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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일기와 출토복식에 나타난 조선시대 16세기 복식문화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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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일_2020.10.10 심사기간_2020.11.01-14 게재확정일_2020.11.19

󰡔미암일기󰡕와 출토복식에 나타난 조선시대 16세기 복식문화 연구

A Study on the 16th Century Costume of the Joseon Dynasty shown in the Miam Diary and Excavated Costumes

이명숙, 건국대학교 패션디자인학과 / 박순임, 건국대학교 패션디자인학과 Rhee, Myung Soog_Department of Fashion Design, Konkuk University Park, Soon Im_Department of Fashion Design, Konkuk University

차례 1. 서론

1.1. 연구배경 및 목적 1.2. 연구방법 및 범위

2. 『미암일기󰡕의 일반적인 고찰 2.1. 『미암일기󰡕의 사료적 가치 2.2. 16세기의 정치 사회적 배경 2.3. 『미암일기󰡕에 나타난 복식문화 2.4. 『미암일기󰡕에 나타난 색채

3. 조선시대의 16세기 출토복식 3.1. 16세기 출토복식의 특징

3.2. 16세기 출토복식에 나타난 복식의 종류 4. 『미암일기󰡕복식과 출토복식의 비교분석 5. 결론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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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일기󰡕와 출토복식에 나타난 조선시대 16세기 복식문화 연구

A Study on the 16th Century Costume of the Joseon Dynasty shown in the Miam Diary and Excavated Costumes

이명숙, 건국대학교 패션디자인학과 / 박순임, 건국대학교 패션디자인학과 Rhee, Myung Soog_Department of Fashion Design, Konkuk University Park, Soon Im_Department of Fashion Design, Konkuk University

요약

중심어 미암일기 출토복식 조선시대 16세기 복식문화

본 연구는 조선시대 16세기 복식의 종류와 특징, 색상 및 복식문화 등을 살펴보고 문헌과 실물을 근거 로 사료에 대한 확실성을 추구하여 향후 전통 복식문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방안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연구방법은 사대부가 복식의 공통점을 가진 󰡔미암일기󰡕와 출토복식에 나타난 사료와 실증자료를 통해 당 시대의 복식과 직물의 종류, 복식생활상을 살펴보았다. 연구내용은 조선시대 선비이며 고급 관리였 던 유희춘(1513~1577)의 개인 일기인 󰡔미암일기(眉巖日記)󰡕와 16세기 출토복식의 실증 보고서에 따른 자료 중 64건(여성묘주 35명, 남성묘주 29명), 조선왕조실록 중 󰡔미암일기󰡕의 배경인 선조실록 의 문헌을 중심으로 비교 · 고찰하였다. 󰡔미암일기󰡕에는 복식에 대한 기록이 230회로 복식의 종류는 면복, 조복, 단령, 직령, 철릭, 답호 등 21종류가 분석되었다. 출토복식은 무덤에서 출토된 실증적 유 물로 남녀 묘주 64명의 복식을 분석한 결과 총 1,145점, 19종류로 조사되었다. 선조실록에 나타나는 복식과 관련된 기록은 조복, 흑단령, 융복, 곤복에 면류관, 홍천익, 흑화자 등이었다. 사료에서 보이는 가죽옷은 16세기 출토복식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반면, 출토복식에서 보이는 액주름, 도포, 창의, 중치막 등이 미암일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16세기 복식문화의 특징은 지인 간 침비의 파견을 통한 디자인과 바느질 방법의 공유, 대여, 증여, 선물, 자체제작, 물품 구입, 왕실의 하사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혼인을 위한 복식 마련에는 직물구입, 염색, 복식제작 등에 2년이 넘는 준비 기간이 소요되 었고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고급 직물을 사용했다. 출토복식은 단령, 철릭, 답호, 액주름, 장옷 등의 복 식의 종류와 직물에 나타난 연화문, 연보상화문, 사양화 등의 문양을 통해 16세기의 복식, 직물, 문양 의 유행과 복식문화를 살펴볼 수 있었다. 본 연구는 우리 전통복식의 가치를 재인식하고 16세기 조선 시대의 복식문화를 계승하여 전통미를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데 의의가 있다.

ABSTRACT

Keyword Miam Diary excavated costume Joseon Dynasty the 16th Century costume culture

This study intends to examine the types and characteristics of clothing, colors, and costume culture of the 16th century of the Joseon Dynasty and to propose possible ways to develop Korean traditional costume. The method of research is to compare and contrast the types of clothing and fabric, and costume culture through historical records and empirical data from the

“Miam Diary,” a personal diary of Yu Hi Chun (1513-1577) who was a scholar and high-ranking official, and the data from 64 empirical reports of excavated relics from the 16th century along with the Annals of King Seonjo. In the “Miam Diary,” a total of 230 clothing-related records were identified which can be categorized into 21 types. In the case of excavated costumes, according to an analysis of 64 men and women's tombs, a total of 1,145 items were identified in 19 types. While the leather clothes were found in the historical records of "Miam Diary" but not in the excavated costume, ‘Akjurem,’ ‘Dopo,’ ‘Chang-ui,’ and ‘Jungchimak’ were only found in the excavated costumes but not in the “Miam Diary.” Some of the most distinctive characteristics of the 16th century’s costume culture are the sharing of ‘Chimbi’s among acquaintances who can do designing and sawing, the lending and giving of the items, the customs of gift and self-production, the purchases of goods, and the grants from the royal family. In particular, it took more than two years to prepare wedding costumes. The excavated costume showed the 16th century's trend of costume, fabric, and pattern. This research has an original contribution to re-recognizing the value of traditional Korean costume culture of the 16th century for further development of traditional beauty.

본 연구는 2018년 건국대학교

KU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한

논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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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1.1. 연구배경 및 목적

의생활은 인간의 생활사 중에서 문화, 유행, 사회현상 등의 여러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 므로 일상생활 속의 복식에 대한 기록은 그 시대의 복식풍속과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 한 단서가 될 수 있다. 16세기 출토복식에 대한 연구는 16세기 연안김씨 여성복식을 연구한 송미경(Song, M., 2007), 16세기 출토복식의 특징을 연구한 안명숙(An, M., 2009), 16세 기 단령의 구성법을 연구한 이은주(Lee, E., 1998) 등 다수의 연구가 있다. 󰡔미암일기󰡕에 대한 연구는 미암일기의 내용을 분석한 송재용(Song, J., 1996), 󰡔미암일기󰡕에 나타난 사대 부 복식을 연구한 윤소정(Yoon, S., 2006), 󰡔미암일기󰡕를 통해 본 복식의 유통 양상과 그 특징에 대해 연구한 이민주(Lee, M., 2006) 등의 연구가 있으나 현재까지 출토복식의 실증 유물과 동시대의 일기인 사료에 나타난 기록을 비교 분석한 16세기의 복식문화 연구는 전무 한 실정이다. 출토복식은 무덤에서 나온 복식으로 다양한 종류의 복식들이 출토되고 있지만, 소재, 형태, 시대별 복식의 특징, 유행만을 알 수 있을 뿐, 복식의 풍속, 관습, 유통 등을 밝 히기에는 한계가 있다.

