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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Type and Characteristics of the King Taejo's Taesil in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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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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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1598-1142 (Print) / ISSN 2383-9066 (Online) https://doi.org/10.7738/JAH.2017.26.6.077

1. 서 론

한국 고유의 민속신앙인 장태(藏胎)문화는 고려에 이 은 조선 왕실에서도 여전히 지속, 발전하였다. 조선시대 왕의 자녀로 태어난 아기의 태(胎)는 일정한 형식과 절 차에 따라 명당에 묻고 아기태실(阿只胎室)을 만들었다.

이 중에서 왕위에 오른 왕자의 아기태실은 지상에 석물 을 더하여 다시 조성되었는데, 이를 가봉태실(加封胎室) 이라고 한다.

마치 봉분과 같은 형상인 아기태실에 비해 가봉태실 은 지상에 여러 석물들을 가공, 조립하여 조성하였기 때

* Corresponding Author : [email protected]

이 논문은 2017년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교수 교육연구진흥과제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문에 여러 분야에서 관심을 두고 연구가 진행되기도 하 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지하에 묻혀 있던 석함 안의 태항아리를 꺼내어 서삼릉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태실 의 지하, 지상의 구조물 모두 크게 훼손되었다. 이후 태 실 석물들은 무관심 속에 방치되거나 유실되어 현상유지 조차 어려워지게 되었다.

본 연구의 대상인 태조대왕 태실

1)

역시 이러한 상황 과 크게 다르지 않다. 태조태실은 원래 전라도 진산군 (현재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에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으며, 1993년에 원 위치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 충남 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된 연구 대상의 정식 명칭은 ‘태조 대왕 태실’이지만, 본 논문에서는 ‘태조태실’이라는 약칭을 함께 사용 하기로 한다.

조선 태조대왕 태실(胎室)의 형식과 특성

A Study on the Type and Characteristics of the King Taejo’s Taesil in Joseon Dynasty

유 기 원 Ryu, Kee-Weon (인하공업전문대학 건축과 강사)

김 기 주*

1)

Kim, Ki-Joo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디자인·건축공학부 교수)

Abstract

Ordinary people generally bury or burn placenta when the baby was born. But, Joseon royal family put placenta in pot and then buried it in propitious site praying for good health and long life. After that baby had become the king of Joseon, people built stone figures formed fixed type at that place. It is called gabong-taesil(加封胎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figure out the type and characteristics of the King Taejo’s taesil in Joseon Dynasty.

The King Taejo’s taesil had built first as soon as Joseon was established circa 1393, and repaired largely in 1689.

Since then, this was damaged by the Japanese Empire and assembled in recent days at near place from the original place. Center piece of taesil remains the original form, and the rest of stone figures is assumed to be rebuilt in 1689.

But, some materials like sangseok(裳石) and jeonseok(磚石) are assumed that are original stone figures or were made, assembled by the style of then.

Considering most of remained taesil is a relic of the latter part of Joseon Dynasty, the King Taejo’ taesil has high cultural value as the first gabong-taesil of Joseon Dynasty inheriting Goryeo Dynasty type.

주제어 : 태실(胎室), 태조(太祖)대왕, 개첨석(蓋簷石), 태석(胎石), 난간석(欄干石), 상석(裳石), 전석(磚石) Keywords : Taesil, King Taejo, Gaecheomseok, Taeseok, Nanganseok, Sangseok, Jeonseok

(2)

다른 태실에 비해 비교적 석물 유구의 상태가 양호한 태조태실은 조선 전기의 형식이 많이 남아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본격적 인 연구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2)

그림 1. 태조대왕 태실 전경

본 연구는 태조태실의 형식과 특성을 밝히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현재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가봉태실은 25개가 전해지고 있지만, 이 중에서 유구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여 복원된 사례는 10여 개에 불과하다.

3)

(<표 1>

참조) 그러므로 본 연구는 일부 부재만 확인되는 가봉태 실을 포함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4)

태실과 관련된 용어 의 사용은 원칙적으로 의궤를 따르는 것으로 하였으나, 부득이한 경우 선행 연구결과를 참고하였다.

2. 문헌으로 살펴본 태조태실의 변천 과정

2-1. 가봉(加封)

태조 이성계는 1335년(충숙왕 복위 4) 10월 11일 함경 도 영흥에서 부친인 이자춘의 집[私第]에서 민간인의 신 분으로 태어났다. 이성계의 태는 용연이라는 못 가운데 에 묻혔었다고 한다.

5)

당시 민간에서도 행하여지던 장태

2) 태조태실에 대한 연구는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석물에 관한 일 연구: 서삼릉 이장 원 태실을 중심으로 , 문화재, 33호, 2000.12, 94∼

135쪽’과 ‘심현용, 조선시대 가봉태실의 중앙태석에 대한 양식과 변천 , 대구사학, 113호, 2013, 99∼142쪽’에서 여러 사례 중 하나로 다루어졌 을 뿐이다.

3) 조선시대 27명의 역대 국왕 중에서 연산군, 효종, 철종, 고종은 가봉 태실의 조성 여부가 확인되지 않으며, 추존된 5명의 국왕 중 덕종, 원종, 진종의 태실 역시 분명하지 않다. <표 1>은 조선시대 국왕의 가봉태실 목록과 위치/장태/가봉/복원/문화재 지정 등을 정리한 것이다.

4) 가봉태실의 일반적인 구성은 가봉태실비(표석)를 포함한다. 그렇지만 태실비에 대한 연구는 또 다른 연구로 정리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므로 본 연구 대상에서는 제외하였다.

태조대왕 태실 평면도

태조대왕 태실 좌측면도

그림 2. 태조대왕 태실 평면 및 측면도

풍속에 따른 것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1392년 7 월 17일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한 후, 이성계 선대에 대 한 추숭 사업이나 천도의 문제와 같이 새로운 왕조 창 업에 따른 일련의 국가 차원의 사업들이 곧바로 착수되 었다. 이러한 사업의 일환으로 이성계의 태를 옮겨 모시 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민간 풍속에 따라 장태되었던 태 를 왕위에 오른 이성계의 신분에 맞게 격상, 가봉하려 했던 것이다.

태조는 1392년(태조 1) 11월 27일 태실증고사 권중화 로 하여금 가봉을 위한 태실 터를 찾게 하였고,

6)

이듬해 1월 2일에 전라도 진동현(珍同縣, 현 충남 금산군)의 한 곳을 후보지로 추천하며 산수형세도를 바쳤다.

