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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開土太王陵碑文 辛卯年條에 대한 新解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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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廣開土太王陵碑文 辛卯年條에 대한 新解釋

47)

백 승 옥*

❙국문초록❙

그 동안 광개토태왕릉비문 속의 이른바 신묘년조 기사는 비에 관한 여러 연구분야 가운데 가장 주목받았던 곳이다

.

신묘년조 기사란 비문

1

면의 제

8

34

자부터

9

24

자까지를 말한다

(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 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

이 기사는 비문

1775

자 가운데

32

자에 불과하지만 이를 어떻게 해 석하느냐에 따라 당시 동북아 각국의 역사적 위상이 달라질 수 있다

.

광개토태왕릉비는 장수왕이

414

년에 先王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

이 비가 다시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은

19

세기 말이었다

.

비 발견 이후

,

비는 이끼를 제거하는 과정과 탁본을 만들기 위해 비면에 바른 석회 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상당 부분 잃어 버렸다

.

따라서 원래의 글자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것은 석회를 바르기 이전에 만들어진 탁본들이다

.

신묘년조 기사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글자는

1

9

번째 줄

13

번째 글자이다

.

이 글자에 대하여 기존에는 대개

로 읽었다

.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석회를 바르기 이전의 여러 탁본 자료를 비교 검토한 후

,

이 글자는

로 읽을 수 없음을 밝혔다

.

그리고 이를

字로 읽었다

. ‘

의 뜻은

넓은 강

의 의미이다

.

이는 비문의 또 다른 곳에서는

阿利水

로 표현하였으며 오늘날의 漢江이다

.

이를 감안하여 신묘년조에 대한 해석을 다음과 같 이 하였다

.

百殘

(

백제

)

과 新羅는 오래전부터

(

우리 고구려의

)

屬民이었다

.

그래서 朝貢을 바쳐왔다

.

그런데 倭가 辛卯 年에

(

우리 속민의 땅에 침범해

)

오므로

, (

광개토태왕이

)

沺을 건너 백잔을 치고 신라를 □□하여 臣民으로 삼 았다

.”

[

주제어

]

광개토태왕릉비

,

신묘년조

, 1-9-13

,

전치문설

,

혜정본

,

청명본

,

수곡본

❙목 차❙

.

머리말

.

신묘년조에 대한 新解釋

.

맺음말

*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 / haman100@hanmail.net

(2)

Ⅰ. 머리말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

이하 광개토태왕으로 줄여 씀

)

의 陵碑文 가운데 이른바 신묘년조 기사는 비문 이 가지는 그 동안의 諸 연구분야 가운데 가장 주목받았던 곳이다

.

이 기사는 능비문

1775

자 가운데

32

자에 불과하지만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당시 동북아 각국의 위상은 달라질 수 있다

.

능비는 장수왕이 先王 崩御 후

3

년 상을 마치는 시기에 父王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

서기 연 도로는

414

년이다

.

이 비가 다시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은

19

세기 말이었다

.

능비는 수풀과 이끼로 뒤덮인 채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

발견자는 이 지역에 설치된 懷仁縣의 설치위원 章樾의 부하인 關月山으로 알려 져 있다

.

書藝에 관심이 많았던 관월산은 비 발견 후 몇 문자를 탁본하고

,

그 다음해는 天津에서 탁공을 불러 墨水廓塡本을 만들었다

.

그 후 탁본은 계속되었고

1883

년 일본 육군 장교인 酒匂景信에 의해 일본에까지 전 해지게 된다

.

이 시기 일본은 식민지 개척을 위한 한반도 침략을 준비 중에 있었다

.

자료는 어떠한 목적과 시각을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달리 보일 수 있다

.

비 발견 직후의 시대 상황은 비문의 내용을 애초 비를 세운 목적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활용하게 만들었다

.

일본 제국주의의 한 반도 및 대륙침략의 명분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역사 자료로써 이용되어 졌던 것이다

.

일본학계와 교육계에서는 지금도 능비문의 내용을 일본 고대국가 성립과 관련하여 그를 뒷받침하는 유력 한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

그리고 동아시아 전체사적 시각이라는 이름하에 대륙과 열도세력의 대립이라는

2

분법적 시각은 여전히 능비를 보는 유력한 시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

이러한 시각으로는 한 반도의 역사

,

나아가 동북아 전체 역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

백제와 신라

,

가야의 역사는 틈새 역사로 전락하게 되며

,

주변 강국의 역사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다

.

실상을 바로 보는 방법은 역시 능비문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

그런데 현재의 碑는 그 원 모습을 많이 잃은 채 존재한다

.

碑보다는 오히려 석회가 발리기 이전에 탁출된 이른바 초기원석탁본을 주목해야 한다

.

원상의 파악은 믿을만한 탁본을 바탕으로 한 釋讀이 전제 조건이다

.

신묘년조 기사에 주목한 이유는 핵심이 이 기사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신묘년조 기사란 비문

1

면 의 제

8

34

자부터

9

24

자까지를 말한다

.

이 기사는 아니지만

,

신묘년이라는 기년명이 나오기 때문에 일 반적으로 그렇게 이름하고 있다

.

Ⅱ. 신묘년조에 대한 新解釋

1. 기존의 解釋과 前置文說

(a)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b)

而倭以辛卯年來

(c)

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3)

신묘년조 기사는 그 명성만큼이나 그 동안의 연구 성과 또한 대단한 것이어서 구구의 설이 있다

.

1) 이 구 절은 釋讀도 일치하고 있지 않다

.

-9-2

(

1

9

행 두번째 글자를 말한다

.

이하 같다

.)

에 대해 대부분

로 석독하나

,

金永萬2)과 徐榮 洙3)

로 석독하고 있다

.

-9-6

자에 대해 대부분

로 석독하나

,

李亨求

·

朴魯姬는 비문 변조설의 입장 에서

로 석독하고 있다

.

이들은 Ⅰ

-9-11

자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 보는

대신

로 석독하고

,

-9-12

자는

대신

으로 석독하여 왜가 신묘년에 조공을 바치지 않아 고구려가 백제 등을 격파하는 것으로 해 석했다

.

