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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 동경(銅鏡)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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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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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투고일_2018.12.10. 심사기간_2019.01.01-16. 게재확정일_2019.01.25.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 동경(銅鏡)에 관한 연구 Study on the Bronze Mirror from Three Kingdom Period and Unified Silla 홍세아, 동국대학교대학원 미술학과 박사수료 Hong, Se Ah_ABD, Department of Fine Arts, Graduate School of Dongguk University. 차례. 1. 서론 2. 동아시아 동경의 기원과 상징성 2.1. 동경의 기원과 전개 2.2. 동아시아 동경의 전개 2.3. 동경의 상징성과 용도 3.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 동경의 기형 3.1. 삼국시대 3.2. 통일신라시대 4.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 동경의 문양의 내용 4.1. 삼국시대 동경의 문양 내용 4.2. 통일신라시대 동경의 문양 내용 5. 결론 참고문헌.

(2)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 동경(銅鏡)에 관한 연구 Study on the Bronze Mirror from Three Kingdom Period and Unified Silla 홍세아, 동국대학교대학원 미술학과 박사수료 Hong, Se Ah_ABD, Department of Fine Arts, Graduate School of Dongguk University. 동경이란 동판의 경면을 잘 다듬고 문질러 얼굴이 비치게 하는 것이 본래의 용도인데, 그 뒷면에 다양한 문양이 표현되면서 동경의 본래 용도 이외에 다양한 쓰임새로도 사용되었다. 이런 동경은 청동기시대 이후부터 시대별 연속성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동경은 얼굴을 비춰보고 화장을 하는 도구이지만, 고대의 동경은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당시의 사상, 문화, 시대적인 풍속 등을 동경의 배면에 장식하고 있 ‘감(鑒)’기원설 다. 따라서 동경의 배면을 통해 그 시대의 사상이나 신앙을 짐작할 수 있다. ‘양수(陽燧)’기원설 이에 본 연구에서는 동경의 기원과 전개에 대해 살펴보고 동경이 가진 상징성과 용도에 대해 정리한 후, 선사시 상징성 및 용도 대와 고려시대를 잇는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동경에 대해 연구하였다. 특히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동경의 현황 삼국시대 을 시대별로 정리하고 동경의 기형과 문양에 대해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다. 첫째, 동경의 상징성과 용도가 시 기별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둘째, 동경의 기형이 원형만이 나타나던 삼국시대와 달리 통일신라에 들어서 통일신라시대 동경(銅鏡)의 기형과 문양 다양한 형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셋째, 삼국시대에 비해 통일신라시대에 들어 동경의 문양이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넷째, 이전시대에선 볼 수 없었던 특수기법이 사용된 동경이 통일신라시대에 나타나는 것이다.. 요약 중심어. ABSTRACT. Bronze mirrors were originally used to produce reflection by clearing and rubbing the surface of a copperplate. However, as numerous patterns were engraved on the back, they have been used Keyword for purposes other than intended. Bronze mirrors have been excavated with chronological continuity from the late Bronze Age. Basically used for personal grooming and deeply ingrained Theory of‘gam’origin in people’s daily life, bronze mirrors reflected philosophy, culture and customs of the time on the theory of‘yangsu’origin back. Therefore, the backside of bronze mirrors enables the future generation to catch a glimpse symbolism and usage of philosophy or religion of the past. Three Kingdom period This paper examines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bronze mirrors, explores their symbolism and use, and studies bronze mirrors of the Three Kingdom and Unified Silla periods which succeed Unified Silla period prehistoric times and precede Goryeo Dynasty. Especially, the status of bronze mirrors of the form and pattern of bronze mirrors Three Kingdom and Unified Silla periods was organized in a chronological order, and figure and pattern were analyzed as follows. First, bronze mirrors had different symbolism and usage by time period. Second, while mostly taking a round shape in the Three Kingdom period, bronze mirrors were created in various forms in the Unified Silla period. Third, compared to the Three Kingdom period, bronze mirrors have taken specific patterns in the Unified Silla period. Last but not least, unprecedented special techniques were used to create bronze mirrors in the Unified Silla period.. 614.

