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학위청구논문
도제합(陶製盒)의 조형연구
-한옥(韓屋)의 조형성을 중심으로-
국민대학교 대학원
도예학과
박 중 원
2003
도제합(陶製盒)의 조형연구
-한옥(韓屋)의 조형성을 중심으로-
지도교수 노 경 조
이 논문을 석사학위 청구 논문으로 제출함.
2003년 1월 일
국민대학교 대학원
도예학과
박 중 원
2003
박중원의 석사학위 청구 논문을 인준함.
2003년 1월 일
심사위원장 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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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사 위 원 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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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사 위 원 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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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대학원
논 문 개 요
도자기는 인간의 생활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생활과 상호 관계를 가지고 발전되어왔다.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사용해 온 흙으로 만 든 조형물 중에서 도자기는 인간이 생활을 영위하는데 있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해 왔다.
특히 도제합(陶製盒)은 도자기의 예술적 가치와 더불어 용(用)과 미(美)를 겸한 도자기로서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오면서 발전되어왔다.
본 논문에서는 도제합(陶製盒)과 한옥(韓屋)이라는 한국미의 대표적 조형물 을 논문의 주제로 하여 두 조형물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조형성을 현대적 감각에 맞는 새로운 조형으로 확대하고 응용하여 우리의 전통미가 가지는 참된 의미를 확인하고 도제합(陶製盒)이 지니는 조형적 특징을 새로운 시각 으로 재해석하여 현대인의 정서와 미의식 함양에 도움이 되는 도자조형을 추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본 논문에서는 한국도제합(韓國陶製盒)과 한옥(韓屋)의 일반적 고찰과 도 제합(陶製盒)과 한옥(韓屋)의 미표현의식(美表現意識)을 관찰하고 도제합(陶 製盒)의 형태, 문양, 용도에 관한 미(美)와 실용성(實用性)을 알아보고 한국 조형물에서 도제합(陶製盒)과 한옥(韓屋)이 차지하는 예술성과 그 미의 본 질을 연구하였다.
첫째, 도제합의 일반적 고찰을 통해 한국의 도제합(陶製盒)을 시대별로 삼국시대 및 고려 조선조 도자를 시대적으로 분류함으로서 시기적으로 변 천된 도제합(陶製盒)에서 나타나는 조형성과 미의 본질을 찾아보았다.
둘째, 한옥(韓屋)의 역사적 의의 및 한옥(韓屋)의 전체적인 구성과 특성을 연구하고, 도제합(陶製盒) 연구의 모티브인 한옥의 지붕에 대한 연구를 통 해 한옥(韓屋)의 지붕구조의 조형적 특징을 찾아보고, 한옥(韓屋) 지붕의 형
태를 매개로 한 도제합(陶製盒) 조형의 연관성에 관한 연구하였다.
셋째, 도제합(陶製盒)과 한옥(韓屋)은 연구하는데 있어서 선, 색, 조형이라는 한국의 조형미를 대표하는 세 가지 요소를 작품연구의 주된 제작의도로 하 여 작품을 연구하였다.
본 연구 작업에서는 선, 색, 조형이라는 요소로 전통미와 현대미의 조화 를 표현하려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선은 부드럽고 여유 있는 곡선과 강하고 경직된 직선의 조화를 통해 현대를 살고 있는 한국인의 미적(美的) 정서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색은 자연과의 조화라는 한국의 미의 고유한 특성에 맞추어 색을 단순화하고 원재료의 기본적 특성이 잘 나타나도록 표현하였 다. 자연과 융합, 조화되는 조용하고 때로는 적막한 미를 표현할 수 있는 그리고 따스함을 전해줄 수 있는 색을 표현하고자 했다. 조형은 자연의 일 부와 주변이나 자연과의 합일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는 한옥(韓屋)의 조형 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고 단순, 소박한 생명성을 창출할 수 있는 도제합(陶 製盒)을 제작하고자 했다.
본 논문에서 제시된 한옥(韓屋)을 중심으로 한 도제합(陶製盒)의 조형을 연구하면서 한국의 조형성은 유연함과 자연스러움이 앞서는 특징을 알 수 있었다. 한국의 도제합(陶製盒)과 한옥(韓屋)에서 나타나는 간결함 속에서도 깃들여진 정과 아름다움을 통해 한국의 미(美)의 본질과 특성을 알 수 있었 다. 본 연구를 통해 한국의 전통미를 해석하고 새로운 조형을 창출하기 위 해서는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의 과제는 작 업에 있어서 작품이 곧 본인임을 인식하고 작품에 대해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목 차
Ⅰ. 서 론
··· 11. 연구목적 ··· 1
2. 연구방법 및 범위 ··· 2
Ⅱ. 도제합(陶製盒)의 고찰
··· 41. 도제합(陶製盒)의 일반적 고찰 ··· 4
2. 도제합(陶製盒)의 조형적 고찰 ··· 9
3. 용도에 따른 분류 ··· 15
Ⅲ. 한옥(韓屋)의 고찰
··· 221. 한옥(韓屋)의 의미 ··· 22
2. 한옥(韓屋)의 공간적 구조적 특성 ··· 25
3. 한옥(韓屋)의 지붕 ··· 29
Ⅳ. 작품제작방법 및 설명
··· 361. 작품제작의도 ··· 36
2. 작품제작방법 ··· 40
3. 작품설명 ··· 44
Ⅳ. 결 론
··· 60참고문헌
··· 62Abstract
··· 64Ⅰ. 서 론
1. 연구목적
인류가 집단생활과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원시시대부터 식생활과 함께 각종 생활 도구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식량의 저장과 혹은 물건을 담기도 하고 운반하기도 하는 등의 용도에 따라 그릇의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다.
처음에 등장하는 용기는 자연물을 이용한 간단한 도구가 사용되었겠지만 차츰 흙을 빚어서 그릇을 만들게 시작하면서 도자문화가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도자기는 선사시대에서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토기를 비롯하여 고려와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청자와 백자 등 우수한 자기의 발달을 이루었 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재에 이르러서는 기계화되고 다량으로 생산하는 산업도자기가 식생활의 발달과 더불어 보관상의 기능과 사용상의 기능, 사 회적 요구에 의하여 다양하게 발달되었으며 용기의 형태와 기능 또한 세분 화되어 많이 발전되어왔다.
특히 뚜껑이 있는 도자기는 도자기의 예술적 가치와 더불어 실용성을 갖 는 기능적 특징으로 인하여 우리의 일상생활과 밀착되어 현재에 이르러서 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또한 도제합(陶製盒)은 몸통과 뚜껑이 맞물려져 하나의 기물을 이루는 관 계로 제작 상 정교한 기술을 요하고 도자기의 형태와 기능을 결정짓는 가 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토기, 청자, 백자등 기타 우리나라 도자기 전반에 나 타난 뚜껑과 몸통전이 맞물려지는 구조적인 형식의 기능을 가진 도제합(陶 製盒)의 변천과정과 특징을 고찰하고 그리고 우리 선조들이 함축시킨 지혜 와 식견이 터전을 이룬 한옥(韓屋)에서의 조형성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본 작업에 응용함으로서 도제합(陶製盒)의 기본골격을 이루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는 도제합(陶製盒)과 한옥(韓屋)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뛰어난
조형성을 현대적 감각에 맞는 새로운 조형으로 확대하고 응용하여 우리의 전통미가 가지는 참된 의미를 확인하고 도제합(陶製盒)이 지니는 조형적 특 징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여 현대인의 정서와 미의식 함양에 도움이 되는 도자 조형을 추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도제합(陶製盒)의 기능성과 미적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창조 적인 디자인의 방향제시와 도제합(陶製盒)의 활용범위를 확대 모색하는 차 원에서 도자공예의 자료를 제시하는 역할이 되고자 함을 연구의 목적으로 한다.
2. 연구방법 및 범위
본 논문에서는 연구방법을 3가지의 군으로 나누어 연구하였다
첫째, 도제합(陶製盒)의 개념과 그 역할을 통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도제 합(陶製盒)에 대한 정의와 역사적 변천과정, 그리고 조형적 기능적 분류를 통한 도제합(陶製盒)연구에 주안점을 두었다.