7)

닷새 후 인 1월 7일에 태조는 권중화가 추천한 후보지에 태를 이 안(移安)하기로 결정하고 진동현을 진주(珍州, 이후 珍山 郡으로 개명)로 승격하였다.

8)

5) 영조실록, 영조 31년(1755) 1월 4일 기사; 洪敬謨(1774∼1851), 豐 沛聖蹟記: 上 , 冠巖全書, 22책, 기(記)

6) 태조실록, 태조 1년(1392) 11월 27일 기사

7) 태조실록, 태조 2년(1393) 1월 2일 기사. 한편 ‘村山智順, 조선의

풍수, 최길성 역, 민음사, 1990, 679∼681쪽’에는 이성계의 장태와 이

안(移安)을 무학대사가 지시하였다고 하지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

기 어렵다. 또 여지도서(1757∼1765) 이후 진산군읍지(1789경, 奎

17437), 호남읍지(1871, 奎12175) 등에서는 이 고을사람인 진순도(陳

舜道)가 전추(田秋) 소유의 땅을 태조태실 후보지로 추천하였다는 기

록이 보이나, 진위는 확인할 수 없다.

(3)

역대 태주 원 위치 / 현 위치 출 생 장 태 가 봉 비 고 문화재 지정 1 태조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산4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산1-86, 1-88 1335-10-11 1393 복원 충남 유형 제131호

2 정종 경북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산84-2~3

경북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202 1357-07-01 1399 일부 부재 3 태종 경북 성주군 용암면 대봉2리 산65 1367-05-16 1401 지표조사

4 세종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산27 1397-04-10 1419 일부 부재 경남 기념 제30호 5 문종 경북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 산2 1414-10-03 1439 1450 발굴 경북 유형 제187호 6 단종 경북 성주군 가천면 법전리 산10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산438 1441-07-23 1441-윤11-26

1451-01-03 1452∼1455

1699∼1719 지표조사

일부 부재 경남 기념 제31호 7 세조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 1417-09-24 1438-03-10 1462 복원 사적 제444호

추존 덕종 미상 1438 -

8 예종 전북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산158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102 1450-01-01 1462-10-15 1578 복원 전북 민속 제26호 9 성종 경기 광주시 태전동 265-1

서울 종로구 와룡동 2-1 1457-07-30 1458-03-01 1471 복원

10 연산군 미상 1476-11-07 -

11 중종 경기 가평군 가평읍 상색리 산112 1488-03-05 1429-09-07 1507 복원 경기 향토 제6호 12 인종 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산24 1515-02-25 1521-01-17 1546 발굴/복원 경북 유형 제350호 13 명종 충남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 산6-2

충남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 산1 1534-05-22 1538-02-21 1546 복원 충남 유형 제121호 14 선조 충남 부여군 충화면 청남리 산227

충남 부여군 충화면 오덕리 237 1552-11-11 1570 일부 부재 충남 문자 제117호 15 광해군 대구 북구 연경동 산135, 산136-1 1575-04-26 1581-04-01 1609 일부 부재

추존 원종 미상 1580-06-22 -

16 인조 황해 황주군 해주면 남본정 1595-11-07 1626 -

17 효종 미상 1619-05-22 -

18 현종 충남 예산군 신양면 황계리 189-20∼21 1641-02-04 1647 1681 일부 부재

19 숙종 충남 공주시 태봉동 산64-9 1661-08-15 1661-12-25 1683 일부 부재 충남 문자 제321호 20 경종 충북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산34-1 1688-10-28 1689-02-22 1726 복원 충북 유형 제6호 21 영조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무성리 산5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무성리 산6-1 1694-09-13 1695-01-28 1729 복원 충북 기념 제69호

추존 진종 미상 1719-02-15 -

추존 장조 경북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 산2 1735-01-21 1735-윤4-04 1785 발굴 22 정조 강원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산210-1

강원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산133, 산134 1752-09-22 1753-01-21 1801 복원 강원 유형 제114호 23 순조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산1-1 1790-06-18 1790-08-12 1806 복원 충북 유형 제11호 추존 문조 경기 포천시 영중면 성동리 451-18

경기 포천시 영중면 성동리 640-1 1809-08-09 1809-12-21 1836 일부 부재 경기 향토 제30호 24 헌종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 산6-2 1827-07-18 1827-11-11 1847 일부 부재

25 철종 미상 1831-06-17 -

26 고종 미상 1852-07-25 -

27 순종 충남 홍성군 구항면 태봉리 366-38 1874-02-08 1874-06-08 -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379∼381쪽 참조

표 1. 조선 역대 국왕의 가봉태실 현황

(4)

삼사좌복야(三司左僕射) 권중화(權仲和)를 보내어 태실(胎 室)을 완산부(完山府) 진동현(珍同縣)에 안치(安置)하고, 그 현(縣)을 승격시켜 진주(珍州)로 삼고…

9)

이후 태조태실이 언제 가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0)

다만 1916년 도굴 당시 발견된 태항아리의 명문에 따 라

11)

이안을 위해 태항아리에 봉안한 시기가 1393년 1월 15일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세종의 경우 태실 터 선정부터 안태까지 최소 한 달 정도의 기간이 소요되 었던 것으로 미루어

12)

태조태실의 가봉 시기는 2월 이후 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2. 표석(標石) 건립

태조태실을 가봉하면서 표석을 함께 세웠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표석에 대한 기록은 1686년 태봉등록

에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다. 당시 전라감사인 김진구(金 鎭龜)는 바람이 불어 태실이 파손되는 불상사가 일어나 자 장계를 올렸고, 이에 조정은 예조참판 심재(沈梓)를 직접 보내어 실태를 조사케 했다. 이때 심재가 올린 장 계에 따르면, 당시 표석은 만력 12년, 즉 1584년(선조 17)에 건립되었으나 약 100년이 지나 ‘萬曆’이라는 글자 가 훼손되어 교체가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 비석은 만력(萬曆) 12년에 건립되었는데, (중략) ‘萬曆’

두 글자가 손상되고 파괴되어서 조금 갈아내고 손보면 그 대로 쓸 수 있는 그러한 정도가 못됩니다.…

13)

결국 ‘만력’ 글자가 새겨진 비석은 1689년 개수할 때 교체되었으며, 귀대석은 상태가 양호하여 재사용되었다고 한다.

