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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Yi Myongrae s Semi-solid Ointment (Yi Myongrae Goy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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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I 10.17480/psk.2016.60.5.272

한국 ‘근대 전통의약품’인 <이명래고약>의 역사

이 영 남*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Received July 1, 2016; Revised October 25, 2016; Accepted October 26, 2016)

History of Yi Myongrae's Semi-solid Ointment (Yi Myongrae Goyak®)

Young Nam LEE

Dept. of Korean History, University of Seoul, Dongdaemun-gu, Seoul 02504, Korea

Abstract — Over a hundred-year long history of Yi Myongrae's semi-solid ointment (Yi Myongrae Goyak®) was reviewed.

Yi Myongrae Goyak®, which one would consider the first Korean traditional drug of modern times, was rooted on Seong Il-ron ( 성일론 ) ointment developed by Emil Devise (1871~1933, Korean name is Seong Il-ron), a Catholic priest of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 who served over thirty-five years from 1895 at Gonseri Church, Asan, Chungcheong Nam-do.

Devise's ointment made with his own special formular described in both Latin and Chinese was very helpful to many Korean suffered from pyogenic skin diseases. A teenage errand, Yi Myongrae (1890~1952) at Gonseri Church was apprenticed sev- eral years to Devise's special formular of herbal medicine and eventually open a cure-house named Yi Myongrae Goyak house at Gonseri in 1906. Since then, Yi Myongrae Goyak® became very popular for treating pyogenic skin disease such as furuncle, carbuncle, impetigo, ecthyma, etc and gained reputation as the cure-all (panacea) of various purulent skin dis- ease among Korean people even in 1980's. In 1920, Yi Myongrae' Goyak house® was relocated at Joongrim-dong, near Yakhyun Catholic Church in Seoul. Yi Myongrae Goyak house® became a family business succeeding to son-in law, Lee Kwangjin (1911~1996). A short time after National Liberation from Japanese Colony, Yi Myongrae' Goyak house® com- menced Chungjeongro period, by running the Goyak house®, Myongrae Oriental Clinic at Chungjeongro 3-ga 331 upto 1950's, at Chungjeongro 375-5 during 1960's-1978 and relocated at Chungjeong-ro 61-1 since 1978. These sites at a junction of three busy streets were just a few steps apart from each other. Yi Myongrae Goyak® has been succeeded into two lines:

one was 'Original Yi Myongrae Goyak® house, Myongrae Oriental Clinic' run by doctors of oriental medicine, Lee Kwang- jin along with Im Jae-hyung (1944~) who is Lee's son-in law. This Myongrae Oriental Clinic closed currently is looking for a successor. The other line, Myongrae Pharmaceutical Co. at Lipjong-dong and Kwanchul-dong in Seoul operated from 1956 to 2002, by Yi Yongjae (1921~2009), a daughter of Yi Myongrae. Myongrae Pharmaceutical Co. had manufactured massively Yi Myongrae Goyak®, and distributed its product through local pharmacy. However, the full-right on Yi Myongrae Goyak®, owned by Myongrae Pharmaceutical Co. was transferred in a year of 2005 to Mr. Hwnag Kyu-Jang who has been a technical staff of Myongrae Pharmaceutical Co. for many years. Hwang had been in charge of production of Yi Myongrae Goyak®

in cooperative with GP Pharmaceutical Co. Currently Mr Hwang is collaborating with JungWoo Pharmaceutical co.

Keywords □ Yi Myongrae's semi-solid ointment (Yi Myongrae Goyak®), Catholic Priest Emil Devise, Korean traditional drugs of modern times, Cure-all (panacea) of purulent skin diseases, Original Yi Myongrae Goyak® house, Myongrae Ori- ental Clinic', Myongrae Pharmaceutical Co.

머리글

페니실린 항생제가 발견되기 전인 1940년 중반까지1), 사람이

이 논문의 일부는 2016년 4월 18일 대한약학회 약학사 분과학회 제5회

심포지엄에서 발표되었음.

#

Corresponding Author

Young Nam Lee, 충북대학교 명예교수

Dept. of Korean History, University of Seoul, Dongdaemun-gu, Seoul 02504, Korea

Tel.: 02-6490-5544

E-mail: [email protected] Short Report

종설

1) 스코트랜드 출신 알렉산더 플레밍(A. Fleming, 1881~1955)이 1928년에 발견

한 푸른곰팡이(Penicillium sp.)의 대사산물인 페니실린(Penicillin)을 1941년 플

로리(H. Flory, 1898~1968)와 체인(E. B. Chain, 1906~1979) 등이 분리, 정

제하여 미생물질환 치료제로 개발하였다. 약제개발에 깊숙이 관여한 영국 국

방성은 전쟁 동안에는 전쟁부상자의 치료에만 penicillin의 사용을 제한하였

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더불어 일반인에게도 페니실린의 사용이 허용

되어 인류는 비로소 항생제 시대(antibiotics era)로 진입하였다.

(2)

건강한 삶과 장수를 누리는데 있어 막강한 방해자는 미생물이라 할 수 있었다. 항생제 등장 이전, 사람의 평균 수명은 동, 서양 별 차이 없이 40세 전후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항생제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미생물 질환으로 인한 인명피해, 특 히 영아와 노인의 사망률이 급감되었을 뿐만 아니라2), 섭생, 보 건, 위생 등이 전반적으로 개선되어 건강한 삶을 누리며 수명도 길어졌다. 하지만 병원균의 항생제 내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 하면서 항생제 사용에 대한 깊은 성찰과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3) 미생물이 일으키는 인체질환은 원인 미생물 종류에 따라 진균 (곰팡이)성 질환, 세균성 질환, 바이러스성 질환으로 대별한다. 미 생물성 질환 가운데 가장 흔한 질환이 세균성 화농 질환(bacterial pyogenic diseases)이다. 화농성 세균 질환에는 피부나 근육의 국 소적인 피부감염(skin infection)과 기관지, 심장근육, 간, 뇌, 장, 자궁, 신장 등에 발생하는 내부 장기 염증(internal organ infection) 이 있다.4)

화농성 질환은 염증으로 시작하여 화농을 거쳐 조직의 손상으 로 이어지는데, 특히 피부 화농성 질환(skin purulent disease)은 매우 흔하여 피부 화농의 불편함이나 어려움을 경험하지 않은 사 람은 거의 없다고 본다. 오늘날 항생제의 보급과 국민의 영양, 보 건, 위생의 개선 등 다양한 요인으로 세균성 피부질환의 발생은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항생제가 보편화되기 전인 1970-80년 대까지도 우리에게 종기(부스럼)는 흔하였다. 이시기에 잘 낫지 않은 종기치료에 이명래(李明來, 1890-1952)가 개발한 고약(상품 명: 이명래고약)의 효과가 탁월하여 <이명래고약(李明來膏藥)>

이 종기치료제의 대명사처럼 회자되기도 했다.5)천주교 신자였 던 이명래(세례명 요한)는 충남 아산, 공세리 성당에서 파리외방 전교회 소속 드비즈 신부를 보좌하면서 신부가 알고 있는 비법을 전수받아 1906년 종기치료제인 고약을 개발하였는데6), 이명래가 개발한 고약은 한국의 근대 전통의약 1호란 자부심을 갖고 있다 (Fig. 1).7) <이명래고약>은 1980년까지만 해도 저렴한 비용으로

가정마다 마련할 수 있는 상비약이었다. 오늘날 종기치료제로서

<이명래 고약>의 위상은 예전에 비할 수 없게 낮아졌지만, 그 래도 <이명래고약>의 수요는 지속되고 있다.8)

본고에서는 항생제가 발견되기 훨씬 이전인 20세기 초에 화농 성 피부질환 치료제로 개발되어 수 십 년 동안 종기(부스럼) 등 피부질환의 특효약으로 명성을 누리며 서민들의 보건 향상에 크게 기여했던 <이명래고약>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이명래고약>의 역사를 논하기에 앞서 조선시대의 종기 피해의 사례를 간략하게 살펴봄으로 종기가 생명을 위협할 수 있던 질환이었음을 짚어 보 고자 한다. 한편 <이명래고약>이 개발될 즈음의 서민의 위생환 경 및 보건생활의 수준을 가늠하기 위하여 조선 개화기의 위생 보건 및 의료 환경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 후에

<이명래고약>의 탄생 경위와 근대전통의약으로 명성을 얻은

<이명래고약>의 변천사를 고찰하고자 한다.

