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A Study on the Architectural Change of Banquet Space in Changgyeonggung during the Reign of Crown Prince Hyomyung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1

Share "A Study on the Architectural Change of Banquet Space in Changgyeonggung during the Reign of Crown Prince Hyomyung"

Copied!
10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ISSN 1598-1142 (Print) / ISSN 2383-9066 (Online) https://doi.org/10.7738/JAH.2020.29.4.017

효명세자 대리청정시기 창경궁 연향공간의 건축변화 연구

A Study on the Architectural Change of Banquet Space in Changgyeonggung during the Reign of Crown Prince Hyomyung

석 진 영*1) Seok, Jin-Young (군산대학교 건축공학과 강사)

Abstract

The planning acumen led by the crown prince stands out during the banquets that were held continually during the reign of Crown Prince Hyomyung around the late Joseon period from 1827 to 1929. If we examine the changes in banquet space during the period that Crown Prince Hyomyung ruled by proxy, the Jagyeongjeon(慈慶 殿) in Changgyeonggung Palace, which was built during the time of King Jeongjo was repaired after the in 1827 during the reign of the crown prince and appeared in its changed form in Muja Jinjakin 1828. It is believed that the Jagyeongjeonwas expanded and repaired during the reign of Crown Prince Hyomyung to conduct banquets for important guests. Jagyeongjeon which was repaired during the crown prince's reign, is a space where banquets were continuously held during the three years that he reigned, and we can see that it is an important space for royalty where the authority of King Sunjo, Queen Sunwon, and Crown Prince Hyomyung was reflected. Yeongyeongdan(演慶堂) was a structure built in 1828, which is after the period when the Jagyeongjeonwas changed in 1827, and it is a space that emerged during the reign of the crown prince.

Hwanchwijeong(環翠亭), which was constructed during the time of King Seongjong was changed after 1827 during the reign of Crown Prince Hyomyung and appeared in its changed form in Muja Jinjakin 1828.

Hwanchwijeongwas the place where the Crown Prince Hyomyung stayed and planned banquets and it was repaired along with Jagyeongjeonin 1827. During his reign, the political intent of the crown prince was reflected not in superficial political spaces but in spaces where banquets were held and accordingly the main spaces for banquets and their related royal palace locations were changed or newly established. You need to briefly explain what this and Muja Jinjak are. New information is not provided in this paragraph. You have already established why the crown prince renovated the banquets and its significance in the first two paragraphs. You could just add “Jagyeongjeon(慈慶殿), Yeongyeongdan(演慶堂), and Hwanchwijeong(環翠亭) in Changgyeonggung Palace during his reign were changed and renovated during the time when the royal banquets of the 19th century were getting established. It was spaces that reflected the royal family and royal authority” to the end of the second paragraph and it would convey your intended meaning.

주제어 : 효명세자, 연향, 공간, 창경궁, 자경전, 연경당, 환취정

Keywords : Hyomyeong-seja, Banquet, Space, Changgyeonggung, Jagyeongjeon, Yeongyeongdan, Hwanchwijeong

1. 서 론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다양한 목적에 따라 연향을 설행하였다. 왕을 중심으로 한 외연은 정전에서 주로

* Corresponding Author: [email protected]

열렸고, 대비를 위한 내연은 대비의 전각에서 거행되었 다. 왕실의 연향은 주로 왕실을 중심으로 왕실이 거처 했던 공간에서 거행된다. 궁궐의 연향공간이 지속적으 로 바뀌면서 거행되는 것은 연향공간이 왕실의 권위가 가장 잘 반영된 공간에서 거행되었기 때문이다.

(2)

조선후기로 들어서면서 연향은 외연과 내연의 이원 화 된 형식으로 설행된다. 왕실 어른인 대비에 대한 효 와 함께 대비의 권위와 위계가 높아지게 되면서 이런 양상이 연향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즉, 궁궐 연향 공간에서 정전과 함께 내연의 공간도 주요한 장소로 인식된다. 연향공간으로 왕조의 중요한 공간을 알 수 있다.1)

내연은 외연에 비해 여성이 참여하는 것과 연관되어 공간을 효율적으로 구성해야만 했다. 내연에 소용되는 물품들의 배설은 외연보다 준비와 절차면에서 복잡했 고 연향 설행시간도 길어져 이를 대비해야 했다.

조선후기 정조시기의 연향을 발전시키는 양상은 순 조시기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순조시기의 내연은 정순 왕후, 혜경궁, 순원왕후, 신정왕후의 존립과 함께 막강 한 위상을 가진 대비들과 왕후가 있었던 시기이다.

순조 시기 대리청정을 시작한 효명세자가 기획한 연 향에서 상왕과 대비로 격상되어진 순조와 순원왕후 또 한, 왕과 왕비의 반열로 올라선 효명세자와 신정왕후의 권위가 연향에 반영된다. 이는 내연의 주요 연향 공간 을 잘 살펴볼 수 있는 시기로 연향 공간에서도 변화가 나타난다. 효명세자 대리청청 시기 왕세자 공간의 건축 변화에 대한 의미 있는 연구가 있다.2)

효명세자 대리청정 한 3년의 시기는 궁궐 연향이 헌 종시기로 이어지는 과도기로 조선 궁궐 연향에서 중요 한 시기이다. 본 연구는 효명세자가 정치에 참여한 1827년에서 1829년까지 창경궁 慈慶殿, 演慶堂, 環翠亭 에서 지속적으로 열린 연향 공간의 건축적 변화 특징 을 살펴보고자 한다.