4)

-9-12

자에 대해서 김영만은

으로 석독했다

.

5)

-9-13

자에 대해서는 옛 일본학계에서는

로 읽어 왔으나

,

水谷悌二郞6)과 武田幸男7)

,

任世權

·

李宇泰8)는 모르는 글자로 처리했다

.

북한학계의 손영종은 이를

浿

로 석독하고 있다

.

9)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살펴 볼 것이다

.

-9-14

자는 보통

로 석독되었으나 천관우는 이를

로 석독했다

.

10)

-9-17

자에 대해서는 석독되지 않은 글자로 보아왔으나 조 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편 󰡔조선유적유물도감󰡕11)과 손영종12) 등은

으로 석독하였으며

,

최근 이용현 도

으로 보았다

.

13) 중국의 탁공 初均德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른바 手抄本에도

으로 적혀 있다

.

그러나 아직 확정할 정도의 획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

-9-19

자는 석독되지 않은 자로 처리해 왔으나

,

그 右旁에

부분이 남아 있음이 확인되어

으로 석독함이 최근의 추세이다

.

신묘년조 해석에는

(a)

부분은

백제와 신라는 옛날부터

(

우리 고구려의

)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다

로 해석하 여 대다수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지만

, (b)

이하에 대해서는 백인백색의 해석으로 엇갈린다

.

비문 변조설을 제 외하면 이를 크게

2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

첫째는 菅政友14)

,

那珂通世15)

,

三宅米吉16)이후 일본학계의 정설로 볼 수 있는 것으로서

,

몇 단계의 변화

1) 전반적 연구사의 정리는 李基東, 「硏究의 現況과 問題點」, 󰡔韓國史 市民講座󰡕3, 一潮閣, 1989; 武田幸男, 󰡔高句麗史と東ア ジア ‒ 「廣開土王碑」硏究序說󰡕, 岩波書店, 東京, 1989. 특히 신묘년조 기사의 정리는 徐榮洙, 「‘辛卯年記事’의 변상과 원상」,

󰡔廣開土好太王碑硏究 100年(中)󰡕, (社團法人)高句麗硏究會, 제2회 高句麗國際學術大會 발표요지, 1996의 논문이 참고된다. 2) 金永萬, 「광개토왕릉비의 新硏究(Ⅰ)」, 󰡔신라가야연구󰡕 11, 1980.

3) 徐榮洙, 앞 논문, 1996, 45쪽.

4) 李亨求·朴魯姬, 󰡔廣開土大王陵碑文의 新硏究󰡕, 동화출판공사, 1986.

5) 김영만, 위 논문, 1980.

6) 水谷悌二郞, 「好太王碑考」, 󰡔書品󰡕 100號, 1959.

7) 武田幸男, 앞의 책, 1988.

8) 任世權·李宇泰 編著, 󰡔韓國金石文集成(1)󰡕, 韓國國學振興院, 2002.

9) 손영종, 「광개토왕릉비 왜관계기사의 옳바른 해석을 위하여」, 󰡔력사과학󰡕126호,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사회과학출판 사, 평양, 1988; 󰡔광개토왕릉비문 연구󰡕, 도서출판 중심, 서울, 2001.

10) 千寬宇, 「廣開土王陵碑再論」, 󰡔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79.

11)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조선유적유물도감󰡕4, 1990.

12) 손영종, 앞의 책, 2001.

13) 이용현, 「廣開土王碑에서 묘사된 倭의 모습」, 동양고고학연구소 주관 광개토대왕비건립 1600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자료집, 2014.

14) 菅政友, 「高麗好太王碑銘考」, 󰡔史學會雜誌󰡕 第22号~25号, 東京: 史學會, 1891, 35~39쪽. 15) 那珂通世, 「高句麗古碑考」, 󰡔史學雜誌󰡕 第47号~49号, 東京: 史學會, 1893, 22~26쪽.

16) 三宅米吉, 「高麗古碑考」, 󰡔考古學會雜誌󰡕 第2編 第1~3号, 東京: 日本考古學會, 1898; 「高麗古碑考追加」, 󰡔考古學會雜誌󰡕

第2編 第5号, 東京: 日本考古學會, 1898, 43~45쪽.

(4)

를 거쳐 현재는

百殘과 新羅는 원래 고구려왕의 屬民이고 由來朝貢하고 있었다

.

그런데 倭는 辛卯年부터 以 來

(

이 時代

),

바다를 건너와서 百殘을 격파하고

,

新羅를 □□하여

,

臣民으로 삼아 버렸다

.

17)

로 해석하는 경 우이다

.

伏字의 補入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는 있으나

(b)

이하의 주어를 모두 왜로 본다는 점이 동일한 특색 이다

.

那珂通世는

(c)

의 결자부분을 任那 또는 加羅로 추정하여 왜가 백제

·

가라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 은 것으로 해석하였다

.

18) 이러한 해석은 학계에서의 논의 상황과는 관계없이

100

여 년 동안이나 일본 고등 학교 역사 교과서에 실려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對韓半島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이는 당시

(1880~90

년대

)

일본 정부의 정치적 의도와도 부합되어 있었다

.

19) 那珂와 해석의 차이는 있지만

,

-9-17~20

자를

任那加羅

로 읽은 경우도 있다

.

20)

그런데 원석탁본을 포함해 여러 탁본을 보면 Ⅰ

-9-19

자의 방부분에는

이 확인된다

.

따라서

任那加羅

로 추정한 설은 성립할 수 없다

.

그리고 百殘을 殘國으로 약칭한 예는 있지만

,

약칭의 경우도 처음 나오는 경우에는 온전히

(Full Name)

쓰고 있음을 볼 때 뒤쪽에서 임나가라로 나오기 때문에 Ⅰ

-9-17, 18

자가 임나 가라의 약칭으로 보는

가라

또는

임나

일 가능성은 낮다

.

둘째는 鄭寅普 이후 한국학계와 북한학계 등의 해석이다

.