본 연구의 대상인 󰡔미암일기󰡕는 일부 소실된 부분을 제외하면, 미암 유희춘이 10년 동안 매 일 자신의 활동에 대해 자세하고 사실적으로 기록한 일기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조선전기의 사대부 양반관료의 관직 생활과 일상생활 및 가정생활의 단면들을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 다. 그동안 우리가 모르고 지내던 조선전기 조상들의 삶의 방식과 경제생활, 가정경영, 사회 교류, 가족관계 등 조선전기의 사회상 및 복식문화의 전반적인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 한 자료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시대 선비이며 고급 관리였던 유희춘(1513~1577)의 개인 일기인 󰡔 미암일기(眉巖日記)󰡕의 기록과 16세기 출토복식 보고서,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실록 10년의 자료를 통해, 16세기 복식의 종류와 특징, 색상 및 복식문화를 살펴보고, 문헌과 실물을 근 거로 하여 향후 전통복식 발전 방안을 모색하고 이를 근거로 전통복식 종류의 확대 및 디자 인의 개발을 위한 모색과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1.2. 연구방법 및 범위

본 연구의 연구방법과 범위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미암 유희춘의 일기가 시작되는 1567년 10월 1일부터 미암이 졸하기 2일 전인 1577년 5월 13일까지의 일기인 󰡔미암일기󰡕에 나타 난 기록을 분석대상으로 하였다. 둘째, 16세기 출토복식 유물 중 64건(여성묘주 35명, 남성 묘주 29명)의 출토복식 보고서에 나타난 출토복식의 종류와 수량과 특징을 분석하였다. 셋 째, 조선왕조실록 중 󰡔미암일기󰡕의 배경인 선조실록에 나타난 복식 관련 기록을 조사하여 󰡔 미암일기󰡕와 출토복식 보고서에 대한 기록들과 비교 분석하였으며 16세기에 사대부들이 보 편적으로 착용하였던 복식의 종류와 색상 및 복식문화 등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2. 󰡔미암일기󰡕의 일반적인 고찰 2.1. 󰡔미암일기󰡕의 사료적 가치

유희춘은 1513년 12월 4일에 태어나 1577년 5월 15일에 사망한 조선시대의 선비로 본관

은 선산(善山). 호는 미암(眉巖)이다. 1538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7년 양재

역(良才驛)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함경도 종성으로 이배 되었다. 1565

년 충청도 은진에 다시 이배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재임용되어 대사성 · 부제학 ·

전라도 관찰사, 예조, 공조의 참판을 지냈다. 저서로는 󰡔미암일기󰡕·󰡔속몽구(續蒙求)󰡕 · 󰡔역대

요록(歷代要錄)󰡕 · 󰡔속휘변(續諱때)󰡕 · 󰡔천해록(川海錄)󰡕 · 󰡔헌근록(獻芹錄)󰡕 · 󰡔주자어류전해

(朱子語類箋解)󰡕 · 󰡔시서석의(詩書釋義)󰡕 · 󰡔완심도(玩心圖)󰡕 등이 있으며, 편서로 󰡔국조유선

록(國朝儒先錄)󰡕이 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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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7년부터 10년 동안 유희춘이 기록한 일기 중 현재 남아있는 그의 친필 일기는 모두 11 책으로 일기 10책과 유희춘과 부인 송덕봉의 시문을 모아 엮은 부록 1책으로 구성되어 있 다. 친필 󰡔미암일기󰡕는 1963년 1월 21일 그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260호로 지정되 었으며 중간에 빠진 부분이 있지만 선조실록 편찬에도 중대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 다(Song, J., 1996. p.3).

󰡔미암일기󰡕는 담양군 대덕면 모현관에 목판과 고문서가 함께 보관되어 있으며 1860년대에 후손들은 󰡔미암집󰡕과 󰡔경연일기󰡕로 발간하였다. 1936년~1938년에 5책으로 조선사편수회 에서 󰡔조선사료총간󰡕으로 간행하였다. 1996년 송담 이백순에 의하여 번역되었고 담양향토 문화연구원의 교열로 국역으로 완간되었다(민족문화 대백과사전, 2020). 개인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국사와 지방관아의 행정, 집안의 대소사, 교우 관계를 빠짐없이 기록했기에 복식,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사상, 문학, 의술, 날씨, 식생활에 관한 내용이 모두 들어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특히 남성의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관리로서의 일상과 가족 구성 원, 직물, 복식에 대한 기록이 많아 당 시대의 복식 생활상을 전반적으로 보여준다.

2.2. 16세기 정치 사회적 배경

조선을 건국한 정치세력은 성리학을 국가의 사상적 기반으로 채택하였으나 14세기 말까지 도 왕위의 계승에서부터 민가의 가계계승에 이르기까지 종법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 였다(Lee, C., 2010, p.105). 이처럼 고려시대의 비 부계적 특성이 조선시대 전기까지도 지 속하고 있었으나 점차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고 정통주의를 강조하는 성리학과 종법 제도가 정착되면서 왕위계승과 국가의례, 사회생활 등의 여러 영역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조선시대 초 15세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사병을 없애고 관직 제도를 개혁하였으며 경 제, 문화, 과학, 음악 등 전 분야를 발전시켰고 또한 훈민정음 창제와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 국대전을 완성하여 조선전기의 문물제도를 완성했다. 16세기는 조선의 사상적 기반인 성리 학이 토대를 이루었으며 지배계층의 제도적 확립이 강화된 시기였다. 이황과 이이는 16세기 중반 이래 강한 학문적 결속력으로 중앙과 향촌 사회에서 영향력을 키워 지방세력을 확대하 였다(Lee, J., 2014).

미암 유희춘이 생존했던 조선전기인 16세기에는 지방의 사림파 세력이 정계에 등장하여 기 존 대신인 훈구파와 정치적, 사상적으로 대립하면서 조선의 정치는 혼란스러웠으며, 매우 불 확실성의 시기였다. 정치적으로 살펴보면 중종, 인종, 명종, 선조 대왕이 왕위를 계승하고 있 었던 시기로 네 번의 사화가 일어났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조광조를 중용하 는 등 명망 있는 신진 사림을 등용했지만 기묘사화가 일어나고 결국 이렇다 할 치적을 남기 지는 못했다. 명종 때 역시 을사사화가 일어났으며 1565년 문정왕후가 사망한 후 명종은 성 리학 이념에 충실했던 사림들과 공신과 왕실의 외척들을 배척하고 본격적인 사림정치를 시 작했다. 미암 유희춘도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갔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관리에 재임용되었다.

사회적으로는 농업의 발달과 장시의 등장으로 경제가 발달하면서 물자가 풍부해져 사치풍조 가 사회문제로 대두했다. 사치풍조의 유행은 복식에 집중되었고 그 주도층은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양반과 비슷한 옷을 입고 어린아이들도 담비 이엄과 명주옷을 입고 다녔으며 천민의 부녀자들까지도 모피와 비단옷을 착용함에 따라 신분적 규제를 받던 고급 옷감의 수요가 증 가하기 시작했다(Nam, M., 2000, p.210). 고급 옷감의 수요 증가는 양잠업을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16세기 농가의 부업으로 활성화되었다.