2. 효명세자 대리청정시기 연향

18세기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순조가 왕위에 오 르면서 조선은 19세기의 왕조를 맞이한다. 하지만 정순 왕후의 수렴청정과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3)와의 혼인

1) 석진영,『朝鮮時代 宮闕 宴享 空間의 建築的 特徵 硏究』, 한양대 학교대학원 건축학과 박사학위 논문, 2020

2) 정정남,「효명세자 대리청정기 동궐의 건축적 변화」, 국립중앙박 물관 특별전 도록, 2019. 6

3) 純元王后는 1802년 왕비로 책봉되었고 1809년 효명세자를 낳았다.

효명이 죽고 헌종이 즉위한 후 왕대비·대왕대비에 進號되었다. 1849 년(헌종 15)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철종으로 왕통을 잇게 하고 수 렴청정하였다. 1851년(철종 2) 자신의 외가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철종의 왕비로 책봉해, 그 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절정기를 이룩하 였다. 1857년(철종 8)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국민족문화대백 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으로 강력한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한 안동김씨의 외척 세력으로 순조의 정치적 위상이 높지 않았다. 순조는 권력의 균형을 위해 풍양 조씨의 딸을 며느리로 간택 한다.

1827년 순조는 병약함을 이유로 孝明世子(益宗)4) 게 대리청정을 맡긴다. 하지만 순조가 효명세자의 교육 에 지대한 공을 쏟았다는 면과는 상이한 것으로 순조 가 효명세자로 하여금 왕권을 회복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순조 시기의 연향은 정조시기 연향 문화를 계승한다.

특히, 1809년 己巳進表裏進饌은 1795년 혜경궁을 위한 연희당진찬의 발전된 양상을 보인다.

1809년 진찬이 거행된 후 1827년 효명세자가 대리청 정을 시작하면서 자경전에서 進爵을 거행하고 이 연향 에서 진작의 용어가 새롭게 등장한다. 효명세자는 1827 년 7월에 왕세손(헌종) 탄생이라는 경사가 있자, 다음 과 같이 조촐한 연향을 진작으로 올리고자 했다.

1827년(순조 27)1월25일. 왕세자 예조판서 조종영을 불러 보았다. 하령하기를, “두 분 전하께 존호를 올린 후, 조 그만 술자리(小爵)를 베풀어 인정과 예의를 펴려고 하니, 이 뜻을 대신에게 가서 전하는 것이 좋겠다.”하니, 조종 영이 말하기를, “진연과 진찬에다 헌작례(獻爵禮)가 있는 데, 이번 의절은 어떻게 하시겠사옵니까?”하니, 하령하기 를, “진연이나 진찬으로 이름을 부칠 것까지는 없고, 조 그만 술자리를 베풀어 경사를 기념하려고 한다. 그런데 병신년(1776)의 진찬 의절은 너무 약소한 듯하니, 이번에 는 넉넉하게 마련하고, 의주는 진작의(進爵儀)로 하는 것 이 좋겠다.”라고 하였다.5)

이전에 설행되었던 연향을 효명세자가 목적과 의례에 맞게 재구성한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며 進爵儀라는 새로 운 연향 양상이 생기게 되는 배경을 잘 설명하고 있다.

1828년에 거행된 무자진작은 효명세자 3년 재위기간 중간에 설행된 연향이다.

무자진작의 설행은 이전 해에 열린 내연과 비슷한 구 성으로 자경전에서 內宴으로만 열리며 殿庭 중간에는 朱簾을 가벽으로 연향 공간을 이중으로 분할하였다.6)

4) 1809년(순조 9)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났으며 1812년(순조 12) 창덕궁 인정전에서 책봉되었다. 1827년(순조 27) 순조의 명으로 대리 청정을 시작하였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기간 동안 자신의 처가였 던 풍양조씨(豐壤趙氏)를 중용하면서 안동김씨를 견제하려 하였다.

점차 국정을 장악하고 대부분의 국가전례를 행하였다 1930년 창덕궁 희정당에서 훙서하였다.] 효명세자의 죽음으로 안동김씨 견제는 좌절 되었다. 헌종 즉위 후 1844에 익종으로 추존되었으며 고종시기 문조 로 추존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純組實錄』卷29, 純祖 27年 7月 戊辰

(3)

무자진작은 순원왕후의 사순을 경축하는 進爵의 목 적으로 내연의 형식을 잘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왕세자 권위에 맞는 연향이 추가되었는데 바로 왕세자 주도의 翌日會酌이다.

무자진작의 王世子翌日會酌은 연향에서 새롭게 나타 나는 형식으로 대리청정 2년 시기에 왕세자의 정치적 위상과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나타난 양상으로 생각된 다. 이에 따라 왕세자를 위한 공간들이 연향에서도 나 타난다.