조선시대 종기의 피해 사례와 개화기의 위생보건 환경

조선시대 종기의 피해 사례

흔히 종기(腫氣) 또는 종창(腫瘡)으로 대표되는 피부 질환은 요 즈음은 질병으로 취급하지 않을 정도로 드물지만, 항생제가 개 발되어 보급되기 전인 1945년에도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 는 심각한 병이었다. 종기(부스럼)는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 특히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매우 흔했다. 이

2) Levy, S., 『Antibiotic Paradox: How miracle drugs are destroying the

miracle 』, New York, Plenum Press, 1992; 황상익,「페니실린을 개발한 플 레밍, 플로리, 체인」,『인물로 보는 의학의 역사』 여문각, 2004, 245~248쪽.

3) 항생제내성 미생물의 문제는 국내, 아시아 지역뿐만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다 루어지고 있다. 국내는 식품의약안전처, 아시아 지역은 <항생제 내성 감시를 위한 아시아 연합(ANSORP)>, 세계적으로는 세계보건기구(WHO)가 항생제 내 성 문제를 다루고 있다.; 김남순, 「항생제사용실태조사 및 평가 보고서」 , 건 강보험심사평가원 미생물학과, 식품의약안전청, 2006. Kim, S. H., et al., ANSORP study group."Changing trends in antimicrobial resistance and sero- types of Streptococcus pneumoniae isolates in Asian countries: an Asian Net- work for Surveillance of Resistant Pathogens(ANSORP) study," Antimicrob Agents Chemother. 56, 1418-1426, 2012. WHO/CDS/CSR/DRS. WHO Global Strategy for Containment of Antimicrobial Resistance, 2013.

4) 이유철 외.『한 눈에 알 수 있는 병원미생물학』3판, 이퍼블릭, 2009, 32-39쪽.

5) 이기창 · 용범, 「피부병의 만병통치약, 이명래 고약」 , 『10년을 꿈꾸는 노 포, 한국의 최고 가게』 흐름출판, 2005, 35-41쪽.

6) 공세리 성지성당(홈페이지 : http://www.gongseri.or.kr)

7) ‘ 근대 전통의약’이란 한국제약업계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개화기에 우리 힘으

로 개발되어 지금도 사용되는 의약품을 일컫는다. 8) ( 주)정우제약에서 월 20,000개의 <밴드 이명래고약>을 공급하고 있다.

Fig. 1 − 이명래(1890~1952), 1939~1940년대 중림동 진료실

(3)

렇듯 종기가 흔했던 것은 불량한 위생과 부실한 영양 때문이었 다. 다행히도 한국에는 20세기 초에 <이명래고약>이 개발되었 는데 <이명래고약>이 저렴하면서도 종기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보여 널리 애용되었다.

피부(皮膚)와 기육(肌肉)에 생기는 피부과 질환의 양상은 조그 만 종기(boil, furuncle)부터 큰 종기(carbuncle), 농가진(표재성 농피증, impetigo), 고름궤양증(ecthyma), 모낭염(folliculitis) 등 다양하다. 이러한 피부질환은 신속히 치료하지 않을 경우, 조직 의 심재성 괴사를 일으키며 이리되면 균이 급성으로 퍼져 혈류 순환계에 유입되어 급성 패혈증(acute septicemia)로 생명을 잃 을 수도 있다.9)세균성 피부질환은 왕후장상이나 양인, 천인 구 별 없고 노, 소, 청, 장년 누구에게나 발생한다.

『조선왕조실록』등에 종기 피해의 기록이 있는데, 기록의 대 부분이 백성보다 좋은 영양, 섭생, 생활환경 및 의료혜택을 누렸 을 왕실이나 고관대작에 관한 것이다. 조선의 27명 왕 가운데 12 명이 각종 화농성 질환(腫氣로 표현됨)으로 무척 고생했고, 조그 만 종기로 인하여 막강한 왕권이 무너진 경우도 있다.10)왕 뿐만 아니라 신하도11), 왕실의 여인도 종기로 고생했다는 기록이 있 다.12)종기의 상태가 그리 심하지 않으면 기록이 남지 않았을 수 도 있기에 종기를 앓아본 사람들은 더욱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 다. 조선의 왕으로 종기로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목숨을 잃은 왕 도 여럿 있는데, 그 가운데 문종, 효종, 현종, 정조의 경우를 축 약하여 정리하면서 종기의 심각성을 살펴본다.

세종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던 문종(재위1450~1452)은 등창, 허리부근에 난 커다란 종기(협옹(脇癰), 크기가 5~6치)때문에 거 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문종이 겪은 고통과 치병에 대한 여러 가

지 대책 등이 실록에 남아있다.13)문종은 부왕의 치상 기간에도 종 기로 무척 고생하였다.14) 뿐만 아니라, 재위기간 내내 종기로 고생 한 문종은 재위 2년, 39세 나이에 두서너 홉(190~270 ml 됨)의 고 름을 뽑아내는 조치를 받다가 끝내는 죽음을 맞이했다.15)

효종(재위 1649~1659) 역시 왕세자 시절부터 자주 종기를 앓 았다.16)그의 종기는 주로 얼굴에 나는 면종이었다. 효종은 재위 내내 간헐적으로 종기로 고생을 하였다. 효종10년(1659) 4월 27 일, 머리 위에 작은 종기가 생겼는데 하루 만에 종기의 독이 얼 굴에 두루 퍼져 눈을 뜰 수 없게끔 악화되어 발병 7일 만에 승 하하였다.17)

효종의 아들인 현종 역시 세자 때부터 종기로 고생하였다. 현 종은 재위 내내 투침창(偸鍼瘡-다래끼), 하지 습창(濕瘡), 나력 ( 瀝)(목 주위 림파절을 따라 생긴 종기, 일명 연주창), 액창(腋 瘡-겨드랑이 림파절의 종기)등 각가지 종기로 고통을 받다가 재 위 15년, 1674년 34세로 승하했다.18)

정조(재위 1776~1800)는 즉위 초부터 이마, 미간, 눈꺼풀, 뺨, 이마 등 얼굴에 종기가 자주 났다. 정조는 재위 24년 6월 초순, 머리와 등에 종기가 생겨 치료를 받았는데 병세가 점점 악화되 며 고열이 생기더니, 뒷목에 통증이 오고 환부가 심하게 부어올 랐다. 등창 환부가 점점 늘어나 연적(硯滴)만큼 커지며 온몸에 심 한 발열증세가 계속되다가 종기가 생긴지 20 여일 만에 황망하 게 세상을 떴다.19)

일국의 지존인 국왕이 이 정도였으니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백성이 경험한 종기 피해는 어떠했을까? 왕실이나 고관대작의 피 해보다 훨씬 컷을 것이다. 때로는 종기가 사람들의 운명을 돌려

9) 대한피부과학회 교과서 편찬위원회, 「제14장 감염피부질환」 , 『피부과학』

대한의학서적, 2014, 355-364쪽.

10) 방성혜, 『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시대의 창, 2012, 25쪽.

11) 우복 정경세(동춘당집 별집 제7권) 선조대왕 34년(1601), 선생의 나이 39세 였는데 6월에 등에 종기를 앓아 거의 위험할 뻔하였다. 몇 달을 병석에 누 워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보 29권, 21년(1695) 12월 9일, 영돈녕부사 윤 지완에게 어의 백광현을 보내 치료하게 하다.

12) 『숙종실록』26년(1700) 5월 12일: 내전이 종기를 치료 받다.;『숙종실록』

26 년(1700) 6월 21일: 내전이 종기를 치료 받다.; 『정조실록』 24년(1800) 2 월 17일: 혜경궁의 부스럼이 쾌차되다.;『정조실록』15년(1791) 5월 9일:

혜경궁이 종기가 났다가 곧 회복되었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들어가 하례하다.