이 유형의 특징은

(c)

의 주어를 고구려로 본다는 점이다

.

정인보의 해석은 이미

1938

년 무렵 쓰여진 것이었으나 발표되지 않고 있다가

1955

년 후학들에 의해 발표되었던 것이다

.

21) 설의 요지는 倭가 신묘년

(391

)

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 등을 격파하고 이들을 臣民으 로 삼았다는 기존의 해석과는 달리

,

행동의 주체를 倭가 아닌 高句麗로 보는 것이다

.

이러한

신묘년조 고구 려 주체설

은 이후 한국학계의 주류적 위치를 점하게 되며

,

북한학계에서도 수용된다

.

신묘년조의 성격과 해석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주장은 이른바

(

)

前置文說이다

.

濱田耕策은 비문에서 광 개토왕의 대외 정벌 가운데 왕의 親征을 표시하는

王躬率

의 경우는 연호

+

간지와 본문 사이에 왕의 친정 이 유를 설명하는 전치문이 놓이고

, ‘

敎遣

인 경우에는 연호

+

간지 다음에 바로 본문이 나온다고 하였다

.

이는 전 정토기사를 통틀어 예외는 없고 더욱이 전치문이 놓이는 경우는 고구려에 일시적으로 불리한 내용이 기술되 어 있고 그것을 고구려군이 타파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

신묘년조의 기사도 이러한 전치문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

따라서 이 구절 역시 광개토왕

(

)

의 토벌을 전제로 고구려가 일시 불리한 상황이었음을 기술한 다음

,

그러한 상황을 역전시키는 구조로 기술되어 있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

나아가 역사적 사실은 다

17) 鈴木靖民, 「日本에서의 廣開土王碑 拓本과 碑文 硏究」, 󰡔廣開土好太王碑硏究 100年(上)󰡕, (社團法人)高句麗硏究會, 제2회 高句麗國際學術大會 발표요지, 1996, 12쪽.

18) 那珂通世, 「앞 논문」, 22~26쪽. 이는 이후 末松保和, 󰡔任那興亡史󰡕, 大八洲出版社, 東京, 1949에 의해 정리된다. 19) 박시형과 김석형의 비판이 있은 후 일본 내에서도 자성의 글이 있다. 中塚明, 「近代日本史學史における朝鮮問題 ‒ とくに‘廣

開土王陵碑’をめぐって」, 󰡔思想󰡕 561, 東京, 1971; 佐伯有淸, 「高句麗廣開土王陵碑文再檢討のだめの序章 ‒ 參謀本部と朝鮮 硏究-」, 󰡔日本歷史󰡕, 1972年 4月號.

20) 李丙燾, 󰡔韓國史󰡕 고대편, 을유문화사, 1959; 金瑛河, 「廣開土王碑와 倭」, 󰡔弘益史學󰡕 창간호, 1984; 金瑛河, 「廣開土大王 陵碑의 정복기사 해석 ‒ 신묘년기사의 재검토와 관련하여 ‒」, 󰡔韓國古代史硏究󰡕 66, 2012.

21) 鄭寅普,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 󰡔용재백낙준박사환갑기념국학논총󰡕, 1955(󰡔薝園文錄󰡕, 1967에 재수록); 「廣開 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 󰡔薝園國學散藁󰡕, 文敎社, 1955.

(5)

르다 하더라도 기존 일본학계의 신묘년조 기사 해석은 올바르다고 보는 것이다

.

이러한 전치문 구조설은 이미 末松保和가 언급한 바 있고

,

22) 前澤和之는

揷入文

이라는 이름으로 제기한 바 있는데

,

23) 濱田耕策가 이를 보다 정밀히 논증하여 정리한 것이다

.

24) 이에 더 나아가 濱田과 武田幸男25) 은 신묘년조 기사는 영락

6

년조 광개토왕의 백제 토벌의 전제문 일뿐 아니라

6

년 이후의 기사에 대한 전치 문

,

즉 大前置文이라고 하여 이른바 대전치문설을 정착시켰다

.

,

다른 기사들의 전치문은 연호 다음에 오는 데 신묘년조 기사가 영락

5

년과

6

년 사이에 온 것은 대전치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이러한 전치문설에 입 각하는 한 왜는 트릭스타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

26)

일본에서는 이러한 전치문설이 이미 鐵案으로 고착된 것으로 보인다

.

전치문설이 발표 주장된지

40

여 년 이 되었지만

,

한국

(

북한 포함

)

학계에서는 손영종과27) 김태식의28) 부분적 비판 외에는 그동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

그런데 최근 이를 지지하는 발표가 있었다

.

이용현은 전치문설에 입각한 신묘년조의 해석에 동조하 면서 倭의 위력에 대해서는 실제 이상으로 과장된 것으로 보았다

.

29) 국내학자로서 공식적인 석상에서 처음 으로 전치문설의 수용을 주장한 것이다

.

전치문설에서는 倭의 위상이 과장된 것으로 보고 있다

.

이는 비문을 통해 남선경영설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

이 점에서는 사실의 시비 여부를 떠나 전치문설은 그동안 신묘년조의 논란에 대한 절묘 한 타협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

그리고 일본 고대사학계 측에서 보면 많은 성과도 이루었다고 보인다

.

,

능비문의 내용을 통해

, 4~5

세기 대 고구려에 비견할 만한 倭의 실체 입증이라는 수확이다

.

또한

1945

년 이

70~80

년대 일본 고대사학계의 새로운 지향인

동북아 속에서의 일본

이라는 실체 찾기의 의도에 부합하는

것이다

.

일본 사학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것만으로도 전치문설에 입각한 능비문의 이해 방식은 중요한 성 과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

전치문이 전쟁의 명분을 설정하는 문장임에는 틀림없으나 신묘년조 전체가

(

)

전치문으로 보는 점에는 몇 가지 의문이 있다

.

영락

9

년조로 보아 倭는 백제와 和通하는 존재이다

.

화통이란 대등한 상대끼리의 협력 이나 협약을 말하는 것이지 臣民의 대상에게 적용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

그리고 비문에

11

회 보이는 民 의 용례를 분석해 보면 이는 모두 고구려의 民만 있을 뿐이다

.