선조 5년인 1572년 12월 24일과 1573년 2월 17일의 일기에 양반가의 가체와 비단옷, 염색 직물 등의 사치풍조를 금지했던 기록과 1573년 2월 17일 일기에는 상인의 명주옷 착용 금 지와 상여인의 비단옷 금지, 비단 목도리 금지 기록이 있다. 16세기는 직물과 곡식이 화폐의 구실을 했기 때문에 여인들의 직조 기술이 가정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미암일기󰡕

1568년, 4월, 22일에 “노비가 녹을 받아 왔는데 쌀이 8섬, 보리가 3섬, 명주베가 1필, 삼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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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3필이다.”를 미루어 보아 당시는 관리들의 급여인 녹봉도 직물과 곡식으로 지급했고 일 꾼들의 급여도 무명과 곡물로 지급했다. 따라서 모든 거래에 활발하게 사용되었던 명주와 무명은 크게는 토지를 사고 팔거나 가축을 사고 팔 때 사용되었고 작게는 가정과 개인에게 필요한 것들을 구입할 때도 무명이나 곡식으로 거래하였다.

󰡔미암일기󰡕의 기록에는 미암 자신이 직물이나 곡식의 매매를 통해서 집안 살림을 돕거나 재 산을 증식시킨 기록은 없지만 이문건(1495~1567)의 1535~1567까지의 일기인 쇄미록과 오희문(1539~1613)의 일기인 묵재일기에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직물과 곡식의 매매를 통해 가정경제를 돕거나 재산을 증식시켜가는 기록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양반 자신들이 직접 매매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거래는 종을 시켜서 처리했다.

16세기 조선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가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자급자족의 사회였다.

미암 유희춘이 유배, 관직 생활로 자주 집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부인인 송덕봉이 실질적인 집안 살림을 책임졌는데, 그녀는 새집의 건축, 농사 관리, 노비 관리, 음식 장만, 토지 매매 등의 집안 대소사는 물론, 누에를 치거나, 삼을 재배하고 옷감을 구입해서 염색하고 옷을 제 작하는 등의 다양한 일들을 도맡아 했다. 이 시기는 아직 유교적인 가족질서, 즉 가부장제가 정착하기 이전으로, 미암일기를 통해서 보면 사대부가의 여성이 실질적인 가정의 중심 역할 을 했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당당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16세기에도 고 려시대의 비부계적 특성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2.3. 󰡔미암일기󰡕에 나타난 복식문화

조선은 500년이라는 긴 시간을 이어온 왕조로 복식에서도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새롭게 생 성되는 복식이 있는가 하면 소멸하는 복식도 있고 또 착용자들의 선호에 따라 크게 유행하 는 복식의 종류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대별로 복식의 형태, 장식, 직물의 종류 등이 차츰 변천하는 것도 살펴볼 수 있다. 복식은 정치, 문화적인 상황이나 사회현상에 따라 다양한 변 화를 가져온다. 1569년 윤 6월 8일 유희춘이 유행에 따라 초립에서 사립으로 갓을 바꿔 썼 다는 기록을 보더라도 유행을 따라가는 인간 심리를 읽을 수 있다. 1567년 10월 12일, “성 주 김응인이 침비와 남원사람을 보내 왔다”라는 기록은 사대부 집안 간 복식의 제작, 디자인 에 대한 정보의 공유가 있었음도 알 수 있다.

󰡔미암일기󰡕 속에는 복식, 직물, 쓰개, 신발의 종류와 복식의 재료를 장만하고 제작하는 기록 과 함께 직접 만들지 못하는 물품들은 장인에게 의뢰해서 제작하는 과정들을 알 수 있는 대 목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필요한 물품이 없을 때는 지인들에게 빌려서 착용한 예도 많이 있 다. 미암 자신도 복직된 후 관복, 각대, 사모를 지인에게 빌리는 경우가 많았고 품계가 올라 갈 때마다 은대, 금대, 관자, 조복 등 관직에 맞는 관복과 관대를 빌려서 착용했다. 1568년 7월 6일 부인이 흑단령을 제작해서 보내주기 전까지 10개월 가까이 흑단령을 빌려 입은 기 록도 있다. 손주의 혼례 때에도 예복은 부인 송덕봉이 직접 바느질해서 제작했지만 갓과 신 발 등은 지인에게 빌려서 사용했다. 지인에게서 빌릴 수 없을 때에는 여러 가지 물품을 대여 해 주는 곳에서 빌려서 사용했는데 이러한 대여 문화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한성부 시전 부분에 혼례용품을 빌려주던 가게인 세물전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세물전은 조선 시대 후기까지 계속해서 존속했다. 부인 송덕봉은 남편이 처음 입게 되는 당상관 의복, 자단 의, 또 손자가 혼례 때 입을 흑단령을 직접 제작했고 철마다 남편의 의복을 지었으며 의복 수발은 동거 중일 때뿐만 아니라 서울과 향촌에 서로 멀리 떨어져 지낼 때도 의복을 보내주 었다. 그 외의 의복은 첩이나 침모에게 제작하게 했던 기록은 당 시대의 생활 풍속 및 복식 문화상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미암일기󰡕의 복식에 대한 기록은 230회이며 복식의 종 류는 면복, 조복, 단령, 직령, 철릭, 답호 등 21종류가 분석되었다.

󰡔미암일기󰡕에 나타난 복식의 종류는 적삼, 한삼, 저고리, 바지, 치마, 잠벵이, 유의, 도롱이

등의 기본 복식과 함께 단령, 조복, 직령, 철릭, 답호, 방의, 배자, 과두, 장의, 원삼, 단삼, 등

다양한 겉옷인 포류가 있다. 핫옷, 털옷, 납의, 침고(누빈 바지), 솜옷, 구피의(강아지가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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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금, 속옷, 버선, 행전, 토수, 등의 기록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단령에 대한 기록이 가 장 많다. 단령의 종류는 관복, 공복, 시복, 흑단령, 홍단령, 목면단령, 모시베단령, 무명베단 령, 저포단령, 옥색단령(담복) 등으로 용도나 소재, 색으로 구분하거나 직물의 소재나 바느 질 방법, 옷감의 두께에 따라 복식의 명칭 앞에 붙여 다양하게 표현하였다.

복식의 종류별 분포를 보면 단령이 67회(29%)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두 번째 는 저고리로 19회(8%)의 비중이며 기타는 48회(21%)를 차지하는데 특정한 옷의 명칭이 없이 옷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철릭은 9회(4%)로 국가의 행사에 많이 착용하였고 직령은 11회(5%)를 차지하는데 편복의 포로 많이 착용했다. 방령에 대한 기록은 5회가 있는데 방 령은 말을 탈 때 착용하는 복식이다. 상마상은 방령과 같은 용도의 복식으로 생각되며 3회 가 기록되고 있다. 유희춘이 당상관까지 지낸 고급 관리였지만 의외로 흉배에 대한 기록은 1572년 11월 3일 1회 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는 관직에 기용되어 있어도 특별한 경우를 제 외하고는 흉배를 착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미암일기󰡕에 나타난 복 식의 종류와 수량을 살펴보면 <Table 1>과 같다.

