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소녀-되기의 시간성과 복수화된 주체
4.2. 악무한적 일상성의 반복과 탈정체화의 역설
1990년대 말 배수아의 소설들은 앞서 해체된 가족과 도시의 공허 속에서 변경될 수 없는 삶의 조건을 확인한 소녀소년들이 자라나 마주하게 된 보다 더 극한의 현실조건들을 그려낸다.228) 유년기의 기억과 꿈 사이를 헤매던 소녀소년들의 형상은 도시의 현실 속에 존재하는 소외된 청년들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그 사이에서 비루한 직업적 삶과 폭력의 문제가 중점적으로 가시 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1990년대 말에 발표된 작품들이 이전 의 작품들과 완전한 단절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버려짐’에 관한 소 녀고아의 상처와 불안의 심리는 더욱 직접적으로 여성청년들의 훼손된 삶과 신체의 문제를 통해 극화된다고도 볼 수 있다. 소녀고아들은 자라서 “가족 을 갖지 못한 독신여성”229)이 되고 그 안에서 다시금 타인들과 분리된 삶을 살아간다. 때문에 이 시기 배수아의 소설은 후기산업사회의 청년들의 허무 와 소외를 증상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8년에 출간된 소설집 심야통신에 실린 작품들은 소녀고아나 사촌 및 또래관계의 청년들에 관한 배수아의 지속적인 주제가 무엇보다 도시와 꿈과 폭력이라는 주제로 형상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인 면모를 보인 다. 첫 소설집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에 등장한 청년들의 모습과 유사성 을 가지면서도 훨씬 더 계층적으로 취약한 존재로 형상화된 청년인물들은 벗어날 수 없는 도시의 일상 속에서 자신의 몸 안에 뿌리박힌 ‘병적인 것’
들을 감각한다. 특히 여기서 도시의 공간은 기억 속의 ‘먼 곳’인 유년기적 장소와 대비를 이루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이때 여성들의 신체와 그 사이에 번지는 ‘전염’의 이미지들은 유년기의 기억과 도시생활 사이를 오가는 폭력 의 메커니즘을 드러낸다.
228) 근대적 가족 개념이 해체되고 있다는 위기의 감각은 1990년대의 잠재적 불안 이기도 했다. 이혼율의 증가와 가부장 위상의 변화에 대한 불안의 정동은 대중 문화의 재현에서 지배적인 감수성으로 나타난다. 1998년의 IMF 이후의 경제구 조 변화 속에서 한국사회는 이러한 위기를 현실로서 직면한다. 1996년, 1997년 의 한국사회의 ‘아버지 신드롬’ 및 ‘공주 신드롬’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강
준만, 한국현대사 산책―1990년대편 2권(3당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인물과
사상사, 2006.
229) 김양선, 「빈곤의 여성화와 비천한 몸: 천운영ㆍ배수아의 작품을 중심으로」, 여성과 사회 15, 한국여성연구소, 2004, 158면.
「나의 첫 개」에서 ‘나’의 유년기에 대한 기억과 자라난 현재의 삶은 모두 공주의 환상으로 유지될 수 없는 신체적 폭력으로 나타난다. 과거 어린 ‘나’
는 친척들의 집을 전전하며 어른들에게 ‘늦된 아이’로 여겨진 채 방치당한 기억을 가지고 있으며, 성인이 된 후에는 길거리를 오가며 매춘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어린 시절 ‘멘스’를 할 때는 집밖으로 쫓겨나 개집 앞에서 지내야 했던 ‘나’(의 몸)은 친척들에게 혐오스럽고 불결한 대상으로 여겨진다. 소설 에서 붉은 피의 이미지는 소녀의 몸 전체를 은유하는 동시에 소녀를 낳은 부모에 대한 소문과도 이어지는데, 이때 ‘나’의 신체에 흐르는 ‘새빨간 피’는 아버지를 찔러 죽인 어머니의 뱃속으로 전해진 아버지의 ‘피’와 연결되고 있다. 이는 앞선 배수아의 소설에 나타난 ‘유전적 결함’을 상기시키는 것으 로 「나의 첫 개」에 나타난 불온한 피는 혈연관계를 타고 흐르는 부계가족 의 계통성을 드러낸다. 소설 속에서 피의 이미지는 소녀인 ‘나’의 몸, 부모 의 살인에 대한 소문(“새빨간 피가 홍수처럼 골목에 넘쳤다는군.”), 기르던 개의 죽음을 가로지르며 전염, 확산된다. 「나의 첫 개」는 혈연적 가족주의 및 대 리양육의 상황 속에서 버려진 소녀가 거리의 부랑을 거쳐 끝내 정신병원으 로 이어지는 과정을 불확실한 진술의 구조를 통해 전달함으로써 가족-사회 구조에서 타자화된 존재들의 불안과 고립감을 잔혹하고도 환상적으로 그려 낸다. 이처럼 바람인형(1996)에서 보여준 유년기의 동화적 환상은 심야 통신(1998)과 그 사람의 첫사랑(1999)에 이르면 폭력과 죽음의 환상으 로 채색되는 경향을 보인다.
