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적 차원에서 제기된 개념과 논의들은 ‘남북관계의 제도적 발전’ 이란 주제에 관한 논의의 방향과 범위를 규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와 관련하여 먼저 생각해야 할 세 가지 점이 있다. 첫째, 제도 개념 의 다양성과 관련하여 과연 남북관계의 제도적 발전이 무엇을 의미하 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관심은 제 도적 발전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방법에만 치중하 는 것은 사상누각을 짓는 일과 다름이 없다. 만일 남북한간 조약, 법, 기구 등이 지속적으로 창출된다면, 이것만으로 제도적 발전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현재의 한반도 상황에서 그러한 성과를 반복적으로 거 두는 것도 쉽지는 않은 실정이고 보면, 그렇다는 대답도 당연히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발전을 당면과제로 삼는 근본적인 이유 가 한민족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통일여건을 마련하려 는 데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그러한 형식적 제도의 창출을 넘어 서 이것이 실질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환경조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남북관계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는 규범과 문화의 차원 에서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포괄적인 제도 개념이 도입되지 않고서는 제도적 발전을 제대로 설명 내지 이해하기 어렵다.
둘째, 남북관계의 제도적 발전에는 의미맥락상 안정적·점진적·체계적 발전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그렇다면,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의 형 성, 즉 제도화는 어떠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가에 관한 문 제가 제기된다. 일차적으로 남북한의 의지와 양자간의 합의가 중요하 며, 이에 못지 않게 한반도 문제에 직·간접적인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 강대국들이 남북한간의 합의가 원활하게 도출될 수 있는 환경조 성에 기여하고, 합의된 사항이 실천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필수적이 다. 그러나 조만간 이러한 것을 기대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다만 남북한을 비롯하여 주변강대국들은 한반도 문제에 관련한 다양 한 난제를 중심으로 양자간 또는 다자간 대화를 통해 문제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문제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상이하기 때문에 협상의 진전이 어려우며, 설령 합의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실천의 불확실 성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게임이론이 설정하고 있는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그렇지만 제도적 발전을 하나의 국가목표로 삼고, 국가들간 전략적 게임의 대상으로만 이해하고 접근한다면, 예상 되는 결과는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각 국가의 목표와 전략이 기존 제도의 산물임을 인식한다면, 각 국가의 전략에만 초점 을 맞추는 방식의 게임이론이 남북관계의 제도적 발전문제에 그대로 적용될 수도 없다. 국가간의 전략적 상호작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현 실에 적용시키려면, 무엇보다 기존의 국내 및 국제제도의 성격을 충 분히 고려하여 제도의 생성 및 변화를 위한 포괄적 전략을 강구해야 한다. 요컨대 남북관계의 제도적 발전문제는 기존의 제도 틀 내에서 다양한 수준의 행위자들 ― 개인, 사회, 정부, 국제적 비정부기구 등
― 이 참여하는 일종의 ‘다차원 게임’(multilevel game)75) 성격을 75) 다차원 게임이란 상이한 차원의 게임들이 서로 영향을 줌으로써 상호
간에 우발적인 결과들이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슈연계, 국내와 국제정치의 연결, 그리고 상이한 행위자들로 구성된 게임들간의 양립 가능성 등이 강조된다. 다차원 게임은 정치적 맥락 (제도)을 배제한 채 어떤 특정한 상황을 분석하는 것만으로 국제적 협 력의 발생양식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Robert Axelrod & R. O. Keohane, "Achieving Cooperation under Anarchy:
Strategies and Institutions," Neorealism and Neoliberalism: The Contemporary Debate, ed. by D. A. Baldwin (N.Y.: Columbia Univ.
Press, 1993), pp. 98-103 참조.
띤다. 즉 남북관계의 제도적 발전은 궁극적으로 통일이 실현될 때까 지 제도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다차원적이고 반복적인 게임과정 인 동시에 그러한 게임의 결과가 다시 제도적 맥락을 변화시키는 방 식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이해되 듯이 제도적 발전이 반드시 그렇게 선순환적으로만 발생하지 않을 가 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떠한 위기 상황이 닥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가 갑작스럽게 생성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제 도가 통일여건 조성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것이라면, 이것 역시 제 도적 발전의 한 방법일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셋째, 앞의 두 가지 논의는 논리적으로 본 주제의 공간적 적용범위 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즉 남북관계의 제도적 발전이 남북한 관계 수준에서 전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것인가의 문제이다. 포괄적인 제 도 개념에서 출발할 때, 남북관계의 제도적 발전은 남한과 북한의 국 내환경은 물론이고 한반도 주변환경 수준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남한과 북한 내부의 제도적 변화, 그리고 주변 국 제환경의 제도적 변화는 남북관계의 제도화를 위한 주요 결정요인으 로 작용하며, 동시에 역방향의 작용도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남북관계의 제도적 발전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며, 어떠한 적용범위를 가질 수 있는지를 우선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 정책과제와 실천적 접근방법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