복식 수량 복식 수량

면복 1 장삼 1

제복 1 원삼 1

조복 17 장옷 2

단령 67 저고리 19

철릭 9 치마 3

직령 11 바지 10

방령 5 적삼 6

답호 2 한삼 1

갑주 7 상마상 3

과두 1 배자 3

가죽옷 12 기타 48

<Table 1> The Types and Quantities of Costumes in the 󰡔Miam Diary󰡕

일기에 나타나는 복식에 출토복식에서 나타나는 복식의 종류들이 빠져 있다고 해서 그 옷을 착용하지 않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일기에는 복식의 종류를 적지 않고 그냥 옷이라는 보편적인 명칭으로 48회나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기에는 다양한 쓰개와 신발의 종류, 수납을 위한 갓집, 가죽상자, 조복상자, 보자기, 개가죽보자기 등에 대한 기록들이 있 다. 쓰개는 부인 송덕봉의 이엄을 빼고는 대부분 남성의 것으로 16세기 남성 입모의 종류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갓은 말총으로 엮은 것으로 평상시에는 검은 갓을 썼으나 국상이 나면 흰 비단 천을 덧씌워서 백립으로 썼다. 남성들도 겨울에는 방한용으로 이엄을 착용했다. 󰡔미 암일기󰡕에 나타난 쓰개의 종류는 백립(白笠), 흑립(黑笠), 초립(草笠), 사립(絲笠), 사모(紗 帽), 당사모(唐紗帽), 정자관(程子冠), 충정관(沖正冠), 염계관(濂溪冠), 궁전모(弓箭帽), 홍 종립, 탕건(宕巾), 감투(敢鬪), 망건(網巾), 복두(幞頭) 등이 있다.

두식의 장신구는 금, 은, 옥관자와 상투 동곳, 갓끈, 옥비견(갓을 잡아주는 장식)의 기록이 있다. 1571년 11월 21의 일기를 보면 “드디어 황금귀고리를 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당시의 유행 현상을 미루어 보아 귀고리를 착용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일기에는 다 양한 직물의 종류와 가격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 있으며, 이는 16세기 조선시대 직물 가격 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일기에는 출토복식에서 출토되지 않은 가죽의 기록이 많은데 이는 16세기에 다양한 가죽을

방한용 의복 재료로 사용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가죽의 종류는 쥐가죽, 개가죽, 수달피가

죽, 청서피, 사슴가죽, 문피, 족제비가죽, 호랑이가죽 등이 의복, 쓰개, 신발에 사용되었고 일

기를 쓰기 시작한 1567년은 쥐가죽, 개가죽, 수달피에 대한 기록이 많고 차츰 관직이 올라

갈수록 족제비, 호랑이, 노루, 담비가죽 등 고급가죽의 사용이 많아졌다. 1570년 11월 4일

의 일기 중 빨간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직조한 홍화주에 대한 기록과 1569년 8월 9일과

1573년 3월 19일 유희춘이 문관이었음에도 국가행사에 무관의 복장과 무기를 갖추고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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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 또 국상 중에 모시베 단령을 입지 않고 무명베 단령을 입은 기록들이 있다. 또한 󰡔미 암일기󰡕에는 하사, 대여, 증여, 선물, 공방의 장인에게 직접 제작을 의뢰하거나 옷을 지어주 는 사람에게 삯을 주고 제작을 의뢰한 기록도 많이 보인다. 제작이 어려운 조복은 중국을 오 가던 통사에게 구매를 의뢰하기도 했다. 유희춘이 왕실에서 하사받은 기록은 모두 12회로 그 중 의복, 직물, 사모 · 귀덮개는 각 2회, 주머니 5회, 대록피(사슴가죽) 1회이다. 유희춘이 선조에게 하사받은 의복은 1568년 10월 23일에 “새까만 무명베의 단령이 하나, 초록빛 명 주베로 만든 겹배자가 하나, 하늘빛 명주 겹저고리가 하나, 하얀 모시베 겹저고리가 하나, 하얀 명주로 만든 겹토수(손목싸개)와 행전(다리싸개)이 하나, 하얀 비단 적삼이 하나, 검정 색 사슴 가죽으로 만든 당혜가 하나, 흑서피로 만든 신과 일반신 각 한 벌과 1576년 10월 13일의 붉은 명주 속옷 1벌, 하얀 무명에 명주 속을 넣은 바지 1벌, 검은 가죽신 1쌍이다”.

집에 불이 나서 옷이 타버린 경우와 먼 길을 떠나는 지인에게 의복을 선물하거나 또 노비에 게 헌 옷을 물려주는 풍속은 16세기의 복식 생활문화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2.4. 󰡔미암일기󰡕에 나타난 색채

일기에는 의복을 짓는 침선과 관련된 가위나 바늘, 인두, 자 등의 기록과 함께 염색에 관련 된 기록들이 있다. 직물에 염색한 기록은 총 5회로 그중 4회가 쪽 염색이고 1회는 손주의 혼례복을 만들기 위해 명주에 염색을 한 것으로 직물 염색은 관복을 만들거나 혼례복를 준 비할 때 집중되어 있다. 염료에 대한 기록으로는 1574년 7월 27일 부인이 종을 시켜 쪽풀 을 한강에서 채취한 기록, 홍화 10회, 단목(소목) 2회, 자초 1회가 있다. 소목과 홍화, 자초 로 염색을 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염료를 구입한 기록을 볼 때 실생활에서 다양한 색상으로 염색한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염색의 재료 중 쪽은 청색, 소목은 홍색, 자초는 보라색, 홍 화는 분홍색과 홍색을 염색하는 데 쓰인다. 쪽은 옅은 하늘색에서 짙은 남색까지 염색할 수 있는 염료로 짙은 남색은 쪽풀을 발효시켜 염료를 만드는데 일기에는 발효염색 기록은 나오 지 않고 쪽잎을 따서 바로 염색하는 생쪽 염색법에 대한 기록만 있다. 이는 1574년 7월 27 일 부인이 종을 시켜 한강에서 쪽풀을 뜯어오게 하고 그 다음 날인 28일에는 부인이 네 덩 어리의 얼음을 가져다가 명주베에 쪽물을 들였다는 일기의 내용에서 쪽염을 할 때는 한강에 서 쪽풀을 채취하고 서빙고에서 얼음을 가져다가 생쪽 염색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홍 화를 염색할 때는 오미자가 같이 쓰이는데 홍화와 오미자를 함께 구한 기록은 염색 재료로 쓰였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기록은 조선시대의 염료 구입과 염색 방법을 알 수 있는 자료이며, 1571년 11월 1일의 무명베 1필로 소목 2근을 구매한 것은 소목이 그 당시 에 매우 비싼 염료였음도 알 수 있다.

󰡔미암일기󰡕에는 자주색 비단옷, 홍단령, 백단령, 흑단령, 하늘빛 명주저고리 등과 같이 옷의 색상과 남색 치맛감, 금실 놓인 붉은 옷감, 분홍비단 등의 색상표현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 한 색상표현은 직물에 국한되지 않고 검은 의관, 자색 말총으로 엮은 갓, 홍종립, 검은 비단 의 갓끈, 백복두, 지달가죽 푸른 덧신, 흰 사슴 가죽신, 검정색 가죽신, 연록의 가죽 털로 만 든 덧신, 붉은 가죽의 아이 신발, 자색 아동 신발, 붉은 노루 가죽 등에서도 다양하게 나타나 고 있다. 색채에 대한 기록을 보면 무엇이든 빠짐없이 기록했던 유희춘의 섬세한 성격을 알 수 있다. 일기에 나타난 색채는 흰색, 검은색, 홍색, 청색, 황색이 많은데 이는 전통적인 오 방색이 복식생활에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일기에 나타나는 색의 표현은 흰색, 검 은색, 홍색, 청색, 자색 등 10가지의 색상표현들이 총 156회가 기록되고 있다. 색상별로는 흰색 44회 29%, 검은색 43회 28%, 홍색 28회 18%, 청색과 자색 각각 13회로 8%, 녹색 6 회 4%, 황색 3회 2%, 분홍, 도홍, 황갈색은 각각 1%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일상생 활 속에서 무채색의 사용 빈도가 매우 높음을 알 수 있었다.