연향 명칭 출처 연향 규모 설행

시기 설행

전각 목적

己巳進表裏進饌 己巳進 表裏進

饌儀軌 內宴 (1809) 景春殿 혜경궁 관례60주년 慈慶殿進爵 進爵整禮儀軌 內宴 (1827),

2월 慈慶殿, 環翠亭

순조, 순원왕후

존호 演慶堂進爵 進爵整

禮儀軌 內宴 (1827),

6월 演慶堂 순조, 순원왕후존호 戊子進爵 純祖戊

子進爵儀軌 內宴 (1828),

2월 慈慶殿,

環翠亭 순원왕후 40세 경축 演慶堂進爵 純祖戊

子進爵

儀軌 內宴 (1828),6월 演慶堂 순원왕후 생일 己丑進饌 純祖己

丑進饌 儀軌

外宴, 內宴

(1829),

2월 明政殿,

慈慶殿 순조사순, 어극 30주년 己丑進饌 純祖己

丑進饌

儀軌 內宴 (1829),

6월 慈慶殿 순조사순, 어극 30주년 표 1. 순조(효명세자) 시기 궁중 연향 설행

: 효명세자 대리청정시기 연향

효명세자 대리청정 시기에 열린 연향은 <표 1>과 같다. 연향은 1827년과 1828년 자경전과 연경당에서 거 행되었다. 1829년 대리청정 마지막 해에는 기축진찬으 로 명정전의 외연과 자경전의 내연이 거행되었고, 다른 연향에 비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는 순조의 등극 30주년을 경축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왕세자의 왕권 회 복 의지가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기축진찬은 순조의 권위에 맞는 형식으로 기획되었 으며 다른 시기에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 구성으로 공간을 구획하여 진행되었다. 대규모의 연향을 거행하 는 데 주력한 이유는 효심과 정치적 위상 회복으로 해 6) 석진영·한동수,「순조 궁중연희 내연 무대의 朱簾, 甲帳에 관한 연 구 : 修理·排設 부분을 중심으로」, 건축역사연구, 2017, 26.2, 67∼76쪽

석된다. 또한, 禮樂을 중시하며 군주의 존재를 널리 알 려 왕실의 위엄을 회복하려고 한 것이기도 했다.7)

효명세자 대리청정 시기 『戊子進爵儀軌』,『己丑進 饌儀軌』의 筵說8)에서 연향의 공간과 구성에 관한 논 의를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무자년(1828, 순조28) 01월14일 영하기를, “이번에 의장은 양.일산,수정장,금월부 등만 사용하고 그 나머지는 마련 하지 말아야한다. 외보계는 작년에 비하여 길이와 너비 를 반으로 줄이고 내보계는 작년에 비하여 조금 넓고 크게하여 곧장 정문의 문지방에 닿게 하라. 그리고 포장 밖에 두 발(簾)의 간격을 두어 악생을 보계(補階)의 끝에 줄지어 앉히는 것이 좋겠다.9)

무자년(1828, 순조28) 11월25일 “명정전 보계(補階)의 조 (曹:호조)에서 거행하는데, 월대에 평보계를 설치하면 용 접(容接)할 수 있사옵니다.”라고 하니, 하령하기를, “평보 계로 하라. 백관은 월대 아래서 선온(宣醞)하는 것이 가 하다.”라고 하였다.10)

기록의 내용을 살펴보면 내연의 보계를 이전의 연향 에 비해 크게 배설하는 것으로 이는 연향이 이루어지 는 주요 전각과 이와 연계되는 연향 공간의 확보가 필 요해 논의가 진행된 것이다. 즉, 연향의 거행은 공간의 형식에 따른 배치가 연향마다 다르게 적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연향의 목적에 따라 설행할 전각의 결정과 외연, 내 연에서 효율적으로 구성하기 위한 관계 기관과의 논의 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3. 효명세자 대리청정시기 연향공간의 건축 변화

3.1 慈慶殿

孝明世子 대리청정시기 重熙堂은 왕세자의 正堂으로 사용되었다.11) 왕세자의 공간은 정치적 활동을 위한 공 간과 사적인 공간이 있었다.

연향을 중요시했던 효명세자가 연향을 거행했던 주 요 공간은 창경궁의 자경전이다.

慈慶殿12)은 1777년 정조가 혜경궁을 위해 창경궁에

7) 석진영·한동수,「순조 궁중연희 내연 무대의 朱簾, 甲帳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2017, 26.2, 67∼76쪽

8) 의궤의 연설(筵設)은 연향 장소와 함께 여러 소용 물품에 관해 관 리들과 의논한 것을 적은 것이다.

9) 이의강(역) 외,『국역순조무자진작의궤』,보고사, 2006, 48쪽 참조.

10) 김종수,『국역순조기축진찬의궤,권이』,민속원, 2007, 47쪽 참조.

11) 『순조실록』 27년 2월 9일

(4)

지은 전각이다. 이후 효의왕후가 자경전에 머물게 되며 1782년 자경전에서 승하한다.

자경전은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이후 궁궐 연향에서는 주요 공간으로 등장한다. 조선후기 연향은 정조시기를 거치면서 왕과 대비를 위한 연향으로 발전 된다. 이런 특징은 효명세자 시기에는 형식적으로 상왕 과 대비의 위계로 격상된 순조와 순원왕후의 연향으로 알 수 있다.

자경전은 조선 궁중 연향의 기틀을 세운 정조를 기 점으로 효명세자가 정치적으로 활동하는 동안 순조와 순원왕후를 위한 다양하고 화려한 연향이 거행된다.

즉, 효명세자의 정치적 활동이 본격화된 시기에 내연 의 설행에 있어서 중요한 전각으로 자리 하게 된다.

효명세자 대리청정 기간인 1827년부터 1829년까지 열린 자경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무자년(1828, 순조28) 01월14일 왕세자가 유호헌(攸好軒) 에 앉고 예조 당상, 호. 공조판서, 사옹제조, 장악제조가 입대할 때 –중략- 조종영이 아뢰기를, “장소는 어디로 할 것인지요?”하니, 영하기를, “ 자경전으로 하라.” 하였 다. 하였다. 이어 박종훈에게 하령하기를, “연석(筵席)에 서 물러난 뒤 가서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13)

자경전의 건축적 형식은 1827년『慈慶殿進爵整禮儀 軌』와 1828년『戊子進爵儀軌』의 기록으로 알 수 있 다. <그림 1>로 살펴보면 자경전의 형식이 다르다.

우선 1827년의 자경전은 一자 건축형식으로 전각과 행각이 서로 대칭을 이루며 전체적으로는 ㅁ자 형식을 갖추고 있다.

1828년의 자경전은 전각의 규모가 5칸에서 7칸으로 확장되고 일자형의 전각이 ㄱ자형으로 전각 내부 공간 이 확대된 형태를 보인다.