(3) 1. 서론 동경은 얼굴을 비춰보고 화장을 하는 도구이지만, 고대의 동경은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당시의 경제, 사상, 문화, 시대적인 풍속 등을 동경의 배면(背面)에 장식하고 있다. 이런 동경의 배면을 통해 그 시대의 사상이나 신앙을 짐작할 수 있어 중요한 자료로 주목되고 있다. 또한 고대의 동경은 고분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던 부장품으로 각 시대별 특징을 알 수 있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동경은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시대별 연속성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발굴되고 있지만, 현재까지 동 경에 대한 연구는 선사시대 동경과 고려시대 동경에 대한 연구에 많이 치우쳐져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의 동경의 현황에 대해 살펴보면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동경 문양의 흐름에 대해 연구하고자 한다. 또한 동경은 출토지에 의해 편년이 고찰 됨에 따라 출토지로 편년을 구분한 후 문양별 특징이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보고자 한다.. 2. 동아시아 동경의 기원과 상징성 2.1. 동경의 기원과 전개 2.1.1. 기원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의 전래 경로는 아직까지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스키트(Scyth) 청동기 문화와 시베리아의 미누신스크(Minussinsk) 청동기문화로 연결되어지는 요녕지방의 청동기 문화를 일반적인 한반도 청동기 전래 원류로 이해하고 있다1). 한반도 청동기 문화 유물을 대표하는 동경은 북방 시베리아 계통보다 중국에서 먼저 등장하였기 때문에 동경의 기원과 기능에 대한 논의는 중국에서 출토된 동경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2). 고고학적 자료는 없지만 문헌기록에서는 중국 동경의 기원을 고대사의 전설시기인 황제(黃 帝)시대로 올려보고 있다. 헌원황제전(軒轅黃帝傳)에는 「황제가 왕옥산에서 서왕모를 만났는 데, 경(鏡) 12개를 주조하여, 달을 따라 그것을 골라 사용하니, 이것이 경(鏡)의 시초이다3).」, 「(황제가) 그것을 본떠 경을 주조하였기에 십오면인 신경(神鏡)과 보경(寶鏡)을 만들었다4).」 등의 기록이 보이며5), 술이기(述異記)에도 「요주(饒州)에서 전하여지는 바에 의하면, 헌원 씨(軒轅氏)는 호수 가에서 경을 주조하였는데, 오늘날에도 헌원씨가 거울을 갈던 돌이 있으니, 그 돌은 항상 깨끗하여 덩굴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6).」는 기록이 있다. 경에 대한 기록이 황제시대부터 나오기는 하지만 실증적인 사료가 없어 이 기록들을 모두 신뢰 할 수는 없지만, 동경의 기원이 상당히 오래됐었음을 알 수 있어 기원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동경의 기원설에는 물그릇인 동수분(銅水盆)이 변천했다는 설, 원시적 방법으로 불씨를 얻던 ‘양수(陽燧)’가 변천했다는 설, 기물의 ‘뚜껑(蓋子)’이 변천했다는 설, 거마(車馬)의 장식구인 ‘동포(銅泡)’이 변천했다는 설 등이 있다. 이런 기원설은 따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각 기원설은 동경의 형태와 역할, 상징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므로 함께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1)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를 독립적으로 설정하고 한반도의 청동기시대 문화를 주변 지역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려고 시도하였 다. 따라서 遼寧지방 청동기를 통해서 華北綏遠(Ordos), 그리고 다시 시베리아의 미누신스크(Minussinsk), 스키트(Scyth) 청동문 화의 요소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우리나라 청동기문화라는 주장이 일반적이다(金元龍, 韓國考古學槪說 第三版, 一志社, 1986, p.63). 2) 하지만 최근에는 銅鏡의 기원에 관한 연구로는 北方傳來說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銅鏡이 시베리아, 綏源式 銅泡에서 由來되었다고 보는 說로, 綏源式 銅鏡이 B.C. 5-2세기경에 유행하는 양식이기 때문에 그 이전시기의 銅泡에서 起源을 구하려는 것 으로 소형의銅泡에 얼굴을 비추다가 큰 銅鏡의 형태로 발전했다는 논리를 구성한다. 반면에 李亨求는 B.C. 14-13세기경에 유행하 던 幾何文 樣式의 單線을 對稱的으로 구성하는 것이 발해연안에서 유행하고 있는 多鈕幾何文鏡의 구성과 유사하며, B.C. 12-11세 기경의 齊家期의 七角星幾何紋單紐鏡에서 보이는 星文과 幾何文의 구성이 발해연안의 多鈕幾何文鏡의 樣式과 연결됨을 밝혀 江上 波夫, 金廷鶴, 金良善이 多鈕鏡의 起源으로 주장하는 綏遠式帶鉤는 B.C. 5-2세기에야 유행하는 것을 들어 中國起源說을 주장하고 있다(金廷鶴, 「韓國靑銅器文化の源流と發展」, 韓國の考古學, 河出書房新社, 1972, pp.146-160 ; 金良善, 「多鈕幾何學文硏究抄」, 梅山國學散稿, 崇田大學校博物館, 1973, pp.81-82 ; 李亨求, 「靑銅器文化의 비교 1(東北亞와의 比較) : 銅鏡을 中心으로 한 中 國 「中原地方」과 「시베리아」와의 關係」, 韓國史論13, 國史編纂委員會, 1983, pp.362-373). 3) 軒轅黃帝傳, 「帝會王母於王屋山鑄鏡十二, 隨月用之, 此鏡之始也, ...帝因鑄鏡以像之, 爲十五面, 神鏡寶鏡也」. 4) 軒轅黃帝傳, 「…帝因鑄鏡以像之, 爲十五面, 神鏡寶鏡也」. 5) 손정애, 「중국 고대 문화 고찰」, 동아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9, p.37. 6) 述異記, 「饒州俗傳, 軒轅氏鑄鏡於湖邊, 今有軒轅磨鏡石, 石上常潔, 不生蔓草」. 기초조형학연구 20권 1호 (통권91호). 615.