둘째, 한옥(韓屋)의 역사적 의의 및 한옥(韓屋)의 전체적인 구성과 특성을 연구하였다.
셋째, 도제합의 연구의 모티브인 한옥의 지붕에 대한 연구를 통해 도제합 (陶製盒)의 조형의 모태로 하기위한 기본적인 고찰과 더불어 한옥(韓屋)의 지붕구조의 조형적 특징을 찾아보고 한옥(韓屋) 지붕의 형태를 매개로한 도 제합(陶製盒) 뚜껑의 연관성에 관한 연구가치의 타당성을 가늠해 본다.
일반적으로 도제합(陶製盒)의 조형에서 핵심은 뚜껑과 몸통으로 구분되어 있어 뚜껑이 용기의 몸통과 상호 밀접하게 맞물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뚜 껑과 몸통 양자가 이루어내는 기형에서 나타나는 형태와 비례를 통하여 뚜 껑과 몸통전이 맞물리는 구조적인 형식을 갖고 있다.
뚜껑과 몸통이 그 자체로서 명확한 형태를 가질 때, 이것이 부착되는 부 분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도제합(陶製盒)의 기본구조에 한옥(韓屋) 지붕구조의 조형을 중점
으로 표현의 다양성을 모색하고자 노력하였다.
제작방법은 물레에 의한 성형을 중심으로 진행하였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도판작업을 병행하였다. 물레성형은 흙이라는 소재가 갖고 있는 가소성이라 는 특성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는 대표적 성형방법의 하나이다. 그리고 물레로 성형된 기물을 도박으로 두드림으로써 물레로 성형된 원의 형태를 정형화된 형태로 변형하였다.
유약(釉藥)은 금속산화물 등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유약을 사용하기보다는 재와 흙 등의 천연재료로 조합한 유약을 주로 사용함으로써 자연스러움을 바탕으로 한 작품에 따스함을 주고자했다.
Ⅱ. 도제합(陶製盒)의 고찰
1. 도제합(陶製盒)의 일반적 고찰
합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합이란? 음식을 담는 그릇의 한 가지. 운 두1)가 그리 높지 않고 둥글넓적한데, 뚜껑이 있는 기물로 정의되어있다. 기 물로 동양에서는 유개용기(有蓋用器), 서양에서는 ‘Covered Bowl’ 이란 용어 로 표현하여 사용되어 졌다.
합은 시대와 문화에 따른 생활상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반 액체 상태 의 내용물들을 뚜껑을 덮어 정결하게 보관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였으 며, 기형이 상, 하로 구분되어 뚜껑과 몸체로 구성되어 있는 용기를 말한다.
형태상 크기가 다양하며, 뚜껑은 몸과 크기가 비슷하거나 혹은 몸체에 비해 조금 작은 것이 보편적이다. 몸과 이분화된 형태로 형성되어 장식적 미를 겸한 실용기로 각기 다양한 형태, 다양한 용도의 특징을 지닌다.
합은 그 용기 안에 어떠한 내용물을 담는가에 따라 그 합의 크기와 형태, 용도가 한정되어 사용되어 왔다. 즉 향을 담아 쓰던 향합의 경우 향을 발생 시킬 수 있는 적은 양의 건조된 물질을 넣어 보관할 수 있도록 합의 크기 는 작으며 제례때나 불교의식의 영향으로 그 고귀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화 려하게 만들어진 것이 보통이다.
합의 제작과 사용은, 인류가 점토를 사용하기 시작했던 오랜 옛날부터라 고 보며 특히 물레와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용기를 만든 후에는 많은 도제 합(陶製盒)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합들은 당시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정결하게 보존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으리라 보며, 보존의 완전을 위해서 뚜껑을 만들었음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도제합(陶製盒)은 용도에 따라 기법과 그 형태에 큰 관계가 있 다고 보며, 이러한 연관을 토대로 보면 우리나라 도자의 제작기법과 형태는
1) 그릇이나 신 등의 둘레의 높이
삼국시대로부터 상당히 빠른 속도로 변천, 발전했으며 용기의 형태나 문양 은 그 시대의 종교에 크게 영향을 받았음에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기물 의 형태와 문양에서 연화문(蓮花紋), 인동문(忍冬紋), 보상문(寶相紋)등과 함 께 당초문(唐草紋), 인화문(印花紋)등에 구성되어 있는 표현은 불교적 양식 과 분류할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기물들은 이것들을 만든 장인들의 생활 속에서 종교적 의식을 은연 중에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으며, 골호(骨壺)라든가 생활용 기로서의 뚜껑있는 항아리, 뚜껑있는 발(鉢)등 그 외에 다양한 합들이 만들 어진 것도 종교의 영향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 합이 토기(土器) 혹은 석기질(石器質)의 용기인데 비하여 고려시 대에 가장 번창했던 청자는 자기질(磁器質)로서 후세에 그 유례가 없는 훌 륭한 유품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기물의 다양성에서도 경이를 금할 수 없 는 것이다.
더구나 고려는 숭불(崇佛)이 국가를 세운 이념으로서 생활이나 사회구조 가 불교적인 양상 속에서 확립되었고 그 조형역량도 역시 불교성을 나타내 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고려시대의 청자가 송대(宋代)의 영향에서 이루 어졌다고 본다면, 특히 그 양식은 불교적인 것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불교양식은 고려의 청자가 11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이 사적인 고증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때 이 시기는 불 교의 생활화가 이루어진 시기로서 고려 특유의 청자양식이 성립되어 졌으 리라 볼 수 있고 이런 이유로 불교양식용기로서의 합과 생활용기로서의 합 은 상당한 발전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것들은 표현방법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형태별 고찰에서 보 겠거니와 우리나라 도자제(陶磁製)의 생활화는 실로 고려시대부터라고 본다 면 표현양식은 다르다고 보더라고 이런 고려청자의 양식과 제조기법은 고 려말에 와서 분청사기와 그 후 조선조 백자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조 선시대의 배불사상(背佛思想)은 도자기 표현이 점차 서민적으로 나타나게 된 근본이라 보며 형태와 문양에서도 불교의식을 벗어나 자유로운 표현이
나타나 있는 것은 볼 수 있다.