자경전의 형태가 변한 것과 관련하여『戊子進爵儀 軌』의 연설부분의 기록을 살펴보면 자경전을 수리한 기록이 남아 있다.

조종영이 아뢰기를, “장소는 어디로 할 것인지요?” 하니, 영하기를, “자경전으로 하라.” 하였다. 이어 박중훈에게 하령하기를, 연석에서 물러난 뒤 가서 살펴보는 것이 좋 12) 정조시기(1777) 창경궁에 지어진 전각으로 이후 재건되는 단계를 거치지만 화재로 소실된다. 창경궁의 자경궁은 혜경궁을 위한 전각 이지만 이후 효의왕후가 거처하고 효명세자 시기에는 순원왕후가 거 처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고종시기 흥선대원군이 재건한 경복궁 의 자경전은 신정왕후를 위한 전각이다. 본 연구의 자경전은 창경궁 의 자경전을 뜻한다.

13) 이의강(역) 외,『국역순조무자진작의궤』,보고사, 2006, 48쪽

겠다.“ 하니, 박종훈이 아뢰기를, “작년에 이미 수리를 거쳤으니 공역이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니, 영하 기를, 자시 수리할 필요는 없겠지만, 창호가 뚫린 곳이 있으면 다시 칠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14)

그림 1. 慈慶殿進爵 慈慶殿(1827) 上, 戊子進爵 慈慶殿(1828) 下 (서울대학교 규장각)

1827년 진작이 열린 자경전은 정조시기 지어진 자경 전의 형태이고 1828년 무자진작이 거행된 자경전은 효 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해인 1827년 자경전에서 진작을 거행하고 난 후 수리 되어져 건축변화가 생긴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1828년 의궤에 기록된 자경전은 순조 시기 제 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동궐도〉의 자경전 형태와 같 은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연구에서 동궐도의 제작시기 를 효명세자 대리청정시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15)

14) 이의강(역) 외, 『국역순조무자진작의궤』,보고사, 2006, 45∼46쪽 15) 정정남,『효명세자 대리청정기 동궐의 건축적 변화』, 국립중앙 박물관 특별전 도록, 2019, 6

(5)

자경전의 건축 변화를 <그림 2>의 班次圖로 평면 을 살펴볼 수 있다. 반차도에서 연향공간의 殿閣과 行 閣, 殿庭에 補階를 排設하는 형태를 알 수 있다.

1827년 자경전은 전면에 퇴가 있지만 1828년 자경전 은 전 후면에 툇간이 있다. 1828년 자경전은 중심 건물 을 위주로 확장공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림 2. 慈慶殿進爵 慈慶殿 班次圖(1827) 上, 戊子進爵 慈慶殿 班次圖(1828) 下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1829년 기축진찬이 거행된 자경전은 무자진작 자경 전과 동일하게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비교해보면 1827년 자경전진작의 공간구 성은 전각을 크게 殿內, 楹外와 殿庭 공간으로 이원화 하여 구분하였다.

연향공간의 마당인 전정 공간 內 東補階, 西補階로 영역을 나누고 위계에 따라 동보계, 서보계의 단에 차 이를 두어 이를 다시 中補階, 下補階로 구성하였다.

1828년 자경전진작이 이전 해에 비해 증축되어진 것 은 1827년 왕세손의 탄생을 경축하며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진작과는 다르게 1828년 거행된 무자진작은 순 원왕후의 40세를 경축하기 위한 것으로 이전보다 성대 한 연향으로 열린 것과 연관이 있다.

자경전의 공간이 성대한 연향을 거행하기에 용이하 지 않아 진작 거행에 적합하도록 수리하였기 때문에 의궤에 기록된 자경전의 반차도와 입면이 다르게 나타 난 것으로 판단된다.

즉, <그림 2>의 반차도로 자경전의 一자 건축형식 이 ㄱ형의 건축형식으로 변화 된 것을 확인 할 수 있 다.

1827년 거행된 자경전이 협소하여 전각을 증축하여 1828년 무자진작과 1829년 기축진찬을 설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자경전의 寶慶門 근처의 공간에서도 무자진작에서 배치 변화가 나타난다. 이를 <그림 3>

과 같이 의궤의 筵說과 班次圖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 다.

무자년(1828, 순조28) 01월15일“ 보경문이 주렴(朱簾)안에 있은 뒤에야 편리할 듯하고, 주렴 밖은 공간이 너무 좁 으면 혹 곤란할 염려가 있을까 생각됩니다.”16)

그림 3. 慈慶殿進爵의 寶慶門(1827) 左, 戊子進爵의 寶慶門 (1828) 右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즉, 외부와 연결하는 문 주변의 공간의 협소함을 염 려하여 문 주위를 주렴으로 구획하여 공간을 구분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양상은 外宴과 다르게 內宴의 연향 설행에서 외연보다 다양한 구성과 이에 따른 건축 구성요소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성을 主賓으로 한 내연이 거행되는 것도 유교중심 의 국가 이념이 반영되어 왕실 어른에 대한 공경과 남·

녀의 구분과 신분에 따른 공간 구현을 해야 하는 이유 를 반영한 것과도 관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내연의 설행은 정전에서 주로 거행된 외연에 비해 궁궐의 연향 공간이 다양하게 구성되는 특징이 나타난 다. 내연은 연향의 주빈과 설행 목적과 연향 규모 등과 16) 이의강(역) 외,『국역순조무자진작의궤』,보고사, 2006, 53쪽

(6)

비례하게 기획되어졌다.