13) 『세종실록』31년(1449) 10월 25일: 세자의 등창으로 기내의 명산대천 및 신 사 등에 빌게 하다.; 『세종실록』 31년(1449) 11월 1일: (1번째 기사) 세자 의 병으로 도죄 이하의 죄인을 사면시키다. (2번째 기사) 세자의 병으로 약 사재· 수륙재를 행하게 하다.;『세종실록』31년(1449) 11월 15일: 동궁의 종 기 근이 빠져나옴에 따라 가자의 예를 상고할 것을 명하다.; 『세종실록』

31 년(1449) 11월 18일: 동궁의 종기 근이 빠짐에 2품 이상 관원이 시어소에 나아가 하례하다.; 『세종실록』 31년(1449) 12월 15일: 사간원에서 동궁의 종기를 제대로 구료하지 못한 내의 죄 주기를 청하다.; 『세종실록』 31년 (1449) 12 월 25일: 세자에게 종기가 났으므로 신하를 보내어 신사와 불우에 기도하게 하다.

14) 『문종실록』즉위년(1450) 2월 20일: (2번째 기사) 하연·황보인 등이 왕의 종 기를 염려하여 동궁에 물러가 조섭하기를 청하다.; 『문종실록』즉위년 (1450) 5 월 4일: (1번째 기사) 임금이 빈전에 나아가려 하자 승정원에서 조 리할 것을 아뢰다.

15) 『문종실록』 2년(1452) 5월 14일: 유시에 임금이 강녕전에서 훙하다.

16) 『승정원일기』인조 24년(1646) 8월 16일: 약방 도제조 영의정 김자점(金自 點), 좌승지 이시해가 침의(鍼醫)들과 입진(入診)해서 왕세자의 면부에 종기 가 나서 침을 놓겠다고 하령하니... 동궁을 간병한 결과를 보고하는 도제조 등가 두 번째 아뢰기를, “.. 세자의 면부 좌측 눈썹 바깥쪽 부근에 작은 종 기가 났었는데 이미 사그라졌고 옅은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코 옆에 난 것 은 크기가 팥만 하고 붉은색이며 조금 부어 있습니다. 볼 아래쪽에 난 것은 멍울이 섰는데 크기가 작은 바둑돌 같고... 모두가 ‘폐와 위의 경락에 풍열 ( 風熱)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승마(升麻)와 악실연(惡實硏, 우엉 씨 를 간 것) 각 8푼을 더한 청상방풍탕(淸上防風湯) 5첩을 먼저 쓰고, 증세에 차도가 있는지 본 다음 다시 의약(議藥)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습 니다. 이대로 조제하여 들이고 내일 이어서 침을 놓도록 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약방일기』에 의거함. 『승정원일기』인조 24년(1646) 11월 24 일: “세자가 의관에게 하령하기를 ‘왼쪽 눈 눈꺼풀에 팥알만 한 붉은 종기 가 났는데 곪을 조짐이 있는 듯하다”라고 하였습니다.

17) 『효종실록』 10년(1659) 4월 27일:(1번째 기사) 머리 위에 작은 종기가 있 으므로 약방이 들어와 진찰한 다음 약을 올리다.; 『효종실록』10년(1659) 4 월 28일:(1번째 기사) 약방이 들어와 진찰하다.; 『효종실록』 10년(1659) 4 월 30일:(2번째 기사) 제조 홍명하와 도제조 원두표가 시약청을 설치하는 일로 의논하다.; 『효종실록』 10년(1659) 5월 3일: (2번째 기사) 병이 위독 하여 편전에 나아가지 못하다. ; 『효종실록』10년(1659) 5월 4일: 대조전 에서 승하하다

18) 『현종실록』10년(1669) 8월 23일: 뜸을 뜨다.;『현종실록』10년(1669) 1 월 17일: (1번째 기사) 왕의 병세가 심해져 침으로 종기를 따다.; 『현종실 록』 15년(1947) 8월 18일: 상이 승하하다.

19) 『정조실록』24년(1800) 6월 14일: 내의원 제조 서용보를 편전으로 불러 진

찰을 받다. 『정조실록』24년(1800) 6월 23일:(1번째 기사) 약원의 제신을

접견하고 의술에 밝은 자를 두루 찾아보도록 지시하였다.; 『정조실록』 24

년(1800) 6월 28일: 유시에 임금이 창경궁의 영춘헌에서 승하하다.

(4)

놓을 수도 있다. 충청도에 사는 현감을 지낸 신량(申 )의 딸이 인조(仁祖)의 계비 후보로 초간택되었다. 그녀가 예조의 재간택 에 참여하기 위하여 한양으로 오는 도중 다리에 종기가 났고 반 일만에 종기가 크게 성하여 어쩔 수 없이 재간택을 포기하였다 는 기록도 있다.20)

조선시대, 전의감 소속 ‘치종청(治腫廳)’이란 관청을 두고 왕실 의 종기를 치료하였다.21)치종청에는 종기 전문 치종의(治腫醫) 가 있었는데 이들은 대개 하층민으로 주변의 이름 없는 많은 환 자를 돌보면서 치종술을 축적하여 이름을 얻은 사람 가운데 특 별히 선발된 자들이다. 치종은 고름이 찬 환부를 침으로 찌르거 나 째어서 썩은 피와 고름을 빼내는 외과적 조치였다. 20세기 초 반 서구에서도 종기 치료에는 고름이 찬 환부에 외과적 조치가 보다 보편적인 것 같다.22)

조선시대 치종의로 이름을 남긴 사람으로 성종~중종대의 김순 몽(金順蒙), 16세기 중반의 임언국(任彦國), 인조가 등용시킨 윤후 익(尹後益)23), 현종~속종조의 백광현(白光玹, 1625~) 등이 있다.

이들은 민중 속에서 수도 없이 많은 환자를 접하여 쌓은 명성이 조정에까지 닿아 내의원 의관 시험 없이 특별채용 되었다. 김순몽 은 노비 출신으로 내의원 제조에 올랐으며24)후에는 공을 인정받 아 조정대신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당상관에 올랐다.25)비슷한 시 기에 이맹형(李孟亨), 박세거(朴世擧), 김상곤(金尙昆)도 백성의 종기를 잘 치료하여 군직이나 혜민서의 봉록을 받기도 했다.26) 16세기 중반에 활약한 임언국(1522~1566)은 전라도 정읍 사람 으로 신기에 가까운 치종술을 지녀 조정에 발탁되어 전의감 직 장(直長, 내의원의 종7품직)이 되었고 후에는 치종청의 교수로 후진을 양성하며 치종비방(治腫秘方)과 치종지남(治腫指南)의 저 술을 남겼다.27)인조~효종 대에 임사를 거쳐 현종 대에 활약한

윤후익은 조정 중신들의 수많은 질시와 모함에도 불구하고 현종 의 종창 주치의가 되어 당상관에 올랐다.28) 저자 거리의 걸인 소 년이었던 백광현은 현종 대에 내의원 의원이 되었는데, 후에 숙 종은 치종의 공로를 인정하여 포천현감에 임명하였다.29)

하층민이 조정에 발탁될 정도로 치종의 명성을 얻은 것은 이 루 헤아릴 없을 만큼 많은 종기환자를 치료하면서 얻은 기술이 축적된 결과이다. 1945년 항생제가 보급되기 전까지 화농성 피 부질환은 매우 흔한 질환으로, 특히 영양, 섭생, 위생이 열악하 면 발생 빈도가 높아 신체의 고통과 생활의 불편이 크고 생명을 잃을 경우도 있었다.

개화기 외국인의 눈에 비친 조선의 위생보건 환경

조선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개화기에 접어들었다.30) 1882년 8월에는 중국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 易章程)>을 맺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로 미국인이 합법적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영국과 독일은 1884년에, 러시아와 이탈리아가 뒤를 이어 조약을 맺었다. 불란서와 조선은 1886년 4월에 ‘조불수호통상조규’를 맺었다.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자, 다 양한 국적, 다양한 직업을 지녔던 외국인들이 조선을 다녀갔거 나 조선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기록을 남기었다. 이러한 기록물 이 『한말 외국인 기록』으로 정리되었다.31)

19세기 후반 조선인의 위생보건 상태와 보건의료에 대하여 조 선인 스스로가 남긴 기록은 없다. 그러나 서양의 내방자가 남긴 저술 가운데 당시의 조선민중의 생활환경이나 청결, 위생과 보 건 상태 및 질병의식을 짐작하게 하거나 질병에 어떤 대처를 하 였는지를 유추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는 좀 있다. 개화기의 조 선을 서양에 알린 다수의 저술가운데 하나가 1894년 겨울~1897 년 봄 사이, 네 차례에 걸쳐 한국을 답사한 영국 지리학자 이사 벨라 버드 비숍(I. B. Bishop)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이다.32)그녀는 최상층인 왕실부터 최하 층의 빈민들까지 조선인의 생활을 목격하면서 조선에서 보고 느 낀 것을 비교적 담담하게 기술하였다.