30) 다른 나라의 백성을 民으로 표시한 사례는 없다

.

이러한 점만 보더라도 전치문설은 검토의 여지가 있다

.

22) 末松保和, 앞의 책, 1949.

23) 前澤和之, 「廣開土王陵碑をめぐる二·三の問題」, 󰡔續日本記硏究󰡕 159, 1972, 16~17쪽.

24) 濱田耕策, 「高句麗廣開土王陵碑文の虛像と實像」, 󰡔日本歷史󰡕304, 1973; 濱田耕策, 「高句麗廣開土王陵碑文の硏究」, 󰡔朝鮮 史硏究會論文集󰡕11, 1974.

25) 武田幸男, 「四~五世紀の朝鮮諸國」, 󰡔シンポジウム 好太王碑 ‒ 四·五世紀の東アジアと日本 ‒󰡕, 東方書店, 東京, 1985, 124~

140쪽; 武田辛男, 「辛卯年條記事の再吟味」, 앞의 책, 1989, 152~186쪽.

26) 李成市, 「表象としての廣開土王碑文」, 󰡔思想󰡕842, 1994; 이성시 지음·박경희 옮김, 「표상으로서의 광개토왕비문」, 󰡔만들 어진 고대 ‒ 근대 국민 국가의 동아시아 이야기 ‒󰡕, 도서출판 삼인, 2001.

27) 손영종, 앞 논문, 34쪽.

28) 김태식, 「4세기의 한일관계 개관」, 󰡔광개토대왕비와 한일관계󰡕, 景仁文化社, 2005.

29) 이용현, 앞의 글, 2014.

30) 김태식, 앞의 논문, 2005, 8쪽.

(6)

2. 1-9-13字의 釋讀

신묘년조의 해석에 앞서 역시 중요한 것은 석독이다

.

특히 왜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글자는 Ⅰ

-9-13

字 이다

.

이 자에 대한 석독은 그동안 대부분

자로 읽어왔다

.

그러나 다른 자로 읽을 만한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

그만큼 이 글자는 불명확한 상태로 존재해 왔다

.

字 외에

, ‘

浿

31)로 읽거나

, ‘

’,

32)

33)로 읽어 왔다

.

또는 이를 모르는 글자로 처리하기도 하였다

.

34) 서영수는 비문의 변조를 근거로

으로 읽기도 하였다

.

35) 최근 이진희의 비문 변조설은 그 근거를 잃었다고 볼 수 있다

.

그러나 일본 육군본부에 의한 의도적 변조는 아니라 해도 탁본 의뢰자의 요구 또는 탁출 작업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한 탁공의 의도에 의한 글자 왜곡은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

.

그 예가 初氏 일가가 대본으 로 쓰던 手抄本 속의

のち

라는 일본문자이다

.

이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은 석회 도포 이전의 초기원석탁본 을 자료로 활용하는 것이다

.

비가 현존함으로 비를 직접 확인하는 방법이 유용하며 탁본자료는 별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오산 이다

.

현존하는 비는 원래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

발견 초 이끼를 제거하 기 위한 작업 과정에서 비는

1

차적으로 火難를 입었다

. 2

차적으로는 선명한 글자의 탁출 또는 탁출작업의 편 리를 위한 석회도포로 인해 원 모습을 잃었다

. 3

차적으로는

1980

년대 이전의 어느 시기

(1960

년대 초로 추정 함

)

에 행한 중국 정부의 보존처리 잘못으로 인해 석회가 잔존된 상태로 고착되었다

.

원석과 석회가 왜곡된 상태로 굳어져 남아 있는 것이다

.

따라서 원비를 관찰할 때는 이러한 비의 상황을 감안하여야 할 것이다

.

이러한 상태에서 비문의 원래 글자를 알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자료는 초기원석탁본이라 할 수 있다

.

그러 나 현 상태의 碑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

원비에서 각 글자가 차지하고 있는 위 치 파악은 석독에 유용할 수 있다

.

아래에서는 초기원석탁본이 확실한 자료들을 동원하여 Ⅰ

-9-13

자에 대한 석독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

그리고

2002

년과

2005

년에 촬영한 사진자료도 아울러 활용하고자 한다

.

1-9-13

자의 석독은 매우 중요하다

.

먼저 이 글자가 海字인지 아닌지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

만약 이 글자가 海라면

1-9-12~4

자는

渡海破

가 되어 주어는 왜

,

고구려 모두 가능하다

.

그러나 이 글자가 만약 海가 아닌 다른 글자라면 그 주어는 왜가 되기 어렵다

.

바다를 건너지 않고는 왜가 올 수 없기 때문이다

.

즉 이 글자가 海가 아닌 다른 글자라면 신묘년조 전체를 전치문으로 보는 설에 입각한 해석은 성립되기 어려운 것 이다

.

31) 손영종, 앞의 논문, 31쪽. 32) 李亨求·朴魯姬, 앞의 책.

33) 福宿南嶋, 「好太王碑文を讀む」, 󰡔書道硏究󰡕創刊號, 1987; 耿鐵華, 「好太王碑 ‘辛卯年’句考釋」, 󰡔考古與文物󰡕1992, 第4期;

󰡔앞 책󰡕, 108~111쪽에 재수록. 국내에서는 이도학이 耿鐵華의 설을 따라 ‘每’로 읽음(이도학, 「廣開土王陵碑文에 보이는 戰 爭 記事의 분석」, 󰡔廣開土好太王碑 硏究 100年(下)󰡕, 제2회 고구려국제학술대회 발표요지, 1996, 90쪽). 한편, 白崎昭一郞 은 이를 ‘每’로 읽긴 하나, Ⅰ-2-15자의 ‘津’을 ‘聿’로 약획한 경우를 예로 들어 ‘海’의 약획자로 봄(白崎昭一朗, 󰡔廣開土王碑文 の硏究󰡕, 吉川弘文館, 東京, 1993, 154쪽).