(1) 도제합(陶製盒)의 시대적 분류
토기 중 뚜껑을 사용한 기물이 어느 시기에 만들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 더라도 물레를 사용하여 토기를 만든 시기에는 토제형태의 다양성을 나타 내고 있음을 유품으로 볼 수 있거니와 이런 것들은 큰 것으로는 호형(壺形) 에서부터 작은 잔(盞)에 이르기까지 생활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용기에서 삼국은 제작원료의 차이와 표현감각의 차이가 있을 뿐 실질적인 사용기능 에 있어서는 별로 차이를 나타내고 있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삼국이 모두 고대에 이를수록 기형의 단순성을 나타내고 있으나 실질적으 로 후기라고 해서 발전되었다고 볼 수는 없고 표현양식이 복잡해지고 많은 양의 생산은 가능했으리라 보며 이런 것들이 고려시대에 까지 지속되었음 을 볼 수 있어 뚜껑기의 생산도 많았음을 유물과 제조기법에서 알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가. 고구려(高句麗)
고구려 토기가 백제나 신라와는 다른 양식으로 나타나 있고 그 유물이 별로 없으나 중국한(漢)대 토기양식을 받아들였을 것으로 보아 상당한 발전 장태(發展狀態)를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보며 이런 것들이 고신라토기(古新 羅土器)에 까지 영향을 줄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면 고구려는 제토기양식 (製土器樣式)의 확립과 물레 성형방법의 기법이 일찍부터 발전되어 있으므 로 해서 기형의 발전도 상당 수준에 이르고 있었을 것이며 특히 생활용기 로서의 발전도 크게 나타나 있었을 것이고 비록 유물이 없다 하더라도 백 제, 신라의 동시기에는 어느 정도 비슷한 토기발전이 이루어졌음을 와당이 나 전(塼)과 같은 제품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 중에서 제 토제품(製土製品)의 표현이 가장 단순한 고구려에서는 그 용기의 발전이 실
질적이었을 것으로 보아 뚜껑기(器)의 발전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나. 백제(百濟)
삼국 중 토기제품의 표현의식(表現意識)이 가장 우아했던 백제의 문화는 멀리 일본에 까지 문물을 전파했던 것으로 보아 얼마나 발전되었는가를 가 히 짐작할 수 있거니와 그 유물로서 백제의 토기제의 발전을 능히 알 수 있어 사용기능에 적합한 형태로서 뿐 아니라 미적표현의식(美的表現意識)이 완숙하고도 꾸밈이 없던 것을 알 수 있다. 기형의 실용적인 면에서나 조형 적인 면에서도 특히 제조방법에서도 조금도 현대제품에 손색이 없고 토질 의 본질로서 뿐 아니라 생활용기로서의 구비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 신라(新羅)
신라는 토기의 유물이 가장 많이 남아있고 제품의 종류도 삼국중 가장 그 유물이 많이 남아있어 어느 정도 신라시대의 형태와 제조방법은 자세히 알 수 있으며 특히 신라의 뚜껑기물은 다양해서 골호(骨壺)라든가 뚜껑 있 는 잔(盞)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물이 있을 뿐 아니라 장식에서도 음각장식 방법과 영락장식 혹은 토우장식, 투각장식 등의 방법에 의하여 매우 표현력 이 강렬하게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표현된 기법은 매우 다 양하면서도 그 형태의 안정감은 기형 하나 하나에 끊을 수 없는 매력을 나 타내고 있음을 볼 수 있고 특히 신라통일기에 이르러서는 제토양식(製土樣 式)이 고도(高度)로 발전되었다. 뚜껑기의 제작과 영락장식, 음각장식, 인화 문장식등이 성행하였고, 유물 중에서도 특히 소품에 합이 많이 만들어졌다 는 것은 특징적 예식보다는 생활용기로서 제작되었다.
라. 고려(高麗)
고려는 청자가 주가 되는 시기로서 고려청자의 발생과 쇠퇴는 각기 백년 으로 하여 三期로 나눈다. 제1기는 순청자시대 (1050∼1150), 제2기는 상감 청자시대 (1150∼1250), 제3기는 쇠퇴기 (1250∼1350)로 구분할 수 있다.2)
고려시대의 청자를 삼기로 나누어 본다 하더라도 청자시기에 와서는 기 형의 안정감을 나타내고 물레사용방법이 극도로 발전된 시기일 뿐 아니라 그릇의 구조상에서도 우리나라 어느 시기보다 가장 뚜렷하게 정돈되어 완 성된 시기라 할 수 있으며 특히 합의 발전도 실용적이면서도 고아(高雅)한 기법과 특이한 발색으로 그 짜임새가 높은 수준의 아름다움을 나타내 주고 있다. 한마디로 고려청자는 우리나라 도자의 유색(釉色), 형태(形態), 기문 (기紋)의 기술 등에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신묘한 솜씨일 뿐만 아니라 조 형적 기술이나 섬세한 감각의 견지에서 단연 최상의 시기인 것이다.
이러한 고려시기의 합은 청자상감명골호(靑磁象嵌銘骨壺)와 같이 용기로 서의 기능을 최대로 발휘했을 뿐 아니라 제조상의 문제점을 찾아볼 수 없 고 시문방법(施紋方法)도 손색이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여기 사용된 문양은 순청자유만을 사용하기도 하고 상감문등을 하 여 기형의 아름다움을 더해주었다. 합에 사용된 문양도 다양하여 국화문, 목단문, 버들문, 오리문, 봉황문, 당초문등이 기형에 적절하게 배열됨으로서 합의 아름다움을 일층 더 첨가해 주었다. 이러한 청자기법은 고려 말 분청 사기수법(粉靑沙器手法)이라는 기법으로 변질(変質)되므로 기형뿐 아니라 장식 방법이 무척 온화하고 부드러운 표현방법으로 바뀌어졌으며 이것은 또한 조선조 백자에로 옮겨져 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마. 조선(朝鮮)
조선조 도자기는 처음부터 고려자기와는 몇 가지 다른 점을 보이고 있는 데 첫째, 조선조는 고려와는 달리 전국에 요지(窯地)가 퍼져 있었으며 둘째,
2) 김원룡, 한국미술사, 삼성문화문고, 1958
고려는 청자가 주류였으나 조선조는 분청과 함께 백자가 주류를 이루고 발 전되었으며 셋째, 조선조 자기는 수요관사명(需要官司銘)이 있는 것이 많다 는 점이다. 넷째, 조선조자기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분청사기가 자취를 감추 었다는 점이다.3)
또한 조선조에 있어서 많은 제품들이 대중을 상대로 만들어져 있어 자기 의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그 기법도 분청사기에서 인화문분청, 상감문 분청, 박지퇴화문분청, 조화문분청, 철화문분청, 귀얄문분청, 분장문분청등 다양한 특징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백자의 경우도 순백자를 위시해서 청화 백자, 백자상감, 철화백자, 진사백자 등 다양했으며 분청사기의 문양에서는 국화문, 당초문, 완자문, 인화시문등과 버들, 갈대, 학, 초화, 모란, 연화, 당 초, 등 다양하게 쓰였음을 볼 수 있고 뚜껑이 있는 기물에는 대담하고 힘 있는 표현과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백자의 경우에도 문양이 다양하게 나타나서 매조, 송죽, 매죽, 매화, 시명, 산수 등의 문양과 어문, 장생문, 초화문 등이 사용되어 백자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백자는 우아하면서도 절묘한 표현을 나타내고 있음은 조선조 특유의 미 라고 할 수 있고 조선조 미의 특색이라고 하겠다.
2. 도제합(陶製盒)의 조형적 고찰 가. 토기(土器)
우리나라에서 토기가 주된 생활용기로 사용된 시대는 주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였다. 그 중 도자기에서 뚜껑을 사용한 기물이 어느 시기에 만 들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김해식 토기에서 처음으로 뚜껑 있는 토기 가 나타난다.
김해식 토기란 흡수성이 많은 연질(軟質)의 무문토기에서 멍석문양이 나
3) 정양모, 이조도자, 동화출판사, 1957
타나는 회청색 연질토기로 변화된 토기를 말한다. 경주시 조양동에서 출토 된 받침이 있는 항아리에서 뚜껑이 나타나고 있는데 뚜껑의 형태는 원통형 으로 뚜껑 위 부분이 수평을 이루고 중앙부위에 넓적한 긴 띠를 반원 모양 으로 붙여 중량감 있게 만들어졌다.
삼국시대에 이르면 성형과 소성기술의 발달로 생활용기가 다량으로 제작 되고 각 시대마다 다양한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고구려 시대의 토기를 그 지방 선사시대의 토기와 중국 한식토기(漢式土 器)의 영향을 받은 토기로서 신라시대와 백제시대의 토기와는 다른 이국적 인 양상을 띠고 있다. 흑회색 혹은 회색의 연질토기로 바닥이 평저(平底)인 항아리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몸통 손잡이가 부착된 시루와 뚝배기, 보시 기 같은 실용성이 있는 그릇이 출토되었다.
백제시대의 토기는 근본적으로 신라 토기와 같은 계통이지만 중국의 한 (漢)나라식 토기의 제작방법과 고구려 토기의 영향을 받아서 더욱 발전되었 다. 형태는 대체적으로 온후함과 중후함을 느끼게 하고 부드러운 선으로 표 현하며 표면의 문양도 적당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한 기종도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매우 다양하고 뚜껑 있는 용기는 고 배(高杯), 발(鉢), 삼족토기(三足土器), 골호(骨壺), 도연(陶硯), 등잔(燈盞), 변 기 등으로 나타나 있다.
신라시대 토기는 김해식 토기에서 발전해 온 토기로서 신라 영토에서 제 작된 회색 계통의 연질토기(軟質土器) 즉, 회청색 연질토기를 가리킨다.