14)

현재 남아 있는 비석은 1689년에 교체된 비석으

8) 안태한 지역을 승격시키던 관례는 고려 때부터 시행되어 왔다. (심 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89쪽)

9) 태조실록, 태조 2년(1393) 1월 7일 기사

10) ‘심현용, 앞의 책, 2016, 379쪽’에는 ‘태조실록, 태조 2년(1393) 1월 7일 기사’를 근거로 태조태실의 가봉 시기를 1393년 1월 7일이라 하였 지만, 태실 터를 선정한지 5일 만에 가봉태실이 완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11) ‘… 그 파내인 항아리의 뚜껑거죽에 維大歲癸酉甲寅朔辛酉日丙申 時入安 이라는 글자가 붉게 쓰여 있어 지금에도 분명히 봉안 당시의 연월일 시각을 분명히 알겠더라.…’; 太祖의 臍胎​​ 發掘 , 매일신보, 1916.10.15, 3면 기사

12) 세종태실은 1418년 8월 14일 태실도감이 설치되어 태실 터를 찾기 시작하였으며, 10월 25일에 그 후보지가 결정되었고, 11월 11일에 세종 의 어태를 받들고 진주로 향하였다. 이로 미루어 태실 터를 선정하고 나서 가봉태실이 완성할 때까지 최소 한 달 정도가 소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실록, 세종 즉위년(1418) 8월 14일 · 10월 25일 · 11월 11일 기사 참조.

13) 태봉등록, 병인(1686, 숙종 12) 11월 25일 기사

로 뒷면의 명문 기록과 일치하며,

15)

귀대석은 1584년의 유구로 추정된다.

2-3. 개수(改修)

1686년 전라감사 김진구의 장계로 시작되어 공사가 완료된 것은 현재 비석의 뒷면 기록과 같은 1689년 3월 29일이었다.

처음 김진구는 횡죽석(橫竹石)이 파손되고, 연엽주석 (蓮葉柱石) 1개가 부러졌으며, 귀대석에 균열이 보인다 고 보고하였다.

16)

이후 석공과 함께 파견된 예조참판 심 재(沈梓)는 파손된 석물은 연엽주석 1개와 횡죽석 4개에 불과하지만 그 간격이 벌어져 횡죽석 모두를 교체해야 하고, 또 앞서 언급했듯이 비석도 다시 쓰기 어렵다는 보고를 하였다.

17)

흉년과 국상으로 2년을 미루던

18)

공사는 1689년 2월 26일부터 3월 29일까지

19)

약 한 달이 소요되었다. 그런 데 실제 공사는 처음 장계에서 보고되었던 공사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개수 공사 후 선공 감제조 예조판서 이관징(李觀徵)과 관상감제조 이조참판 유하익(兪夏益)은 공사를 마치고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 렸다.

… 혹 쓸 만한 돌이 약간 있다고 하더라도 다시 돌을 마 련한다면, 혹 척수(尺數)가 종전에 비해 모자라거나 돌의 질이 새로운 돌과 같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집탈이든지 미집탈(未執

)이든지 따지지 않고, 그중에 새로 바꾸어 야만 할 것은 바꾸고 그대로 계속 쓸 것은 그대로 쓸 경 우에, 난간 주석 8개, 죽석(竹石) 8개, 우전석(隅

石) 8개 와 비석은 바꿔야 하고, 비석도 새 돌로 만들어서 설치 해야 합니다. 개첨석(盖

石), 중대석(中臺石), 귀대석(龜臺 石)만은 돌 빛깔이 서로 비슷하였으므로 그대로 설치하 였고, 앞에 배치했던 우전석(隅

石)은 비록, 그냥 그대로 우전석으로 다시 쓸 수는 없었지만 하전석(下

石)으로 쓸 수는 있기에 그대로 하전석으로 다시 썼습니다. 헐기 전에는 하전석을 설치한 적이 전혀 없고, 다만 우전석으 로 부토(浮土) 위에 설치한 까닭에 든든하지 못한 듯하였 었는데, 이번에 새로 하전석을 설치하였더니 종전과 비

14) 태봉등록, 기사(1689, 숙종 15) 윤3월 초5일 기사. 이 기사에는 1584년에 제작된 비석을 개수 공사 후 태실 오른쪽 5보 거리에 묻었다 는 기록도 보인다.

15) 현재 비석 뒷면에는 ‘康熙二十八年(1689)三月二十九日重建’이라는 명문이 남아 있다.

16) 태봉등록, 병인(1686, 숙종 12) 11월 초10일 기사 17) 태봉등록, 병인(1686, 숙종 12) 11월 25일 기사

18) 태봉등록, 정묘(1687, 숙종 13) 7월 24일; 무진(1688, 숙종 14) 9월 초9일 기사

19) 태봉등록, 기사(1689, 숙종 15) 2월 초6일 기사

(5)

교하여 훨씬 든든해졌사옵니다. 이번 공사는 규모가 커 서 가봉(加封)과 다름이 없을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날 걸리지 않고도 공사를 마무리했을 뿐 아니라 석물 제 작도 역시 정교하고 치밀하게 만들어져서 참으로 다행이 옵니다.…

20)

공사 범위가 커진 이유는 신재와 구재의 재질과 빛깔 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교체된 부재는 연엽주석(蓮葉柱 石) 8개, 횡죽석(橫竹石) 8개, 우전석(隅磚石) 8개, 비석 이고,

21)

재사용된 부재는 개첨석(盖簷石), 중대석(中臺 石), 귀대석(龜臺石)이다. 또 기존에 사용하던 우전석은 버리지 않고 새로 제작된 우전석 아래에 하전석(下磚石) 으로 사용하여 구조적인 보강을 꾀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사용되었다는 하전석은 현재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고, 예전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는 중대석은 어떤 부재를 가리키는지 명확하지 않다.

22)

1689년 이후 1725년과 1866년에도 개수 공사가 시행되 었지만, 밀려난 석재를 바로 하거나 횡죽석 1개를 교체 하는 등 경미한 수준의 개수가 이루어졌다.

23)

2-4. 서삼릉 이장 및 복원

1911년 일제는 이왕직을 통하여 태조태실의 현황 조 사에 착수하였다.

24)

1916년 9월에는 석함 내부의 태항 아리가 노출되는 도굴 사건이 발생하면서 태실이 훼손 되었다.

25)

이후 일제는 전국에 방치된 태실을 한곳에 모아 관리하겠다는 명목으로 1928년 태항아리를 서울로 옮겨갔으며,

26)

1929년 태실 집장지인 서삼릉에 이장되 었다.