(4) 2.1.1.1. ‘감(鑒)’기원설 거울은 한자로 경 또는 감의 문자를 사용한다. 그러나 은대의 갑골문자 안에는 감(監) 또는 감(鑑) 글자가 있다. 이효정은 갑골문자집석 제 8에서 감(監)은 사람이 평평한 그릇 옆에 서서 자기의 용모를 감하는 모습이며 그 본의는 ‘본다’라는 것이라고 논하고 있다. 쇠금 변의 감(鑑)의 글자는 특별히 금속제의 대야를 지칭하며, 현재 알려져 있는 가장 오래된 감(鑑)은 춘추전국 초기의 ‘공오왕부차감(攻吳王夫差鑑)’이다. 경의 글자가 사용된 것은 주말(周末: 기 원전 3세기)부터이며, 금속의 대야에 물을 넣고 얼굴을 숙이고 수면에 모습을 비춰보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것은 마음을 거울에 비춰본다는 뜻도 포함하는 기원설이다7). 곽말약(郭沫若)은 고인(古人)들은 그릇에 물을 담아놓고 얼굴을 비추었는데, 이러한 종류의 물그릇을 「감(監)」이라 칭하고, 동으로 ‘감(鑒)’을 만드는 것이라 여겼다. 일반 백성들은 도기 를 이용하여 물을 담고, 귀족들은 동기를 이용하여 물을 담았는데, 당시의 동기는 두들겨 만든 정결한 기물로 설령 물이 없어도 얼굴을 비추어 보는 것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이후 발전하여 동수분(동대야)을 편편하게 하여 얻어진 것이 동경이라고 보았다8). 양상봉(梁上棒)도 동경의 기원에 대해 「지수(止水)→감분중정수(鑒盆中靜水)→무수광감(無 水光鑒)→광면동편(光面銅片)→동편배면가뉴(銅片背面加鈕)→소배경(素背鏡)→소지가회채 (素地加繪彩)→개회채가주도문(改繪彩加鑄圖文)→가주자명(加鑄字銘)」으로 발전하였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추측은 역시 ‘수감(水鑒)에 용모를 비춘다’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9). 광아(廣雅)에도 ‘경(鏡)’이라는 한자어의 기원이 유추되는 부분이 나타난다. 즉 ‘감위지경 (鑒謂之鏡)’라 하여, 감(鑒)과 경(鏡)이 동일한 개념임을 보여준다. 이렇듯 「경」자는 「감」자에 서 출발하였는데, 갑골문 중에는 경 · 감자는 없고 다만 「감(監)」자만 있는데, 이 「ㅁ」 글자는 ‘인감우수(人監于水)’ 즉 사람이 대야에 물을 담아 용모를 비추어보는 모습의 상형자이다. 또 한,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말하기를 ‘감은 큰그릇(大盆)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감은 물 담는 그릇 즉 대야의 일종으로 대야에 물을 담아 용모를 비추어본데서 기원함을 알 수 있다. 한편 주례주(周禮注)의 정현(鄭玄)의 주석에는 「감역경(鑑亦鏡)」이라 하여 결국 감(鑑), 감(鑒), 감(監), 경(鏡)이 동일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설문해자에 대해 은옥재(殷玉裁)는 주(註)에서 ‘금(金)은 빛이 있어 물건을 비출 수 있으니 경(鏡)이라 한다10)’고 적고 있으며,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편에는 ‘사람은 흐르는 물에 비추어보지 않고, 괸 물에 비추어 본다11)’고 하고 있어 옛날 사람들이 금속 그릇 에 물을 담아 얼굴을 비추어보았음을 알 수 있다12). 2.1.1.2. ‘양수(陽燧)’기원설 태양에서 불을 취하는 도구인 ‘양수’에서 경의 기원을 찾는 설로써 이는 사료에 남겨진 기록에 서 그 형태와 역할을 볼 수 있다. 즉 회남자(淮南子) 「천자(天子)」에는 「양수는 해를 보고 불을 일으킨다13).」하였고, 고금주(古今注)에는 「양수는 동으로 만든다. 형태는 경과 같고, 해를 향하면 불이 생긴다. 쑥으로 그것을 받아, 불을 얻을 수 있다14).」고 하였다. 즉, 양수는 동으로 만들고 빛이 새지 않으며, 외형은 경과 같고, 경면(鏡面)은 요형(凹形)이며, 태양이 정중앙에 위치할 때 태양 빛을 집중시키면 쑥과 같이 마른 풀을 사용해 불을 구할 수 있다는 7) 國立故宮博物館, 「鏡と鑑」, 文物光華, 1994, p.15. 8) 郭沫若, 「三門崍出土銅器二三事」, 文物第 一期, 1959(郭寶鈞, 國立歷史博物館藏歷代銅鏡, 國立歷史博物館, 1996, p.41에서 재 인용). 9) 孔祥星 · 劉一曼, 中國古代銅鏡, 주류성, 2003, p.9. 10) 說文解字, 「金有光可照物謂之鏡」. 11) 莊子, 德充符, 「人莫鑑於流水, 而鑑於止水」. 12) 동경을 ‘감’의 변천으로 보는 학설은 이제껏 가장 많은 학자들의 지시를 받아왔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동경 기원설도 대체로 ‘감’ 기원설을 따르고 있는 추세로서 이난영(韓國의 銅鏡,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3 ; 「韓國古代金屬工藝硏究」, 단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1)과 전영순(「高麗銅鏡 硏究 : 刑態와 紋樣을 中心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72) 역시 동경의 ‘감’기원설을 따르고 있으며, 대개 수경(水鏡) 발전의 ‘감’에서 기원을 찾고 있다. 13) 淮南子, 天文, 「陽燧見日則燃而爲火」. 14) 古今注, 「陽燧以銅爲之, 形如鏡, 向日則生火, 以艾承之, 則得火也」. 616.