회청색 연질토기란 도기와 자기의 중간으로 정선된 태토(胎土)를 사용하 여 터널식 등요(登窯)에서 섭씨 1000도 이상의 고온으로 구워낸 토기를 말 한다. 갈색계통은 완전히 사라지고 회색계통의 단조롭지만 우아한 색이 나 타난다. 고온에서 구워진 토기이므로 흡수성이 거의 없고 기면에 유약을 바 르지 않았지만 태토 속에 함유된 장석질이 녹거나 회가 날아 붙어 자연유 가 부분적으로 착색된 것을 볼 수 있다.
신라시대의 뚜껑 있는 용기는 골호(骨壺), 고배(高杯) 등에서 나타나 있다.
이는 의식적인 성격이 강한 용기로 대부분 뚜껑의 장식에 있어서 음각 장
식방법과 양각장식, 혹은 토우장식, 투각장식 등의 방법에 의하여 매우 강 하게 표현되어 있다.
나. 청자(靑磁)
청자가 주가 되는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고려청자의 발생을 11세기 중엽으로 볼 때 제1기는 순청자시대 (1050∼
1150), 제2기는 상감청자시대 (1150∼1250), 제3기는 쇠퇴기 (1250∼1350)로 구분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세시기로 나누어진 고려시대의 청자는 문양이나 기물의 형 태 등이 섬세하고 우아하며 부드러운 곡선의 조형미를 나타냄으로서 귀족 적인 고려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음각, 양각, 상감 등의 다양한 시문 방법과 독특한 청자의 발색 형태 등은 우리나라 어느 시기보다 가장 뚜렷하게 정돈되어 있다.
또한 고려의 문화가 불교를 국교로 공인한 후, 숭불정책으로 모든 문화와 조형예술이 불교의 사상에 기인된 불교문화이듯이, 고려시대 도자 예술 역 시 고려인의 생활 속에서 불교의식과 깊은 연관성을 내포하고 있고 소수 귀족 계급의 욕구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며 그들의 취향에 따라 제작이 되었 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점이 고려청자의 성격을 귀족문화의 소산이라고 결정 짖는 중요 한 요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뚜껑이 있는 기물도 기능적이고 구조적인 면에 충실하면서도 매 우 섬세하고 정교하게 제작되어졌다. 이러한 청자의 뚜껑 있는 용기는 다양 한 합과 주전자, 향로, 주전자 등인데 그 중 합은 여러 형태로 원형합, 투각 합, 원통형합, 사각형합, 모자합 등이 있다.
기하학적 형태의 원형합은 주로 기물이 낮고, 뚜껑과 몸의 크기가 같고 기물 전체의 높이가 구경(口徑)보다 낮다. 원통형합은 기물전체의 높이가 구경보다 커진 형태이며 일반적으로 몸체의 높이보다 뚜껑의 높이가 낮은 형태로 내용물을 담기에 적합한 기능을 하고 뚜껑은 손잡이가 없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물은 소성 시 맞물림 부분을 제유하여 뚜껑을 얹어서 소성 (燒成)하였다.
그 외 투각합은 사각형의 직육면체합으로 기물 전체 혹은 기물의 부분을 투각한 것으로 대부분 향합이나 여인들의 화장합으로 사용되었고, 조합형은 한 개 또는 여러 개의 작은 합들이 큰 합 속에 담겨져 조합을 이루고 있는 형태의 합으로 여러 종류의 향이나 화장품을 분리, 보관하기 좋은 형태로서 향합이나 화장합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합의 공통점은 뚜껑과 몸통이 한 몸으로 이루어지고 뚜껑손잡이 가 없이도 열고 닫기가 불편하지 않는 소품으로 제작되었으며 각진 몸통 전 밖으로 뚜껑이 맞물려 제작기술의 정교함과 기형의 안정성이 잘 나타나 있다.
다. 분청사기(粉靑沙器)
분청사기란 백토분장회청사기(白土粉粧灰靑砂器)의 약칭으로 기물의 표면 에 장식적 효과를 위하여 태토(胎土)에 백토로 분장하고 회청색의 유약을 입힌 사기를 말한다.
분청사기의 생활용기의 종류에는 사발(砂鉢), 접시, 대접(大接)합이 주류을 이루고 있다. 분청의 뚜껑 있는 용기로는 주로 호형합과 뚜껑 있는 사발 등 이 있으며 호형의 그릇은 주로 골호로 사용되었고 사발형태의 합은 식기로 사용되었다.
라. 백자(白磁)
우리나라에서는 완전한 백자가 만들어진 시기는 조선시대 초기인 15세기 에 들어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왔다.
조선시대는 배불(背佛)사상으로 유교(儒敎)적인 문화는 백자의 표현도 불 교의식에서 벗어나 표현이 좀 더 서민적이며 솔직하고 대담하여 자유스런 조형미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백자에 뚜껑이 보이는 기물로는 식합, 등잔, 주전자, 향로, 골호 등으로 청자 합이 섬세하고 정교한 기교적인 아름다움과는 달리 상징형의 부착 장식이 축소 생략되고 기능성이 강조되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 예컨대 백자의 주전자는 몸통의 형태가 대부분 구형으로 입구의 목도 생략되고 주 구와 손잡이도 주전자의 기능만을 할 수 있도록 짧게 단순화되고 뚜껑은 대부분 몸통전 안으로 들어가고 몸통 속에 수평의 뚜껑받이 턱을 만들어서 뚜껑을 받쳐주는 형식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전자의 손잡이도 청자에 서는 수직형의 손잡이였음에 비해 백자의 주전자는 몸통 부위에 수평형의 손잡이가 주를 이루고 있다. 식합이나 골호는 뚜껑의 몸통전 밖으로 씌여진 형식을 하고 있으나 뚜껑이 극히 간결하고 손잡이 또한 기능만을 충족시킬 수 있게끔 전혀 장식이 없이 나타나 있다. 향로의 뚜껑에서도 뚜껑 윗부분 에 부착된 각종 동물의 형태도 크기가 축소되고 청자의 향로에서는 삼족의 다리에까지 장식화되고 있으나 백자의 향로는 단순히 굽으로 처리하고 있 다. 이상과 같이 백자의 형태나 뚜껑굽이 몸통전 안으로 들어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음으로 보아 그 구조가 실용성을 중심으로 용도에 맞게 제작되었음 을 알 수 있다.
(1) 도제합(陶製盒)의 형태별 고찰
도자기 형태가 갖는 시대성은 어느 정도 공동형식을 갖고 있는 것이 보 편적이라 하겠거니와 우리나라 시대적인 일반적으로 삼국시대의 토기와 고 려시대청자, 조선조시대의 분청사기와 백자는 너무나 명확하게 분류되어 있 는 것을 알 수 있다. 합의 경우 그 시대적 형태가 어떻게 다르게 나타났는 가를 관찰할 필요가 있으리라 보며 이는 그 시대가 사회성과 깊은 관계를 갖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는 합이라는 개념은 뚜껑이 있는 기물로서 그 크기 가 작은 편이며 몸뚱이가 上․下 그 폭이 비슷하며 키가 크지 않은 것이 보통이며 형태상으로는 안정성을 갖는 기능적 형태로 입이 크고 굽이 없는
것과 굽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며 합의 뚜껑은 몸과 크기가 비슷하거나 조 금 작은 편이 많다.