27)

20) 태봉등록, 기사(1689, 숙종 15) 윤3월 초5일 기사

21) 비석과 마찬가지로 교체된 구재는 태실 가까운 곳에 묻었다는 기 록이 보인다. (위의 글)

22) 1689년 태봉등록의 기록에서 보이지 않는 태실 석물의 부재는 사 방석과 상석이기 때문에, ‘중대석’은 이 둘 중 하나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23) 태봉등록, 을사(1725, 영조 1) 4월 9일; 태조대왕태실수개의궤, 병인(1866, 고종 3) 3월 24일 기사. 강화도 외규장각에 소장되었던 도서 목록을 기록한 江華府外奎章閣奉安冊寶譜略誌狀御製御筆及藏置書籍形 止案(1857, 奎9165의2)에 보면 현재 전해지고 있는 병인년(1866) 의궤 외에 太祖朝胎室石物修改儀軌(1686)와 太祖朝胎室修改儀軌(1725)가 제작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실전된 의궤들은 기록 시기로 미루어 태 봉등록에서 보이는 1689년과 1725년의 개수 공사를 의궤로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4) 순종실록부록, 순종 4년(1911) 12월 5일 기사

25) 太祖의 臍胎를 發掘, 대담한 범인은 내지인이 아닌가 , 매일신보, 1916.10.15, 3면 기사

26) 各地名山에 뫼시었던 李王家 先代 胎封 移奉 , 매일신보, 1928.9.10, 3면 기사

27) ‘高麗忠肅王後四年乙亥十月十一日生 太祖高皇帝胎 康熙二十八年己

일제는 태항아리를 파가면서 비석을 세 토막으로 자 르는 등 석물을 훼손하고 묻어버렸으며, 원래의 태실 자 리는 민간인에게 불하하였다.

28)

해방 이후에는 더욱 상 황이 나빠져 급기야 1970년대에 태실 자리에 민간인 묘 소가 들어서게 되었고, 1985년 묘소 주변에 방치되던 석 물들이 무단으로 반출되다가 마을 주민들에 의해 발각되 기도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88년 마을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태조태실복원추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처음에는 원 위 치에 복원하는 것으로 추진하였으나, 합의를 이루지 못해 1993년 8월 현 위치에 복원되기에 이르렀다.

29)

3. 가봉태실 비교분석 및 형식 구분

조선시대의 가봉태실은 지하구조물과 지상구조물로 구성되어 있고, 이 중에서 지상구조물은 다시 태실과 표 석(標石)인 가봉태실비로 나뉜다. 본 논문에서는 지상구 조물 중 태실을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태실은 편의상 태석부, 난간부, 기단부로 구분하여 부재별로 비 교·분석하였다.

3-1. 태석(胎石)부

30)

태석부는 지하에 묻은 태(胎)를 상징하는 석물로서 태 실 중앙에 위치하며, 아래부터 사방석(四方石), 중동석(中 童石), 개첨석(蓋簷石)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사방석은 크기가 다른 팔각형 평면의 석물을 상 하 2단으로 구성한 형식이 정종태실에 처음 나타나며, 실전되기는 하였지만 기록상으로는 태종태실과 세종태실 도 같은 형식의 사방석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31)

1450 년 문종태실에서는 연엽문을 새긴 팔각 평면의 사방석이 2단에서 1단으로 줄었다가,

32)

1471년에 가봉된 성종태실

巳三月二十九日藏 于太田君山內面 昭和四年(1929) 月 日移藏’, 서삼릉 태조 태지석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28) 석물 훼손에 동원된 인물은 금산군 추부면에 거주하는 전주이씨 종 친들이었다고 한다. (한송희, 태조대왕 태실의 역사 , 금산 태조대왕 태실유적 그 역사와 가치, 금산군, 2016.11, 14∼15쪽)

29) 한송희, 위의 글, 2016.11, 15∼17쪽 및 관련 공문 참조.

30) ‘태석(胎石)’은 의궤나 문헌에는 없는 용어로 심현용이 사방석(四方 石), 중동석(中童石), 개첨석(蓋簷石)을 통칭하여 ‘중앙태석(中央胎石)’이 라 하였는데, 본 논문에서는 이를 따라 ‘태석(胎石)’이라는 용어를 사용 하고자 한다. (심현용, 앞의 글, 2013, 100쪽)

31) 태종태실은 ‘李王職 編, 胎封, 1928 (장서각 소장) ’, 세종태실은 ‘신 라오악종합학술조사단, 세종·단종대왕의 태실조사 , 고고미술, 8권, 8호, 1967.8, 323∼325쪽’ 참조.

32) 문종태실은 훼손이 심해 사방석 중 일부 파편만 발견되었는데, 이

에 근거하여 팔각 평면에 연엽문이 새겨진 1단 구성의 사방석으로 추정

(6)

그림 3. 태조대왕 태실 태석부

이후에는 1단으로 구성된 사각형 평면의 사방석이 나타 나면서 측면에 연엽 문양을 새긴 형식이 숙종대까지 이 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33)

1720년대 경종과 영조태실에서 아무런 문양이 없는 1단의 사각형 평면이 잠시 보이다 가, 1785년에 가봉된 장조태실 이후에는 1단으로 구성된 사방석의 형태가 다시 팔각형으로 바뀌면서 측면에 문양 을 새겨 넣던 예전 형식이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중동석은 정종태실부터 문종태실까지 팔각형의 평면 형태를 유지하다가 1471년에 가봉된 성종태실 이후 원형 평면으로 바뀐다.

34)

1546년에 가봉된 인종태실 이후에는 입면 형태가 원통형에서 계란형으로 바뀌는데, 이후 이 러한 계란형의 중동석 형식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1801 년에 가봉된 정조태실 이후에는 중동석에도 연환문과 만 자문의 문양을 조각하면서 장식화 경향이 나타나고 좀 더 구형(球形)에 가까워진다. 중동석은 개첨석과 별도로 제작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15세기 초까지만 해도 한 부재로 제작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35)

개첨석은 이례적인 몇 개의 사례를 제외하고 대부분 팔각형의 평면 형태를 보이고 있다.

36)

개첨석은 목조건 축의 지붕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녀마루, 추녀와 사래, 앙곡 등과 같은 건축적 요소가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성종태실과 같이 연잎 문양이 장식되기도 하고, 정조태 실 이후에는 건축적 요소와 연잎 문양이 함께 표현되기

하고 있다. [박광열·김동숙·김희철, 예천 명봉리 조선왕조 태실(문종·장 조) 유적, 성림문화재연구원, 2014, 49~51쪽 · 95쪽]

33) 정방형 평면의 사방석이 처음 출현한 것은 세조태실이지만, 현재 남아 있는 세조태실은 가봉태실이 아닌 아기태실로 조성된 특이한 경 우이다.