(5)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요면경(凹面鏡)은 중국에서 상말주초(商末周初: 기원전 12〜11)에 출토된 게 가장 이르다고 알려져 있는데, 현재 출토된 동경은 제가문화(齊家文化)로서 비록 제가문화는 상한이 기원전 2000년이나 그 하한이 기원전 1100년까지 볼 수 있어, 요면경이 사용된 시기에 인류가 스스로 불을 얻었고, 그 화종(火種)을 지키는 것을 중요시했음을 추정해 볼 수 있으므로 수(燧)로부터 변천해 경이 이루어졌다는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15). 빛을 모아 불을 만들어내는 양수는 무사(巫師)가 신기역량(神奇力量)을 표현하는 장면에서 매우 효과적인 신기(神奇) 표현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태양을 향해 동경을 내어 비추 면 그 사방으로 반사되는 빛은 마치 작은 태양과 같이 느껴졌을 것이며, 신성한 태양을 숭배하고 경외하던 선사인들에게는 작은 태양을 가진, 태양으로부터 불을 받아내는, 태양의 신성한 힘을 전수받은 무사가 그만큼 신성한 존재로 느껴졌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양수에서 발전한 것이 동경이라는 ‘양수기원설’은 동경의 신이적인 용도, 즉 상징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다16). 2.2. 동아시아 동경의 전개 동경이란 문화 자체는 중국에서 발생된 문화이기에 중국의 동경을 언급하지 않고는 한국과 일본의 동경문화를 논할 수 없다17). 또한 한국과 일본 동경의 기원으로 중국 동북부에서 수입 된 양수형태인 다뉴경이 한반도로 왔고, 한반도의 다뉴경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보고 있 다18). 동북아시아 동경의 기원인 중국 동경과 중국에서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어진 동경이 시대가 지남에 따라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2.2.1. 중국 중국의 가장 이른 시기부터 서주시기까지 동경의 특징은 첫째, 출토된 동경이 해당기간에 비해 출토수량이 극히 적은 점이다. 둘째, 동경의 크기는 부호묘 출토의 3점을 제외하면 모두 10㎝ 이하의 소형으로 동경의 두께 또한 얇다. 셋째, 동경의 형태는 모두 원형이다. 넷째, 배면의 문양은 크게 소문과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대별되며 소문경이나 기하학문경이 아닌 나머지는 문양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다섯째, 동경의 뉴(鈕)는 모두 단뉴(單鈕)이다. 여섯 째, 섬서성 왕태천촌 출토품을 제외하면 모두 매장유구에서 출토되어 중국에서 발견되는 초기 동경은 모두 매장유구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동경이 부장품으로 사용되었으며, 피장자의 신분 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19). 2.2.2. 한국 한반도 최초 동경은 크게 단뉴경과 다뉴경20)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다뉴경은 다뉴뇌문경, 다 15) 施慧美, 「中國歷代銅鏡槪述」, 國立歷史博物館藏 歷代銅鏡, 國立歷史博物館, 1996, p.42. 16) 황정숙, 「高麗 中 · 後期 思想을 통해본 銅鏡 文樣의 象徵性 硏究」,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6, pp.14-17. 17) 梅原末治, 紹興古鏡, 桑名文星堂, 1939 ; 梅原末治, 漢以前の古鏡の研究, 同朋舎出版, 1984 ; 森浩一는 동북아시아 銅鏡에 관한 연구에서 동경을 3가지(소 · 중 · 대)로 분류하였다. 이 분류는 중국 · 한국 · 일본에서 기본으로 사용하고 있다(森浩一, 「鏡の もつ意味と機能」, 鏡, 1978). 18) 다뉴경은 수(隧)에서 비롯된다고 인정되는 오목거울로 요녕성에서 한반도에 걸쳐 독특한 형태로 제작 사용되었다. 이 銅鏡은 원시 신앙과 관련이 있을 듯하며 이때의 동경은 생활용구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 형식의 동경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샤머니 즘과 깊은 관계를 지닌 제례용구로 사용되었다(이난영, 高麗鏡硏究, 도서출판 신유, 2003, pp.72-73). 북한에서 남한으로 남한에서 일본으로 다뉴경을 가진 집단이 이동하였다(이청규, 「東北亞地域의 다뉴경과 그 副葬墓에 대하여」,  한국고고학보40, 한국고고학회, 1999). 한반도에 다뉴경이 집중하여 위세를 가지게 된 시기를 4세기 후반으로 보았다. 그리고 북쪽보다 남쪽에서 다뉴경의 문화가 더욱 발달하였다고 주장하고 두 번에 걸쳐 다뉴경을 지닌 집단이 일본으로 이동하였다고 논하였다(이양수, 「多鈕鏡으로 본 韓半島 南部 社會發展」, 부산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2). 19) 첫째, 왕실과 관련된 피장자이며 부호묘가 이에 해당된다. 둘째, 제후급의 매장유적으로 사가원, 상촌령 괵국묘 등이 해당된다. 또 한 북경 백부유적이나 요령 남산근 유적의 경우 중원식 기준으로 보자면 반드시 제후라고 볼 수는 없으나 풍부한 부장품으로 판 단해 볼 때 피장자는 현지의 유력자 계급의 신분을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수량이 적기는 하나 銅鏡과 함께 청동기가 부 장되어 있는 무덤이며 후가장, 봉상현, 보계시, 서촌유적 등이 이에 해당된다(안신원, 「초기 銅鏡의 기능과 확산과정에 대한 연구 」, 단군학연구18, 고조선단군학, 2007, pp. 379-381). 20) 多鈕鏡은 圓形의 鏡面에 두 개 이상의 꼭지가 달린 것으로 기원전 1천년기의 초기부터 말기까지 거의 전 시간에 걸쳐 滿洲 - 韓 半島 - 日本列島 전역에 分布하는 이 지역의 청동기를 대표하는 유물이다(이청규, 「多紐鏡 型式의 變遷과 分布」, 韓國上古史學報 기초조형학연구 20권 1호 (통권91호). 617.

