibid, 351).
위의 아실라의 말처럼, 내가 인식하고 있던 나의 모습이 진정한 나의 모 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생각과 감정을 느끼게 될까? 자각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우리가 그 자각의 순 간을 반기거나 무덤덤하게 넘어가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혼란스러움 과 답답함, 명확히 표현해낼 수 없는 것에서 오는 불편함과 불안함 등 여 러 감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우리는 문득 우리가 ‘갈등하는 정체성을 표현 하는 언어를 회피’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메타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그 자각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 그 자각을 못 깨달은 척 외면해버 리거나, 일관되지 않은 진술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그것이 자신의 모습 이라고 결론 내려버릴지도 모른다. 그 ‘일관성 없고 불안정한 상태’를 마주 하는 일의 불안함과 불편함을 견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실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중의 대부분은 진정한 자아에 대해 보다 일관된 이해와 인식을 위 한 탐색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그러한 자각을 매우 특별한 지적 곤란 (aporia)의 순간으로 여길 것이다. 만일 그러한 순간이 자기 이해를 위한 수 단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적 곤란을 그저 파괴적인 것으로 여길 것이 다(Ibid, 351).
위에서 아실라는 바로 그 불안함과 불편함의 순간을 ‘지적 곤란(aporia)’의 순간으로 본다. 그는 우리가 혼란스럽고 힘든 지적 곤란의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느냐에 따라 그 순간은 우리 자신에게 파괴적인 순간이 될 수도 있고, 우리가 더 나은 자기이해로 나아가는 발판이 될 수도 있다 고 주장한다. 물론, 그 순간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전자에 해당될 것 이다. 아실라는 이와 같은 지적 곤란의 상태가 우리를 ‘진정한 자아에 대한 일관된 이해와 인식을 위한 탐색’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서술한다.
지적 곤란의 상태가 진정한 자아에 대한 탐색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는 아래에서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어 그 의미를 보이고 자 한다.
예를 들면, 타자를 통해서 나 자신을 ‘남성’이며, ‘아시아계’이고, ‘교수’일 뿐 아니라, ‘건강하고 친절한 사람’이라고 부르도록 배운다. 그러나 담론의 어느 순간에라도 그러한 용어들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갑자기 나에게 의심스러운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남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진정으로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나는 이 용어가 가리키는 특징으로 나를 규정하도록 원 하는가? ‘아시아계’라는 용어는 인종을 말하는가, 문화를 말하는가? 이것은 누구를 위하여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하나의 정의로 사용되고 있는가? 친 절과 같은 ‘미덕’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이 드는 순간 나는 나에게 그러한
용어를 가르쳐 준 타자들이 혹시 나의 불안을 덜어 줄 수도 있을까 하고 희망하면서 그들에게 호소하는 것으로 그치기 쉽다. 그러나 그러한 타자들 조차도 그 말이 어떤 명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로부터 배운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 가? 그들의 언어를 통해서 내 자신 안에서 인식하도록 요청받았던 그 의미 있고 진정한 자아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나에게 한때 그렇게나 중 요했던 그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지금 나는 타자들이 어떤 사람으 로 인정해 주기를 원하는가? 나는 누구인가?(Ibid, 354)
지적 곤란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을 “나는 누구지?”와 같은 질문으로 이끈 다. 누군가 그에게 그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혹은 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고 했기 때문이 아니라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겠다’라는 사실을 자각 한 순간 그가 느끼는 불안함이 그를 그 질문의 자리로 이끈다. 내가 가진 나에 대한 이해가, 나의 존재를 구성하던 의미체계가 한 순간에 무너질 때 우리는 낯설어진 우리 자신의 실존 앞에 두려움을 느끼며 묻게 된다. “도 대체 나는 누구인가?”
이를 아실라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나의 진정한 자아는 이젠 인식할 수 없는 이방인으로 나타난다. 즉, 나 자 신에 의해서도 또 나의 의미 있는 타자에 의해서도 분명하고 뚜렷하게 규 정되기 어려운 존재로 나타난다(Ibid, 351).
아실라에 따르면, 내가 규정했던 나의 의미는 사라지고, 나는 내 앞에 인식 할 수 없는,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이방인으로 서 있다. 아실라는 우리 가 낯선 자신과 마주할 때 불안정성을 느끼고, 그로인해 불안함을 느낄 것 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 불안함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여기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 불안함을 유발하는 낯선 이방인 같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그는 이를 자 기 이방인화(self-defamiliarization)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교육자들이 자기 이해에서 겪는 지적 곤란의 순간을 자아에 대해 보다
분명하고 진실한 정의에 도달하기 위한 예비적인 순간 정도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의 신비로움을 보다 진실하고 정 직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계기로 지적 곤란 자체를 받아들여 그것을 학생들 의 내면에 진작시키려고 든다면, 자기 이해의 언어에 투자하는 교육적인 노 력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신비로움은 우리 각자의 고유한 이름 속 에 새겨져 있다. 우리의 자아는 인식 가능한 것 이상의 무엇을 지니고 이 다. 이러한 지각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이해는 해결을 기다리는 문제가 아니 라는 것, 그리고 우리 자신이 어느 수준에서는 규정되지 않는 존재여야만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첩경이다(Ibid, 521).
위에서 아실라는, 지적 곤란의 순간에 낯설어진 자신을 마주하고 스스로에 게 던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규정되지 않는 이방인’이 며, 이 순간은 ‘규정될 수 없는 낯선 존재’로서의 자신을 인정하고 이해해 나아가는 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자기 자신 에 대한 이해는 테일러의 주장처럼 언어로 명백히 표현될 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이처럼 ‘규정되지 않는 신비로운 존재로서의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 일 때 가능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아실라가 테일러의 자기진실성 개념을 재해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아실라는 이 재해석이 데리다(Jacques Derrida)를 비롯한 해 체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언어에 대한 해체적 관점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밝 힌다. 그들은 이상적인 명료성과 검증된 의사소통, 도출된 합의를 권장하는
‘과학적인’ 경향의 철학과 물질적 불투명성 혹은 무의식적인 의미부여와 같 이 미확정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드러내는 언어적 속성에 관한 ‘문학적인’
접근의 철학이 균형을 이루어야 함을 주장하는 학자들이다. 그들은 언어가
‘과학적’ 경향의 철학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의 사유를 위해 필요한 재 료이자 관습적 지원체제임을 인정한다. 다만, 그와 동시에 ‘문학적인’ 철학 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언어가 그 사유를 사고의 주체를 포함한 누구에 의 해서도 완전히 정의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우리의 사고를 사고되지 않 은 채 노출시킨다는 점 또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체적 관점에서 볼 때, 언어는 불확정성을 내포한다(Ibid, 352-353). 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