부산의 구시가지는 초라한 오두막집들로 채워졌다. 오두막집 들은 창문이 없는, 진흙으로 된 담벼락과 짚으로 된 지붕의 깊 숙한 처마를 가졌다. 오두막집 바깥에는 고체와 액체 쓰레기들 이 버려진 불규칙한 도랑이 있었다.(35쪽)

서울은 거리 곳곳에서 쓰레기와 오물의 모습으로 동양적 아름

20) 『속잡록(續雜錄)』 4 인조 16년(1638): 예조에서 처자 재간택(再揀擇)을 29

일로 정하여 시행하기로 하였다.

21)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제2권, 경도(京都), 전의감(典醫監) 중부 견평방(堅平坊)에 있다. 개국 초에 설치했다. 대궐 안에서 쓰는 의약 ( 醫藥)을 바치고 신하에게 〈약을〉내려 주는 일을 맡는다. 선조 36년에 치 종청(治腫廳)을 다시 설치하였다가 후에 본감(本監)에 합쳤다.

22) 1907 년 고종이 헤이그 밀사로 파견한 이준이 얼굴에 난종기의 수술을 받고 는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기항·송창주,「제5장 이준의 죽 음」 , 『아! 이준열사』공옥출판사, 2007, 139-145쪽.

23) 『승정원일기』인조 16년(1638) 5월 1일: 서울에 사는 윤후익 등의 침술이 정교하므로 급료를 주어 사진하게 할 것을 청하는 내의원 도제조 등...

24) 『중종실록』 11년(1516) 12월 1일: 간원(諫院)에서 치사와 술업에 정통한 자를 거용해 사류에 끼게 한 일에 대해 아뢰다.

25) 『중종실록』12년(1517) 7월 13일: 대간이 평안 · 함경도 감영 노비들의 고 생이 많은 것 등의 폐해를 아뢰다. “대비 이어소(大妃移御所)의 시약의원(侍 藥醫員) 유영정(劉永貞) · 김순몽(金順蒙)에게 각각 한 자급을 더하여 모두 당 상(堂上)이 되었습니다. 이제 대비께서 안녕하신 것은 진실로 기쁘고 경사 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천류(賤流)에게는 물건으로써 상은 주는 것은 옳지 마는 어찌 당상 가자(堂上加資)로써 상을 줄 수야 있겠습니까? 관작(官爵)은 진실로 외람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6) 어숙권(魚叔權), 『패관잡기』 제2권. (출처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27) 박상영 · 안상우,「치종지남 연구」,『민족문화』32, 2008, 339-363쪽.; 김

남일 교수의 유의열전 144, 任彦國(조선 명종년간) 조선 외과술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유의(儒醫)」,『한의신문』 (2010. 4. 1.)

28) 『현종실록』 1년(1010) 6월 26일: 술시에 의관 등을 입진하게 하여 진찰을 시작하고 유후성 등이 뜸을 뜨다.

29) 『숙종실록』10년(1684) 5월 2일: 유헌 · 이선 · 이후정 · 윤덕준 · 정재희 등에 게 관직을 제수하다.

30) 본고에서는 논문 전개 상의 편의를 위해 개화기를 1876년 개항부터 1920년 대까지로 설정했다.

31) 신복룡 편, 『한말 외국인 기록』총 23권. 집문당. 1999~2000.

32) 비숍, 이사벨라 버드, 이인화 옮김.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살림출판사, 1994.

(5)

다움을 반감 시킨다.(47쪽).

울퉁불퉁한 샛길, 겨울에 쌓인 각종 오물더미, 발목까지 잠기 는 진흙탕과 그 불결함...(498쪽)

가축우리 같은 집 앞에는 지저분한 뜰이 있고 한쪽은 뒷간, 다 른 한쪽은 돼지우리, 바깥쪽에는 악취를 풍겨대는 수렁이 있는 데 이런 곳에 파놓은 우물에서 마실 물을 긷고...(188쪽) 여관방이 기분 좋게 따듯해지자 서까래를 까맣게 뒤덮고 있던 무수한 집파리들이 깨어나 수프에 빠져죽고, 눈앞에서는 수백 마리가 기어 다녔다. 사람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거대한 벼룩과 빈대 부대였다.(350쪽)

옴이 오르고 털이 빠진 개들과 완전히 벗거나 반쯤 벗은 상태 로 온통 부스럼 딱지가 앉은 아이들이 서로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심한 악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흙 속에 딩굴거나 ...(36쪽, 187쪽)

명성왕후의 주치의로 1888년 조선에 와서 15년간 의료선교를 하던 언더우드 부인33) 등 서양인들은 당시 조선인의 섭생, 위생, 보건 환경 등이 매우 열악하다고 하였다. 언더우드 여사는 그의 저술, 『상투의 나라(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or Life in Korea)34)에 조선의 하층민은 냄새가 나고 지독히 불결 하고 비위생적이라고 강도 높게 기술했다. 언더우드 여사는 제 물포항에 첫 발을 디뎠을 때의 한국인에 대한 인상을 다음과 같 이 기록하였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목둘레에 흩어져 있었고 얼굴은 굶주 리고 더러운 인상을 주었다... 가난한 하등 국민의 경우 한 달 에 두 번 이상 옷을 갈아입은 적이 없어 더럽다.(25쪽) 대개의 빈궁한 가정들은 밖에 창고 같은 방이 하나 있는데 그 것을 부엌으로 사용한다. 이 방에 창문은 없고 유리 대신 종이 를 바른 아주 작은 창이 하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집에 관련 된 모든 것은 지독히 비위생적이고 대개는 불결하고 해충으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구정물은 거리의 양옆에 있는 말할 수 없 이 더러운 도랑으로 흘러간다. 최근에 이러한 상태를 개선하고 보다 깨끗한 거리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수년 동안 열 려진 채 있었던 하수구는 그 도시의 구원자인 여름 장마로 씻 겨내려 간다.(28~29쪽)

조선의 여관은 불결하며 좁으며 고약한 냄새와 불편함이 청국 의 그것 다음이다.(67쪽) 흙바닥 위에 덮여 있는 돗자리는 먼지 와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수없는 해충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방과 돗자리에 누움으로써 설사, 천연두, 콜레라, 발진티브스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프고 죽었겠는가? 조선인들은 “참으로 깨끗하다는 것”을 모른다. 훈증이나 소독은 달나라에 사는 사 람의 개인 생활처럼 자유분방한 상상의 날개를 훨씬 넘어선 것 이다. 집 주위에 이끼 낀 물웅덩이와 시궁창이 있어서 불쾌한 냄새와 지독한 독성이 있는 수증기가 뿜어 나온다.(70쪽) 이곳 은 치명적인 말라리아균이 습기 찬 밤공기에서 몸에 스며든 곳 이다.(71쪽)

서울은 산으로 둘러싼 분지에 위치해 있으며 여름에는 썩은 물 웅덩이와 오물이 넘쳐흐르는 도랑이 구역질나는 대기가 문명 화된 나라에서는 상상 할 수도 없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냄새 를 풍겨서 아주 비위생적이다.(129쪽)

조선에 위생 시설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와그너도 기술하 였다.35)

집을 둘러싸고 있는 매우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조건, 위생법과 상식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모든 질병과 고통이 발생한다. 문 옆에는 다음해 밭, 논갈이에 쓸 퇴비를 만들려고 오물과 쓰레 기를 쌓아두고..., 쥐는 무척 많고..

당시의 조선 민중의 질병관을 엿볼 수 있는 기록도 있다.

조선인들은 병에 걸리면 축귀법(Modus operandi)으로 대처하 는데 질병이 ‘불결한 귀신’ 때문이라 여겨 무당의 푸닥거리에 의존하거나 ‘액막이“ 굿을 하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다.(비숍, 459쪽, 480쪽)

1895년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조선 사람들은 경련을 쥐가 다리를 갉고 타고 올라와 가슴까 지 이른 병이라 믿어 콜레라를 쥐병이라 부른다. 따라서 그들 은 고양이의 영혼에게 기도하며, 문에 종이 고양이를 매달고 경련이 난 곳을 고양이 가죽으로 문지른다.(언더우드 책, 173쪽)

서양인들이 그들은 우월하다는 자기중심적 사고로 조선의 현 실을 폄하하거나 왜곡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1950~70년 전 반까지 낙후된 농촌, 산촌, 해촌 지역에서 필자가 경험한 것도 이 와 비슷하여 개화기에 서양인들이 남긴 기록이 허구나 과장된 것 으로 볼 수만은 없다.