(6) 뉴조문경, 다뉴세문경으로 나뉘며, 청동기시대 말기부터 삼한시대 전기에 걸쳐 사용된다. 이후 삼한시대 후기부터는 한경에 의해 대체된다. 삼한시대의 시기구분은 일반적인 편년을 따라 점토대토기와 와질토기를 기준으로 전기와 후 기로 나눴다. 일반적으로 전기와 후기의 구분은 토기문화 내에서 구분되어 지지만, 삼한시대의 시기구분은 토기 문화 뿐 아니라 동경으로도 시기구분이 가능하다. 삼한 전기는 다뉴경이 유행 하지만 후기에는 중국동경인 한경이 주류를 점하게 된다. 이는 기원전 108년 한사군의 설치를 전후한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크다21). 다뉴경은 다른 청동기 유물과 함께 동반 출토된다. 이 유물들의 성격을 통해 동경이 제의에 사용되는 무구(巫具)임을 알 수 있으며, 이를 소유하고 사용한 자는 제(祭) · 정(政)을 함께 관리하는 제사장의 신분이라는 점은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다. 청동기∼초기철기시 대의 多鈕鏡은 제사장의 신분과 지위를 과시하는 위세품이었다. 최고의 위세품임을 입증하는 실제적인 근거는 각종 청동기를 다량 부장한 무덤에 다뉴경이 동반되기 때문이다22). 2.2.3. 일본 일본에서 출토된 중국 동경 중에서 전국시대의 동경은 소수이다. 한대의 동경은 500면 이상 출토되어져 있어, 본격적으로 동경이 야기 된 것은 중국의 한대 이후, 일본의 야요이 시대였다. 바다를 건너서 유래된 동경은 귀중품으로, 일본에서는 제의 도구 및 보물로 여겨졌다. 이후 국산생산이 시작되어, 시대의 흐름과 같이 동경은 여러 장소에 사용되었다. 2.3. 동경의 상징성과 용도 동경이란 동판의 경면을 잘 다듬고 문질러 얼굴이 비치게 하는 것이 본래의 용도인데, 그 뒷면 에 다양한 문양이 표현되면서 동경의 본래 용도 이외에 다양한 쓰임새로도 사용되었다. 첫째, 동경의 문양을 통해 당시의 신앙을 유추할 수 있다. 샤머니즘을 상징하는 동경은 다뉴경 으로, 다뉴경의 동반유물 성격을 통해 동경이 제의에 사용된 무구로써 제사장의 신이력을 돋보 이게 하는 착장구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동경이 제의적 성격과 신분을 나타내 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토속신앙을 상징하는 동경은 전북 부안 죽막동 제사유물 중 출토된 동경이 있다. 죽막동 제사유물 출토 동경을 통해, 무굿 형태의 제의에 동경을 이용하여 제단이나 제사지역을 장식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동경에 명문을 새겨 도교 및 신선사상을 상징하는 동경과 불교사상을 상징하는 사리기로 사용되는 경우 탑 내에서 발견된 것으로 불국 사 석가탑 이후로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었다. 또한 민간신앙 중 하나인 땅 속에 있는 나쁜 기운을 진압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된 지진구에도 동경이 사용되었다. 둘째, 대부분의 삼국과 통일신라시대 동경은 고분에서 발견되어 부장품으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부장품은 장송의례용품 중 하나로써, 당시의 내세관을 나타낸다. 셋째, 동경은 하사품이나 진상품으로써 국가간 대표적인 교류물자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중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한경, 일본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방격규구신수문경과 의자손 수대경이 있다. 방격규구신수문경과 의자손수대경은 같은 주형에서 여러 동경을 찍어 선물이 나 답례품으로 나누어 가지는 동범동형경으로 당시 한국과 일본의 교류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자료 중 하나이다. 넷째, 현존하는 동경 중 깨어져 있는 것은 파손된 것과 고의적으로 동경을 깨서 조각으로 재가공 된 것이 있다. 조각으로 재가공된 ‘파경’은 징표의 상징으로써 사용되었는데, 이는 삼국사기 설씨여전에 전장으로 떠난 이를 기다리는 여인이 파경을 간직하고 있는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67, 2010, p.46). 21) 이양수, 「韓半島 三韓 · 三國時代 銅鏡의 考古學的 硏究」, 부산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p.4. 22) 李淸圭, 「國의 形成과 多鈕鏡부장묘」, 선사와 고대14, 한국고대학회, 2000, pp.27-47. 618.