34) 중동석이 원형의 평면 형태로 가장 먼저 바뀐 사례는 아기태실로 조성된 세조태실이다.

35) 중동석과 개첨석이 분리 제작된 사례는 세조태실 이후 문종태실 에서 처음 확인된다. 태종태실과 세종태실은 기록만 남아 있어 분리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36) 아기태실로 조성된 세조태실은 개첨석이 원형이고, 광해군태실에서 는 육각형의 개첨석이 발견되었으나 제작 중 폐기된 석재로 판단된다.

구 분 Ⅰ형식 Ⅱ형식 Ⅲ형식

시 기 14C말∼15C초 15C말∼18C초 18C말∼19C초

특 징

개첨 팔각/옥개

(일부 연화)

팔각/연화

또는 옥개 팔각/옥개

→ 옥개+연화 중동 팔각/무문 원형/무문 원형/연환+만자 사방 2단/팔각

/무문 1단/사각

/연엽 → 무문 1단/팔각 /유문

사 례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사천) 세조, 성종, 인종, 명종, 예종, 경종, 영조

장조, 정조, 순조, 문조, 헌종

정종태실 성종태실 순조태실

표 2. 태석부 형식 구분 및 특징

도 한다.

37)

상부에는 연봉형의 보주와 연주대가 장식되 는데, 처음 개첨석과 분리되어 제작되다가 일체형으로 바뀐다.

이를 종합해 보면 태석부는 크게 3가지의 형식으로 구분된다. Ⅰ형식은 팔각형 평면의 사방석을 1단 또는 2 단으로 깔고, 그 위에 다시 팔각형 평면의 중동석과 개 첨석을 올려놓았다. 1399년에 가봉된 정종태실부터 1450 년에 가봉된 문종태실까지 이러한 형식을 취하고 있으 며, 복위 후 18세기 초 무렵에 조성된 사천의 단종태실 도 Ⅰ형식으로 분류될 수 있다.

Ⅱ형식은 측면에 연엽 문양을 조각한 정방형 평면의 사방석을 1단 깔고, 그 위에 원형 평면의 중동석과 팔각 평면의 개첨석을 놓은 형식이다. 1471년에 가봉된 성종 태실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며, 초기에 보이던 원통형의 중동석은 1546년에 가봉된 인종태실부터는 계란형으로 바뀌게 되었다. Ⅱ형식 말기인 18세기 초 경종태실과 영 조태실에서는 잠시 사방석 측면에 있던 문양이 사라지 기도 한다.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1438년 아기태실로 조성된 세조태실은 Ⅱ형식의 시발점이 되고 있다.

Ⅲ형식은 사방석의 평면 형태가 다시 팔각형으로 바뀌

37) 심현용은 ‘앞의 책, 2016, 412∼413쪽’에서 개첨석을 분류하는 기준 중 하나로 그 형태에 따라 연화형과 옥개형으로 구분하여 분류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화형으로 분류된 개첨석에도 앙곡과 추녀 등 건축적

표현이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재검토가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7)

어 1단으로 조성되고, 측면에는 연엽문, 만자문, 운문 등 의 문양이 나타나며, 아무 문양이 없던 중동석에도 연환 문, 만자문 등의 문양이 조각되어 있는 형식이다. 1785년 에 가봉된 장조태실부터 가장 늦게 제작된 헌종태실까지 이러한 형식으로 분류될 수 있다.

3-2. 난간부

난간부는 태실 가장자리에 팔각형으로 배치된 석물로 서 보통 주석(柱石), 동자석(童子石), 횡죽석(橫竹石)으로 구성된다.

38)

주석과 동자석은 전석 위에 세워지는데, 전 석 윗면의 구멍에 꽂아 세우기 위해 보통 주석과 동자 석의 아랫면에는 촉을 돌출시켜 깎는다. 단면이 팔각형 인 횡죽석은 주석 좌우로 돌출시킨 부분과 동자석에 의 해 지지되며, 한 변에 1개 또는 2개의 부재로 이루어져 있다.

39)

그림 4. 태조대왕 태실 난간부 입면

정종태실과 세종태실에서는 동자석의 유구나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40)

조선 건국 직후 창건된 태실은 동자석 을 두지 않고 주석만 가지고 횡죽석을 받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자석은 1401년에 가봉된 태종태실에 처음 나타났다가, 1450년에 가봉된 문종태실 이후 주석과 동 자석을 모두 갖춘 방식이 정착되었다.

정종태실 주석의 상부는 연주대 상하에 얇은 띠를 간 략하게 조각하고 그 위에 원형의 보주를 얹었다. 기둥 좌우에는 횡죽석을 받치는 받침대를 돌출시키고 그 아 래에는 대나무 문양을 수직으로 양각하였다. 태종태실의 주석과 동자석에는 특별한 문양이 없다. 주석에는 횡죽 석을 걸치기 위해 기둥 하부를 좌우 방향으로 살짝 돌 출시켰고, 상부는 방형의 보주와 그 아래 띠를 둘렀다.

동자석은 하부가 동자주의 형태이고, 상부는 전후 방향

38) 의궤에 나타난 정식명칭은 ‘蓮葉柱石’, ‘蓮葉童子石’, ‘橫竹石’이다.

39) 태실 규모가 커지는 16세기에는 한 변에 2개, 총 16개의 횡죽석이 설치된다.

40) 18∼19세기에 제작된 세종과 태조의 태실의궤 도설에서도 동자석은 보이지 않는다.

폭을 넓혀 횡죽석을 받치고 있다. 이와 같이 태실 난간 석에 동자석을 두지 않거나 주석 좌우의 돌출 부분이 미 약하고 장식이 단순하며 방형의 보주가 나타나는 특징을 보이는 난간 형식을 Ⅰ형식으로 분류하였는데, 여러 형 식의 태실 난간을 적용해 본 것으로 보인다.

난간이 일정한 형식을 갖춘 모습은 1450년에 가봉된 문종태실에서 처음 나타났으며,

41)

1471년에 가봉된 성 종태실부터 1681년에 가봉된 현종태실까지 약 2세기 동 안 유사한 형식의 난간을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형식을

Ⅱ형식으로 분류하였다. Ⅱ형식의 주석은 기둥 상부에 원형의 보주를 두고, 그 아래에 구슬을 꿴 형태의 연주 대를 둘렀으며, 기둥 중앙에는 수직으로 쌍사를 조각하 였다. 또 기둥 좌우에는 횡죽석을 받치는 돌출부 외에 주석을 안정적으로 세울 수 있도록 하부에도 돌출부가 나타났다. 이전 형식보다 돌출부의 크기는 더 커지고 연엽으로 장식되었으며, 중앙에는 고복형으로 볼록하게 처리하고 그 상하에는 연주대를 조각하였다. 동자석은 주석에서 기둥 부분을 생략한 모습으로 처리되었는데, 상하좌우 모두 대칭이며 주석과 동일한 방식으로 조각 하였다.

