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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내면 사이의 언어적 경험

문서에서 북한 청소년의 세대경험과 특성 (페이지 107-114)

Ⅶ2. 빈곤과 계층화의 육체적 경험

3. 국가와 내면 사이의 언어적 경험

가. 공적 언어와 사적 언어의 사이에 있는 세대

새로운 세대의 특징은 언어 세계를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김 일성, 김정일 등 최고지도자의 절대적 ‘언어들’을 배우고 학습하는 것 은 예전 세대와 동일하다. 그러나 이런 언어들은 그들 세계에서는 실 질적인 일상의 고민과 생활을 해결하지 못하는 ‘죽은 말들’로서 매우 형식적으로 무감각하게 사용될 뿐이다. 뿐만 아니라 계층적으로 하층

에 속하는 학생들의 경우 출석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이런 학습 기회조차 갖지 못해 국가의 공식 언어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경우가 많 이 발견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실제 일상에서 쓰는 언어, 내면의 생 각을 기록하는 사적인 기록의 언어, 그리고 공적인 국가 언어 사이의 괴리가 이들 세대에서는 클 뿐만 아니라 이들 세대는 이런 이중성을 매우 잘 활용하기도 한다.

새로운 세대는 실제로 국가의 공식 언어 학습 수준이 과거 세대와는 달라 보인다. 면접에 응한 대부분의 구술자들은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원칙’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고, ‘김일성저 작집’이나 ‘김정일선집’ 등도 거의 읽어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물 론 교육과정에 있는 내용을 통해 지도자의 항일무장투쟁 역사나 혁명 사상 등에 대한 학습을 하지만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둔 소수 학생들을 제외하면 학습 열의는 높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경제적 어려움 으로 출석하지 못하는 학생들의 경우 학습 수준이 매우 낮은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학교의 공식 조직생활을 통해 이들이 인용하는 국가의 공식 언어는 이들에게 지급되는 ‘생활수첩’(생활총화록) 앞에 인쇄돼 있는 학생의 학습태도에 대한 김일성과 김정일의 몇 가지 ‘말씀’, 교실 앞에 붙어 있는 두 개 정도의 ‘말씀’이 전부였다. 이들은 이들 몇 개의 ‘말씀’ 을 중학교 전학년 내내 모든 호상비판과 자아비판, 공식적 발언에서 재 인용하면서 반복 사용한다. 이런 반복적 인용은 내용에 대한 진정성 있는 재음미가 아닌 거의 형식화된 인용, 그들의 말로는 ‘각’(형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반복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죽은 말씀’을 형식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이런 국가의 공식 언어와 일상의 언어적 수행 사이의 괴리는 특히 고난의 행군 이후 세대의 언어 속에서 뚜렷

하게 발견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공적 또는 사적으로 사용하는 언어 세계의 특질을 발견하는 것을 통해 이들이 갖는 의식 세계의 특 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와 행동의 권위를 독점했던 초월적 발화체(김일성, 김정일)가 사라지면 그 말들은 형식적으로는 절대적 지위로 계속 남아 있지만, 그 언어 사용의 잘못을 수정할 존재, 지속적 재의미화를 수행할 존재는 없 는 것이 된다. 만약 초월적 발화체가 살아 있다면, 모든 언어와 행동이 그의 검열에 따라 재조정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자유로운 재 의미화를 하길 꺼려하게 되며 오히려 언어 세계는 더욱 경직된다. 그 러나 그런 언어를 조정하는 중심 발화체가 사라지면 그들이 남긴 말은 그대로 고정된 경구로 남고, 일상에서는 이런 말들을 현실의 필요에 따 라 재의미화를 하게 된다.62

나. 국가 언어에 대한 반복적 인용과 냉소

새로운 세대의 언어생활이 갖는 이중성과 언어 수행의 단면을 적나 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생활총화에서이다. 앞서 얘기했듯 최고지도자의