(7) 3.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 동경의 기형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 시대별로 동경의 현황에 대해 살펴보면서 기형에 대해 연구 하고자 한다. 3.1. 삼국시대 3.1.1. 고구려 현재 고구려 동경은 소수림왕(384년)의 분묘로 생각되는 집안 마선구 (M2100호묘)에서 출토된 철경으로 표면이 부식되어 문양대를 거의 알 아볼 수 없으나 원권문과 연호문이 일부 확인되는 원형이다.. 고 구 려. 鐵鏡. 3.1.2. 백제 백제 동경은 시기별로 구분하는 것 보다 중앙(한성 · 공주 · 부여 출토품)과 지방이라는 지역적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 대개 중앙에서는 중국과 관련된 동경이 나타나며, 이에 반해 지방에서 는 고흥 안동 출토된 중국제의 후한경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까 지 다소 한정된 시기에 왜경(倭鏡)이 주로 발견된다23). 현존하는 백제 동경은 모두 원형이다. <표 1> 백제 동경(銅鏡) 현황. 백. 倣製鏡. 倣製鏡. 倣製鏡. 倣製鏡. 虺龍文鏡. 連弧文鏡. 漢鏡. 變形博局鏡. 方格規矩神獸. 宜子孫獸帶鏡. 獸帶鏡. 變形六獸鏡. 珠文鏡. 珠文鏡. 珠文鏡. (倭鏡). (倭鏡). (倭鏡). (倭鏡). 文鏡. 虺龍文鏡. 제. 3.1.3. 신라 및 가야 신라 동경은 주로 고분에서 발견되었으며, 대략 4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신라­가야­왜 정권 과의 교섭을 배경으로 한반도 서남해 지역에 왜경이 유입되어 출토되었다. 경주 지역에서 출토 되는 왜경은 가야를 통해 이차적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볼 수 있다24). 현존하는 신라와 가야의 동경은 파편을 제외하고 모두 원형으로, 파편도 원형으로 추정된다. <표 2> 신라 및 가야 동경(銅鏡) 현황. 신 라 珠文鏡. 變形捩文鏡. (倭鏡). (倭鏡). 連弧文倣製鏡. 變形六獸鏡. 雙頭龍文鏡. 鳥文博局鏡. 鐵鏡. 博局鏡. 獸帶鏡 片. 博局鏡. 珠文鏡. 倣製鏡. (倭鏡). 가 야 珠文鏡. 連弧文鏡 片. 珠文鏡. 23) 청동의 질이나 형태 등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출토한 동경을 비교해 보면, 이 시기 한반도에서 확인되는 동경은 일본에서 제작 된 완제품이 각기 백제와 왜의 중앙정부인 야마토 정권과의 복잡한 교섭을 배경으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이양수, 「韓半島 三 韓 · 三國時代 銅鏡의 考古學的 硏究」, 부산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pp. 157-158). 24) 小田富士雄, 「韓國古墳出土の倭鏡」, 考古學叢考, 齊藤忠先生記念論文集 上 吉川弘文館, 2009. 기초조형학연구 20권 1호 (통권91호). 619.

(8) 3.2.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 동경에는 통일신라와 당의 활발했던 교섭상황에 따라 당경의 영향을 많이 받은 당경 계 동경이 나타난다. 이 동경들은 당경에서 자주 나타나는 문양인 해수포도문과 서화쌍난문을 사용하고 문양이 세밀하며 경계가 두껍다. 특히 통일신라 통경의 현황을 살펴보면, 원형과 함께 이전 시기에서 볼 수 없었던 능형, 화형, 방형 등 새로운 형태가 나타난다. 이는 동경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다양한 기형으로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현존하는 유물 이외에도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25)의 기록을 통해 서 알 수 있다. 매신라물해에는 소경에서 대형, 방형, 팔괘경, 화문경 등 다양한 동경이 일본 으로 수출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통일신라 동경의 기형은 현존하는 유물의 기형보다 더 다양 한 것으로 생각된다. <표 3> 통일신라 동경(銅鏡) 현황. 博局四神鏡. 日光文鏡. 無文鏡. 海獸葡萄文鏡. 日光文鏡 片. 海獸葡萄文鏡. 海獸葡萄文鏡. 海獸葡萄文鏡. 七寶文鏡. 無文鏡. 無文鏡 片. 無文鏡. 無文鏡. 金銀平文寶相. 金銀平文寶相. 螺鈿團花禽獸. 八弧寶相花文. 無文方形鏡. 華文鏡. 華文鏡. 文鏡. 鏡 片. 片. 瑞花雙鸞八稜 形鏡. 통 일 신 라. 瑞花雙鸞八稜 形鏡. 荷花文鏡. 七花文鏡 片. 4.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 동경 문양의 내용 4.1. 삼국시대 동경의 문양 삼국시대 동경은 크게 수대경(獸帶鏡)과 용문경(龍文鏡), 연호문경(連弧文鏡), 박국경(博局 鏡)으로 나눌 수 있다. 수대경은 중앙의 원형 꼭지 바깥으로 청룡 · 백호 · 주작 · 현무 등의 사신(四神)을 배치한 동경 이다. 동물의 표현기법에 따라 세선식(細線式)과 부조식(浮彫式)으로 나뉘는데, 부조식의 경 우 대개 6개의 꼭지 사이에 여섯 마리의 동물을 표현한 것이 많다. 별도의 명문대를 두르고 명문을 표현하는 것이 많지만 없는 경우도 있다. 또한 사신을 사냥하는 인물을 반부조로 새겨 진 문양도 있다26). 