대부분 미생물에 의한 질환 발생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 대동 소이하지만, 특히 피부질환은 개인의 주거 환경, 청결, 위생, 섭 생, 영양 등에 따라 이환률에 차이가 크다. 우리 몸을 보호하는 가장 외각의 장치인 피부가 여러 가지 물리적, 화학적 자극으로 손상을 받으면 외부로부터 미생물의 침입이 용이하여 크고 작은 각종 피부병이 생긴다.

개화기의 조선 민중은 일반적으로 불량한 위생, 열악한 주거 환경, 부적절한 섭생과 영양결핍 등으로 쾌적한 생활을 누리지 못한 것 같다. 이러한 환경에서 콜레라, 이질, 두창, 장티프스 같 은 각종 악성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창궐하여 민생을 위협했다.36)

33) 원래 이름은 Lillias S. Horton이며 시카고 의과대학 출신의 여의사이다. 언 더우드 선교사와 결혼한 후는 언더우드 여사로 불렸다.

34) 이 책은 신복룡, 최수근 역주와 함께 <한말 외국인 기록 15>으로 1999년 집문당에서 출판했다.

35) 와그너, 신복룡 역주, 『한말 외국인기록 : 한국의 아동생활(Children of Korea) 』집문당, 1911, 14-45쪽에서 발췌.

36) 황상익, 『일제강점기 의료의 풍경』 12, 일본의 전염병 ① Pressian com.

2011. 6. 9.

37) Chun, B. C., Public Policy and Laws on Infectious Disease Control in

Korea: Past, Present and Prospective. Infection and Chemotherapy. 43,

474-484, 2011.

(6)

특히 외국인들은 피부질환을 우리나라의 향토병으로 인식할 정 도였다.37) 이런 사실로 개화기에 조선에서 피부질환으로 고생하 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음을 짐작 할 수 있다.

1876년 개항 이후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은 국민의 보건 후 생이 국력에 매우 중요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내정개혁 건의안에 근대적 위생 정책을 넣었으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무산되었다.38) 그러다가 1894년 6월 고종이 관제개혁을 실시하면서 국가보건의 료체제의 중핵적 역할을 할 기관으로 내무아문 안에 위생국을, 경 무청 총무국에서 위생업무 담당 부서를 두었다. 하지만 의료사업 과 환경위생 사업을 담당할 전문적인 행정관리가 없고 이러한 행 정적 조치를 구현할 방역소나 의료기관이 없어 민생에게 돌아가 는 혜택은 거의 없었다.39)

기창덕은 「우리나라 여명기의 피부과학」논문에서 우리나라 는 옛부터 피부병 환자가 많아 왕실에서는 온천요법을 권장했다 고 한다. 하지만 백성들의 피부병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 것은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세운 병원에서 일본의사들이 남긴 때부터로 보았다. 원산에 생생의원 원장인 고마츠(小松運)은 당 시 조선인에게 많은 병은 매독과 피부병이라 했고, 인천에 일본 의원 의사 다나카(田中親之)는 내원한 환자가운데 피부병 환자가 세 번째로 많다고 했다. 1885년 11월에 내한하여 정동에서 <시 병원>을 운영하던 미국 선교의사인 스크랜톤(W. B. Scranton)도 한국인은 영양 결핍으로 피부병이 많다고 보고했다.40) 1886년 제 중원 의사 알렌(Allen)은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 (1885. 4.~1886. 3.)』에서 제중원을 찾은 환자 중 1위는 학질, 2위는 소화기 질환, 3위가 각종 피부병이라 했다. 외래에서 치료 를 받은 환자 1만460명 가운데 394명이 “수술(operation)”을 받 았는데 수술 환자의 50.7%(200명)가 종기를 절개하여 고름을 빼 낸 것(排膿)이며, 비강 폴립, 낭종, 지방종을 제거한 것까지 포함 하면 피부질환을 수술로 치료한 것이 전체 수술의 70퍼센트가 넘었다.41)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당시에 종기 같은 피부병으로 병원 을 찾는 한국인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는 경제력을 갖춘 계층으로 전체 국민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경제력이 없는 사람들 은 종기로 인한 각종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할 수밖에 없지 않았 을까 생각한다.

‘ 근대 전통 약품 ’ 인 < 이명래고약 > 의 탄생

충남 아산 공세리 성당의 드비즈 신부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李承薰)42)으로부터 시작 된 조선의 천주교는 1791년(신해년)의 진산사건(珍山事件), 1801 년(신유년)의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 帛書事件)과 1839년(기해 년), 1866년(병인년)에 극심한 박해로 절멸의 위기에 처했다. 그 러다가 조선과 프랑스 사이의 조불수호조약(1887년 5월)의 제9 조 2항에 ‘교회’(敎晦)에 근거하여 서양인들은 포교의 자유를 얻 게 되었고,43)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는 천주교 사제들이 조선에 건너와 왕성하게 전교 활동을 폈다.

프랑스 비비에르 교구 아르데슈에서 1871년 7월 14일에 출생 한 에밀 드비즈(Emil Devise, 1871. 7. 14.~1933. 8. 31, 한국명 成一論)는 사제 서품을 받자마자(1894. 7. 1.) 프랑스를 떠나 1894 년 10월 23일 제물포에 도착했다. 파리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 1658년 설립) 소속인 그는 서울 명동성당에서 수개월간 한국말 을 익히고는 1895년 5월 충남 아산 공세리 성당에 부임하여 경 기도 안성 평택, 안중 지역, 충남의 아산만 일대는 물론 충북 진 천, 백곡까지 관활하며 사제 활동을 펼쳤다(Fig. 2).44)

드비즈 신부는 아산만이 내려다보이는 신풍산 부지를 매입하 여 사제관(현, 공세리 성당 박물관)을 건축하고(1898. 5. 29.), 뒤

38) 신동원·황상익, 「조선말기(1876~1910) 근대보건의료체제의 형성과 그 의 미」『의사학』 5, 155-165, 1996.

39) Lee, J. C., Kee, C.D., The Instistutionalization of Public Hygines in Korea, 1876~1901. Kor. J. Med. History 4, 21-34, 1995.; 맹광호, 「한국의 공중 보 건 1세기」 , 『의사학』 8, 127-137, 1999.

40) 기창덕,「우리나라 여명기(1876~1945)의 피부과학」,『의사학』6, 1-43, 1997.

41) 황상익. [근대 의료의 풍경·30] <제중원> 보고서 ⑥ Pressian.com. 2010.06.10 08:50:00

42) 1784 년 2월 프랑스 예수회원 그라몽(Grammont, 梁東材)에게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은 천교서적, 성화, 성물을 가지고와 포교를 했다.

43) “ 조불수호통상조약”(출처 : 한국브리태니커온라인)

44) 충남 아산 인주면 공세리 194번지에 천주교 대전교구 공세리 교회가 있다.

공세리 성당은 아산만이 내려다보이는 신풍산(神風山) 구릉에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아산만 인근 지역에서 걷은 세곡(稅穀)을 보관했던 공진창(貢津倉 - 공세곶창)자리였다. 1425년(세종 7)부터 조창의 기능을 갖기 시작한 공세곶 창은 고종 대에 폐지되었고, 그후 공세창 터는 지방민들이 가족의 건강과 안녕, 풍어, 풍년을 기원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공세리 본당 100년사(1895.

5. 6.~1899. 5. 5.) 』 천주교 대전교구 공세리교회, 1998, 103-112쪽.