출토복식은 출토와 동시에 산소와 접촉하면서 황갈색으로 변화하는 특성 때문에 대부분의

복식과 직물이 갈색을 띄고 있다. 배천조(1532~?)의 도포나 의인박씨(16세기 중후반)의

단령처럼 쪽으로 염색한 복식은 남색이 선명하게 남아있어 색상이 확실하고, 배천조의 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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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천안무연고 여성묘(16세기)의 시복 단령처럼 분홍색이 유지된 드문 경우도 있다. 󰡔미 암일기󰡕에 나타난 색상표현 횟수와 비율은 <Table 2>와 같다.

3. 조선시대의 16세기 출토복식 3.1. 16세기 출토복식의 특징

출토복식이란 분묘 이장 시 관 내부에서 시신과 함께 발견된 복식류를 말한다. 출토복식은 관 주변을 회로 두껍게 바르는 매장법으로 조성된 회격묘와 회곽묘에서 발굴되고 있다. 출 토복식은 망인을 위해 새로 만든 수의와 넓은 관 내부를 채웠던 보공품이다. 과거의 사람들 은 이승의 삶이 저승에서도 지속된다는 생각으로 염습의를 생존 시 착용하던 옷을 넣었고 가족의 복식도 함께 부장품으로 넣었다. 실물자료인 출토복식은 의복의 형태와 구성, 옷감의 재질, 바느질법 등을 알 수 있으며 묘주의 생몰년대가 정확한 복식은 복식의 세부적인 특징 을 연구할 수 있는 고증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Seoul History Museum, 2003, p.38). 출 토복식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나타나고 있다. 출토지를 파악할 수 없는 3건을 제외하고, 총 196건 중 경기 77, 충청 54, 경상 32, 전라 17, 서울 12, 강원 3, 인천 1건이 있다. 가장 많이 출토되는 지역은 경기 지역이고 그 다음이 충청도, 경상도 순으로 나타났 다. 1941년 경기도 시흥에서 출토된 동래정씨(?~1583)의 출토복식을 시작으로 생몰 연도 가 정확한 출토복식은 몰년을 기준으로 1500년대 29건, 1600년대 48건, 1700년대 22건, 1800년대 9건, 1900년대 2건이 있다(Korea Folk Encyclopedia, 2020a; 2020b). 출토복식 의 출현은 대부분 문헌과 회화 중심의 간접자료에 의존하던 조선시대 복식 연구가 다양한 형태의 실증자료를 접하게 됨으로써 문헌과 회화 자료로는 증명되지 않았던 직접적인 연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16세기 출토복식에 나타난 복식 중 남성의 복식은 포 종류인 단령, 직령, 철릭, 답호, 도포, 액주름, 창의, 중치막, 방령, 장의와 배자, 저고리, 바지, 적삼 등이 있다. 단령(團領)은 문무 백관의 상복으로 깃이 둥근 데서 유래 된 명칭이다. 신라 진덕여왕 2년 당나라에서 받아 온 것을 시작으로 고려 우왕 13년(1387년)에 상복으로 정한 후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착용했던 (National Folk Museum, 2000, p.51) 우리 선조의 전통적인 관복이라고 할 수 있다. 답호 (褡胡)는 조선시대 왕과 관리들이 철릭 위에 입던 겉옷으로 깃은 직령으로 소매가 짧다. 󰡔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조선전기의 답호는 외교 사신과 신하들에게 하사품으로 사용 되었다. 조선전기의 반소매 형태의 답호는 1630년경 이후 점점 자취를 감추고 답호라는 명 칭은 조선 후기에도 포(袍) 위에 덧입는 소매가 없는 옷으로 남아있어 답호의 형태가 변화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철릭은 저고리와 주름치마를 따로 구성하여 허리에서 연결한 형태의 포이다. 조선시대 왕을 비롯한 문무관이 착용하던 곧은 깃의 포로 허리 부분에 잔주름이 잡 혀 있는 것이 특징으로 양쪽 소매나 혹은 한쪽 소매에 매듭단추를 달아 탈부착 할 수 있게 한 것도 있다. 시대에 따라 의와 상의 길이, 치마폭, 주름의 넓이, 깃, 소매의 형태 등에서 많 은 변화가 있었다(National Folk Museum, 2000, p. 36). 액주름포는 남자용 포의 일종으로 겨드랑이 아래에 주름이 있어 액주름포라고 했으며 주름이 한 쪽 방향으로 잡힌 것과 맞주 름 형태로 잡힌 것이 있다. 솜을 두거나 누비로 구성한 사례가 많으며 화장과 총장의 길이가

색명 횟수 비율(%) 염색원료

1 흰색(백색, 하얀색) 46 29 없음

2 검은색(흑색) 44 28 신나무, 밤나무, 녹차 등

3 홍색(붉은색) 28 18 소목(단목) 홍화

4 청색(쪽빛, 남색, 하늘빛푸른색) 13 8 쪽

5 자색 13 8 자초

6 녹색(연록, 초록빛) 6 4 쪽+치자, 황벽 등 모든 황색 염료

7 황색 3 1.6 치자, 황벽, 괴화, 금잔화 등

8 분홍색 1 1 홍화

9 도홍색 1 1 홍화

10 황갈색 1 1 오리나무열매, 느릅나무껍질 등

<Table 2> The Frequency and Percentage of Color Expressions Shown in the 󰡔Miam 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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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포들에 비해 짧고 형태와 구성이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방한 등을 위한 실용적인 복식이었다(Lee et al., 2000, pp.53-54). 액주름포는 조선전기에 출토되었으나 임진왜란 을 분수령으로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는 전쟁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지고 나라가 혼 란스러워지면서 융복인 철릭의 착용이 늘어나고, 실학사상이 대두하면서 도포와 창의, 심의 가 널리 착용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복식으로는 저고리, 치마, 속바지, 단속곳, 적삼, 한삼을 기본으로 단령, 원삼, 장옷이 있다. 여성 단령은 조선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여성의 예복으로 사용되었다. 동시대의 남성 단령과 비교하면 소매와 무, 전단후장형, 옷고름, 대대 등의 몇 가지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Song, M., 2002, pp.151-160). 장옷은 조선 시대 중기에 남녀 모두 입었던 포의 일종이 다. 장옷의 특징은 좌우 대칭형으로 목판깃이 이중섶과 나란히 달리고 겨드랑이에 소형의 삼각무가 있으며 태수가 달린 직령교임형이다.

저고리는 삼국시대부터 남녀 공통으로 입었던 윗옷 중 하나로 저고리라는 말은 세종 2년 (1420년)의 실록에서 처음 보인다. 길, 소매, 깃, 섶, 동정, 고름으로 구성되며 저고리의 기 본형은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변화가 없으나 길이, 도련, 소매형태 등은 시대에 따라 조금 씩 변화가 있었다. 조선전기의 저고리는 길이가 길고 품이 넓으며 섶도 넓어 여밈의 위치가 깊고 소매도 넓었다. 치마는 평상용과 의례용 치마가 다르다. 평상용은 길이가 짧고 주름을 풍성하게 잡아 만든 형태이다. 치마는 조선후기보다 폭이 넓었으며 저고리와 치마의 전체 비율은 초기에는 1:1이었으나 저고리의 길이가 후기로 갈수록 짧아지면서 치마의 길이가 길 어졌다.