토기시대인 삼국시대는 뚜껑기의 형태가 선각(線刻)이나 영락 등 장식적 인 것이 많이 표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거니와 일반토기와 같이 굽이 높고 귀가 달린 기형이 많고 또한 합의 뚜껑에 토우로 장식하거나 음각으로 그 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 많다. 토우는 사람의 일상생활형태와 뱀, 거북, 오 리, 물고기 등 다양하게 나타나거나 기하학적 선의 배열로서 장식하고 있음 을 볼 수 있다. 또한 신라통일기에 와서는 도장으로 찍은 무늬가 많이 사용 되어 기형의 진중함을 더해주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대 개 토기합은 크기가 크고 제례용으로 또는 장례용 골호(骨壺)로 또는 합 (盒)항아리와 같이 예식용기형(禮式用器形)이 많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청자에 있어서는 기형이 안정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 라 그 만들어진 짜임새가 세련되고 흠잡을 것이 없을 정도로 안정되어 있 으며 합의 형태는 상징형태(象徵形態)로서 국화형합(菊花形盒), 과실형합(果 實形盒), 화형합(花形盒)이 있고 각형합(角形盒), 조합형합(組合形盒), 투각합 (透刻盒)이 있을 뿐만 아니라 호형합(壺形盒)등이 다양하게 보인다. 또한 뚜 껑에 손잡이 달린 합과 뚜껑에 손잡이 없는 합이 있으며 귀와 같은 장식이 붙어 있는 합등 고려청자는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제례(祭禮)에 사용했을 것 으로 보이는 많은 합들이 만들어져서 합의 용도에 따라서 많은 제품을 유 물로 남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려의 합과는 달리 조선조는 대별(大別)하여 가사용구로 서의 합과 제례기로서의 합 그리고 문방구합 등 다양한 제품들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일반적 백자사발형에 뚜껑이 있는 합과 방형(方形)의 합, 통형합(筒型盒), 향로형합(香爐形盒)등의 형태가 보이고 있 다.
3. 용도에 따른 분류
도제합(陶製盒)을 용도별로 분류하여 살펴보면 반합(飯盒), 화장합(化粧 盒), 찬합(饌盒), 탕기(湯器), 항아리, 설탕합 등 여러 가지로 분류되고 있다.
토기제품으로부터 선유자기(線釉磁器), 청자, 백자, 기타 잡유자기(雜釉磁 器)에 이르는 합의 일반적 용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반합(飯盒)
식기의 일종으로 주로 밥을 담아 먹는 그릇으로 크기는 보통의 식기와 같으나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까지 종류가 다양하며 주로 조선조시기의 것 이 많으며 분청반합으로부터 순백자(純白磁)와 청화백자반합(靑華白磁飯盒) 등이 만들어졌으며 특히 조선조 후기에 많이 만들어졌음을 볼 수 있다.
형태에 있어 전이 겉으로 벌어진 바라기, 밑과 전이 같은 입기, 전이 안 으로 오므라든 바리가 있는데, 바리는 여성용이다.
또한 크기에 따라 왕사발, 중사발, 소사발 등의 종류가 있고 대부분 백자 로 제작되어 전통자기의 반합은 양감이 풍부하고 소박하면서도 담백한 느 낌을 주고 있다.
나. 찬합(饌盒)
음식을 종류별로 넣어두는 용기로서 찬합은 그 형태가 사각, 십이각의 것 이 보통이며 이중합(二重盒), 사중합(四重盒)이 보통이며 뚜껑이 있는 그릇 으로 음식을 넣어 두고 식사 때마다 사용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조선조 에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 화장합(化粧盒)
화장합은 여인들의 화장품그릇의 일종으로 독립되어 있는 기물도 있지만 큰 합 속에 몇 개의 작은 합들을 넣어서 한 조(組)를 이루고 있는 것이 보 통이다. 문양은 정교하게 그리고 형태는 여성취향에 맞도록 섬세하고 변화
가 있다. 보통 화장합에는 홍분(紅粉), 구홍(口紅), 향분(香紛), 향유(香油), 수향(水香)등의 각종 화장품을 담아두고 썼다고 한다. 일명 모자합(母子盒) 이라고도 하며 큰 합 속에는 병(甁)이 들어있는데 이는 향유(香油)나 수향 (水香)을 넣어두던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반달형의 분합(粉盒)이 들어있는 경우도 있다. 밖의 합이 사각일 때 안의 합이 원형(円形)인 것이 있는데 형 태의 다양성과 문양의 섬세함 등은 고려의 도자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라. 향합(香盒)
고려시대에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합의 일종으로 향을 담아두고 쓰던 것 으로 제례(祭禮) 때나 불교양식(佛敎樣式)에 사용하거나 혹은 화장기의 향 합으로도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문양이 섬세하고 곱게 만들어졌을 뿐 아니 라 고귀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연화문(蓮花紋), 국화문(菊花紋), 모란문(牡丹 紋)등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만들어진 것이 보통이다.
마. 사리합(舍利盒)
고승들이나 또는 불교의 화장법(火葬法)에 의해서 화장(火葬)한 후 사리 (舍利)가 나오면 이것을 보존하기 위하여 정교한 합을 만들고 여기다 사리 (舍利)를 보전하는데 이 합을 사리합(舍利盒)이라 한다.
바. 담배합(煙草盒)
담배의 건조와 또한 연초(煙草)의 변질을 막고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진 합으로서 어느 정도는 대중용기로서 목제합(木製盒)과 같이 사용되었을 것 으로 본다.
사. 비누합
세면용의 뚜껑이 있는 합으로 비누를 담아두고 사용하는 것으로서 찬합
(饌盒)과 비슷하게 이층, 삼층으로 되어있는 것이 있으며 찬합보다는 적으 며 매 층마다 비누 외에 필요한 향료(香料)를 넣어두고 사용했다.
아. 차합(茶盒)
차를 보관하거나 또는 넣어 두었다 먹는데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합이 다.
참고도판
도판 1 有蓋三角壺, 高句麗, 5C 도판 2 三足土器壺, 百濟, 5C
도판 3 有蓋高杯, 新羅, 6C
도판 5 土製有蓋盒, 新羅, 6C
도판 4 土製有蓋盒, 伽倻, 5C
도판 6 土製有蓋盒, 新羅, 6C
참고도판
도판 7 靑磁銅畵菊花文盒, 高麗, 12C 도판 8 靑磁象嵌牧丹唐草文粉盒, 高麗, 12C
도판 10 靑磁象嵌雲鶴紋母子盒, 高麗, 12C 도판 9 靑磁象嵌龍鳳牧丹文盒, 高麗, 12C
도판 12 靑磁象嵌透刻龜甲文化粧箱子, 高麗 도판 11 靑磁象嵌辰砂雲鶴紋粉盒, 高麗, 13C
참고도판
도판 13 粉靑沙器牧丹文盒, 朝鮮, 15C 도판 14 粉靑沙器牧丹文盒, 朝鮮, 15C
도판 15 粉靑沙器印花文盒, 朝鮮, 15C 도판 16 粉靑沙器印花文盒, 朝鮮, 15C
도판 18 粉靑沙器唐草文盒, 朝鮮, 15C 도판 17 粉靑沙器牧丹文盒, 朝鮮, 15C
참고도판
도판 21 白磁陽刻雙鶴汶盒, 朝鮮, 17C 도판 22 白磁方形盒, 朝鮮, 17C 도판 20 白磁香꽂이, 朝鮮, 17C 도판 19 白磁丹唐草文盒, 朝鮮,15C
도판 24 鐵畵白磁唐草盒, 泰國, 16C 도판 23 靑畵白磁牧丹盒, 朝鮮, 18C
Ⅲ. 한옥(韓屋)의 고찰
1. 한옥(韓屋)의 의미
우리 조상들은 예부터 집을 자연의 일부로 동화시켜 구성하였다. 뒷산과 비슷한 물매를 가진 지붕과 야트막한 기둥, 처마와 자연스런 담장의 조화, 그리고 흙과 돌, 나무와 같은 자연 속의 재료를 이용하여 처해진 환경에 순 응하며 주거문화를 형성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옥에는 다른 나라에서 찾 아볼 수 없는 우리 고유의 정서와 특성이 고스란히 배어있다.4)
한옥(韓屋)은 일본의 주택처럼 신경질적인 짜임이나 구조적인 기교미로 가장하지 않으며, 인위적인 조경(造景)이나 이발한 정원수(庭園樹)로 정원을 가꾸지도 않는다. 중국의 주택처럼 호들갑스럽지도 않고 번잡스럽지도 않 다. 일본처럼 근시안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4면의 자연풍광 그대로를 주택 에 도입하여 편안함을 찾았으니 자연의 한 부분이 집이었고, 뒤뜰은 담을 넘고, 건너 자연으로 되돌아가도록 만들었다.5)
가. 한옥(韓屋)의 형성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집을 한옥(韓屋)이라고 한다. 또한 우리 민족이 전 통적으로 입어오던 바지저고리나 치마저고리를 한복(韓服)이라 하고, 김치 나 된장찌개 등을 곁들여 밥상에 차린 음식을 한식(韓食)이라 하듯이 한옥 (韓屋)은 이 땅에 세워지던 독특한 우리네의 집을 일컫는 말이다.