Fig. 2 − 에밀 드비즈(Emil P. Devise, 1871~1933)

(7)

이어 한식 기와집에 서양식을 가미한 성당건물 및 부속시설을 건 축하였다(1899. 8.). 그는 1932년 신병으로 프랑스로 귀환할 때 까지 35년 동안 공세리에서 사역했다. 그는 고딕 건축물인 붉은 벽돌의 회당을 직접 설계하고 중국 건축 기술자를 불러들여 완 공하고(1922년,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 제144호), 마을에 인주초 등학교의 전신인 조성보통학교를 설립해 주민을 교육하고,45) 세리 인근 지역 논과 밭을 사들여 교우들에게 소작을 줌으로 생 활을 안정시켰다. 뿐만 아니라 온양 온천리에 공원공동묘지를 조 성하고, 성당에 상수도를 설치하는 등 인근 주민을 위한 환경 개 선사업을 폈다. 현재 아산·천안·안성이 한국의 대표적 포도 산지 가 된 것이 제의용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드비즈 신부가 이곳에 서 포도 재배를 했기 때문이라 한다.46)드비즈 신부가 공세리에 서 살면서 기여한 것은 신자의 신앙생활을 돕는 것 이외에 종기 치료약을 개발하고 제조 비법을 한국인에게 전수함으로 다수의 서민이 저렴한 비용으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드비즈 신부는 프랑스의 지원으로 공세리 성당을 건축할 때 가난한 신자들을 공사에 참여시켰는데 공사장 인부들과 인근 주 민들이 종기 등 다양한 피부질환으로 고통을 받는 것을 본 그는 프랑스에서 익힌 방법으로 고약을 제조하여 무료로 나누어 주었 다. 그가 만든 고약은 도포가 용이한 무른 고약이었는데 종기 치 료에 효과가 좋다는 소문이 났고 사람들은 그의 한국 이름을 붙 여 <성일론고약>이라 했다. 드비즈 신부는 고약의 비법이 적힌 한방의서를 가지고 있었는데 비법서의 한 쪽은 한문, 다른 쪽은 라틴어로 되어있었다고 한다.47)이 비법서는 현존하지 않아 작 성 경위나 상세한 내용 등은 알 수 없다. 드비즈의 <성일론고 약>이 훗날 <이명래고약>으로 발전한 것이다.

당시 외국에 파견되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현지의 열악한 환 경에서의 생존과 포교 활동에 필요한 간단한 의술을 지니고 있 었기에 드비즈 신부가 지녔던 한방의서는 외방전교회에서 전해 내려오는 의서에 한문을 병기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이 와는 반대로 드비즈 신부의 고약 처방은 전교본부가 한자문화권 에 파견된 외방 선교사들이 수집한 정보를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이에 라틴어를 병기하여 해외파견 사제가 활용하도록 마련한 것 일 수도 있다. 후자는 당시 파리외방전교단의 사업 활동으로부 터 유추한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는 각국에 파견된 선교

사들에게 그들의 활동 지역에서 각종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하도 록 한 후, 막대한 정보를 정리하는 작업을 하였다. 해외파견 선교 사들의 보고 대상은 지역사회의 정치, 경제, 지리는 물론 풍속, 자 연생태, 환경을 포함하는 거의 모든 것을 망라했다. 파리외방전교 단 본부의 알데(Jean-Baptist Du Halde, 1674~1743) 신부는 중 국 선교사 겸 탁월한 지리학자인 레지(Jean-Baptist Regis) 신부 가 보고한 내용을 정리하였고, 이런 사업의 일환으로 자신이 중국 을 방문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1742년 영어로 중국사(4권)를 썼다.48)

이명래 고약의 탄생

드비즈가 공세리에서 사제활동을 시작한 1895년 즈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반 조선 사람들의 위생, 보건 환경은 매우 열악 했다. 영양과 위생 여건이 좋지 않고 생활이 청결치 않아 종기를 비롯하여 각종 피부병 환자가 많았다고 한다.

이명래(李明來, 본관 광주, 1890~1952)는 서울 남산동 사람으 로 그의 아버지 이병무는 서울 명동성당의 독실한 신자였고 이 명래 역시 천주교 신자였다. 이명래는 빈한한 집안의 아홉 남매 의 장남이었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 명동성당 주임 프와넬 (Victor. L. Poisnel, 한국명: 박도행, 1855~1925) 신부는 이명래 가족에게 공세리에 가서 성당의 소작논을 얻어 생활하라고 권했 다. 공세리에 도착한 10대 초반의 이명래는 성당 내에 각가지 잡 일을 거두면서 드비즈 신부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신부는 이명 래에게 자신이 알고 있던 종기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는 고약의 제조법을 가르쳐주었다. 이명래는 드비즈의 고약 제조법을 익히 면서 고약에 굳기를 주는 경고화 기술을 접목하였다. 이명래는 반고형 고약으로 수많은 충청도 인근의 가난한 백성들과 거지들 을 무료로 치료하며 임상으로 약효를 개선하였다. 이명래 고약 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이명래 고약의 변천사

이명래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향약재료에 서양 약제술을 접목하여 개발한 고약으로 본격적으로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열여섯 살인 1906년(광무 10년)이다. 따라서 <이 명래고약>은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근대 신약으로 한 세기 넘는 역사를 지닌다. 1980년까지도 가정상비약으로 불후의 명약이라 일컬어지던 <이명래고약>은 동화약품의 활명수49), 조선무약합

45) 주정아,「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대전교

구 공세리본당. www.catholictimes. or. 2011-10-23 [제2767호, 14면].

46) 천경석,「아산시가 만드는 시민을 위한 뉴스」, 아산향토연구회(2009-03-26 12:00:00 작성).

47) 안종주,「고약, 서민들의 만병통치약」,『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한겨레신 문사, 1990, 223-228쪽.

48) Du Halde, 『Kingdom of Korea in the General History of China contain- ing a Geological, Historical, Chronological, Political and Physical Descrip- tion of the Empire of China, Chinese-Tartary Corea and Thibet, including an Exact and Particular Account of their Customs, Manners, Ceremonies, Religion, Arts and Sciences 』 Vol. I-V.(1742)(London, J.

Watts). 이 책 4권에 조선에 관한 내용이 있다.

49) 활명수는 궁중 선전관이던 개신교 신자 민병호(閔竝浩, 호 老川, 1856~1939) 가 궁중에서 사용하는 생약 비방에 서양 약제법을 접목하여 개발한 소화제 이다. 민병호와 민강(閔 , 호 恩浦, 1883.~1931, 1963년 3월 1일 건국훈 장 국민장 추서)부자는 1897년, 서울 순화동 5번지에 동화약방(1962년 동화 약품으로 상호변경)을 설립하고 활명수를 대중화하여 근대전통의약 1호란 이름을 얻었다(출처 : ㈜동화약품 홍보실).

50) 우황 청심원은 한의사 청주인 박성수(朴性洙, 호 一松, 1897~1989)가 1925

년에 세운 조선무약에서 개발한 한약이다.(출처 :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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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회사의 우황청심원50)과 함께 우리 약업계의 3대 근대전통의약 이란 명성을 갖고 있다.

<이명래고약>은 종창, 관절염, 류마티스 등 각종 화농성 질 환에 효과가 탁월하다. <이명래고약>은 흑갈색의 경고제(고약) 와 담황갈색~황갈색의 발근고로 구성되어 있다. 고약에는 새 조 직의 성장을 촉진 시키는 성분이, 발근고에는 고름을 뿌리까지 뽑아내는 성분이 들어있다. 고약의 기본 약재는 소염, 항염 성분 을 갖고 있는 오행초와 가래나무의 추출액이다. 여기에 주원료 인 창출, 황단(납), 석검, 청피 성분을 가하여 고온으로 고아서 고 약을 제조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고약에는 연교, 금은화, 목 향, 유향, 몰약 등 다양한 성분이 포함 되어 있다. 발근고에는 창 출, 황, 석검, 청피가 들어있다. 고약제조에 면실유를 써야 월등 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Figs. 3,4). <이명래고약>은 약효 성분만큼 고약의 형태(고약의 굳기)도 치료효과를 좌우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고약의 굳기는 고약을 제조할 때의 성분의 배 합, 습도, 화력의 세기에 따라 달라짐으로 노련한 경험이 필수적 이라 한다.(명래한의원 원장 임재형林宰馨).51)

중림동과 충정로의 <이명래고약집>52)

이명래는 공세리에서 가정을 꾸리고 자신이 개발한 고약으로 종기환자를 치료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 을 마련한 그는 1920년에 서울로 올라와 서대문과 남대문 중간 지역인 만리재, 중림동 약현성당 근처 매우 허름한 집에서 고약

<=이명래고약>을 만들어 내방하는 종기 환자를 치료하였다.53)

<이명래고약>의 치료 효과는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종기 뿐만이 아니라 외상, 결핵, 늑막염 등 내부 질환 환자까지 <이명 래 고약집>을 찾았는데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아주 저렴한 비용으 로 서민들이 큰 어려움 없이 이용했던 서민의료시설이었다. <이명 래고약>의 명성은 조선인에게 뿐만 아니라 일본인에게도 펴졌다.