34) 水谷悌二郞, 앞의 논문과 책; 武田幸男, 앞의 책, 1989.

35) 서영수, 앞의 논문, 1996, 49~50쪽.

(7)

이제까지 Ⅰ

-9-13

자에 대한 석독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

글자의 변인

를 인정하느냐 안하느 냐이다

.

인정하는 견해는

浿

로 보았고

,

변이 없다고 보는 설은

혹은

으로 보았다

.

석회 박락이 상당히 진행된 시기의 탁본인 주운대 탁본

(1981

년 탁출

)

에 의하면 이 글자는 해당위치에서 현저하게 왼쪽에 치우쳐있다는 것을 비교적 쉽게 알 수 있다

.

36)따라서 주 탁본에 의하는 한

,

이 글자에

변이 있다고 가정하면 비문 상에 행간을 구분하기 위해 그은 종선 상에 위치하거나 그 보다 더 왼쪽

,

즉 종 선 밖으로 놓이게 됨으로

변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

그러나 주운대 탁본 하나만으로

변을 인정하지 않 을 수는 없을 것이다

.

초기 원석탁본으로 인정되는 水谷本 등에서는

가 보이고 있다

.

그리고 주운대 탁본에는 비문에 전혀 글자 흔적이 없는데도 탁본에는 도리어 명확하게 글자가 새겨져 있 는 곳도 일부 있다

.

또한 원석탁본에 의하는 한 Ⅰ

-3-27

자는

이다

.

그런데 주 탁본에는 여전히

이다

.

이러한 점들은 주운대 탁본만으로는

변의 존재를 판단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주운대 탁본 은 석회가 많이 박락된 이후의 탁본이긴 하나 여전히 석회가 잔존한 상태에서 탁출한 탁본으로 볼 수 있다

.

최근 발견된 혜정본 및 청명본

,

금자본

,

북경대 도서관소장본37) 등에서도

가 확인된다

.

따라서

자와

자로 보기는 어렵다

.

다만 초기원석탁본들에서도

의 존재는 왼쪽으로 치우쳐 져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러한 현상이 왜 일어난 것일까

?

이는 원비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

비는

1-9-13

자가 위치하는 부분에서 좌상 에서 우하 방향으로 약간 깨져 있다

.

모든 초기원석탁본들에서 나타나는

1-9-13

자의 탁출 상태를 보면 이는 초 기원석탁본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나타난 현상으로 파악된다

.

이에 원비의 현 상태 등을 감안하여 볼 때

1-9-13

자가 위치한 지점은 비가 세워진

414

년 당시 이미 깨어져 있었거나 비 발견 초기 이끼 제거를 위한 과정에서 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

그런데 사진상으로는 알아보기 힘들지만 현장에서 망원경 등을 이용하여 이 부분을 관찰하여 보면

, 1-9-13

자의 좌상에서 우하로 깨어진 부분을 기준으로 우상부분과 좌하부분은 약간의 단차가 있 다

.

좌하 부분이 우상 부분보다 약간 높다

. 1-9-13

자는 그러한 비의 상태를 감안하여 새겨졌을 것이다

.

능비는 돌의 상태로 보아 글자를 새길 수 없는 지점에는 刻字하지 않았다

. 2

면의

9

행과

10

행의 윗부분

(

원 래는

9

1~7

자와

10

1~16

자의 위치

)

과 같은 곳이 그러하다

.

이 경우는 비면의 가쪽이기 때문에 刻字하 지 않은 것이 가능했다

.

그리고 비면에는 테두리선을 둘렀기 때문에 그곳에 글자가 새겨지지 않았을 것임을 알 수 있다

.

그러나

1-9-13

자의 위치와 같이 문장의 중간일 경우 글자 새김은 비의 상태를 감안하여 새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36) 주운대 탁본에 대한 소개와 함께, 주 탁본이 갖는 결점 등에 관해서는 박진석, 󰡔호태왕비와 고대 조일관계연구󰡕, 서광학술 자료사, 1993, 52~59쪽에 잘 정리 되어 있다. 이 글자에 대한 씨의 석독은 ‘海’로 읽어 필자의 견해와는 다르다. 주 탁본의 사진은 위의 책 435쪽에 실려 있다.

37) 󰡔晋高麗好太王碑 李龍精拓整紙本 五分第三󰡕이란 潘祖蔭의 친필 題簽이 붙어있는 탁본(北京大學圖書館 拓片室- 3021326-3), 全 4폭 원석탁본(林基中, 󰡔廣開土王碑原石初期拓本集成󰡕, 東國大學校 出版部, 1995, 357쪽). 徐建新의 北京大學 A본(徐建 新, 「北京に現存する好太王碑原石拓本の調査と硏究 ‒ 北京大學所藏拓本を中心に ‒」, 󰡔朝鮮文化硏究󰡕 第3号, 東京大學文學部 朝鮮文化硏究室, 東京, 1996, 32~33쪽. 이는 당시 北京 최고의 拓工으로 인정받던 李雲從이 拓出한 것을 潘祖蔭이 최초 소 장한 것으로 확인되는 탁본이다. 따라서 북경대학 A본은 潘祖蔭이 1890년 사망함으로, 그 이전에 탁출된 것이 분명한 탁본 이다. 이는 원석탁본임은 물론 탁본의 편년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하 본고에서는 이를 북경대 A본으로 약 칭한다.

(8)

1-9-13

자의 위치가 비에 글자를 새기기 이전에 이 미 깨져 있는 부분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段이 지어 진 곳은 분명하다

.

따라서

1-9-13

자는 비면의 이러한 상황이 감안되어 새겨졌을 것이다

.

이 글자가 왼쪽으 로 약간 치우쳐 각자된 이유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

아래의

<

사진

1~3>

을 참고하 면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38)

<사진 3> 1면 9행 11~15자

<사진 1> 1-9-13자의 비문 상 위치

<사진 2> 1-9-13자 상세

(9)

변의 존재를 인정한 견해로서는 대세를 이루는

字說과

浿

字說이 있다

. ‘

浿

字說은 탁본에 의하면 대 부분

아래 부분에

모양의 획이 확실히 보인다는 점을 근거로 하고 있다

.