3.2. 16세기 출토복식에 나타난 복식의 종류

16세기의 출토복식 보고서 중 남성 묘주 29명, 여성 묘주 35명의 출토복식을 분석한 결과 조사된 출토복식은 저고리, 치마, 바지, 단령, 철릭, 직령, 방의, 답호, 장옷 등의 19종류, 1,145점으로 그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저고리가 337점으로 29%를 차지했다.

저고리는 여성 묘주의 저고리 292점, 남성 묘주의 저고리 45점으로 조사되었다. 그 다음으 로는 철릭 166점(15%), 바지 156점(14%), 치마 126점(11%), 장옷 99점(9%) 순으로 나 타나고 있다. 직령은 옷깃이 곧고 양옆에 사각형의 무가 달린 남성용의 포로 56점이 출토되 어 5%의 비중을 차지하지만,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도포와 창의의 착용이 일반화되면서 겉 옷으로 착용 사례가 줄어들고 단령의 받침옷으로 착용 되었다. 액주름포는 40점이 출토되어 3%의 비중이다. 창의는 7점으로 조경(1541~1609)의 묘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며 도포 는 4점으로 이석명(1513~1583)의 묘와 배천조(1532~?)의 묘에서 출토되었다. 안정 나씨 묘(16세기 중후반)와 배천조의 묘에서 3점이 출토된 과두는 남자복식의 짧은 포의 일종으 로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우리의 대표적 전통복식인 저고리, 치마, 바지를 제외하고 철릭과 장옷은 16세기에 가장 많이 착용되었던 복식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 다고 생각된다. 64명 묘주의 출토복식에 나타난 복식의 종류와 수량은 다음 <Table 3>과 같다.

복식 수량 복식 수량

단령 41 장옷 99

철릭 166 장삼 3

직령 56 적삼 27

방의 5 한삼 10

답호 38 바지 156

과두 3 말군 1

배자 1 저고리 337

액주름 40 치마 126

<Table 3> The Types and Quantities of Clothing Shown in the Excavated Costu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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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암일기󰡕복식과 출토복식의 비교분석

󰡔미암일기󰡕의 복식과 출토복식의 공통점은 사대부가의 복식이라는 점이다. 공통으로 보이는 복식 중 저고리, 치마, 바지, 적삼 등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착용하는 복식 이외에 단령, 철릭, 방령의, 답호, 직령, 장옷, 장삼 등 사대부들만이 착용할 수 있는 복식을 찾아볼 수 있 다. 일기에서 나타난 복식 중 면복은 왕의 복식으로 출토가 어려운 복식이고 제복과 조복 또 한 특별한 행사 때만 착용하는 옷으로 16세기 출토복식에서는 아직 발견된 사례가 없다. 또 미암일기에서는 가죽옷, 상마상, 갑주에 대한 기록이 있는 반면에 출토복식에서는 액주름, 중치막, 도포, 창의, 말군 등 서로 다른 의복의 종류들을 찾아 볼 수 있었다.

󰡔미암일기󰡕의 특징은 복식의 장만, 관리, 대여 등에 대한 기록으로 복식에 필요한 직물의 장 만이나 제작, 염색 등의 기록과 함께 필요한 복식이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서 빌려서 사용하 고 본인도 남에게 빌려준 기록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혼례와 같이 일회성 의례를 치를 때에는 복식을 자주 빌려 입었다. 특히 유희춘 집안의 경우 혼인을 위한 복식을 마련하는데 직물 구입, 염색, 복식제작 등에 2년이 넘는 준비 기간이 소요되었고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고급 직물을 사용했다. 그리고 복식을 마련하는 일을 전적으로 부인인 송덕봉만 맡은 것은 아니었다. 관리의 복식인 관복과 관계된 것은 유희춘 자신이 직접 마련하는 경우가 많았다.

흑단령, 조복, 각대, 사모, 은대, 갓, 옥관자 등을 다른 사람에게 빌리기도 하고 하사품을 사 용하기도 했으며 장인에게 부탁하여 제작하기도 했다. 또한, 부인이나 첩이 염색에 필요한 직물이나 염색 재료인 홍화, 오미자, 단목(소목), 자초 등을 부탁하면 구해서 보내주기도 했 다. “부인이 오승목 25필로 남색 비단 치맛감을 샀다.”라든가 “무명베 33필로 연초록 비단 26척 반 1필을 샀다.”,라는 등의 기록을 보면 그 당시 고급 직물의 가격 또한 알 수 있었다.

이는 출토복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생생한 복식문화의 사회상에 대한 기록이다. 유희춘은 복직되어 관직에 있을 당시 관복, 각대, 사모, 은대, 금대, 관자, 조복 등을 지인들에게 자주 빌려 입었다. 일기에 나타난 대여 기록은 관리로서 입궐할 때나 국가의 행사에 참여할 때 갖 춰야 하는 복식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물품의 대여 기록은 <Table 4>와 같다.

중치막 10 창의 7

도포 4 기타 포 15

흑단령

1568년

1월 24일 학관 심연이 조복과 흑단령을 빌려줬는데 흑단령은 가부장(假部將)이 입었던 것이다.

1568년 6월 20일

이사온이 흑단령을 찾아 보냈는데 이는 존공의 물건이다. 빌려 입는다는 것이 미안해서 돌려보냈다.

저녁에 이억수가 흑단령을 보내왔다. 중국사신과 행례하는 날에 입어야겠다.

1568년 6월 21일

이사온이 보낸 흑단령을 돌려보냈다.

이씨 집의 흑단령이 다시 왔다.

조복

1568년

2월 2일 부정 심연에게서 조복 상자가 왔다.

1569년 6월 17일

첨정 심연이 그의 조복을 되찾아 갔다. 나는 내일 입궐할 때에 입어야 할 조복을 사방으로 구해 봤으나 얻지를 못했는데 승지 기대승에게 편지를 보내니 내일 아침에 보내주겠다고 승낙을 하였다.

1569년

6월 18일 날이 밝기 전에 대궐로 나아가 기공(기대승)의 조복을 기다렸다.

1570년

7월 11일 구사맹에게서 조복을 빌려 왔다.

1570년

10월 26일 아침에 윤수찬의 집에서 조복을 취해 왔다

각대

1568년 2월 20일

내일아침 표를 올리려면 은대려帶를 둘러야 하므로 저녁에 사방으로 구하다가 홍즙에게서 얻었다.

1569년 7월 24일

운산군수 정양우가 기름먹은 개가죽신 한 켤레를 보내왔다. 나는 그의 하얀 은대와 부채를 돌려 보냈다.

1569년 8월 21일

“은대를 새로 만들려고 하지 말고 전일 빌려준 것을 오래두고 쓰시지요. 그띠가 비록 처남 한혜의 물건이기는 하지만 속히 찾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Table 4> The Records of Item Rental Shown in the 󰡔Miam 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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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일기󰡕 조사를 통해 분석된 복식의 종류는 21종류이며, 복식에 대한 기록은 230회이다.