1939년 말~1940년 초, 일본군장교 사사키(佐佐木)씨가 목덜미에 난 큰 발찌(종기)로 고생하다가 <이명래고약집>을 찾았다. 목덜 미의 종기는 목을 움직일 때 고통을 주어 불편할 뿐 아니라, 함부 로 손을 대면 탈이 나서 생명을 잃을 위험이 있다고 알려졌다. 특 희 일본에서는 “큰 발찌가 생기면 관을 준비하라” 할 정도로 발

찌를 무서워했다고 한다. 사사키씨는 수일 만에 종기가 말끔하 게 치료되자 무척 기뻐하며 군인이라 경제적 여유가 없다면서 종 기치료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이명래고약>에 대하여 총독 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에 <나는 이명래 고약집에서 세 번 놀랐다. 첫째는 불결하고 둘째는 치료비가 너무 싸며, 셋째는 약 의 효과가 참 좋아 병이 잘 낫는다>라고 기고하였다고 한다.54)

이명래는 초취 부인과는 딸 하나만 두었다. 이명래는 첫 부인 과 사별 이후, 천주교 신자인 박말다(朴末多)와 재혼하여 분다 (分多, 1915~1950)와 용재(容載, 1921~2009)를 두었다. 이명래 의 차녀인 분다는 약현성당 신도로 보성전문학교 법과 졸업생 이 광진(李光眞, 본관 경주. 1911~1996)과 1936년 11월 결혼하였 다.55)이명래는 이광진 부부의 살림집을 중림동 <이명래고약 집> 근처에 마련해주고, 사위 이광진에게 고약제조 비법을 전 수하면서 전국적으로 치종 의료인의 명성을 얻어갔다. <이명래

51) 임재형(1944~ )은 이명래의 둘째사위인 이광진(1911~1996)의 사위이다. 장

인 이광진을 통하여 이명래 고약의 비법을 전수받았다.

52) 이 내용은 2014년 11월 8일 오후, 서대문구 봉원동에서 임재형과 3시간에 걸 쳐 한 인터뷰 내용에 근거한 것이다. 임재형은 이명래 가족과 관련된 호적 서류 및 개인 서찰 및 논문 작성에 필요한 서류의 사본도 제공하였다. 1차 인터뷰에서 미진한 부분은 2015. 1. 31. 오후 1시간 30분간 재차 인터뷰로 보충하였다.

53) 중림동 약현 성당이 위치한 언덕에서 오른쪽으로는 서울역이 왼쪽으로는 천 주교 서소문 순교성지가 내려다 보인다. 약현(藥峴)은 선조~인조대 문인 약 봉(藥峯) 서성(徐 )이 살던 곳으로 서성의 어머니가 약주, 약과, 약식을 팔 아 자식 교육을 하였던 곳 또는 약봉이 약초를 재배했던 藥田이 있어 얻어 진 지명이다. 이명래 고약집의 주소는 중림정 204번지였다.(; 『약현본당 백 년사(1891~1991)』천주교 중림동 교회, 1991, 17쪽.)

54) 이 이야기는 <이명래 고약집>을 경영했던 이광진이나 이명래의 3녀 이용재 뿐만 아니라 이광진의 사위인 임재형, 이명래 외손이 수차례 언급했다.경향 신문, 2014. 9.12. 기사, <선대 유품, 저에겐 가족사지만 박물관에 있으면 역 사의 기록>, 서울신문 2009.11.20. [테마스토리 서울](21) 이명래 고약, ‘100 년 국민상비약 가업 이을 후계 없어’.

55) 이광진은 평양 출신으로, 아버지 이하영(李夏榮, 1872~ ?)은 감리교 목사, 어 머니 이오례는 간호사였다. 이하영은 3.1운동으로 10개월의 징역을 받은 것 이 인정되어 2008년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포장을 받은 독립유공자이다.

Fig. 3 − 충남 아산 공세리성당 박물관에 전시된 <이명래고약> 유물

Fig. 4 − 충남 아산 공세리성당 박물관에 전시된 <이명래고약> 유물

(9)

고약집>에는 매일 새벽 전국에서 모여든 수백 명의 환자들이 순 서표를 받고 기다리다가, 진찰을 받고 고약을 받아갔다고 한다.

어떤 때는 밤 12시까지 찾아오는 환자들 때문에 대문을 잠그지 못했는데 청결하지 못한 환자들의 고름 냄새로 집안 식구는 물 론 이웃 사람들까지 힘들었다고 한다.

이명래는 체계적 의학 지식 없이 프랑스 신부에게서 전수받은 비법과 임상 경험만으로 환자를 진료했다. 이에 일제강점기 위 생 감시 업무를 맡은 일본 경찰은 이명래가 의생(한의사)이나 약 종상 면허 없이 불법으로 의료행위를 한다면서 과도한 벌금을 부 과하였다. 이에 사위 이광진이 벌금을 대납하거나 뒷돈으로 경 찰을 무마하였다. 이명래는 일제강점기에는 의생면허의 취득을 거부하다가 해방 뒤 미군정 시절에 비로소 의생(한의사)면허를 받았다.

1944년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일본이 실시한 <주민강제 소개 정책>으로 이명래는 친척이 있는 경기도 평택 서정리로 주거를 옮겼다. 광복 더불어 서울로 돌아온 이명래와 사위 이광진은 서 대문구 서대문경찰서 앞(당시 주소 : 의주통 1정목 20번지앞)에

<이명래고약포>를 다시 열었다(Fig. 5).56)얼마 후 충정로, 서소 문로, 중림로가 교차하여 마포, 신촌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 인 아오개 마루인 지금의 (주)종근당 빌딩 바로 뒤쪽(당시 주소 : 충정로 3가 331번지)으로 자리를 옮겨 <이명래한의원>을 운영 했다. 이곳에서 이명래와 이광진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매우 활발하게 의료 활동을 펼쳤다.

1950년 6월 20일 회갑을 맞아 가족, 친지 등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회갑연을 갖은 이명래는 북한의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온 갖 어려움을 겪었다. 우리 국군이 서울을 탈환할 즈음 후퇴하는 인민군이 20여칸 되는 <이명래고약집>에 불을 질러 그가 아끼 던 사진, 문헌자료 등을 재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이광진이 출타한 동안 고약집 바로 옆에 있던 그의 가옥이 유엔연합군의 포탄에 완파되면서 집에 머물던 온 가족이 목숨을 잃었다. 이듬 해 중공군이 참전한 1.4후퇴 때 이명래는 첫째 딸 가족과 홀로 된 둘째 사위 이광진을 데리고 평택 서정리로 피난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른 후에도 이명래는 평택에 머물다 1952년 1월 6 일 사망했다. <이명래고약>의 제조비법을 전수받은 사위 이광 진은 1951년 7월 서울로 돌아와 <이명래한의원>을 운영하다가 1960년대 초반 현재 ㈜종근당 빌딩 자리(당시 주소 : 충정로 375- 5)에 3층 건물을 신축하고 이전하였다. 그는 동양한의과대학(경희 대학교 한의과대학의 전신)에 진학하여 1957년 한의사면허를 획 득한 후 상호를 <원 이명래고약집, 명래한의원>로 변경하였다.

이광진은 한의사 임재형(1944~)을 사위로 맞아 고약제조의 비

법을 전수하고 가업을 이어갔다.57) 1978년부터는 서대문 쪽으로 30 m 쯤 떨어진 현재의 충정로 지역(주소: 충정로 3가 377번지)으 로 이전하였다. 임재형은 1996년 이광진이 타계한 후 홀로 <원이 명래 고약집, 명래한의원>을 운영하다가 2009년 수술과 요양을 하는 동안 임시 휴업하다가 폐업으로 이어졌는데 현재 후계자를 물색 중이다. 이광진과 임재형이 제조한 <이명래고약>은 약국 이나 다른 곳에서 팔지 않았고 내원 환자의 진료에만 사용함으 로 1906년 이후 <이명래 고약>의 정통성을 계승했다.