용문경은 용의 개수에 따라 명칭이 달라지는데, 세선식으로 표현된 역 'S'자의 간략화된 용무 늬를 4개의 대칭된 돌기 사이에 각각 배치한 형식은 훼용문경(虺龍文鏡)으로 불리고 중국에서 는 사리문경(四螭文鏡)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용 두 마리가 선각되어 있는 경우에는 쌍두 용문경(雙頭龍文鏡)으로 불린다. 별도의 명문대를 두르고 명문을 표현하는 것이 많지만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런 용은 못이나 강가, 바다에 살며 비나 바람을 몰고 다닌다고 여겨져 왔고, 그 상서로움으로. 25) 일본이 신라의 물품을 구입하는데 사용하였던 물품구입 신청서로, 여기에 동경을 신청한 것이 15건으로 비교적 많은 사례가 확인되 었다. 기록에는 대부분 크기가 표기되어 있는데, 현재 알려져 있는 유물에 비해 소경에서 대형, 방형, 팔괘경, 화문경 등 다양하다. 26) 이 인물상은 고구려 角抵塚 벽화의 인물과 매우 흡사하다(구중회, 「무령왕 관련 구리거울 연구」, 백제문화35, 공주대학교 백제 문화연구소, 2006, p. 142 ; 이난영, 한국 고대의 금속공예,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p.87). 620.

(9) 인하여 용문은 고대로부터 많은 문식(文飾)의 소재로 사용되었다. 연호문경은 뉴 주위로 사엽(四葉) 모양이 중심에 자리하고 그 밖으로 8개의 반원호만 남고 나머지 무늬는 생략된 형태의 문양을 나타낸다. 박국경은 중앙에 있는 정사각형의 바깥으로 흔히 ‘TLV'라고 부르는 규구 사이에 보통 8마리의 사신 등의 상스러운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정사각형 내에는 12간지를, 바깥 테두리 안쪽에는 길상구의 명문이 배치되어 있다. 4.2. 통일신라시대 동경의 문양 통일신라시대 동경은 크게 수대경(獸帶鏡)의 종류인 해수포도문경(海獸葡萄文鏡)과 서화쌍 난팔릉형경(瑞花雙鸞八稜形鏡), 무문경(無文鏡), 화문경(花文鏡), 칠보문경(七寶文鏡)으로 나눌 수 있다. 해수포도문경은 네 다리의 해수와 새, 포도 등의 작은 문양 다수를 군데군데에 끼워 박은 문양 으로 뉴도 야수의 형태이다. 동형경으로 같은 문양의 동경이 나라별로 많은 것이 특징이다. 서화쌍난팔릉형경은 새를 두 마리 배치한 문양으로 추정된다. 무문경은 아무 문양이 없는 경으로 통일신라 동경 중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중 석가탑 출토 무문경은 절대연대를 가진 유물로서 뒤에 출토되는 무문경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27). 화문경은 꽃과 새(혹은 나비)가 같이 선각되어 표현된 동경과 보상화(寶相華)28)가 표현된 동경, 사슴과 새, 보상화가 표현된 동경, 둥근 꽃무늬의 단화와 산, 사자, 나비(혹은 작은 새), 구름 등이 함께 표현된 동경이 있다. 보상화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불교에서 이상화한 꽃으로 당초문을 주제로 사용한 오판화(五 瓣花)로 서원명은 만다라화(曼多羅花)이고 백연화를 가리킨다’고 기술하고 있어 신비롭고 불가 사의한 상상의 꽃으로서 불교와 결합되며 불의 문양의 하나로서 자리 잡은 화문으로 짐작된다. 칠보문경은 칠보문이란 고리모양 네개를 조합하여 원형을 만든 기하학문양이다. 칠보문은 다 복, 다남 등 도교적 이념에서 비롯된 삼다사상에 의한 길상도안의 하나로 자손길경(子孫吉慶), 장명부귀(長命富貴) 등을 뜻한다.. 5. 결론 지금까지 동경의 기원과 동아시아 동경의 전개,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 동경의 현황과 문양 양상 등을 파악하여 각 시대별 동경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와 더불어 동경의 다양한 상징성과 용도를 파악함으로써 동경이 단순한 생활용구가 아닌 그 시대인들의 사상을 반영하 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 동경의 특징을 정리해보면, 첫째, 동경은 형태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되는데, 삼국시대까지는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원형만이 나타나지만 통일신라에 들 어서 원형과 함께 릉형, 화형, 방형 등 새로운 형태가 나타난다. 둘째, 고분에서만 발견되던 동경은 이전 시대와 달리 삼국시대로 오면서 사지, 제사유적, 탑, 산성 등에서 발견되면서 다양한 상징성과 용도로서 이용된다. 이런 다양한 상징성과 용도는 통일신라시대까지 이어진다. 셋째, 삼국시대에 많이 나타나던 왜경은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까지 다소 한정된 시기에 만 출토되고 통일신라시대에는 발견되지 않는 점이다. 통일신라 동경에서는 문양이 세밀하고 경태가 두꺼운 당경계 동경이 많이 나타난다. 넷째, 통일신라 이전의 동경들은 뉴의 형태가 단면이 반원형을 이루는 반면, 통일신라에선 鈕의 27) 불국사 가람은 경덕왕 10년에 중창한 후 여러 번 중건되었다고 되어 있으나 석가탑 중수에 대한 기록은 없다. 즉, 석가탑은 불국 사와 조성시기가 같고 조성 당시부터 지금까지 손대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사리기 역시 경덕왕 중창 당시의 것으로 생각된다(불 국사고금력대기). 28) 모란 나무와 같은 모양으로 연꽃을 모체로 하여 장식을 가하고 꽃잎을 층층이 중첩시켜 화려한 색채를 부가한 이상화된 꽃으로 불교를 상징하고 있다. 기초조형학연구 20권 1호 (통권91호). 621.

