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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아랍의 봄 이전까지 비교정치학에서 중동 국가들의 사례는
‘생존에 성공한 권위주의체제’로 다루어져 왔다. 권위주의체제 연구로 저명한 바바라 게디스(Barbara Geddes)는 2003년 자신의 저서에서 이집트와 시리아가 군부 지배와 일당 지배 그리고 개인 지배라는 이른 바 지배의 3개 유형을 공유하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이들 두 개 국가의 권위주의체제를 가장 장기간에 걸쳐 존속하는 삼중 혼합형(Triple Hybrid) 권위주의체제로 진단한 바 있다.88) 2011년 2월 이집트의 무 바라크 정권이 민중들의 시위로 허망하게 붕괴됨으로써 이집트의 사례 는 게디스의 이론이 적용될 수 없는 것으로 판정받았다. 하지만 시리아 의 아사드 정권은 아랍의 봄 열풍과 내전의 소용돌이를 용케 견디며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88) Geddes, Paradigms and Sand Catles: Theory Building and Research Design in Comparative Politics, pp. 74~83. 권위주의의 체제의 유형화를 시도한 이 책에 서 게디스(Geddes)는 군의 지배와 일당 지배, 개인 지배라는 이념형을 설정하고 체제 붕괴에 저항력을 갖는 것은 일당 지배라고 주장했다. 일당 지배는 설령 당 내부에 균열이 존재하고 당 집행부에 적대적인 파벌이 존재하는 경우에도 당원들이 당으로부터 이탈하기보다는 집행부에 협력할 때 얻는 이익이 더 크다고 판단하게 되므로 내부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게디스의 유형화는 조셉 라이 트(Joseph Wright), 잔 테오렐(Jan Teorell), 나타샤 에르조우와 에리카 프란츠 (Natasha Erzow and Erica Frantz) 등 연구자들에게도 전수되었는바, 이들은 권 위주의 체제가 갖는 제도적 특징에 주목하기보다는 정치 행위자가 권력이나 영향력 에 접근하는 정도를 분류의 기준으로 삼았다. 제이슨 브라운리(Jason Brownlee) 역시 권위주의 체제의 지속성을 지배 정당과 관련지어 설명한다는 점에서는 게디스 와 유사하다. 하지만 게디스와 달리 그는 역사적 경로의존성을 중시하면서, 지배 정당이 창설될 당시 엘리트들 사이의 대립에 주목하는 가설을 제시했다. 체제 형성 기에 엘리트 내부의 대립이 해소될 경우, 창설된 지배 정당이 엘리트들 사이의 이해 를 조정하는 장으로서 기능하게 되며, 따라서 지배 계층의 일체성이 유지되고 결과 적으로 권위주의 체제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제고된다는 것이다.
1. 역사적 배경
가. 아사드 권위주의 체제의 성립과 특징
1946년 시리아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 등장한 정권들의 평균 수명은 1년이 채 안 되었다. 그러나 1970년 11월 하페즈 알아사드 (Hafez al-Assad)가 권력을 잡으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그는 1967년 중동 전체를 충격 속에 몰아넣었던 6월 전쟁 당시 국방부 장관 직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전쟁 패배의 책임을 문민 정권이 추진한 국내 우선 정책 탓으로 돌리면서 정권과 대립했고 그의 주장이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 취임 후, 군을 장악하고 경쟁자를 권력에서 밀어내는 데 성공한 하페즈 아사드는 이후 30년 동안 집권하면서 시리아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다.
그가 추진한 다양한 개혁 조치들은 비록 정당성에 있어서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혼란스럽던 시리아의 정국과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사실 시리아는 하페즈가 집권하기 전부터 거듭되는 쿠데 타와 권력 투쟁으로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관료제에 기초한 국가 기반 과 이를 뒷받침하는 인프라들이 비교적 국가 전역에 걸쳐 확고히 구축 되어 있었다. 이를 토대로 하페즈는 자신의 집권기 동안 국가 기구 전체를 대통령 중심으로 장악해 나갔고 정실인사를 통해 인적 네트워 크를 확장하면서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여 자기 세력을 구축했다. 또 지배 가문으로서의 아사드 가를 표상(表象)하는 다양한 상징들로 나라 전체를 가득 채웠다. 당시 시리아의 정부 건물 안에는 대통령의 사진은 물론 연설하는 하페즈 아사드의 입상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89)
89) Kheder Khaddour, “The Assad Regime’s Hold on the Syrian State,” (Carnegie Middle East Center Report, July 2015), p. 4, <http://carnegieendowmen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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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전문가들이 아사드 권위주의체제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바, 이미 하페즈 집권기부터 시리아 국가와 아사드 정권의 경계가 모호 해졌다.90)
1973년 제정된 헌법을 통해 하페즈 집권기의 통치 형태를 살펴보면, 바트당(Baath Party)과 대통령의 권한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아사드 정권하의 시리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트당에 대한 지 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식 후 시리아가 겪은 일련의 정치적 혼란 그리고 1950년대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주창한 아랍 민족주의는 시리아를 이집트와 합병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이 같은 시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61년 9월 28일 군사 쿠데타 로 권력을 잡은 시리아의 군부 세력은 이집트와 시리아의 합병을 무효 화하고 시리아아랍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했는바, 당시 쿠데타를 성공시 킨 세력이 바트당이었다. 하페즈 아사드 역시 바트당 당원이었다.