출토복식은 64명의 묘주 복식 총 1,145점으로 복식의 종류는 19종류가 나타났다. 미암일기 에서 조사된 복식 21종류는 면복, 조복, 단령, 직령, 철릭, 직령 등으로 그중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복식은 단령이다. 단령은 총 67회의 기록이 보이는데 관리였던 유희춘의 지위와 생활을 가늠해 볼 때 조선시대 관복이었던 단령의 기록이 가장 많은 것은 당연한 결과로 보 인다. 단령의 명칭은 세분화해서 흑단령, 홍단령, 옥색단령, 백단령 등의 색으로 표현된 것과 시복, 공복, 상복 등의 착용 용도에 따라 기록된 것, 무명, 모시, 명주, 삼베 등 직물의 소재 를 명시한 것이 있다. 시복, 공복, 상복은 색상만 다를 뿐 같은 형태의 단령이라는 점은 조선 시대 문헌, 초상화, 기록화 등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17건의 기록이 나타난 조복 역시 관 리가 조정의 행사에 착용했던 옷으로 기록에 있어 높은 빈도를 보이나 16세기 출토복식에서 는 아직 조복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유희춘의 1569년 8월 3일의 일기를 보면 통정대부(정 3품)는 도홍색을 입고 2품은 쪽빛 홑옷 철릭을 입는다는 기록을 볼 때 품계에 따라 철릭의 색을 다르게 착용한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이는 관복인 단령이 아닌 철릭에서도 품계에 따라 색상이 정해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출토복식을 분석한 결과 조사된 복식 19종류는 저고리, 치마, 바지, 단령, 철릭, 직령, 방의, 답호, 장옷 등으로 그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저고리이며 여성 묘주의 저고리 292점, 남성 묘주의 저고리 45점으로 총 337점이다. 미암일기와 출토복식에서 공통으로 나 타난 빈도가 높은 복식의 종류는 다음 <Table 5>과 같다.

종류 미암일기 출토복식

수량 % 수량 %

단령 67 29 41 4

직령 11 5 56 5

철릭 9 4 166 15

저고리 19 8 337 29

장옷 2 1 99 9

치마 3 1 126 11

바지 10 4 156 14

<Table 5> The Types of Costumes with the Highest Frequency Shown in the 󰡔Miam Diary󰡕 and the Excavated costumes

󰡔미암일기󰡕에는 가죽옷에 대한 기록이 12건으로 비교적 많은 비중을 차지했지만 16세기 출 토복식에서는 아직 가죽옷이 출토된 경우가 없다. 일기에 나타나는 가죽의 종류는 강아지가 죽, 쥐가죽, 족제비가죽, 사슴가죽, 살쾡이가죽, 여우가죽, 담비가죽, 수달피가죽, 다람쥐가 죽, 노루가죽, 소가죽, 돼지가죽, 지달피가죽, 호랑이가죽 등 다양한 가죽의 종류가 기록되어 있다. 이런 가죽들은 의복을 만드는데도 쓰였지만, 쓰개나 신발에도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죽은 서로 선물로 주고받거나 구매하기도 했는데 방한용으로 쓰였기 때문에 주로 겨울의 일기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미암일기󰡕의 기록에는 도포, 창의, 액주름에 대한 복식의 종류가 나타나지 않았으나 액주 름포는 16세기 출토복식에서 많이 나타나는 복식으로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매우 특이 한 부분이다. 단령, 철릭, 직령, 방의, 갑주 등 남성복 위주의 기록이 많고 장옷이나 치마 등 여성복의 기록이 적은 이유는󰡔미암일기󰡕가 남성의 일기라는 점과 유희춘 자신이 고위 관리 였던 때문인 이유도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관자

1569년 7월 27일

-기대승이 玉珥

옥이

(옥관자) 한쌍을 보내 왔다. 이는 타인의 물건인데 돌려서 빌려준 것이라고 한다.

1569년

8월 13일 기대승에게 옛관자를 보내고 새 관자를 받아 왔는데 아주 쓸만하다.

사모

1573년

10월 6일 광선의 혼인 때 쓸 갓을 성판서의 아들이 장가갈 때 썼던 것으로 빌렸다.

1573년

10월 16일 안경남의 갓을 빌려 왔는데 광선의 머리에 꼭 맞으니 아주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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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춘이 일기를 쓴 선조 1년에서 선조 10년까지의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실록에 나타나는 복식과 관련된 기록은 조복, 흑단령, 융복, 곤복에 면류관, 귀거리, 표리, 백립, 백대, 백화, 백주천익, 홍천익, 흑화자, 명주, 중면자, 채단, 모피, 자주빛 주머니, 피물 등이 있다. 또 왕 이 착용했던 복식의 기록으로 곤복에 면류관, 조복, 흑단령, 백립, 백대, 백화에 대한 부분이 있다.

선조실록에는 왕이 의복을 하사한 기록도 두 번 나타나고 있다. 첫 번째는 선조 6년 10월 1 일 성운의 집이 가난하다는 말을 듣고 표리 한 벌을 하사한 것과 두 번째는 선조 9년 10월 13일 유희춘에게 백주천익(白紬天益)·홍천익(紅天益)과 흑화자(黑靴子)를 하사한 것이다.

그러나 󰡔미암일기󰡕의 기록과 조선왕조실록의 왕의 하사품에 대한 기록이 각기 다르게 나타 난 부분도 있다. 1568년 10월 23일의 󰡔미암일기󰡕에는 “저녁에 옥당의 서리 조희원과 하전 하수가 전하께서 하사하신 의복을 가지고 왔다. 이는 금년 여름 상의원에서 중국의 사신에 게 주려고 준비했던 것으로 극히 정밀하고 화려한 물건이다. 새까만 무명베의 단령이 하나, 초록빛 명주베로 만든 겹배자가 하나, 하늘빛 명주 겹저고리가 하나, 하얀모시베 겹저고리가 하나, 하얀 명주로 만든 겹토수(손목싸개)와 행전(다리싸개)이 하나, 하얀 비단 적삼이 하 나, 검정색 사슴 가죽으로 만든 당혜가 하나, 흑서피로 만든 신과 일반신이 각 한 벌이다.”라 는 기록이 실록에는 빠져 있고 선조 9년 10월 13일에 하사한 복식의 종류도, 백주천익(白紬 天益)· 홍천익(紅天益)과 흑화자(黑靴子)를 하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미암의 일기에는

“이때 중관(中官)이 붉은 보자기 두 개에 큰 붉은 명주 속옷 1벌, 하얀 무명에 명주 속을 넣 은 바지 1벌, 검은 가죽신 1쌍을 싸서 신 희춘의 앞에 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서로 다 르게 나타나고 있다.

선조실록 6권, 선조 5년 9월 28일의 기록에 “젊은 사내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하는 풍조를 금하도록 하다”라는 기록을 볼 때 16세기에 남성들이 귀고리를 많이 착용했음도 알 수 있 다. 복식은 디자인, 직물, 문양, 색상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며 이는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복식문화라고 여겨진다. 출토복식은 그 시대에 실제로 존재했던 복식의 종류와 원형을 볼 수 있어 당시의 복식유행에 따라 변화되는 의복의 종류, 디자인, 직물의 소재와 문양, 바느 질 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출토복식은 각기 다른 묘주에서 단령, 철릭, 답호, 액주름, 장 옷 등의 동일한 복식의 종류와 직물이 출토되었고 연화문, 연보상화문, 사양화 등의 동일하 거나 유사한 문양과 디자인이 나타나고 있어 16세기의 복식, 직물, 문양의 유행을 알 수 있 었다. 바느질 방법도 홈질, 반박음질, 온박음질, 옛쌈솔, 감침, 말아감침, 두땀 상침 등의 동 일한 바느질 방법이 사용되었다. 실물을 확인할 수 있는 출토복식과 직물을 마련하고 전반 적인 복식을 장만하는 과정의 생생한 기록이 담긴 일기는 서로의 한계점을 보완하여 당 시 대의 복식문화를 살펴보는데 상호간의 장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미암일기󰡕와 출토복식을 통해 살펴 본 복식의 특징은 <Table 6>과 같다.

