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녕하세요,’인사를 할 때마다 며칠 전 밤에 있었던 일이 자꾸 떠오 른다. 11시에 학원 수업이 끝나는 딸아이를 데리러, 일 보따리를 주 렁주렁 어깨에 걸고 든 채 온종일 틀어박혀 있었던 작업실(재개발 예정인 낡은 주공아파트)에서 막 나선 걸음이었다. 아파트 현관에서 누군가를 마 주쳤기에‘같은 동에 사는 이웃이니까, 당연히’하는 마음으로 인사를 했다.그이 또한 무심히 마주 고개를 꾸벅 하고 계단을 올라가는가 했더니, 난간 사 이로 내려다보며 굵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나한테 인사한 거 맞아요?”
그 순간엔 잔뜩 지쳐 있던 터라 곧바로‘네에’하고 심상히 대꾸한 데다 그도 대답을 듣자마자 두말 없 이 걸음을 옮겼고, 그 다음엔 자동차에 짐 싣자마자 늦을세라 학원 앞으로 달려가 아이 태워서는 30여 분 남짓 굽이굽이 산 속 집으로 들어가는 가파른 고갯길 밤 운전이 만만찮아서 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랬는데, 의례적으로든 반가워서든‘안녕하세요?’하고 누군가에게 인사를 할 때마다 그 일이 떠오르곤 하는 것이 다. 그리고 갖가지 의문도 이어진다.
내가 그의 마음을 상하게 했나? 그런 한밤중에는 낯선 사람한테 인사를 안 했어야 하나? 좁은 계단에서 도 고개를 외로 꼬고 유령들처럼 슬그머니 비껴가야 하는 것이었나? 아니면, 인사를 하되‘늦으셨네요’라 는 등 좀더 상황에 걸맞은 말로 했어야 하나? …그러나 정작 그렇게 말하면, 얼핏 잠엔지 술엔지 좀 취한 듯 보였는데, 야유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을까? 혹시 그는 매사에 지나간 일의 꼬리를 잡고 고개를 갸우 뚱거리는 회의주의자인가, 이른바‘소심한 A형’인가? 그날 유난히 의기소침한 상태였던가?
이런저런 생각 끝에 한번은 오래전 나 자신이‘인사’때문에 몹시 마음 상했던 일이 떠올랐다. 잘 아는 이와 오랜만에 마주쳐서 무척 반갑게 인사를 했는데 상대가 심드렁하게 고개만 까닥이곤 지나가 버렸던 것 이다.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무슨 기념식 같은 자리였는데 얼마나 무안했던지 결국은 노여움인지 서운함인 지를 못 이기고 나와 버렸던 기억이 난다. 상대가 인사 나눌 기분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마침 딴 생각에 빠 져 있었을 수도 있고, 너무 오랜만이라 나를 못 알아봤을 수도 있으리라, 웃어넘기기엔 너무 어렸을 때 이 야기다. 나무며 집이며 개며 새며 고양이에게는 흔히 인사하면서도 정작 사람에겐 인색하게 굴던 때, 그리 도 옹졸하게 인사의 크기나 양마저도 재고 달던 때 이야기다.
조금 복잡한 마음인 채로도 어쨌거나 나는 낮이건 한밤중이건 아는 이건 모르는 이건 사람과 만물과 마 주치면 인사를 빠트리지 않으리라. 이 바람과 공기를 함께 들이키고 내어쉬며 삶을 이어가는 막대한 인연 을, 예의를 다해 아는 척하리라.
이상희|시인, 그림책작가
한밤중의 인사
짧 은 글 긴 생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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