다소 어둡고 암울한 빛을 띠는 1990년대 말 배수아 소설의 변화는 1997 년 IMF 이후의 사회적 우울감 및 세기말의 불안한 분위기를 환기하며 다소
‘사회학적 시선’으로 확대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230) 심야통신에 수록된
230) 물론 이 ‘사회학적 시선’의 확대는 작품의 주된 경향의 변화를 일컫는 것이 다. 실제로 배수아는 특정 시점 이후 자신의 문학에서 사회학적 관점이 생긴 것 이라기보다는, 최초의 작품을 쓸 때부터 이를 염두에 두었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사회계급문제는 한국과 같은 와일드한 경쟁사회에서는 문화의 어떤 분야 에서든지 스며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 저는 최초의 작품을 쓸 때부 터 이 문제를 항상 염두에 두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교적 초기작 에 속하는 바람인형에서 갑자기 ‘유한계급’이란 단어가 튀어나와서 몹시 당황 스러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것은 ‘프롤레타리아’나 ‘결혼시장’처럼 내 게는 일반적인 단어였습니다. 나는 항시 주인공들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표현해 왔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도리어 당황했어요.” 최인자‧채윤정, 「배수 아를 만나다」, 여/성이론 18,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8, 217면.
소설들에 등장하는 도시는 잠들어있는 꿈의 공간으로 나타나며, 어둠에 뒤 덮인 밤의 도시에는 잠들지 않은 채 꿈을 꾸는 남자와(「건전한 부르주아의 도 시」), 그와는 반대로 악몽을 꾸기 위해 꿈의 사원으로 떠나는 여자(「장화 속 다리에 대한 나쁜 꿈」)가 살아간다. 밤의 도시에서도 여성청년들은 항상 “거 리의 청소부”가 되어 매춘을 하거나, 백화점 여점원으로 일하면서 남자들에 게 섹스를 강요당하고 버려진다. “블랙스트리트를 자생시키지 않는 구조”를 가진 ‘건전한 부르주아 도시’의 사람들이 각자의 몸 안에 “불가사의한 기생 충을 자생시키”231)고 있을 때, 사회의 하층부에 놓인 소녀들의 신체는 강요 된 섹스, 임신, 폭력에 노출되며, 이는 가난, 열병, 장애, 광기, 죽음의 모티 프와 끝없이 교차하고 있다.
1990년대 당시는 아니었지만 2000년대 초중반 배수아의 소설들을 여성주 의적 관점에서 읽어낸 일부 비평가들은 배수아가 90년대의 기성 여성작가 들과 달리 여성인물들의 존재조건을 ‘빈곤’의 문제를 통해 그려낸 점에 주 목하기도 했다.232) 그중에서도 일요일의 스키야키 식당(2003)은 배수아의 소설 중 빈곤의 문제를 가장 첨예하게 드러낸 것으로 평가되지만,233) 앞서 언급했듯 배수아의 소설에서 빈곤(계층)의 문제는 주변화된 소녀들이 느끼 는 타인들과의 ‘격차’, 보다 직접적으로는 1998년 이후 출간된 소설들에 나 타난 여성들의 현실조건으로서 이미 제시되었던 요소라 할 수 있다.234) 앞 의 절의 분석이 시간을 구조화하는 방식에 있어 소녀들의 기억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주체와 시간의 ‘복수성’ 문제에 주목하였다면, 이 절에서는 여성들
231) 배수아, 「건전한 부르주아의 도시」, 심야통신, 해냄, 1998, 29-30면.