상류주택과 민가로 구분되는데 조선이후 유교정책에 따라 남녀유별(男女 有別)과 신분에 의한 건축계획이 이루어져 사랑채, 안채, 행랑채와 이어 부 속되는 마당으로 공간이 구성되는 것이 통례이다. 민가는 상류주택과는 달 리 일반성에 더 우위를 차지하며, 생활공간인 건물과 작업공간인 마당으로 구성되는 것이 기본적이다. 이상형의 집을 짓는 것과 관련하여 과거 선조의
4) 박명덕. 한옥의 재발견. 주택문화사 2002 p7
5)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중에 기대서서. 학고재. 1994 p15
생각은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 잘 나타나 있다.
한국은 아시아 대륙의 동쪽 해안 끈에 돌출되어 나온 반도로서 북쪽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 대륙에 인접해 있으며, 남쪽은 해협 너머에 일본 열도가 바라보이는 위치에 놓여 있다. 따라서 육로 또는 수로로 중국 과의 왕래가 쉬어 고대로부터 중국 문화가 전파되어 왔고, 대륙 문화는 한 국을 통해 일본에 전달되었다.
반도국은 대륙적이며 도서적인 이중적인 특성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한 국 문화는 원만하면서도 격정적이고, 낙천적이면서도 감상적이며, 또 적응 성과 보수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되어 온 한국 전통주택에는 이러한 입지조건과 문화 적 특성이 잘 나타나, 중국과 일본 주택과는 다른 중간적이며 이중적인 성 격을 갖게 되었다.
한옥(韓屋)의 가장 큰 특징은 구들과 마루의 공존 형태라고 할 수가 있 다. 같은 목조건물이지만 일본에서는 마루와 다다미를 놓은 방의 구조는 볼 수 있으나 구들을 놓은 온돌방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중국 중원지방의 전형적인 살림집에서도 구들과 마루의 형태는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부분 적으로 마루를 설치한 사례는 있으나 한옥(韓屋)과 같은 대청이 있는 구조 와는 차이가 있다. 이렇게 구들과 마루를 동시에 지니는 건물 구조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한옥(韓屋)의 개성적인 모습이다. 초기 움 집형 구조의 화덕 시설이 발전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인 구들은 추운 북방지역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안악 제3호 무덤의 부뚜막 그림 등이 그 원시적 형태를 담은 유구(遺構)6)라고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판석을 세우고 그 위에 판석을 덮은 한 줄 고래 방식으로써 고래와 직각 방향으로 불을 지피고 그 끝에는 집밖으로 굴뚝을 설치한 것이었다. 사회 가 집단화되고 복잡화되면서 전용공간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땅 쏙 움집의 구조로서는 그 욕구를 모두 충족시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살림집은 점 차 지표면위로 올라 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 또한 난방의 효율을 높여서 동
6)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
시에 추위를 견디고자 하는 고민들이 만들어 낸 구조가 구들을 이용한 온 돌방인 것이다. 따라서 북방계의 건축은 가능한 한 폐쇄적이며 닫힌 공간 구성을 지향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건물 외부의 차가운 기운을 집 안 깊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내부에서 발생한 따뜻한 기운은 오랫동안 집안에 머물게 하려는 자연발생적인 형태라고 하겠다. 이에 반해서 마루는 지극히 개방적인 남방 계통의 산물이라고 할 수가 있으며, 고온다습한 풍토에서 열 을 잘 방출하고 무난한 통풍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려 는 의도와 부합하는 개방 지향성의 구조하고 할 수가 있다. 이처럼 아주 이질적인 구들과 마루가 공존하는 한옥의 형태는 삼국시대로부터 상호 이 동을 하면서 북부지방 사람들은 온돌을, 남방지역의 사람들은 마루를 선호 함으로써 자연발생적으로 온돌과 마루의 절충적인 구조가 완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나. 한옥(韓屋)의 역사
한옥(韓屋)의 역사는 시대성에서 구분이 생긴다. 1900년대부터 우리나라 의 집의 역사는 크게 달라진다. 1890년대까지를 전형의 시대라 한다면 1900 년대로부터는 규모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확연히 구분된다.
역사시대로 접어든 이후 1890년대까지를 크게 4기로 나누어 본다면, 1기는 역사 이래로부터 삼국시대 말기까지이다. 이 시기의 역사기록은 주 로 중국인이 집필한 역사책에서 발견된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풍물을 기 록한 중에 살림집에 관해 조금씩 언급하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한옥(韓屋)의 구조는 바뀌는 양상에 이른다. 삼국시대 말까지지 1기로 구분 된다.
2기는 신라통일기로부터 고려왕조의 원종(元宗)대까지로 설정한다. 신라 통일기에 이르면 움집, 오두막집, 귀틀집 류가 차츰 고급집으로 바뀌어서 통일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의 경우는 초가가 한 채도 없는 기와집으로 17만 여 호가 즐비하였다. 신라의 문물을 이어받은 고려시대에서도 이런 양상이 계속되다가 몽고군의 습격을 받으면서 고려의 경제상태가 위축되고 집의
규모가 왜소해진다.
3기는 고려 충렬왕대로부터 임진왜란까지의 기간이다. 몽고군에 시달리던 고려왕조는 원나라의 문물이 들어온다. 북방 유목민족의 유형이 잠입하면서 집도 크게 변환의 계기를 맞는다. 조선이라는 신흥국가의 발흥에서 신도(新 都)의 경영 등으로 살림집들도 크게 고무된다. 문물의 진작도 활력소가 되 었다. 이제까지 북방에만 있던 구들이 남하하여 중부지방까지 보급되고 남 방의 마루가 북상하여 중부지방을 넘어서게 되었다.
4기는 임진왜란 이후 1890년대까지이다. 대한제국의 말엽으로 본다. 임진 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경제상태는 극도로 악화되어 복구 작업이 여 의치 않았다. 왕실 또한 같은 실정이었다. 영․정조 때에 이르러서 복구의 역사가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2. 한옥(韓屋)의 공간적 구조적 특성
인간은 삶을 영위하면서 각각의 기능과 용도에 맞는 건물과 공간을 이루 어 나가는데 특히 공간은 관습과 종교, 지역과 자연환경에 가장 적절히 어 울리도록 구성한다. 한옥(韓屋)공간은 생활공간, 의식공간, 작업공간, 휴식공 간 등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궁궐, 사찰, 주택 등 각각의 건축물은 용도와 기능에 따라 그 공간적 구성을 달리한다. 이들 각 공간들은 독립적으로 또 는 상호 연계되면서 위계를 이루며 또한 사용주체의 목적이나 용도에 의해 그 성격이 규정된다.
한옥(韓屋)의 집단적인 건물에서는 대개 건축물의 바닥 면적보다는 외부 공간의 면적이 훨씬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종교 건축이나 궁궐, 그리 고 상류주택 등과 같은 건축물은 그 자체가 한 상징물로서의 조형성을 가 지는 형태를 구성할 뿐 아니라, 그 건물의 주인이 내부에서 밖으로 내다보 는 시각적 경관구성에도 많은 비중을 두어 배치하였다. 즉 우리의 전통건축 물은 서구의 건축물이 건물의 외형에 많은 비중을 두어 계획된 것과는 달 리 내부공간과 외부세계화의 동화에 많은 비중을 두었던 것이다.