Ⅲ형식은 1726년에 가봉된 경종태실부터 보이기 시작 하며, 대체로 Ⅱ형식과 유사하나 더욱 문양이 단순해지 고 일부 장식은 생략되기도 한다. 주석은 원형의 보주 아래에 조각된 연주대가 구슬 형태가 아닌 띠의 형태로 단순하게 되는데, 경종태실에서는 아예 띠조차 보이지 않는다. 문양을 조각하는 기법은 간략해지고 입체감이 적어졌으며, 주석의 좌우 돌출부는 다시 작아졌다. 이러 한 변화에 따라 동자석도 주석과 같이 조각은 단순해지 고 입체감이 줄어들었다. 1801년에 가봉된 정조태실부터 는 동자석이 마치 기둥 위에 주두를 올린 것 같은 모습 으로 바뀌었다.

3-3. 기단부

태석부와 난간부를 받치는 기단부는 전석(磚石)과 상 석(裳石)으로 구성된다. 전석은 태실 외곽에 배치된 석 물로 주석과 동자석을 꽂아 세우기 위한 구멍이 파여 있고, 상석은 전석과 사방석 사이의 공간을 덮는 석물로 사방석의 측면에 파인 홈에 끼워지거나 그 아래에 놓이 기도 한다. 전석과 상석은 각각 우석(隅石)과 면석(面石) 으로 나뉘기도 하는데, 우석은 팔각형의 모서리 부분에 놓이는 석재로 바깥쪽이 V자형으로 뾰족하고, 면석은

41) 문종태실 주석은 사진으로만 확인이 가능하다. (조선의 태실 Ⅰ,

전주이씨대동종약원, 1999, 24쪽)

(8)

우석과 우석 사이에 놓이는 석재로 바깥쪽이 직선의 형 태로 다듬어진다.

Ⅰ형식은 전석을 장대석 형식으로 다듬어서 한 변에 하나의 전석을 배치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주석과 동 자석은 같은 전석 위에 세워지게 된다. 이 형식으로 분 류되는 태실은 태종태실과 세종태실로서 이른 시기에 잠시 나타난 형식이다. 이때 장대석 형식의 전석과 함께 상석이 설치되었는지, 설치되었다면 어떤 형식의 상석이 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43)

Ⅱ형식은 전석을 우석으로만 구성한 형식으로 정종태 실, 단종태실(성주), 성종태실이 이에 해당한다. 정종태실 은 전석의 크기로 미루어 우석으로만 전석이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4)

바깥쪽은 V자형으로 다듬고 안쪽은 직선으로 다듬어 전체적으로는 오각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단종태실(성주) 역시 우석 형식의 전석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정종태실과 달리 동자석이 사 용되었기 때문에 우전석 양 끝에는 동자석을 끼우는 구 멍 흔적이 보이고, 윗면은 일정한 폭만 남기고 나머지는 깎아내어 단차를 두었다. 성종태실은 우석 형식의 전석 과 면석 형식의 상석이 단차 없이 맞대어 설치되었는데,

42) (재)대동문화재연구원, 성주 태종, 단종태실 학술(지표)조사 결과 보고서, 2012, 32·35쪽

43) 태종태실에서는 상석 유구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세종태실에서는 우상석과 면상석이 보이긴 하나 1419년 가봉 당시에 설치된 석물인지, 아니면 1601년 개수 때 설치된 석물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44) 정종태실은 현존하는 우전석으로 미루어 한 변 1,260mm, 태실 지 름(내경) 3m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상석은 사방석 측면의 파인 홈에 끼워져 있다. 성종태실 역시 단종태실(성주)과 같이 면전석 없이 동자석을 설치 하였기 때문에 우전석 사이에 판 구멍에 끼워져 구조적 으로 불리한 모습을 보인다.

Ⅲ형식은 전석과 상석이 각각 우석과 면석으로 분리 되어 구성된 형식이다. 1507년에 가봉된 중종태실에서 처음 전석이 우석과 면석으로 분리된 것이 확인된다. 면 석 형식의 전석, 즉 면전석은 동자석을 좀 더 안정적으 로 세울 수 있고, 태실 규모가 커질 경우 전석을 우석과 면석으로 분리함으로써 부재 크기를 줄일 수 있다.

45)

다 만 전석 안쪽을 다듬어 상석과 맞댈 수 있도록 한 것은 이전 형식을 따른 것이다. 1546년에 가봉된 인종태실에 서는 전석뿐만 아니라 상석도 우석과 면석으로 분리된 것이 처음 확인된다. 그러나 인종태실은 중종태실과 달 리 전석 안쪽을 다듬지 않고 상석을 그 위에 겹쳐 깔아 전석과 상석 사이에 단차를 둔 점이 다르다. 이후 태실 은 인종태실의 형식을 따라 전석과 상석을 우석과 면석 으로 나누고 전선과 상석을 겹쳐 단차를 두었는데, 후에 는 전석의 폭이 점점 커져서 상석과 겹쳐지는 부분이 넓 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상석은 Ⅱ형식과 같이 사방 석 측면의 홈에 끼워 넣었다가 경종태실 이후에는 상석 위에 사방석을 올리는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46)

45) 중종태실은 태실 지름(내경)이 5.3m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46) 인종태실은 예외적으로 사방석 하단에 장대석을 두르고 여기에 상 석을 맞대어 설치하였다.

47) (재)대동문화재연구원, 앞의 책, 2012, 35쪽

구 분 Ⅰ 형 식 Ⅱ 형 식 Ⅲ 형 식

시 기 14C말 ∼ 15C초 15C중 ∼ 18C말 18C초 ∼ 19C초

특징

주석 돌출부 小, 구슬 연주대 돌출부 大, 구슬 연주대 돌출부 小, 띠 연주대

동자석 동자석 無 / 동자주형 대칭형 / 구슬 연주대 대칭형 → 동자주형

횡죽석 1개 1개 → 2개 1개

사 례

정종, 태종, 세종(가봉) 문종, 성종, 중종, 인종, 명종,

예종, 현종, 장조 경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

정종태실 주석 태종태실 주석

및 동자석

42)

성종태실 주석 인종태실 동자석 경종태실 주석 정조태실 주석 영조태실

동자석 순조태실

동자석

표 3. 난간부 형식 구분 및 특징

(9)

4. 태조태실의 형식과 특성

4-1. 형식

(1) 태석부

현재 태조태실의 태석부는 한 부재로 제작된 중동석 과 개첨석이 남아 있으며, 사방석은 유실되어 1993년 현 위치로 복원될 때 제작되었다. 개첨석 상부의 보주 역시 유실되었는데, 개첨석과 별도로 제작되어 꽂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동석은 팔각형의 평면 형태이며, 하 부보다 상부가 커서 역사다리꼴의 입면 형태를 보이고 있다. 개첨석의 평면 형태 역시 팔각형이며, 지붕곡은 기 와지붕과 달리 볼록한 형태이다. 앙곡의 지붕선, 지붕마 루, 추녀 등 옥개형의 요소가 보이고, 상부에는 보주를 꽂았던 구멍이 있다.