그러나 여러 원석탁본을 정 밀히 관찰하면 이는 글자획이 아니라 비면이 깨져 파인 부분이 탁출된 것이다

.

이는 위의 사진들을 자세히 살펴 보아도 알 수 있다

.

따라서

浿

字說은 성립될 수 없다

.

박진석은 이 자의 방에 대해서

자로 인정하면서

, ‘

자의 하부

(

즉 母부분

)

에 내리 비낌선이

2

개거나 심 지어 그보다도 더 많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

.

39) 그는 이를

자이거나 그의 별체자로 보았다

.

결국 박진석은 이 자를

로 읽고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 “

이제 두 글자를 한 데 연결하면 곧

渡海

로 된다

. ‘

자는 흔히 건너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

그러므로

자 다음에

(

강의 이름을 포함

)‘

혹은

(

바다의 이름을 포함

)’

자가 쓰여 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

라고 하고 있다

.

40)

그런데

1-9-13

자가 海인지 아닌지에 대한 구별은 의외로 간단하다

.

그동안 학계에 제출된 석독에 의하면 능비문 상에는

로 석독되는 글자가

1-9-13

자 외에

3

字가 더 있다

. 1-5-21~22

자에서의

四海

1-8-25

, 3-8-31~32

자에서의

東海

이다

.

이 가운데

1-8-25

자는 海로 보기 어렵다

.

원석 탁본들의 비교 검토를 통해 볼 때 이는

‘ ’

字로 보인다

.

아래

<

탁본

1>

청명본의 경우

,

좌측 변에

이 비교적 명확하다

.

오른쪽도

밑에

지가 선명하다

. <

탁본

3>

의 북경대

A

(

반조음본

)

에서도 이러한 획들이 인정된다

.

<탁본 1> 靑溟本 1-8-25字 <탁본 2> 金子鷗亭本 1-8-24~25字

38) <사진 1~2>는 2002년 필자가 촬영한 것이며, <사진 3>은 임세권 전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2005년 망원렌즈를 이용해 촬영한 것이다. 사진을 흔쾌히 제공해 주신 임교수님께 감사드린다.

39) 박진석, 앞의 책, 57쪽. 40) 박진석, 앞의 책, 59쪽.

(10)

<탁본 3> 북경대 A본(반조음본) 1-8-25자 <탁본 4> 북경대 C본 1-8-24~25자

<탁본 5> 청명본 1-5-21~22자(四海) <탁본 6> 金子鷗亭本 1-5-21~22자(四海)

(11)

<탁본 7> 북경대 D본 1-5-21~22자(四海) <탁본 8> 북경대 C본 1-5-21~22자(四海)

<탁본 9> 북경대 C본 3-8-31~32자(東海) <탁본 10> 북경대 D본 3-8-31~32자(東海)

(12)

<탁본 11> 청명본 3-8-32(海) <탁본 12> 북경대 A본(반조음본) 3-8-32(海)

<탁본 13> 金子本 3-8-31~32(東海)

(13)

1-5-21~22

자의

四海

3-8-31~32

자의

東海

는 그 필획이나 전후 문맥으로 볼 때 각 각

로 읽을 수 있다

.

그런데

1-5-22

자는 그 획이 명확하지 않아 비교 대상으로 삼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

그러나

3-8-32

의 자는 海의 획이 비교적 잘 보인다

.

이와

1-9-13

자를 비교해 볼 때

1-9-13

자는

로 보기 어렵다

. 1-9-13

자 의 오른쪽 방을 살펴보면 □부분 가로 획이 海가 확실한

3-8-32

자는 좁은 반면

, 1-9-13

자는 넓다

.

□위부 분의 필획 존재 여부를 떠나

1-9-13

자는 海로 보기 어렵다

.

-9-13

자를

로 석독하여 이를 현 사천으로 비정한 연구가 제출된 바 있다

.

41) 필자도 북경대

A

본 등의 원석탁본을 바탕으로 이를

로 보는 설에 동의한 바 있다

.

42) 그런데 최근 발견된 혜정본을 비롯한 다른 초기원석탁본의

1-9-13

부분의 안쪽을 정밀히 살펴 보면

, ‘

의 가운데 중간 부분에서 가로획이 확인된 다

.

그렇다면 이 글자를 泗로 볼 수는 없다

.

능비에서는 四자를 새길 때 네모 안에 세로로 두 획을 직선으로 내리 긋고 있다

(<

탁본

5, 6, 7, 8>

참조

).

1-9-13

자를 혜정본

,

청명본

,

수곡본

,

금자본

,

부사년 갑본

,

북경대

A~D

본 등의 초기원석 탁본을 바탕으로 정밀히 비교 관찰해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들을 알 수 있다

.

첫째

,

왼쪽의 변은 삼수변으로 볼 수 있다

(

모든 탁본

).

둘째

,

오른쪽 방은 가로로 긴 네모꼴이다

(

모든 탁본

.

수곡본을 바탕으로 석독을 시도한 水谷悌二郞과 武田 幸男은 이를 伏字로 처리 했으나 수곡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의 오른쪽 위 가로획이 길게 존재하며

,

끝부 분에서 기억자 모양으로 꺽여 내려오는 획

(‘

’)

이 확실하다

.

그리고 좌하 부분의 획

(‘

’)

도 보인다

).

셋째

,

오른쪽 방 □의 위쪽의 획 유무에 대해서는

,

혜정본

,

반조음본에서는 획으로 볼 수도 있는 선이 희 미하게 있으나

,

청명본과 금자본

,

부사년 갑본으로 보아 획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

특히 부사년 갑본에서도 혜 정본과 반조음본에서 보이는 선이 보이나 이는 같은 글자 내의 필획이 확실한 부분과 비교해 보았을 때 획으 로 보기 보다는 비석의 스크래치 부분이 탁출된 것으로 보인다

.

이 부분은 청명본에서 보면 필획이 아님이 더욱 확실하다

.