한국의 마루는 안과 바깥을 잇는 매개공간이다. 그래서 외부와 내부의 중 간적인 성격을 띈다. 반은 노출되고 반은 은폐되어 있다. 자연과 문화가 접 경을 이루는 공간으로 문들 자유롭게 떼어내어 바로 바깥공간으로 통할 수 있는 공간이다. 분합을 통째로 걸면 방과 대청이 한 공간이 된다. 가변 벽 이 유행인 서양건축가들이 보고 기겁을 할 처리법이다.7)
(1) 한옥(韓屋)의 구조적 특성
한옥(韓屋)의 구조적 특성을 보면, 힘의 균형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 하여 지붕, 도리, 보, 공포대 등 다양한 구조로 건축물이 하중을 받치며 견 고하게 구축되어 수 천 년 동안 음양오행의 무궁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놀라운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복잡다양하고 그 구성적 조화가 오 묘한 공포제에 못을 사용하지 않고 음양원리로 꿰어 맞춘 양식으로 완벽하 게 만들어진 것이 그 특징이다. 그리하여 한옥(韓屋)은 부수더라도 고스란 히 옮겨 옛집을 복원할 수 있다. 폈다가 다시 접을 수 있고, 또 다시 펼 수 있는 것이 우리 한옥(韓屋)이다. 마치 보자기처럼 유(有)가 무(無)가 되고 다 시 유(有)가 된다. 한옥(韓屋)이야말로 세계에서 그 유래를 볼 수 없는 가변 성 주택의 원형을 갖고 있는 건축물이다. 이와 같은 정신이 결국 주택 내부 의 복합문, 병풍, 발부채, 등으로 이어져 왔다. 한옥은 가변성, 회복성, 다양 성의 기본이며, 결국 가장 인간중심의 건축양식인 것을 알 수 있다.
(2) 한옥(韓屋)의 구조적 분류 가. 안채
안공간인 안채는 집안의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의 공간으로 대문으로 부터 가장 안쪽에 위치하였으며 보통 안방, 안대청, 건넌방, 부엌으로 구성 된다.
안채의 안방은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실내 공간 중에서도 상징적으로 가
7) 이어령. 한국인의 손, 한국인의 마음. 디자인하우스. 1994
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출산, 임종 등 집안의 중요한 일이 이뤄지던 여 성들의 주된 생활공간이다.
안채는 위치상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인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여 성들의 사회생활을 꺼려하여 남편이나 친척 외에는 남자들을 만나지 못하 도록 하는 등 여성들의 외부와의 출입을 제한하던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는 공간배치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사랑채와 달리 학문 탐구 등의 활동공간이 라기 보다는 가족들의 의식주를 전담하는 공간으로 가구류도 의복과 침구 류 보관을 위한 수납용 가구 등이 놓였다.
나. 사랑채
사랑채는 외부로부터 온 손님들에게 숙식을 대접하는 장소로 쓰이거나 이웃이나 친지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고 집안 어른이 어린 자녀들에게 학문과 교양을 교육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또한 사대부 남자들이 모여서 학문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고 시를 짓거나 거문고 등의 악기를 연주하며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한 것도 사랑채에서였다.
부유한 집안의 경우는 사랑채가 독립된 건물로 있었지만 일반적인 농가 에서는 주로 대문 가까이의 바깥쪽 방을 사랑방으로 정해 남자들의 공간으 로 사용했다. 사랑채는 보통 사랑대청과 사랑방으로 구성되며 부유한 집안 은 누마루를 마련하며 한층 품위를 살렸다. 사랑방(The Scholar's Study)은 사랑채의 주요 공간으로 남자주인과 귀한 손님이 기거하는 공간이다. 상류 주택의 사랑방은 기거와 침식 외에도 독서, 예술 활동, 접대 등의 많은 행 위가 이루어졌던 중요한 공간이다. 유학을 장려하여 문필문학을 존중하고 경전을 연구하는 풍조가 만연하였던 조선시대에는 사랑방문화 또한 발달하 였다.
금욕적 유교생활을 지향하는 선비의식의 영향으로 사랑방의 가구나 장식 은 매우 간소하게 꾸며져 보통 몇 개의 방석과 작은 책상, 장농과 책장, 문 방소품 등으로 구성되었다.
다. 사당채
조상숭배의식의 정착과 함께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 안채의 안대청 뒤 쪽이나 사랑채 뒤쪽 제일 높은 곳에 '사당'이라는 의례 공간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보통 사당에는 4개의 신위를 모시는데 서쪽부터 고조의 신위, 증조 의 신위, 할아버지의 신위를 모시며 마지막에 부모의 신위를 모신다.
대개의 중상류 주택은 가묘법(家廟法)8)에 따라 사당을 건축하지만 사당이 없는 집도 있어 그런 집에서는 대청마루에 벽감을 설치하여 신위를 모셨다.
라. 행랑채
전통주택은 상하 신분제도의 영향으로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공간을 다르게 배치하였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안의 경우에는 안채와 사랑 채 외에도 하인들이 기거하거나 곡식 등을 저장해두는 창고로서 쓰였던 행 랑채가 따로 있었다. 하(下) 공간인 행랑채는 그 주택의 규모에 따라 '바깥 행랑채'만 또는 '중문간 행랑채'도 존재하였다.
바깥행랑채는 대문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집안에서 가장 신 분이 낮은 머슴들이 기거하는 공간이었으며 중문간 행랑채는 양반들이 기 거하는 안채, 사랑채와의 중(中)의 공간으로 중간 계층인 청지기가 거처하 였다. 이들 공간들은 커다란 한 울타리 안에 작은 담장을 세우거나 채를 분 리하여 구획하였다.
이렇게 상류주택은 신분과 남녀별, 장유별로 공간을 분리하여 대가족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당시의 가족생활을 고려한 공간 배치를 하였다.
마. 별당채
규모가 있는 집안의 가옥에는 별당이 집의 뒤, 안채의 뒤 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이름이 다르게 불리웠다. 결혼 전의 딸 8) 조선 시대에, 《주자가례》에 따라 조상의 위패를 모시던 제도. 주로 사대부는 고조
이하 조상의 신주를 가묘(家廟)에 봉안하였는데, 가묘가 없는 집에서는 사당방으로 대신하였다.
들이 기거하는 별당은 '초당'으로 불리웠다. 또한 결혼 전의 남자 아이들의 글공부를 위해 '서당'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집도 있었다.
바. 곶간채
중상류층의 주택 중 에서도 부유한 집안은 수십 칸 규모의 주택에서 살 았다. 이들 '칸'수가 많은 전통주택에는 곶간채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어 오 래 저장해두어야 할 음식이나 여러 가지 생활용품들을 저장, 보관하였다.
3. 한옥(韓屋)의 지붕 가. 지붕의 개념
지붕의 사전적 의미는 벽체 위에 설치하여 건물의 최상부를 이루는 구조 체를 총칭하는 것이다. 대부분 목조건축의 지붕은 경사면으로 이루어지되 지역, 기후에 따라 구성을 달리할 뿐 아니라 상부를 덮은 재료와 형태 등에 따라 구분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에서는 지붕의 경 사도가 급하고 큰 눈이 내리거나 바람이 거센 지역에서는 지붕의 재료로 가벼운 목재를 사용하거나 돌로 눌러놓는 등 지붕의 구조나 형태 등에 다 양한 변화를 보인다.9)
지붕은 일조, 피풍, 피수, 기온과 습도 등 건축 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기 능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외에도 외관상의 의장 효과도 크다. 사실 고건 축물을 보았을 때 지붕형식은 그 각각의 종류에 따라 그 건물에 맞게 쓰이 며 그 지붕형식으로 건물의 분위기를 직접적으로 전달해 준다. 한옥(韓屋) 은 처마가 많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지붕이 대단히 크고 육중하다. 또 흙으 로 구운 기와를 사용하기 때문에 실제로도 중량이 많이 나간다. 이러한 무 게감을 없애주고 빗물의 신속한 배수를 위하여 처마의 앙곡과 안허리곡이 생겼지만 이러한 지붕의 곡선은 또한 지붕이 날렵하고 율동적으로 보이게 9) 장기인. 한국건축사전, 보성문화사.1985
하여 무게감을 덜어주는 시각적인 역할을 한다.