태조태실의 태석부는 Ⅰ형식인 정종태실, 태종태실, 세종태실, 문종태실 등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며,

49)

대체 로 15세기 중엽까지 이러한 태석부가 사용된 것으로 보 인다. Ⅰ형식에서 보이는 사방석의 공통된 모습은 2단의

48) (재)대동문화재연구원, 위의 책, 2012, 59쪽

49) 현재까지 보존된 것은 정종태실이 유일하다. 태종태실은 胎封(李 王職 編, 1928)에 스케치와 실측치가 기록되어 있고, 세종태실은 ‘신라오 악종합학술조사단, 앞의 글, 1967.8, 323∼325쪽’에 사진과 기록이 있다.

문종태실은 발굴조사에서 개첨석 파편 일부만 출토되었다. (박광열·김동 숙·김희철, 앞의 책, 2014, 47~49쪽)

태조태실

태종태실

50)

정종태실 세종태실

51)

그림 5. 태석부 비교

50) 李王職 編, 앞의 책, 1928, 75쪽

51) 신라오악종합학술조사단, 앞의 글, 1967.8, 324쪽

구 분 Ⅰ 형 식 Ⅱ 형 식 Ⅲ 형 식

시 기 15C초 14C말 ∼ 15C후 16C전 ∼ 19C전

특징

전석 장대석 우석 우석 + 면석

상석 미상 면석 우석 + 면석

단수 미상 1단 2단

사 례

태종, 세종 정종, 단종(성주), 성종 중종, 인종, 명종, 경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 헌종

태종태실 전석

47)

단종태실 전석

48)

중종태실 전석 명종태실 전석, 상석

세종태실 전석 성종태실 전석, 상석 인종태실 전석, 상석 경종태실 전석

표 4. 기단부 형식 구분 및 특성

(10)

팔각형 평면이라는 점인데, 유실된 태조태실의 사방석 역시 같은 형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첨석 상부의 보주는 연봉형으로 태종태실과 세종태실의 형태가 유사 한데, 태조태실 역시 유사한 형태일 것으로 추정된다.

태조태실의 태석부 형식은 15세기 중엽까지 나타나는 초기 형식으로서 1393년에 가봉되었을 당시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다만 1866년에 작성된 의궤에서는 Ⅲ형식으로 묘사되어 주목된다.

(2) 난간부

태조태실의 난간부는 동자석 없이 주석과 횡죽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1993년 복원시 유실된 주석 1개와 횡죽 석 8개가 신재로 교체되었다. 주석은 원형의 보주가 있 고 띠로 된 연주대 위아래에 앙련과 복련이 방형 형태로 조각되었으나 문양은 없다. 기둥 좌우 돌출부가 비교적 큰 편이나 연주대가 띠로 조각되어 있고 앙련과 복련은 간략하게 조각되었다.

동자석이 없는 점에 주목한다면 Ⅰ형식으로 분류될 수 있지만, 주석 좌우의 돌출부가 큰 특징은 Ⅱ형식과 유사하고 연주대를 띠로 간략하게 조각한 세부적인 특징 은 Ⅲ형식과 가깝다. 이렇게 혼재된 형식이 나타나게 된 것은 주석이 개수된 1689년 당시의 상황이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는 난간부가 Ⅱ형식에서 Ⅲ형식 으로 변화하는 과도기로서, 기둥 좌우의 돌출부가 크고 고복형과 연엽형 등의 문양을 넣는 방식은 예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단순한 조각 기법은 새로운 경향을 반영한 것이다. 아울러 동자석이 없는 가봉 당시의 형식도 그대 로 유지하면서 Ⅰ형식의 특징까지 나타나고 있다.

태조태실 인종태실(Ⅱ형식) 순조태실(Ⅲ형식)

그림 6. 난간부 비교

(3) 기단부

태조태실의 전석은 우석 8개, 상석은 면석 8개로 구성 되어 있다. 전석은 태봉등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1689 년 개수 공사 때 교체된 것으로 보이고,

52)

상석은 언제

52) 태봉등록, 기사(1698, 숙종15) 윤3월 초5일 기사

제작된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1725년 태봉등록 기 사에 ‘상석 8개’라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53)

1866년에 작성된 태조태실 의궤의 도설에서도 ‘우전석’과 ‘상석’의 그림만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의궤가 작성된 시기에도 현재와 같은 모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태조태실

성종태실

54)

인종태실

55)

그림 7. 기단부 비교

전석과 상석이 우석과 면석으로 구분되는 시기는 16 세기 이후인데, 이러한 형식을 앞에서 Ⅲ형식으로 구분 하였다. 전석이 우석과 면석으로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1507년에 가봉된 중종태실이고, 상석이 우석과 면석으로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1546년에 가봉된 인종태실이다.

태조태실은 이러한 형식 이전에 보이는 Ⅱ형식으로서 우 전석과 면상석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Ⅱ형식인 성종태실의 경우, 전석과 상석을 단차 없이 한 단으로 구성하고 있는데 반해, 태조태실은 후대에 보이는 태실 과 같이 전석과 상석을 겹쳐 쌓아 2단으로 처리하는 방 식, 즉 Ⅲ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렇게 Ⅱ형식과 Ⅲ형식이 혼재되어 나타나는 것은 가 봉 때 만들어진 Ⅱ형식의 기단부를 1689년에 개수하면서 당시의 형식인 Ⅲ형식 요소를 가미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로 추측된다.