‘언어들’은 죽은 말들의 세계이다. 규범화되고 경직된 원칙으로 고정불 변한 데다 실제 일상의 모든 문제를 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 제나 모든 조직생활에서 인용과 반복을 통해 자신들의 일상을 반성하 고 평가해야 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생활총화는 이 죽은 말들과 연출 된 형식을 통해 자신의 일상을 검열해야만 하는 언어 수행의 공간이다. 이들 국가의 공식 언어, 최고지도자의 말들은 어떤 것이 혁명적이고 숭

62_Alexei Yurchak, Everything Was Forever, Until It Was No More: The Last Soviet Generation (Princeton,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5), p. 295.

고한 삶인가를 제시하고 있지만 변화하는 현실이나 실제의 삶을 담지 못하는 죽은 말들인 것이다. 생활총화는 이런 형식적인 공적 언어를 통해 연출되는 하나의 연극무대라고 할 수 있다.

그 학교에 들어가면 교실에 들어가면 교실마다 김일성이라고 써 서 김일성이 한 말. 뭐 학생은 학생의 기본 혁명과업은 뭐 학습 이며 어떻게--. 또 김정일이 말한 게 그게 있어요. 그러면 이제 총화를 시작할 때 위에다 무조건 “위대한 영도자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학생의 기본임무는 공부인데, 그런데 나는 이렇게 못 했 습니다. 반성합니다.” 하고 이렇게. (사례 39 구술녹취록, 2013 I/16)

일주일간의 생활의 일단 자기비판을 해요. 그런데 그 하기 전에 위에 말씀을 넣어야 돼요. 김일성, 김정일의 그런 말씀을 꼭 인 용하고 그리고 뭐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렇게 못하고 뭐 어떻게 공부도 잘 안 하고 이렇게 했습니다.” 자기비판하고 호 상비판해야 돼요. 그런데 호상비판을 하면 상대방이 되게 기분 나빠지고 사이가 안 좋아질 수 있으니까 대개 친한 친구끼리 하 는 경우가 많아요. 짜고. 그런데 내가 할 테니까 다음에 너가 할 때 날 비판해라 이런…. 이렇게 하면서 막 진짜 진심으로 비판하 는 게 아니에요. 막 이렇게-- 항상 하다보니까 이젠 비판할 것 도 없어지고 하다보니까 서로 짜서 하게 되고. (사례 40 구술녹 취록, 2013 I/27-28)

이렇게 형식적으로 연출되는 생활총화는 학생들에게는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면접에 응한 구술자들은 공통적으로 생활총화 시간이 싫어서 일부러 토요일에 결석하는 친구가 있었다고 말한다. 김일성, 김정일의

‘말씀’들을 반복 인용하며 자꾸 ‘반성’과 ‘맹세’를 강요하는 것은 이들

세대에겐 힘든 일이다. 어떤 특정 제도가 운용된다는 것과 그 제도가 실제로 참여자들에게 어떻게 수용되느냐는 분명 다른 것이다. 생활총 화는 요즘 세대에게는 학교로부터의 각종 요구사항이나 경제적 어려움