1829년의 기축진찬에서는 연향의 주빈이 순조로 자 경전은 왕을 위한 연향의 공간으로 변화된다. 이는 대 비의 공간에서 왕을 위한 연향이 열린 것으로 자경전 이 효명세자 시기 정치적으로 중요한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자경전이 1827년 이후 1828년 기점으로 건축적으로 변화된 것은 연향의 목적에 따라 규모가 확대되고 참 가자가 증가하게 된다.

연향을 준비하는 과정은 복잡하고 연향 공간은 이전 에 비해서 의례 절차를 공간에 반영하기 위해 성대한 연향이 거행되기 용이한 구조로 공간에서의 건축적 변 화가 나타난 것으로 판단된다.

3.2 演慶堂

순조시기의 무자진작은 효명세자 정치적 활동 기간 인 중간 시기에 설행된 연향이었다. 무자진작은 2월 자 경전에서 설행된 후 6월 연경당에서 순원왕후의 생일 을 기념하여 다시 설행된다.

演慶堂은 漢京識略에서, “演慶堂을 창건한 子朝 27년 은 순조 27년인 정해년이며, 창건자는 섭정하는 왕세자 인 小朝였으며, 大朝인 순조가 당호를 연경이라 이름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17)

연경당의 연향 공간은 전각을 중심으로 보계를 단으 로 구획하여 배치하여 설행되었다.

<그림 4>의 연경당은 전각의 구성이 慈慶殿과 달 리 본채의 동서쪽에 전각을 연결하여 ㄷ자형 구조를 만들어 주빈의 공간은 전각 안에 위차를 두어 구획한 다. 전정의 공간에는 남녀 초청 객들의 좌석을 배치함 으로써 의례공간의 관습과 공연공간의 편의를 모두 충 족시킬 수 있었으며 연향을 열기에 적합하게 공간을 구획하였다.

ㄷ자형 전각은 전각 앞의 殿庭 공간을 동측 전정의 공간과 함께 연동하여 연향의 목적에 맞게 사용하기에 좋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연향을 준비하면서 소용되는 품목들을 상황에 맞게 배설 할 때 ㄷ자형의 형식이 관계자들의 동선과 의례 진행에서 일관성 확보와 참여자의 구분에도 용이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연경당 남쪽의 전각 외부 벽을 판장 형태의 벽으로 구성한 것도 무자진작 연경당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형 식이다.

17) 주남철,『연경당』, 일지사, 2002년, 9쪽 재인용.

이는 의례 상황에 따라 전정을 확장하여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演慶堂은 보계 위에 전각을 중심으로 전정 중앙에 주렴으로 가벽을 구획하고 차일을 설치하여 2월에 설 행된 慈慶殿 정연에 비해 공간의 구성에서 간소한 양 상을 보인다.

그림 4. 演慶堂進爵圖 上, 演慶堂進爵班次圖 下(1828)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무자진작 다음해에 설행된 기축진찬은 연경당에서 연향이 거행되지 않는다.

연경당을 중세시기 궁중의 연향을 위한 극장형식의 전각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18) 왕실의 연향에서 중요 한 것은 주인공 즉, 主賓과 주빈의 위엄을 반영할 수 있는 공간이다.

연경당은 그런 측면에서 주빈을 대표하는 공간에서 거행되지 않았고 그를 위한 공간 구성과 형식이 상이 하다.

왕실의 진작과 진찬의 연향은 주빈을 상징하는 전각 인 殿에서 주로 설행된다.

18) 사진실, 「연경당 진작의 공간운영과 극장사적 의의」, 2008, 한 국극예술연구, 제27집, 13∼6쪽을 인용함.

(7)

연경당은 궁궐의 위계에서 하위 개념으로 정조시기 연희당 등과 같이 의례가 간소할 경우에 거행되었던 장소이다.

연경당은 효명세자 시기 왕실의 건재함과 효 사상을 반영하기 위해 빈번하게 거행되는 연향을 용이하게 하 기 위해 구획된 전각으로 효명세자 대리청정 시기 연 경당은 연향 공간에서 자경전의 차선 위계를 갖는 공 간적 의미가 있다.

연경당 역시 자경전이 변화되는 시기인 1827년 이후 1828년에 건립되는 연향 공간으로 효명세자 시기 연향 을 위한 공간으로 등장한다.

효명세자가 연향공간으로 연경당을 만들었다는 사실 은, 연경당이 궁극적으로 왕권강화를 위한 공간임을 잘 보여준다.19)

연경당의 ㄷ자 건축형식은 자경전이 一자형에서 ㄱ 자형으로 증축된 이후 나타난 건축형식으로 효명세자 시기 연향 건축 공간이 확장되면서 건축적으로 변화된 것을 알 수 있다.

3.3 環翠亭

효명시기 연향을 거행한 공간에서 살펴보아야 할 곳 은 慈慶殿과 함께 자경전 서측에 자리한 왕세자 공간 인 環翠亭이다. 환취정은 1484년(성종 15) 9월 27일20) 창경궁 창건 당시 조성되었다. 성종은 정자의 이름을

‘環翠亭’이라 직접 짓고 김종직에게 환취정 기문을 써 서 올리라 명하였다.21)

環翠亭은 성종시기에 연향을 거행22)하거나 경종이 잠시 이어하여23) 생활하던 곳으로 경종이 승하한 곳 19) 이민아,『효명세자(孝明世子), 헌종대(憲宗代) 궁궐(宮闕) 영건(營 建)의 정치사적(政治史的) 의의』, 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7, 34

∼35쪽 인용

20)(‘환취’는 빽빽한 나무숲과 산자락에 놓여 주변은 쪽빛 푸른 기운 이 감돌고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정자를 둘러쌌다는 뜻이다.