232) 김양선, 앞의 글.
233) 대표적으로 권오룡은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을 IMF 사태 이후의 풍속화로 읽어내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돈과 가난의 문제, ‘한 순간의 위기로 무너져 내 리는 아슬아슬한 삶’의 문제가 사회적 문제의 전경(前景)으로 부각된 가장 최근 의 계기는 IMF 사태의 체험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은 IMF 이후 한국 사회의 그로테스크한 풍속화이자 풍자적 보고서로서의 의미 를 갖는 것이기도 하다.” 권오룡, 「비하(飛下/卑下)의 상상력이 우리에게 묻는 것-배수아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문학과사회 2003 여름, 858-859면.
234) 이것은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랩소디 인 블루의 소년소녀들까지 소급 되는 문제이다. 초기의 ‘공주 판타지’를 그린 소설들이 공주인 소녀와 그렇지 못 한 소녀인 ‘나’의 사회적/심리적 격차가 만들어낸 동화였듯, 랩소디 인 블루
에서도 중산층인 ‘나’를 둘러싼 부자 사촌 윤이, 일하기 위해 대학을 그만둬야만 하는 신이, 정비소에서 일하는 경운 등의 사촌/또래 관계 사이의 계층적 격차는 중요한 요소로 제시된다.
취약한 현실조건과 연동된 일상적 시간의 ‘반복성’에 초점을 맞춰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이르는 배수아 소설의 변화지점을 가늠해보고자 한 다.
1990년대 말에 발표된 배수아 소설에서 청년세대의 주인공은 기본적으로 결혼을 하지 않은, 비정규직 여성으로 그려진다. 당대의 표현대로라면 ‘싱글 여성’에 해당하는 이러한 인물들은 기혼 남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거나 무 감하거나 폭력적인 연인과 소모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 시기 소설들 에서 연인이 되는 남성들의 모습 또한 바람인형에 나타난 소년들과는 확 연히 다르다. 관료제사회의 위계와 자본주의적 성공을 일정 부분 체현하는 듯한 도시의 남성들은 여성들을 잠시 동안의 성적 대상으로 도구화하거나, 결혼제도로 편입시켜 스스로의 소유로 만들고자 하는 남성권력을 드러낸다.
「1999년, 네덜란드 모텔을 떠나며」와 「여점원 아니디아의 짧고 고독한 생 애」에 등장하는 남성들이 고압적인 태도로 연인을 도구화하는 폭력을 비교 적 직접적으로 체현하고 있다면, 「허무의 도시」, 철수와 같은 작품들에서 연인들은 별다른 특징이 없이 표준화된 청년의 모습으로 ‘무례한’ 폭력을 체현한다.
등단작인 「천구백팔십팔 년의 어두운 방」에 나타난 청년들의 건조하고 불 안정한 현실과 비교할 때, 소설 「1999년 네덜란드 모텔을 떠나며」에서 눈 에 띄는 것은 주인공이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 처해있다는 사실이다. 소설 속 스물아홉 살의 재택근무자인 ‘나’는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아니”235)지 만 최소한의 생계유지를 위해 삽화일을 한다. 그러나 언젠가 네덜란드 호텔 로 떠나겠다는 꿈을 꾸던 ‘나’는 1997년 가을의 어느 날 강물에 버려져 죽 게 되고, 1999년이 되어서야 물속에서 깨어난다. 강물 아래서 깨어난 ‘나’는 과거의 연인이었던 남자를 찾아가지만 남자는 2년 전에 죽었다는 여자의 말 을 믿지 않고, 2년 전과 다름없이 필요에 따른 섹스 행위만을 요구한다. 결 혼한 적은 없으나 임신한 적이 있었으며, 남자에게 웨딩드레스의 값을 요구 하다가 버려진 채 타인들에게 벗은 몸을 촬영 당하고 유기된 ‘사라’(‘나’)는 자신을 “살해당하는 게 어울리”는 “구형 사이보그”와 같은 존재로 느끼게 된다.
235) 배수아, 「1999년 네덜란드 모텔을 떠나며」, 심야통신, 해냄, 1998, 59면.
이하 소설 본문의 직접인용은 이 판본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