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 - 통일신라사를 중심으로 제 9주차: 호족의 대두1
9세기 중엽의 문성왕(839~857) 이후에는 진골 귀족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던 왕위의 쟁탈 을 에워싼 심한 정치적 투쟁은 석어가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일단 귀족들 사이에서 타협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타협은 이때에 점점 그 힘을 과시하기 시작하는 지방세력들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필요에서 일어났던 것 같다. 이제 신라의 역사 무대가 중앙에서부터 지방으로 바뀌는 새로운 전환점에 다다른 것이다.
골품제에 의하여 중앙의 정치 무대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는 이들 지방세력은 그 눈을 해외로 돌렸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중요한 활동 무대를 해상무역에서 찾게 되었 던 것이다. 지금까지 신라의 대외무역은 공적인 조공의 형식을 빌려서 행해졌다. 그러나, 이제 민간무역이 성행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사로이 무역을 행할 수 있는 세력 들의 성장을 뜻한다. 이들은 당 뿐 아니라 일본과도 활발히 교역을 하였으며, 이에 따라서 일 본은 대마도에 신라와의 통역을 맡은 신라역어를 증설하기까지 하였다.
이리하여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 산동반도나 대운하 ․ 회수 유역 같은 곳에는 신라인의 거 류지가 생겼는데 이를 신라방이라불렀다. 이들 거류지에는 그들을 관할하기 위한 신라소 라는 행정기관이 설치되고, 그 직원에는 신라인이 임명되고 있었다. 이들 거류민은 거기에 사원을 세워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신라원이라고 불리었는데, 장보고가 문등현 적산촌에 세운 법화원이 가장 유명하였다. 문성왕 2년(840)에 당으로 갔던 일본인 승려 자각 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의하면 법화원에 강도를 듣기 위해 모여든 신라인은 일시에 250명 이나 되었다고 한다.
크게 해상무역 활동을 벌인 대표적 인물은 청해진(완도)의 장보고였다. 그러나 그 밖에도 강 주(진주) 지방의 왕봉규나 송악(개성)지방의 작제건(왕건의 조부) 같이 그 이름이 알려진 자가 있다. 비록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남양이나 나주 같이 해상무역을 활발히 하던 근 거지에는 그와 비슷한 세력가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신라의 군진(軍鎭)은 본래 변경의 수비를 위하여 육지에 설치된 것으로, 북진(삼척)이나 패 강진(평산)이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해상에서 해적들의 활동이 심해지자, 이에 대비하여 청 해진(완도) ․ 당성진(남양) ․ 혈구진(강화) 등 해안의 요지에도 차례로 군진이 설치되기에 이르 렀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패강진과 청해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