으로 인한 결석 등이 추궁당하는 시간이자 끊임없이 현실과 동떨어진 형식화된 ‘말씀’을 반복 재생하는 지루한 시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게 암만 내가 한 주일 동안 뭘 했고, 학교 다니면서 잘못한 게 뭐고, 뭐 앞으로는 어떻게 하겠다고 맹세하고 이건데, 맨날 생활총화 때마다 그저 똑같아요. 지각을 했고 학교를 뚜꺼 먹었고, 그리고 뭐 말씀대로 뭐, 위대한 장군님의 명언대로 살지 못했고. 그래서 뭐 저의 결함은 뭐 말씀대로 무슨 뭐 말씀을 가 슴 깊이 새기지 못한 데로부터 온다는 거. 그래가지고 뭐 앞으로 는 뭐 그 말씀대로 살 거라는--. 그냥 그게 쭉 똑같은데, 그러니 까 내가 잘못한 일을 자꾸 반성하고, 그걸 통해서 앞으로 뭐 맹 세하고 하는 게 정말 싫었어요. 생활총화를 한다는 자체가. 글쓰 기도 싫었고 생활총화록을 또 한 4주되면 검열을 해요. 노트 생활노트를. 그러니까 그 정리가, 학생들이 꼼꼼한 애들은 하는 데 정리도 안 되고 하니까, 그 생활노트는. 그러니까 혁명역사랑 그 생활노트 점수가 높아요. 생활총화하는 게. 그래가지고 생활 총화를 정말로 하기 싫었어요. (사례 29 구술녹취록, 2013 I/18) 연구자: 그런데 그렇게 토요일 날 생활총화가 있는 날, 활총화에 참석하는 친구는 반 40명 중에 몇 명 정도 돼요, 보통? 구술자: 반도 안 돼요. 그때는 반도 안 돼요.

연구자: 20명도 안 된다?

구술자: 네, 20명도 안 돼요. (사례 29 구술녹취록, 2013 I/20)

소위 북한 모든 주민들이 암기한다는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원 칙’의 경우도 이들 세대에서는 대학 갈 친구들만 외우는 것들이다. 아 예 ‘10대원칙’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사례 29). 김일성, 김정일 혁명사상 등은 대학갈 학생들만 공부하는 내용으로 여겨진다. 대학갈 학생들이란 기본적으로 공부를 어느 정도 잘 하고, 대체로 집안의 경제 적 능력이 되거나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이 들에 한정돼 북한의 공식 언어들이 ‘진학’이나 ‘출세’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

김일성, 김정일 혁명사상도 그런 게 없고, 그 대학갈 아이들은 그런 거 공부하고. 혁명사상이라고 세 과목 있어요. 어머님사상 이라고 김정숙에 대해서 나오고. 그 다음에 그 뭐 김정일, 김일 성. 이렇게 해 가지고 혁명사상 세 개 공부하는 거 있는데, 거기 서 그저 뭐 혁명사상에 대해서 언제 어떻게 했고 그런 거 공부 하고. 그 다음 입, 입당할 때, 맹할 때, 청년동맹 가맹할 때, 학교 3학년 때 가맹하는 데, 이때 입당 심의할 때 10대원칙 외우 라고 그러고. 그때 좀 외우고. 특별히 암송할 필요가 없어요. (사 30 구술녹취록, 2013 I/27)

다. 새로운 세대만의 언어들: 내면을 기록하는 언어

공식적인 주체사상의 언어들, 말씀수첩, 생활수첩, 호상비판 등의 규 범화된 공식 언어들과 달리 그들의 사적 세계는 다른 언어적 형식과 내용을 갖고 있었다. 새로운 세대들은 모이거나 만나면 시장에서 파는 새로 들어온 중고 옷에 대한 정보, 한국드라마와 노래, 누군가 중국에 갔다 왔다는 외부세계에 대한 정보 등에 대해 주로 대화를 나눈다. 체 제에 대한 것도, 미래에 대한 것도 아닌 유행하는 드라마, 사물들, 노 래, 외부세계에 대한 대화를 통해 그들만의 언어세계를 공유한다. 사적 인 이들만의 언어세계에서 정치나 사상과 관련한 내용은 존재하지 않 는다.

한편 이들은 공적 언어 세계 밖에서 자기 내면을 기록하기도 한다. 면접에 응한 일부 학생들은 공식적으로 학교에서 요구하는 일기 이외 에 자신이 개인적으로 혼자 쓰고 보는 일기를 가지고 있었던 경험을 얘기했다. 이런 일기장은 가족 내에서도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취급 되었다. 이들은 일기장에 사소한 생활에서의 일들을 기록하거나 그날 의 기분이나 날씨 등을 기록하곤 한다. 특히 친구들과의 관계에 관해 쓰거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맹세를 쓰기도 한다. 이런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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