(『성종실록 15년 7월 5일)

21)(環翠亭)環翠亭在通明殿北[주:金宗直記昌慶宮之後苑有新亭曰環翠 直通明殿之北奧岡巒體勢旁橫側展長松萬株環擁而立又植密竹數千挺以 補其隙前臨大內結構參差鴛鱗碧鏤莎階苔甃相肋爲翠微之氣自邇以遠則 崇墉之外有闤闠闤闠之...중략...明仁聖遠過孝宗而斯亭之設偶與之同前後 聖賢規模制作異世而同符吁可想已彼芙蓉雙曜之峙壯觀於上陽疑思韶芳 之葺重煥於未央皆爲遊畋巡幸之備耳烏足爲今日道也誠願殿下毋怠毋荒 永肩一心每登眺之際深懼玩愒之易流而必以懷保小民爲祈天永命之實如 上所云則我朝鮮億萬世無疆之休寧不在玆乎臣敢以是爲獻](『궁궐지』, 장서각)

22) “임금이 環翠亭에서 宗親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月山大君 李婷 등이 入侍하였고, 작은 과녁에 활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환취정에 서 종친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월산 대군 이정 등이 입시하다.

(『성종실록』 195권, 성종 17년 9월 17일 기미)

23) “창경궁 환취정으로 옮기다.“ (『경종실록』 15권, 경종 4년 8월

이기도하다.24)

○ 閔命爀, 以戶曹言啓曰, 明政殿雨漏修改及迎鴈門·環翠 亭墻垣修改吉日, 令日官池景泌推擇, 則今五月十三日辰時 爲吉云, 以此日時擧行, 何如? 傳曰, 允。25)

○ 任存常, 以戶曹言啓曰, 差備內環翠亭以下諸處修改吉 日, 令日官崔榮遠推擇, 則來三月二十五日卯時爲吉云, 以 此日時擧行之意, 敢啓。 傳曰, 知道。26)

환취정은 창경궁 후원에 있던 정자이다. 환취라는 이 름은 남산의 烟雲과 東郊의 풀과 나무들이 푸른빛이 마치 정자의 난간 밑으로 들어와서 서로 기이함을 자 랑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1829년 純祖가 40세가 되고, 왕위에 오른 것이 30년 이 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대리청정을 하던 왕세자 의 간청에 의해 잔치가 행해졌다.

환취정은 1827년 효명세자가 주도한 진작에서 자경 전과 함께 의례의 주요 장소로 쓰이게 된다.

효명세자 대리청정 시기 연향에서 왕세자 공간은 크 게 侍宴位와 小次, 便次의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시연위는 연향에서의 왕세자의 자리이며, 소차는 연 향에 참여하기 위하여 의례상으로 대기하는 공간을 의 미한다.

편차는 연향이 거행되는 동안 휴식을 하거나 다음 연향에 참석하기 위해 기거하는 공간이다. 이는 연향이 왕세자를 위한 익일회작이 거행되면서 나타나는 특징 적 의례공간이자.

환취정은 왕세자인 효명세자가 거취하면서 연향을 주도 기획하는 중요한 기능을 하며 연향이 거행되는 동안 왕세자의 편차라는 위계를 갖는 공간이었다.

효명세자 시기 환취정은 단순히 왕세자의 휴식을 위 한 공간의 기능보다는 연향을 주도하여 거행하는 왕세 자의 역할과 관련이 있다.

효명세자는 주빈에게 진작을 올리는 주체로 習儀가

6일 병자)

24) 밤에 流星이 昻星 아래에서 나왔으며 또 井星 위에서도 나왔다.

丑刻에 임금이 環翠亭에서 昇遐하니, 內侍가 지붕에 올라가 皐復을 하고 곧 擧哀 를 하였다. 禮曹에서 世弟가 被髮을 하는 것이 마땅한 지 아니한지를 가지고 儒臣들에게 문의하였는데, 유신 등이 말하기 를, "《五禮儀》 참최 斬衰變服條)에 王世子와 大君 이하가 피발하는 글이 있는데, 邸下가 大行大王 에게는 王統을 繼承하는 義가 있으니, 喪服을 변통하는 절차는 당연히 《오례의》에 의거하여 거행하여야 합니다." 환취정에서 승하하다. (『경종실록』 15권, 경종 4년 8월 25 일 을미)

25)『승정원일기』 1911책 (탈초본 101책) 순조 6년 5월 12일 기미 26)『승정원일기』 2188책 (탈초본 112책) 순조 25년 2월 17일 을해

(8)

이루어지는 날이나 행사 당일 아침 환취정에 머물면서 진찬의 준비와 진행상황을 지휘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환취정은 慈慶殿 진찬의 진행본부라고 할 수 있다.27) 이러한 가능성을『戊子進爵儀軌』의 修理·排設에서 살 펴보면 벽과 창을 도배하고 온돌에는 別文地衣를 배설 하며 환취정 앞에 보계를 깔아 연향을 준비하였다.

즉, 연향에서 환취정이 중요한 전각임을 알 수 있다.

효명세자는 환취정에 머물며 연향 준비의 전반적인 부 분까지 세세하게 지시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환취정이 표면적으로는 왕세자가 연향을 준비하는 공간이었지만, 효명의 대리청정 시기에는 왕권을 연향 에 반영하기 위한 공간적 기능을 한 것이다.

<그림 5>와 <그림 6>으로 환취정의 건축 변화를 살펴보면 1827년과 1828년, 1829년을 비교해보면 1827 년 환취정에 비해 1828년 무자진작의 환취정은 전각의 건축 배치가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小次 環翠亭

그림5. 慈慶殿進爵 環翠亭과 小次(1827)

環翠亭

小次

環翠亭

그림 6. 戊子進爵 環翠亭 (1828) 左, 己丑進饌 環翠亭과 小次 (1829) 右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27) 사진실, 「연경당 진작의 공간운영과 극장사적 의의」, 2008, 한 국극예술연구, 제27집, 13∼61, 41쪽 인용함.