나. 지붕의 종류
형태에 따른 분류로는 맞배지붕, 팔작(합각)지붕, 우진각지붕, 모임지붕 등이 있으며 재료에 따른 분류로는 기와지붕, 초가지붕, 너와지붕, 굴피지붕 등이 있다. 본 논문의 모티브가 한옥 지붕의 형태를 이용한 연구임을 감안 해 재료에 따른 분류보다는 형태에 따른 분류에 초점을 맞추었다.
① 맞배지붕
맞배지붕은 가장 간략하면서도 중후한 형식으로 지붕면이 앞 뒤 양면으 로만 경사를 지어 마치 책을 반쯤 펴 엎어놓은 듯 한 ‘人’자형이다. 정면에 서 보면 정방향으로 보이고 측면에서는 지붕면 테두리가 보일 뿐이다. 따라 서 측면 가구(架構)가 외부로 노출되므로 측면관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수 덕사 대웅전이나 무위사 극락전 등 고려시대나 조선조 초기의 맞배집에서 그러한 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 조선조 후기로 들어와서는 대부분의 맞배집 이 측면에 방풍널을 설치하여 가구(架構)를 가려놓고 있다. 이는 측면관을 노출시키기에는 가구가 매끈하지 못하였던 점과 측면의 처마깊이를 얕게 한데서 오는 비바람의 차단을 염구에 둔 조치이다.
맞배지붕은 추녀가 없기 때문에 처마의 곡선이 미약하기는 하지만 나름 대로 약간의 곡선을 가지고 있다. 이 기법은 처마 끝을 정확하게 수평으로 하였을 경우 처마의 양쪽 끝이 아래로 처져 보이는 착시(錯視)현상이 나타 나기 때문에 이를 미리 교정하여 준 것이다. 지붕마루는 하나의 용마루와 네 개의 내림마루가 생긴다.
② 우진각지붕
우진각지붕은 지붕면이 사면(四面)이어서 전후좌우로 물매를 갖는 형식이 다. 정면에서 보면 사다리꼴 모양이 되고 측면에서는 삼각형으로 보인다.
가구는 팔작지붕과 비슷하나 측면의 지붕을 위하여 헛서까래를 쓰는 경우 가 있다.
우진각지붕은 성문이나 궁성의 문루에 주로 사용되었고, 살림집에서는 대 부분의 초가와 규모가 작은 기와집에서 비교적 많이 사용되었다. 지붕마루 는 하나의 용마루와 네 개의 추녀마루가 생긴다.
③ 팔작지붕
팔작지붕은 지붕면이 우진각과 같이 사면(四面)에 있으나 측면에 삼각형 의 합각(閤閣)이 생겨 우진각과 맞배를 합쳐 놓은 듯한 형식이다. 외관상 위용이 있어 중심이 되는 정전과 같은 중요 건물에 즐겨 사용되었다. 지붕 마루는 하나의 용마루와 네 개의 내림마루 그리고 네 개의 추녀마루가 생 긴다.
합각에는 삼각형 모양의 수직벽이 생기게 되는데 이 벽은 방풍널처럼 판 벽으로 하는 경우와 전벽돌, 와편쌓기, 회벽 등으로도 처리된다. 전돌벽으로 하는 경우에는 여러 가지 무늬를 베풀기도 한다. 합각지붕 또는 팔작지붕으 로도 부른다.
④ 모임지붕
모임지붕은 평면이 정방형인 경우 네 개의 추녀마루만 생겨나는 지붕으 로 용마루가 없이 지붕의 정상부가 뾰족하게 되는 형식이다.
정방형의 평면인 경우에는 사모지붕이 되지만 정육각형의 경우에는 육모 지붕, 정팔각형의 경우에는 팔모지붕이 된다. 목탑의 최상층이나 육모정, 사 모정 등의 정자에서 주로 사용된다.
⑤ 이어내림 지붕
몸체의 지붕처마 끝에서 이어내린 지붕을 말한다. 이는 달개 지붕이라고 도 하는데 맞배 지붕집의 박공벽에서 달아 낸 외쪽지붕으로 꾸민 것을 가
적이라 하며 안동이나 영천지방에 많이 나타나는 형태이다.
⑥ 층단지붕
2층이나 3층 이상의 중층집에서 벽의 바깥쪽에 꾸민 하층 지붕으로 최상 층은 일반지붕과 같이 되는 것을 말한다.
⑦ 겹지붕
지붕처마 바로 밑에 채양과 같은 형태로 꾸미되 본래의 지붕은 짧은 처 마로 하고 밑의 지붕은 약간 길게 나오도록 꾸민 것을 말한다.
⑧ 무량갓
주로 궁궐의 내전건물의 지붕형태로 지붕마루에서 용마루를 꾸미지 않고 안장 모양으로 만든 수기와와 암기와를 용마루의 위치에 덮은 것을 말한다.
참고도판
도판 26 中國家屋, 淸, 18C 도판 25 安東 韓屋, 朝鮮, 19C
도판 27 정읍, 朝鮮, 19C 도판 28 寶光寺3層木塔, 韓國, 20C
도판 30 平等原 鳳凰堂, 日本, 11C 도판 29 華嚴寺, 金, 10C
참고도판
도판 32 秋史古宅, 朝鮮, 18C 도판 31 秋史古宅, 朝鮮, 18C
도판 33 烏竹軒, 朝鮮, 15C
도판 35 老松停古宅, 朝鮮, 15C 도판 36 蘇湖軒, 朝鮮, 15C 도판 34 尹善道古宅, 朝鮮, 18C
참고도판
도판 38 맞배지붕형-수덕사 대웅전 도판 37 맞배지붕
도판 39 우진각지붕 도판 40 우진각지붕형-남대문
도판 42 팔작(합각)지붕형-화엄사 대웅전 도판 41 팔작(합각)지붕형
Ⅳ. 작품제작방법 및 설명
1. 작품제작의도
예술가는 시대전반에 녹아 흐르고 있는 보편적 언어를 도외시할 수 없고 동시에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를 수행해야 한다는 이중부담을 안고 있다.10) 본인도 예외는 아니어서 늘 변화를 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껴왔다.
하지만 작업에 임할 때면 어디선가 본 듯한 무언가를 닮은 듯한 형태를 만든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본인의 의지와는 달리 행동은 낯설 지 않은, 좀더 본인에게 편안한 형태를 쫓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풍토, 문화권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의 간섭, 거역할 수 없는 자연 의 순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에 본인은 스스로의 작업을 객관화하고 ‘흔들리지 않는 중심축’을 잡기 위해 우리의 전통미를 고찰해볼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한옥(韓屋)과 도제 합(陶製盒)에 대한 한국의 조형미를 연계하여 작품을 제작하려한다.
사면의 자연의 품속에 조화시켜 편안한 그리고 자연의 한 끝이 집 뜰일 수 있고 이 집 뜰은 담을 넘고 들을 건너서 자연 속으로 번져나가는 것이 한국주거의 특징이다. (중략) 한국 공예는 한국의 주택 속에서 자라났다. 멀 리는 석기시대로부터 가깝게는 고려의 청자, 조선시대의 자기에 이르기까지 참 잘도 우리의 풍토와 호흡이 맞아왔다.11)
위의 글에서 언급된바와 같이 한옥(韓屋)과 도자(陶磁), 이들 구분된 조형 의 정신과 방법적인 측면의 요소들은 사실상 구분되기보다는 상호 융합되 고 그 안에서 녹아서 새롭게 생겨나는 특질을 지니고 있다. 즉 총체, 조화, 변화 등의 구분된 한옥(韓屋)과 도자(陶磁)의 조형정신은 모두가 큰 하나의 무사의 개념을 공통적 개념으로 담고 있고 이를 통해 총체, 조화, 변화가 가능하며 이를 통해 새로운 한옥(韓屋)의 조형성을 적용한 도제합(陶製盒)
10) 이경휘. 월간도예 4월호, 1998.p81
11)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1994. 학고재. p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