1947년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창당된 ‘아랍바트당’은 아랍의 통일, 외국 지배로부터의 해방, 사회주의를 3대 원칙으로 한 아랍 국민 주의 정당으로서, 1952년 아랍사회당과 합당한 후 ‘아랍바트사회주의 당’으로 정식 명칭을 삼아 현재에 이른다. 바트당의 이념은 서구적 근대 국민주의에 기초한 국민국가 건설과 사회주의이며, 이슬람의 가치나 문화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세속주의를 표방한다.91)
/files/syrian_state1.pdf>. (검색일: 2016.8.16.).
90) 시리아에서 국가와 정권의 개념적 차이가 모호하다는 점을 지적한 연구로는 다음을 참조할 것. Annette Büchs, “The Resilience of Authoritarian Rule in Syria under Hafez and Bashar Al-Assad,” (GIGA Working Paper, no. 97, March 2009),
<http://www.giga-hamburg.de/en/system/files/publications/wp97_buechs .pdf>. (검색일: 2016.8.15.).
91) 바트당이 창당될 당시 발기인 가운데 하나인 미셸 아플라크(Michel Aflaq)가 그리 스정교를 신앙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오늘날 시리아 이외 지역에서 바트당의 정치 세력은 대단히 미미하며 레바논 지역 당 지도부의 경우 시리아 계와 이라크 계가 분열되어 있고, 예멘에서는 이라크 계의 바트민족당이 분리해 나가기
하페즈 대통령 아래서 제정된 1973년 헌법의 전문(前文)에는 위에 서 언급한 바트당 3대 원칙이 제시되어 있었으며 바트당의 전위당 규정 (제8조), 바트당의 선거 의제 설정 권한(제91조)도 명시되어 있었다.
또 동 헌법에는 대통령의 불가침성(제91조), 대통령의 입법 권력(제99 조) 조항 등을 통해 대통령에게 입법부와 사법부를 능가하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92)
2012년 수정될 때까지 40년 동안 유지되어 온 1973년 헌법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식민지주의와 시오니즘에 대한 비판이 다. 하페즈는 주변의 왕정제 국가들이 미국에 우호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소련, 이란과 긴밀히 협력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스라엘이 서방 국가들의 비호 아래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그의 외교는 철저히 반서구, 반이스라엘의 입장에 서 있었다.
하페즈 집권기에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1982년 하마(Hama)에서 발생한 대학살일 것이다. 시리아가 레바논 내전(1975~90년)에 개입한 이후 국내에서 정부의 전복을 노리는 테러가 빈발했고 그 선두에는 무슬림동포단이 있었다. 아랍 전역에서 반체제 종교 운동으로 맹위를 떨치던 무슬림동포단은 아사드 정권의 종교 교육 금지와 종교 지도자 의 체포 및 탄압에 저항하여 지하드를 선포했다. 하마에서 농성전을 벌이던 무슬림동포단은 정부군의 공격을 받고 2~3만 명의 사망자를 낸 뒤 진압된다.
하페즈는 집권 30년 동안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대통령은 아니 었다. 그는 공식석상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국민들과 접촉하
도 했다. 기타 걸프 연안 국가들이나 튀니지에서는 바트당의 활동이 불법으로 간주 된다.
92) 1973년 헌법의 전문은 다음을 참조할 것. Carnegie Middle East Center, “The Syrian Constitution: 1973-2012,” Decenmber 5, 2012, <http://carnegie-mec.
org/diwan/50255?lang=en>. (검색일: 2016.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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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일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은 결코 적지 않았는데 그 원인을 전문가들은 공포 정치 때문으로 분석한다.93)
밀레니엄이 시작된 2000년 7월, 하페즈 아사드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Bashar al-Assad)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됨으로써 아버지를 승계했다. 공화제 국가에서 대통령직 세습이 이루어짐에 따른 바샤르 체제는 세습공화제(Jumluqia, 줌루키야)로 불린다.
원래 바샤르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형 바셀(Bassel)의 그 림자에 가려 별로 주목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1994년 바셀이 사망하자 바샤르는 정치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게 된다. 서구에서 유학 한 경험이 있는 그는 안팎에 자유주의자로 인식됐다. 그가 초기에 추진 한 정책들은 다분히 자유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대통령직에 취임 한 직후 행한 첫 번째 연설에서 바샤르는 사회를 자유화하는 몇 가지 구상을 발표했고 반대파들도 이를 환영했다. 하지만 극도로 보수적인 바트당은 바샤르의 성향을 용인할 수 없었고 그의 자유주의 정책들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7년 당 대회에서 결정된 정치 개혁 안들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바트당은 대통령이 정작 시급한 농업 과 관개 사업, 농촌의 인프라 건설에는 관심이 없다면서 불평했고 자유 주의적 경제 개혁으로 노동자들이 피해를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집권 기간 내내 바트당과 대통령 사이에는 모종의 알력이 있었지만 대통령의 인기는 늘 당을 능가했다.
대통령과 바트당의 불편한 관계는 외교에서도 노정되었다. 집권 초 부터 바샤르는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노력하는 한편, 비우호적
93) V. P. Haran, “Roots of the Syrian Crisis,” (IPCS Special Report, no. 181, March 2016), <http://www.ipcs.org/pdf_file/issue/RootsoftheSyrianCrisis_
VPHaran.pdf>. (검색일: 2016.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