1829년 기축진찬에서는 환취정의 형태는 이전 해와 같지만 왕세자의 소차공간은 확장되어 나타난다.

小次는 환취정에 구획되는 공간으로 연향에서 왕세 자를 위한 또 다른 공간이다. 소차 공간 변화에 따른 배경을 살펴보면 이전 해에 설행된 자경전진작에서 왕 세자의 小次 공간은 협소한 군막 형태로 환취정 부근 에 자리한다.

무자진작은 왕세자의 대리청정 1주년 기념의 경축의 의미로 익일회작이 왕세자를 위해 열리게 되며 소차 공간도 왕세자를 위한 또 다른 공간으로 의미를 갖게 된다.

1828년 무자진작은 왕세자의 익일회작이 처음 설행 되는 중요한 사례로 연향에서 왕세자의 공간이 왕세자 의 정치적 권위에 맞게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 다.

기존은 대연 형식의 군막이 점차 輦의 익장도 훨씬 커지고 주변에 차일과, 장막 등으로 배치하여 일정한 건축 공간의 구획을 보여준다.

환취정 주변 소차공간에서의 건축변화를 <그림 6>

으로 좀 더 살펴보면 1827년의 자경전진작보다 1828년 소차를 중심으로 공간이 확장되고 변화되는 특징이 나 타난다. 또한, 왕세자 소차에서 자경전 전각으로 이어 지는 假複道가 나타난다. 環翠亭의 왕세자 小次에서부 터 慈慶門까지 연결된 형태이다.

왕세자는 환취정과 소차에서 대기하면서 연향이 시 작되기 전 가복도를 따라 자경문까지 다다르게 된다.

이는 기록화와 의궤로 확인되어 나타난다. 가복도에 소용되는 건축 자재는 의궤의 배설 부분에서 알 수 있 다.

油芚付滿箭遮日 二十四浮 自小次軍幕至慈慶門外 設複道 具 柱樑短椽若架屋樣廷袤 十四間廣可 一間許高可立儀仗 上 ○滿箭障子機 並紅漆付油芚釘 着以備行路雨水. 戶曺 措備擧行.

유둔부만전차일 24부 - 小次의 군막에서 慈慶門 밖까지 기둥과 들보에 단연(短椽)을 갖춘 複道를 설치함. 가옥과 같은 모양이며 사방의 길이는 14칸, 폭은 1칸 쯤으로 하 여 높이는 의장을 세울 수 있도록 함. 위는 滿箭障子를 덮음. 機은 모두 홍칠하여 유둔을 붙이고 못을 박아 고 정시켜 비가 올 때 다니는 길로 대비함. 호조가 준비하 여 거행함.28)

假複道의 형식은 기둥을 세우고 보와 서까래로 가설 구조를 만들어 복도를 구성하는 형식이다. 가설 복도의 28) 송방송(역) 외,『國譯純祖己丑進饌儀軌 2』, 민속원, 2007, 146쪽

(9)

설치는 연향 설행 시 비에 대비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 로 생각된다.

환취정은 1827년 이후 1828년에 형태가 변화되고 소 차가 확장되었으며, 1829년 가설 복도를 설치하는 과정 으로 연향을 설행한 3년 동안 발전되며 변화되었다.

환취정의 건축변화는 자경전의 건축적 변화와 동일 한 시기이다.

환취정의 건축변화는 전각의 배치가 다르게 변했지 만, 전각이 증축되거나 확장된 형식은 아니다. 즉, 환취 정의 건축변화는 규모가 아닌 전각의 방향성이 바뀌는 특징이 나타난다.

〈동궐도〉의 기록화를 참조하여보면, 1827년의 전각 과 달리 1828년의 자경전과 환취정의 변화된 건축형태 를 반영하여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환취정과 자경전이 연향을 거행하기 위한 연계성에 서 유기적인 공간의 모습이 구현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7.慈慶殿(中)과 環翠亭(左) (출처 : 동아대학교 소장본)

환취정의 건축 배치 형식이 바뀐 것은 주요 연향 공 간인 자경전과의 건축적 연계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자경전과 환취정의 상관관계를 <그림 8>로 분석해 보면 1827년 자경전과 환취정은 연계성에서 협소하게 나타난다.

1828년 자경전을 증축한 후 환취정의 건축배치를 변 화시키면 연향의 주공간인 자경전과의 연계성이 확장 되는 건축 변화를 알 수 있다.

환취정의 건축변화는 효명세자의 정치적 권위를 반 영하기 위해 전각의 정면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환취정이 변화되는 시기도 자경전이 변화되는 시기 와 연경당이 건립되는 시기와 동일하게 나타난다.

.

그림 8. 1827년과 1828년 창경궁 자경전과 환취정의 배치 비 교도

종합해보면 창경궁의 자경전, 연경당, 환취정은 효명 세자 대리청정 시기에 왕실의 연향을 위해 건축 변화 가 나타난다.〈동궐도〉에는 효명세자 대리청정시기 건 축적으로 변화된 자경전과 환취정의 모습이 반영되어 나타난다.

4. 결론

조선후기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시기인 1827년부터 1829년에 연속적으로 열린 연향은 왕세자의 주도적인 기획력이 돋보인다.

효명세자 대리청정시기 창경궁 연향 공간의 건축 변 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정조시기 건립된 창경궁의 慈慶殿은 효명세자 대리청정 시기인 1827년 자경전진작에서 一자형 배치 였지만, 이후 수리되어 1828년 무자진작에서 ㄱ자형으 로 건축변화가 나타난다.