입정동과 관철동의 <명래제약㈜>

<이명래고약>의 맥은 ‘이명래의 전통방식’을 유지 고수하던 충정로의 이광진, 임재형 이외에도 이명래의 막내딸인 이용재가 1956년 중구 입정동 105번지에 세운 <명래제약㈜>으로도 이어 졌다.58)이용재는 경성여의전(고려의대 전신) 출신 소아과 전문 의로 을지로 3가에서 <요한의원>을 운영한 적도 있다.59)이명 래 고약의 대중화를 원했던 이용재는 일부 성분을 변경해 대량 생 산에 나서며 기업화를 시도했다. 약국에서 팔던 <이명래고약>은

<명래제약소>의 제품이다(Figs. 6,7).60)

<이명래고약>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광진과 이명래의 딸 용 재가 <이명래고약 李明來膏藥>의 정통성과 상품에 대한 특허 권 침해 소송을 벌렸는데 당시 대한민국 특허국은 1)고약 제조 의 비법을 전수 받은 이광진이 약사법 제정 이전부터 <이명래 고약집> 간판을 사용하였고, 2)한의사인 이광진이 환자의 치료 목적으로 직접 제조한 고약을 한의사로서의 개인 처방이라 보고

<이명래고약>의 상표권 침해 소송을 각하하였다(1974. 2. 6. 항

56) 『경향신문』 (1946년 10월 18일, 10월 20일, 10월 22일 광고).

57) 임재형은 1974년에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한 한의사로 1976년에는 한의학 석사를 취득하였다.

58) 주 47참고

59) 그녀는 유진오(兪鎭午, 호 현민 玄民, 1906~1987, 헌법학자, 정치인, 전 고 려대 총장)의 부인이다. <이명래고약 후계자 이용재 여사 별세>, 한국경제 신문(2009년 11월 14일)

60) 서울특별시 중구 입정동 105번지에서 창업한 명래제약은 1960년 12월 종로 구 관철동 29번지로 이전하였다.

Fig. 5 − 이명래고약의 이전 광고(1946. 10. 18. 『경향신문』 ).

▲ 이명래고약포가 1946년 중림동에서 서대문구 의주통 1정목 20번지

로 이전했음을 알린다.

(10)

고심판 제342호).

지피제약, 정우제약과 <이명래고약>

1956년에 설립한 <명래제약>은 경영난을 겪다가 2002년 9월 부터 문을 닫았다. 폐업의 가장 큰 요인은 약사법 시행규칙 제40 조에서 요구하는 <우수 의약품 제조기준>61)맞추려고 설비투 자를 하다가 금융 압박이었다. <명래제약>의 폐업 후, 팔순이 넘은 이용재는 선친이 개발한 종기치료제의 대명사라던 <이명 래고약>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 하다가, 2005년에 <명래제 약>에서 1961년부터 1973년까지 고약 제조를 담당하던 황규장 (1941~)에게 <이명래 고약>의 전통을 계속 지켜줄 것을 부탁 하고 <명래고약>의 판권을 영구히 넘겼다고 한다.62)

<이명래고약>의 판권을 갖은 황규장은 부산지역에서 <조고 약>을 제조하던 천일제약과 밀양의 <하고약>에게 판권을 대 여하여 고약을 생산한 적이 있다. 그러다가 황규장은 ㈜지피 제 약과 협력하여 <이명래고약>을 직접 생산하기 시작했다. 지피 제약은 기름종이에 싸인 까만 고약을 불에 달군 뒤 환부에 붙이 던 전통적 형태의 고약을 <고려됴고약>, <이명래고약>, <천 일조고약>, <밴드 이명래고약>이란 제품명으로 제조, 판매하 는 중소 제약회사이다. 2007년 중앙약사심의위원회는 “고약에 중 금속인 납이 들어있어 인체에 유해할 수 있다”는 견해를 내고 고 약을 피부에 붙였을 때 납이 어느 정도 흡수되며, 흡수된 양이 인체에 유해한 수준인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지피제약에 독 성실험을 통해 안전성을 입증 할 것을 요구했다.63)이에 지피제 약은 식품의약품안전청에 독성실험결과를 제출했으며,64) 2010 2월 8일 식품의약품안전청(당시 청장 윤여표)은 '지피제약'이 생 산, 판매하는 <이명래고약> 등 5개 품목에 대해 고약의 유용성 을 인정하고 안전성에 문제가 없어 허가유지를 결정했다.65) 라서 고약의 안전성 논란이 있던 <이명래고약>은 법의 보호아 래 제조, 판매하고 있다.

황규장은 환부에 붙이면 고약이 체온에 녹아 고름을 빨아들이 는 새로운 형태의 <밴드 이명래고약>66)를 개발하였다. 황규장 은 2015년 2월부터 제휴업체를 (주)정우제약67)으로 변경하고 직 사각형(11 cm×14 cm)의 <밴드 이명래고약>을 생산 중이다.

맺음글

<이명래 고약>의 역사는 조선의 개화기에 충남 아산 공세리 성당의 드비즈 신부가 제조한 피부병 치료제인<성일론 고약>

에 뿌리를 두고 있다. 드비즈의 고약제조 비법을 전수받은 이명 래는 향약재료에 고형화 기술을 접목시켜 1906년에 <이명래고 약>을 개발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근대 제약 역사의 시효라 할 수 있다. 이명래는 1920년 서울 중림동 약현 성당 부근에 <이 명래고약집>을 열었다. <이명래고약>은 저렴한 가격과 뛰어난 치료효과가 소문으로 펴져나가면서 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으 며 종기 치료제의 대명사란 명성을 얻었다. 1980년대까지도 흑 갈색의 <이명래고약>은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던 ‘가정상비약’

이었다. 따라서 프랑스 신부에게서 전수받은 비법과 임상 경험

61) 우수의약품 제조관리 기준(KGMP, Korea Good Manufacturing Practice)은

의약품의 품질을 높이고 우수한 제품을 만들기 위하여 작업장의 구조설비 및 원료의 구입에서부터 보관 · 제조 · 포장 · 출하에 이르기까지의 전 공정에 걸친 제조 및 품질관리에 관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규정이다(약사법 시행 규칙 제 40조 별표 4). 이는 의약품 제조 및 품질관리 전반에 걸쳐 제조에 관여하는 사람이 지켜야 할 규정으로 1997년 3월부터 시행했다. 이법이 시 행되면서 GMP기준에 못 미친 국내 4백여 개의 제약회사들이 문을 닫게 되 었다.

62) 2014 년 11월 25일 경기도 용인시 죽전동 신세계 백화점 커피숍에서 가진 황 규장의 70여 분에 걸친 인터뷰 내용에 근거한 것이다. 황규장은 2005년 다 시 이용재와 손을 잡고 <명래제약>의 회생을 위하여 분투하였다. 황규장은

< 밴드 이명래고약>의 제조 판매를 총괄한다.

63) 식약청, 이명래고약 안전성시험 대상 공고 2008-01-10.

Fig. 6 − <명래제약>의 광고(; 『동아일보』 1960. 12. 12.)

Fig. 7 − <명래제약>의 광고(; 『동아일보』 1960. 12. 15.)

▲ 광고를 통하여 중구 입정동의 명래제약이 1960년 12월 13~14일에 관철동으로 이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64) 최종보고서 <밴드 이명래 고약의 랫드를 이용한 4주 반복 경피투어 독성시 험>, 시험 번호 B8345, (주)Biotoxtech. 지피 제약이 식약청에 제출한 독성 실험 결과의 사본을 황규장에게서 받아살펴 보았다.

65) 지피 제약이 생산, 판매하는 이명래고약, 밴드 이명래고약, 고려됴고약, 도표 됴고약, 천일조고약 등에 대한안전성 평가 결과는 식품의약안전처 홈페이지 (http://www.mfds.go.kr) 에서 확인할 수 있다.

66) < 밴드 이명래고약>의 제형은 직경 2 cm 원형으로 월 20,000개가 출고되고 있다.

67) 본사: 서울 서초구 양재동 362-5, GP 빌딩, 공장: 충남 아산시 신창

면 읍내리, 80-13.

수치

Fig. 2 − 에밀 드비즈(Emil P. Devise, 1871~193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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