넷째

,

오른쪽 방 □의 안에는 정중앙의 약간 아래 부분에 가로획이 확인된다

.

왼쪽

1/2

부분까지는 모든 탁본들에서 보이고

,

금자본에서는 오른쪽 끝부분까지 확인 되지는 않지만

,

혜정본과 청명본

,

반조음본

,

부사 년 갑본

,

북경대

B

본 등에서는 중앙획을 인정할 수 있다

.

다섯째

,

오른쪽 방 □의 가운데 부분 세로획의 유무와 관련하여

,

혜정본과 청명본

,

북경대

A

(

반조음본

),

부사년 갑본 등 대부분의 탁본들에서 중앙 아래 부분은 필획으로서의 획이 확실히 확인된다

.

윗부분의 획은 확실하지 않지만

,

혜정본과 청명본

,

북경대

A

(

반조음본

),

부사년 갑본으로 보아 필획으로 볼 수 있을 것으 로 판단한다

.

41) 林基中, 앞의 책; 「한국에서 호태왕비의 탁본과 비문연구」, 󰡔廣開土好太王碑硏究 100年(上)󰡕, (社團法人)高句麗硏究會, 제2 회 高句麗國際學術大會 발표요지, 1996.

42) 白承玉, 「廣開土王陵碑文의 建碑目的과 加耶關係記事의 해석」, 󰡔韓國上古史學報󰡕42, 2003; 白承玉, 「廣開土王陵碑文의 倭 관계기사에 대한 연구사」, 󰡔광개토대왕비와 한일관계󰡕, 景仁文化社, 2005.

(14)

<탁본 14> 부사년 갑본 1-9-13자

<탁본 15> 북경대 A본 1-9-13자

(15)

<탁본 16> 북경대 B본 1-9-12~13자

<탁본 17> 북경대 D본 1-9-12~13자

(16)

<탁본 18> 혜정본 신묘년조의 일부

(17)

<탁본 19> 혜정본 1-9-13자

<탁본 20> 수곡본 1-9-13자

(18)

<탁본 21> 북경대 A본(반조음본) 1-9-12~14자

(19)

<탁본 22> 金子本 신묘년조 일부(1-9-12~17자)

(20)

<탁본 23> 청명본 신묘년조 일부(1-9-8~13자)

이상의 관찰을 통해 보았을 때

, 1-9-13

자는 삼수변에 田가 합쳐진 글자인

으로 석독된다

.

능비문 상 또 다른 곳에는

자가 보이지 않아 비교해 볼 수는 없다

.

다만

1-8-30

자가 田자여서 필획의 비교가 가능하다

.

이 田자는 필획이 비교적 명확하다

. 1-9-13

자의 오른쪽 부분과 비교해 보면 유사함을 느낄 수 있다

.

다만

(21)

의 가운데 부분

의 가로획이

1-9-13

자에서는 중간에서 약간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

이 점은 위에서 설 명한 바와 같이

1-9-13

자의 위치가 원비에 段差가 있는 곳에 위치함으로 해서 생긴 현상으로 보인다

.

그리고

의 十부분 가로획의 오른쪽 부분과 세로획의 윗부분도 원비면의 문제로 인해 생긴 것으로 생각한다

.

이는 앞의

<

사진

1~3>

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

水勢가 廣大하다

.

또는 그 모양

이라는 뜻이다

.

우리 말 음은

이다

.

<탁본 24> 혜정본 1-8-30자 ‘田’

3. 신묘년조의 신해석

(a)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b)

而倭以辛卯年來

(c)

渡沺破百殘□□新羅以爲臣民

1-9-13

자를 沺으로 석독했다고 해서 신묘년조의 해석이 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

이의 해석을 위해서 는 능비문 상에서 신묘년조의 위치와 성격을 이해하여야 한다

.

신묘년조는 다른 전쟁기사와 달리 기년의 앞쪽에 나와 있다

.

만약 이 문장이

6

년 병신조 만의

(

濱田耕策이 주장한 바와 같은

)

전치문이라면 병신년의 앞쪽에 위치할 이유가 없다

.

전치문설에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를 대전치문설이라고 설명한다

.

그런데

8

년 戊戌조는 百殘

,

新羅

,

倭와는 관계없는 기사이고

, 9

년 己亥조

(22)

에는

8

, 14

년 甲辰조에는 伏字를 포함하여

21

字나 되는 전치문이 내포되어 있다

.

즉 대전치문설은

6

년 丙 申조의 전치문설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제기되었으나 받아들이기 어렵다

.

신묘년조 기사는

6

년 병신조의 ①전치문

+

②이후 백제 및 신라와 관련한 전쟁의 경과와 결과를 요약한 성격을 가진 문장으로 생각한다

.

신묘년조에서 ①에 해당되는 부분은

(a)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b)

而倭 以辛卯年來까지이다

. (c)

渡沺破百殘□□新羅以爲臣民 부분은 ②의 부분

,

즉 전쟁의 경과와 결과를 요약한 것 이다

.

신묘년조 이하의 전쟁에서 고구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쟁은 병신년의 대백제전이었다

.

광개토태 왕이 직접 출전한 이 전쟁에서 전쟁의 절정은 백제 國城을 공격하는 것이었고

,

이 전투에서 광개토태왕은

渡 阿利水

하여 백제를 굴복시키고 있다

.

~

其國城 殘不服義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

】여기에서의 아리수 는 지금의 漢江으로

큰물

’, ‘

큰강

을 의미하는 것이다

.

신묘년조의

1-9-12~13

渡沺

은 바로

渡阿利水

을 줄 여 요약한 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그렇다면 沺은 阿利水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

한문 문장에서는 가 급적 동일어를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은 피한다

.

병신년 대백제 전쟁 경과의 모든 것을 요약할 수 있는 것은 아리수를 건너서 백제를 파한 것이었다

.

~

渡沺破百殘

~

百殘 다음의 伏字 두 글자는 잘 알 수 없으나 신라 정벌 경과를 요약할 수 있는 글자일 가능성이 높다

.