둘째, 효명세자 대리청정시기 수리된 자경전은 3년 동안 지속적인 연향이 거행된 공간으로 순조, 순원왕 후, 효명세자의 왕실 권위가 반영된 공간으로 효명세자 대리청정시기 왕실에서 중요한 공간이었다.

셋째, 演慶堂은 자경전이 변화되는 시기인 1827년 이

(10)

후 1828년에 건립되며, 연향 건축 공간이 확장되면서 등 장하는 공간이다. 연경당의 ㄷ자형 건축형식은 자경전이 一자형에서 ㄱ자형으로 증축되고 난 이후 나타난 건축 형식이다. 즉, 효명세자시기 연향이 거행된 전각은 一자 형, ㄱ자형, ㄷ자형 순으로 건축적 변화가 나타난다.

넷째, 성종시기 건립된 環翠亭은 1827년 이후 자경전 과 함께 건축변화가 나타난다. 환취정 건축 변화의 특 징은 배치 형식이 바뀐 것으로 1827년 자경전과 환취 정은 연계성에서 협소하다. 1828년 자경전을 증축하고 환취정의 건축배치를 바꾸면 두 전각의 연계공간이 확 장되어 주요 연향 공간인 자경전과 환취정의 건축적 연계가 용이해진다.

즉, 효명세자의 권위를 반영하기 위해 환취정의 정면 성을 확보하는 건축적 변화가 나타난 것으로 판단된다.

다섯째, 효명제자 대리청정시기 표면적인 정치적 공 간과 달리 연향이 거행되는 공간은 왕세자의 위상을 연향으로 보여주기 위한 공간적 의미가 있다.

창경궁의 慈慶殿, 演慶堂, 環翠亭은 연향 공간의 확 장과 의례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동일한 시기에 건축적 변화가 나타난다.

종합해보면 자경전과 환취정은 효명세자 대리청정시 기 연향의 주요한 공간으로 집중적으로 수리되었으며, 연경당은 연향의 용이한 설행을 위해 새롭게 건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즉, 효명세자 대리청정시기 창경궁의 자경전과 연경 당, 환취정의 건축적인 변화를 통하여 왕실과 효명세자 의 정치적 위상을 확립하기 위해 연향의 건축 공간이 확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서울대학교 규장각 2. 『승정원일기』, 서울대학교 규장각

3. 『慈慶殿進爵整禮儀軌』,1827, 서울대학교 규장각 4. 『戊子進爵儀軌』, 1828, 서울대학교 규장각 5. 『己丑進饌儀軌』, 1829, 서울대학교 규장각 6. 이의강(역),『국역순조무자진작의궤』, 보고사, 2006 7. 송방송(역) 외,『國譯純祖己丑進饌儀軌 1』, 민속원, 2007 8. 송방송(역) 외,『國譯純祖己丑進饌儀軌 2』, 민속원, 2007 9. 송방송(역) 외,『國譯純祖己丑進饌儀軌 3』, 민속원, 2007 10. 서한석(역) 외,『譯註己巳進表裏進饌儀軌 3』, 국립국악원, 2018 11. 주남철,『연경당』, 일지사, 2002

12.『원행을묘정리의궤 역주』,수원화성박물관 역사자료총

서 1, 수원화성박물관, 2016

13. 사진실,「연경당 진작의 공간운영과 극장사적 의의」, 2008, 한국극예술연구, 제27집

14. 조재모,「조선시대 궁궐의 의례 운영과 건축형식」, 서 울대학교 건축학과 박사학위논문, 2004

15. 정정남,「효명세자 대리청정기 동궐의 건축적 변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도록, 2019. 6

16. 이민아,「효명세자(孝明世子),헌종대(憲宗代) 궁궐(宮 闕) 영건(營建)의 정치사적(政治史的) 의의」, 한국사론, 2008, 54.0, 187∼257쪽

17. 석진영·한동수,「순조 궁중연희 내연 무대의 朱簾, 甲 帳에 관한 연구 : 修理·排設 부분을 중심으로」,건축역 사연구, 2017, 26.2, 67∼76쪽

18. 석진영,『朝鮮時代 宮闕 宴享 空間의 建築的 特徵 硏 究』, 한양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박사학위 논문, 2020

접수(2020. 02. 20) 수정(1차:2020. 08. 05) 게재확정(2020. 08. 14)

참조

관련 문서

When conceptual words of space represent the meaning of time, the scope of space forms the primary meaning, expanding into the scope of time.. Such a change

A Study on the Development of Ship’s Ballast Water A Study on the Development of Ship’s Ballast Water A Study on the Development of Ship’s Ballast Water A Study on the

Keywords: Indigenous, methodology, Southeast Asian Studies, area studies, Kaupapa Maori, Sikolohiyang Pilipino.. * Programme Leader, History and International Studies,

• 이명의 치료에 대한 매커니즘과 디지털 음향 기술에 대한 상업적으로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해 치료 옵션은 증가했 지만, 선택 가이드 라인은 거의 없음.. •

The new energy strategy, announced in the presence of Sheikh Hamdan bin Mohammed bin Rashid Al Maktoum, Crown Prince of Dubai, aims to increase the contribution

고객중심의 열린 기업을 만들어가기 위한 수단 고객중심의 열린 기업을 만들어가기 위한 수단. 기존의 관념을 탈피하고

1 John Owen,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in The Works of John Owen, ed. John Bolt, trans. Scott Clark, "Do This and Live: Christ's Active Obedience as the

It was suspected about the assassinating of Crown Prince Kanaung that he was assassinated in 1866 by Prince Myingun. Myanmar Kingdom nearly outreached the way in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