미암일기 출토복식

사대부가 복식여부 사대부가의 복식임

실물 존재 여부 문헌만 존재 실물이 존재

특징

복식/직물의 종류와 용도 알 수 있음

제작 방법 일부 알 수 있음 알 수 있음

상황별 착용 시기 알 수 있음 알 수 없음

대여, 선물, 하사 여부 알 수 있음 알 수 없음

가격, 염색, 유통 알 수 있음 알 수 없음

디자인, 문양 알 수 없음 알 수 있음

바느질 방법 알 수 없음 알 수 있음

색상 복식의 색상을 알 수 있음 갈변한 복식이 대부분임

복식규제 알 수 있음 알 수 없음

가죽 사용 가죽의 사용이 많음 가죽 의복이 출토되지 않음

남성 쓰개 남성 쓰개의 종류가 다양함 남성 쓰개의 종류가 적음

<Table 6> The Type of Information Found in the 󰡔Miam Diary󰡕 and the Excavated Costumes

(13)

5. 결론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 시대 선비이며 고급 관리였던 유희춘의 개인 일기인 󰡔미암일기(眉巖 日記)󰡕의 기록과 16세기 출토복식 보고서, 선조실록 10년의 기록에 나타난 조선시대 16세 기 복식의 종류와 특징, 색상 및 복식문화를 살펴보고 문헌과 실물을 근거로 하여 사료에 대 한 확실성을 부여하여 향후 전통복식을 발전시킬 방안을 모색해 보는데 있었다.

연구방법은 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나타난 복식의 기록 중 복식의 종류, 색상, 복식문 화에 관련된 기록과 동시대인 16세기 출토복식 유물 중 64명(여성묘주 35명, 남성묘주 29 명)의 출토복식 보고서에 나타난 출토복식의 종류와 수량, 특징을 분석하고 조선왕조실록 중 󰡔미암일기󰡕의 배경인 선조실록 10년의 기록에 나타난 복식 관련 기록을 조사하여 복식 의 종류, 특징, 수량, 색상, 복식문화 등을 비교 분석하였다.

연구 결과는 첫째, 미암일기에 나타난 총 230회의 기록 중 분석된 복식의 명칭은 면복, 조 복, 단령, 직령, 철릭 등 21종류이고 출토복식 보고서 남녀 64명의 복식은 총 1,145점으로 단령, 철릭, 직령, 답호, 직령 등 19종류였다. 󰡔미암일기󰡕에서는 단령이 29%의 비중을 차지 하고 저고리 8%, 조복 7%, 가죽옷, 직령 5%, 철릭, 바지 4% 등으로 분석되었고 출토복식 은 저고리가 29%, 철릭은 15%, 바지 14%, 치마 11%, 장옷 9%, 직령5%, 단령 4%로 조 사되었다. 이는 관직을 지낸 우리 선조들은 기본 복식을 제외하면 단령, 장옷, 철릭을 착용 한 사례가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둘째, 선조실록과 출토복식 보고서, 󰡔미암일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직물의 종류는 무명, 마, 명주, 삼베, 사라능단, 초, 면 · 마교직, 모시이며, 이 직물들은 그 당시 보편적으로 사용 되었던 직물임을 알 수 있었다. 가죽은 조선왕조실록과 미암일기의 기록을 보면 호랑이에서 쥐까지 주변의 다양한 동물의 가죽이 복식의 재료로 상용되었는데도 출토된 복식은 전무한 상태이다. 직물 염색에 대한 기록은 관복을 만들거나 혼례를 준비할 때처럼 중요한 의복을 제작할 때에 집중되어 있고 염료는 주로 쪽, 홍화, 소목, 자초를 많이 사용한 것은 전통적인 오방색에 기인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셋째, 󰡔미암일기󰡕에 나타나는 색의 표현은 흰색 29%, 검은색 28%, 홍색 18%, 청색과 자색 각각 8%, 녹색 4%, 황색 2%, 분홍, 도홍, 황갈색은 각각 1%의 비중을 나타냈다. 출토복식 은 땅속의 환경 또는 출토와 동시에 산소와 결합하면서 거의 갈색을 띄고 있지만 쪽으로 염 색한 복식과 16세기에 출토된 시복 단령에 분홍색이 나타난 경우도 있었다.

넷째, 16세기에 나타난 복식문화의 특징은 󰡔미암일기󰡕에서는 직접 직물을 제직하거나 천을 구입해서 의복을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지인 간 침비 등의 파견을 통한 디자인과 바 느질 방법의 공유, 대여, 증여, 선물의 교류가 빈번했다. 관리의 경우는 궁궐에 비치된 관복 과 입모를 빌려서 착용하기도 했다. 가정에서 직접 제작이 어려운 복식은 전문가에게 제작 을 맡기거나 완성품을 구매하기도 했다. 복식 생활 전반에 대한 일은 부인 송덕봉이 전적으 로 담당한 것은 아니었다. 고급 직물의 구입, 복식의 제작의뢰, 염료마련과 필요한 복식을 빌릴 때에는 유희춘이 해결한 부분도 많았다. 출토복식은 각기 묘주가 다른 복식에서도 단 령, 철릭, 답호, 액주름, 장옷 등의 동일한 복식의 종류와 직물이 출토되었고 연화문, 연보상 화문, 사양화 등의 동일하거나 유사한 문양과 디자인이 나타나고 있어 16세기의 복식, 직물, 문양의 유행을 알 수 있었다.

다섯째, 󰡔미암일기󰡕와 출토복식의 특징 중 공통점은 사대부가의 복식이라는 것이다. 󰡔미암 일기󰡕복식의 특징은 복식규제와 착용시기, 착용용도, 색상, 유통과정 등의 복식 생활 전반에 관한 내용을 알 수 있었으며 출토복식의 특징은 실물이 존재해 복식의 디자인, 형태, 제작방 법, 직물의 문양, 유행의 흐름 등을 분석할 수 있었다. 또 󰡔미암일기󰡕는 남성 중심의 기록물 로 여성들의 복식 생활상이 상세하게 기록되지 않은 한계점이 있었으나 사대부가에서 즐겨 착용하였던 복식과 직물의 종류 및 전반적인 복식문화를 살펴볼 수 있었다.

본 연구의 문헌과 실물을 통해 살펴본 16세기의 복식문화, 시대적 특징, 복식과 직물의 종

류, 색채 등은 한국의 전통미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것

(14)

으로 사료 된다. 향후 세계적으로 한류가 유행하는 시점에서 우리의 대표적인 바지, 저고리, 치마 외에도 한국의 전통미를 확산시킬 수 있는 전통복식의 종류를 더 확대하여 실질적인 디자인 개발에 관한 후속 연구를 지속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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