아마도

10

년 庚子年 내용의 요약일 것이다

.

(a)

부분의 해석에는 문제가 없다

. (b)

의 해석에 있어서는 倭가 신묘년 이래로 왔다는 해석이 있으나

,

한문 문장 구조상으로는 신묘년에 왔다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

그러나 한문 어법상은 그러하다 하더라도 비문 작성자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

신묘년을 入記한 것은 반드시 신묘년 당해에 倭가 왔다 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기보다는 광개토태왕이 즉위한 해에 倭가 온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

.

왕이 즉위한 신성한 해에 왜가 自國 속민의 땅에 침입한 것을 강조함으로서 정벌의 명분을 더욱 높이는 효과를 노 린 것이다

.

실질적으로 倭는 신묘년 훨씬 이전부터

,

그리고 이후에도 백제와 신라지역에 출몰했었다

.

신묘년 을 명기함으로서 감히 왕이 즉위한 해에 속민의 땅을 침범했다는 분노를 나타낸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

이러한 필법은

20

년 庚戌年條에도 보인다

.

동부여를 옛 추모왕 때부터 속민이라고 한 것은 반드시 추모왕 시 기부터라고 보기 보다는 고구려 건국 초기부터 속민이었음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이상의 검토를 종합하여 신묘년조에 대한 해석을 다음과 같이 한다

.

百殘과 新羅는 오래전부터

(

우리 고구려의

)

屬民이었다

.

그래서 朝貢을 바쳐왔다

.

그런데 倭가 辛

卯年에

(

우리 속민의 땅에 침범해

)

오므로

, (

왕이

)

아리수를 건너 백잔를 치고 新羅를 □□하여 臣民으

로 삼았다

.”

(23)

Ⅲ. 맺음말

본고에서는 각종 초기원석탁본을 동원하여

1-9-13

字가

가 아님을 밝혔다

.

이로 인해 일본 학계에서는 이미 鐵案이 되어 버린 전치문설이 성립될 수 없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

倭가 한반도 지역으로 오려면 바다를 건너야 하는데

渡海

로 석독될 수 없다면 그 주어는 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

현전하는 초기원석탁본들을 비교 검토하고

,

원비의 사진 활용

,

현장 관찰 등을 감안하여

1-9-13

자를

으 로 보았다

.

이 글자의 뜻은

넓은 강

의 의미이며

, ‘

漢江

阿利水

를 지칭한 다른 말로 추정하였다

.

영락

6

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가장 절정을 이루는 것은 광개토태왕이 아리수를 건너 백제의 국성을 공격하는 장면이 었다

.

신묘년조에서는 백제 공격의 명분과 함께 그 과정과 결과를 요약한 것이다

.

,

신묘년조는 소위 전치 문적 성격을 포함하여 이후 정벌기사에 대한 경과와 결과를 집약한 성격을 가진 문장이기에

百殘新羅舊是屬 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沺破百殘 □□新羅 以爲臣民

이라 한 것이다

.

전치문설에 따르면 역사적 사실이든 아니든 왜가 백제와 신라를 臣民으로 삼았다는 것을 고구려가 인정한 것이다

.

과연 그러했을까

?

전치문의 내용이 아무리 고구려에 불리한 상황을 설정한 것이라 하지만 당시 고구 려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천하관은 이를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

능비문 속에서 倭를 표현한 용어가 왜

,

왜 구

,

왜적임을 감안해 보더라도 고구려의 속민이었고 향후 國岡上의 왕릉들을 수묘할 民들을 倭의 臣民으로 인정하거나 표현할리가 없었을 것이다

.

전치문설을 바탕으로 신묘년조를 해석하는 방식은 결국 애초 잘못 설 정된 능비에 대한 시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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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2014

11

28

일에 투고되어

,

2014

12

11

일까지 편집위원회에서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 2014

12

29

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

2015

1

5

일 편집위원회에서 게재가 결정되었음

.

(26)

❙Abstract❙

New Analytic Approach to the ‘Sinmyonyeonjo(辛卯年條)’ in the Epitaph of the Great King Kwanggaeto(廣開土太王)

43)

Beack, Seoungok*

Since its discovery, ‘Sinmyonyeonjo’ in the epitaph of the Great King Kwanggaeto has been highlighted more than any other aspects of the relevant research. The records of the

‘Sinmyonyeonjo’ has been inscribed on the first side of the epitaph from 34

th

letter of the 8

th

line to 24

th

letter of the 9

th

line. (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

Among 1775 inscribed letters of the epitaph, it is only 32 letters. However, the interpretation of these 32 letters could change the whole historical background of then East-northern nations upon the epitaph.

The epitaph of the Great King Kwanggaeto had been erected in 414 by the King Jangsu who was a son of Kwanggaeto in order to commemorate father’s achievement. This epitaph re-appealed in the late 19

th

century but the original form of the epitaph has been decayed as of several processes of removing moss and rubbing the inscription. Particularly the amounts of lime had been covered the face of the epitaph in order to rub the inscription correctly, and this made the condition of the epitaph worse than it was found before. Therefore, the rubbings which were took before the lime coverage can be the most intact evidence of the original records of the epitaph.

The most crucial letter is the one which was 13th letter of the 9

th

line. It was initially named

’ but it has been identified that the letter is actually written as ‘

’, which is a successful result of this research. This research work continuously compared this letter with the one from the rubbing evidence that had been produced before the lime cover. The meaning of ‘

’ is a ‘broad river’ and given this in mind, the new interpretation about ‘Sinmyonyeonjo’ is as such: Baekje and Silla had been subordinate nations of Goguryeo for a long time. A tribute from them is a clear evidence of their dependency. However Wae(current Japan) invaded our subordinate nations in the Year of Sinmyo(Sinmyonyeon), and this resulted the Great King Kwanggaeto cross the broad

* Chief Curator, Busan Museum

(27)

river(

) and defeat Baekje and subjectify Silla.

[Key Words] Kwanggaeto, Sinmyonyeonjo, Jeonchimunseol, Hyejeongbon, Cheongmyeongbon, Sugokbon

(2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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