53) 태봉등록, 을사(1725, 영조 1) 2월 27일 기사 54) 심현용, 앞의 책, 2016, 230쪽

55)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인종태실 발굴조사보고서, 경상북도 문화

재연구원·영천시, 1999, 31쪽

(11)

4-2. 특성

태조태실은 1393년경 가봉하였다가 1689년 개수 공사 를 거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가봉 당시의 형 식도 일부 유지하면서 14세기 말과 17세기 말의 양식이 혼재되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사방석은 유실되었지만 일체형으로 만들어진 개첨석과 중동석의 형식으로 미루어 태석부는 가봉 당시의 석물로 판단된다. 태조태실의 태석부 형식은 15세기 전반까지 유 지되는데, 이러한 형식은 고려 왕실의 태석부 형식과 밀 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국 직후 태조태실 이 가봉되면서 조선의 독자적 양식이 발현되기는 시기적 으로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태조태실은 조선 초기에 보이는 태석부의 형식을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 려볼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구 분 태 석 부 난 간 부 기 단 부

시 기 1393년(가봉) 1689년(개수) 1689년(개수) 또는 이전

특 징

【개첨석】 팔각/옥개 【주석】 돌출부大

【주석】 /띠연주대 【전석】 우석

【중동석】 팔각/무문 【동자석】 동자석無 【상석】 면석

【사방석】 유실 【횡죽석】 1개(유실) 【단수】 2단 형 식 태석Ⅰ형식 난간Ⅰ형식 +

난간Ⅱ·Ⅲ과도기 기단Ⅱ형식 + 기단Ⅲ형식 표 5. 태조태실의 형식과 특성

난간부는 구성에 있어서 동자석이 없는 조선 초기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주석의 형식은 Ⅱ형식과 Ⅲ형식의 과 도기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1689년 개수 당시의 시 대적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다른 태실 의 주석과 달리 보주 아래 방형의 앙련과 복련이 보이는 데, 이러한 주석 형식은 정종태실에서 처음 조짐이 보이 다가 문종태실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후 중종태실, 세종태실(1601년 개수), 장조태실 외에는 사용 되지 않으면서 비주류 형식이 되고 말았다. 앙련과 복련 조각의 주석은 태실보다 왕릉에서 일찍, 그리고 보편적으 로 나타났기 때문에 왕릉 형식이 태실로 유입된 것으로 보이며, 왕릉과 태실의 위계 관계가 정립된 이후에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퇴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태 조태실의 주석에서 보이는 앙련과 복련의 조각은 태실 형식이 정립되기 전에 여러 형식이 시도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짐작된다.

56)

56) 다른 사례보다 늦게 18세기 후반에 조성된 장조태실은 정조가 부 친인 사도세자의 태실을 사후에 가봉한 것이다. 당시의 정치 상황과

기단부는 우전석과 면상석으로만 구성되었으며, 이러한 형식은 15세기까지만 나타나는 초기 형식이다. 우전석 자 체는 1689년 개수시 교체된 것이지만 예전 형식을 따라 우석으로만 전석을 구성하였다. 또 현존하는 상석은 언제 제작된 석물인지 확인되지 않지만 개수 이전에 이미 설 치되었던 석물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2단으로 전석과 상 석을 겹치게 쌓은 것은 개수 당시의 형식을 반영한 결과 로 후대의 형식을 보이고 있다.

개첨석 및 중동석 (1393년경)

*한 부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팔각형 평면

연엽주석(1689년)

*동자석 없이 연엽주석만으로 구성

전석(1689년)

*우석 8개로 구성 상석

(1689년 또는 이전)

*면석 8개로 구성

그림 8. 태조태실의 조영 시기 및 특징

5. 결 론

충남 금산군에 위치한 태조대왕 태실은 1393년경 조영 된 조선 최초의 가봉태실로서 1584년에 표석을 건립하고 1689년에 개수 공사가 이루어진 후 큰 변화 없이 유지·관 리되어 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크게 훼손되었 고, 1993년에 흩어진 부재를 겨우 수습하여 현 위치에 복 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태조태실이 조선 최초의 가봉 태실임에도 관련 유구와 사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지금 까지 보다 면밀한 조사연구가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에 본 연구는 전국에 분포한 조선시대 가봉태실 25개를 대 상으로 비교·분석하여 태조태실의 형식과 특성을 파악하

정조와 사도세자라는 특수한 관계가 태실의 격식을 좀 더 높이려고 한

배경이 아닌가 짐작된다.

(12)

고자 하였다. 이러한 연구 과정에서 얻어진 결과를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태석부 중에서 사방석 등 일부 부재가 유실되었 으나, 남아 있는 개첨석과 중동석으로 미루어 1393년경 가봉시 조영된 석물로 추정된다. 1689년 개수 공사 때 예전 석물을 그대로 사용하였다는 기록과 더불어 다른 태실의 태석부와 비교하여 보았을 때도 15세기 전반기 까지 사용된 고식으로 판단된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는 정종태실이 유일하다.

둘째. 난간부는 동자석 없이 주석과 횡죽석으로만 구성 되어 있는데, 동자석 없이 난간부를 구성한 형식은 정종 태실과 세종태실과 같이 15세기 초까지만 나타나는 매우 드문 형식으로 1689년 개수 공사를 하면서 가봉 당시의 예전 규범을 그대로 유지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 1689년 개수 공사시 제작된 주석은 신구 양식이 혼재되어 나타 나고 있어 당시의 과도기적 양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 로 여겨진다.

셋째. 기단부 중 전석은 1689년에 제작된 석물로 기록 되어 있으나, 상석의 제작 연대는 1689년 또는 그 이전 으로 볼 수 있다. 면전석과 우상석 없이 우전석과 면상 석만으로 구성된 방식은 15세기까지만 나타나는 고식으 로, 개수 공사가 이루어진 17세기 말의 경향을 따르고 있지 않다. 태조태실과 같이 우전석 8개, 면상석 8개로만 이루어진 사례는 남아 있지 않다.

이상에서와 같이 태조태실은 17세기 말에 크게 중수되 었음에도 일부 부재를 제외하고 조선 초기의 형식을 대부 분 유지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판단 된다. 또 조선 건국 직후 최초로 가봉된 태실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앞으로 태실을 연구하는 데 있어 태조태실의 형식과 특징은 편년 설정의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을 것 으로 기대되며, 1584년 건립되고 1689년 개수된 가봉태실 비에 대한 후속 연구가 이루어지면 조선시대 태실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보다 활발하게 진행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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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2017. 10. 15) 수정(1차: 2017. 11. 27) 게재확정(2017. 11. 28)

수치

그림 3. 태조대왕 태실 태석부 이후에는 1단으로 구성된 사각형 평면의 사방석이 나타 나면서 측면에 연엽 문양을 새긴 형식이 숙종대까지 이 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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