(10) 형태가 단면이 반원형을 이루는 것과 뉴의 윗면이 평평한 것이 혼재되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섯째, 통일신라시대 동경의 문양을 살펴보면 삼국시대 보다 문양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변화 한 것을 알 수 있다. 여섯째, 이전시대에선 볼 수 없었던 특수경이 통일신라에 나타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는 통일신라가 당의 선진기술을 흡수하고 발전시켜 통일신라만의 독자적인 기술을 갖추었 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기술은 후에 고려경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의 목공예품의 표면 장식에 이러한 금은평탈기법과 나전기법을 주로 사용하면서 고려 평탈기와 나전칠기 제작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상과 같이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의 동경은 기형의 변화는 뚜렷하지 않으나 문양에서 변화가 나타나며 그 시대의 문화를 알 수 있는 공예품 중 하나로 생각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선사시대와 고려시대를 잇는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동경에 대한 연구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참고문헌 국립경주박물관, 과거를 비추는 거울-鏡鑑, 國立慶州博物館, 2007. 국립전주박물관, 扶安 竹幕洞 祭祀遺物 硏究 開館五周年紀念, 학술심포지엄논문집, 1998. 국립김해박물관, 양동리, 가야를 보다, 國立金海博物館, 2012. 국립부여박물관, (2010 소장품조사자료집)청동거울, 국립부여박물관, 2011. 국립전주박물관, 바다와 祭祀-扶安 竹幕洞 祭祀遺蹟, 國立全州博物館, 1995.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통천문화사, 1997. 문화재관리국 · 문화재연구소, 雁鴨池: 發掘調査報告書, 文化財管理局 · 文化財硏究所, 1987. 복천박물관, (神의 거울)銅鏡 : 2009 복천박물관 특별기획전, 복천박물관, 2009. 복천박물관, 청동거울과 고대사회, 복천박물관, 2010. 안신원, 「초기 銅鏡의 기능과 확산과정에 대한 연구」, 단군학연구18, 고조선단군학, 2007. 이규산, 「죽막동 제사유적 발굴보고」, 제16회 한국고고학대회 발표요지, 1992. 이난영, 한국 고대의 금속공예,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이난영, 高麗鏡 硏究, 통천문화사, 2003. 李成巿 · 김창석 옮김, 동아시아의 왕권과 교역–신라 ․ 발해와 정창원 보물, 청년사, 1999. 李鍾哲, 「장승과 솟대에 대한 考古民俗學的 接近 試考」, 尹武炳博土回甲紀念論叢, 1984. 신 숙, 「統一新羅 平脫工藝 硏究」,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2. 이양수, 「韓半島 三韓 · 三國時代 銅鏡의 考古學的 硏究」, 부산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황정숙, 「高麗 中 · 後期 思想을 통해본 銅鏡 文樣의 象徵性 硏究」,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6. 김태식, 「부여 왕흥사지 昌王銘 사리구에 관한 고찰 : 舍利函 銘文을 중심으로」, 문화사학 28, 한국문화사학회, 2007. 尹容鎭, 「한국청동기문화연구 - 대구평리동출토 일괄유물검토」, 한국고고학보10, 한국고고학회, 1981. 李盛周, 「1-3세기 가야 정치체의 성장」, 한국고대사논총, 국가사적개발연구원, 1993. 李松蘭, 「高麗時代 月精寺 八角九層石塔 舍利具의 銅鏡 埋納의 樣相」, 博物館紀要25, 檀國 大學校 石宙善紀念博物館, 2010. 이청규, 「多紐鏡 型式의 變遷과 分布」, 韓國上古史學報67, 2010. 李賢惠, 「鐵器普及과 政治權力의 성장 : 辰弁韓지역 政治集團을 중심으로」, 加耶諸國의 鐵, 仁濟大學校 加耶文化硏究所, 1995. 제동방, 「거울과 환영 : 唐代 銅鏡을 중심으로」, 미술사논단24, 한국미술연구소, 2007. 한영희 · 이규산 · 유병하, 「扶安 竹幕洞祭祀遺物 發掘調査進展報告」, 考古學誌4, 韓國考古美術 硏究所, 1992. 小田富士雄, 「韓國古墳出土の倭鏡」, 考古學叢考, 齊藤忠先生記念論文集 上 吉川弘文館, 2009. 樋口隆康, 古鏡, 新潮社, 1979.. 622.

(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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