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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성의식은 인간을 인간 으로 특징짓는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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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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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제5강

지난 시간에는 <종교문화의 이해>(정진홍 지음, 청년사) 1장을 들어가면서 인간과 종교의 관계를 살 폈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에 대한 자의식을 갖는데 이것이 유한성의식이다. 유한성의식은 인간을 인간 으로 특징짓는 핵심이다. 유한성 의식의 이면에는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결정적인 메커니즘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저편에 대한 동경, 즉 초월지향성이다. 초월지향성이라는 표현은 아직은 종교적 뉘앙스를 담고 있지 않다. 이것을 종교적으로 표현하면 "무한자에 대한 동경"등을 쓸 수 있겠다. 유한성의식과 초월지향성은 동전의 앞뒷면 이상으로 밀접하게 얽혀있으며, 이런 종교적 인 간이 엮어낸 역사가 바로 종교의 문화적 계보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문화의 이해 1장을 보면 "인간은 물음이고 종교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것 은 인간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공식이다. 이것을 유한성 의식과 초월지향성에 대입시킨 다면 유한성은 물음이고 초월은 대답이라 할 수도 있겠다. 유한성에 대한 의식과 이를 벗어나려는 초 월을 향한 몸짓의 관계, 즉 초월과 유한의 관계짓기가 바로 인류의 문명사였다. 그리고 이 과정은 종 교에서 예술로, 예술에서 신화로, 신화에서 학문으로 이어진다. 종교문화의 이해의 2장에 "신화를 사는 삶, 제의를 사는 삶"이라는 말이 나온데, 여기서 '제의'는 문화적인 계보 과정에서 볼 때 예술로 나타 난다고 할 수 있다. 문화의 계보적 진화과정을 통해 유한과 초월의 관계가 일상화된다. 정진홍 교수는 비일상성과 일상성 사이의 '다름'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그에 의하면 종교, 신앙은 그 다름을 얽혀내고 주목하고 그것을 들춰내고 그것을 겪어내고 살아내는 삶이다. 종교의 문화화 과정은 그런 비일상성을 일상화시킨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 말을 좀 더 풀어쓰자면 '다름'을 '다름'으로서 살아내기 보다는 그 '다름' 때문에 벌어질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불안, 종교가 극복하고자 하는 목적 대상으로서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비일상성을 일상화시킨 과정이다. 종교의 문화화 과정은 '다름'에 의해 야기되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다름'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같음'으로 다시 포장하는 방식이었다. 이것은 종교학과 철학 모두 다루는 이야기인데, 종교학은 앞에서 나온 신화, 제의를 구체적으로 다루며, 철학은 이 의미 를 파악하고, 반성한다.

우리가 1장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런 곡해의 과정, 왜곡의 과정이다. 인간은 '다름'을 '다름'으로 끝 끝내 꿋꿋하게 살아내지 못한채 문화화의 과정에서 '다름'을 길들이려 했다. 제도적인 종교는 이 거룩 함을 길들이기의 산물이다. 2장을 보라 신화도 결국은 "일상 속에서" 비일상적인 차원을 주목함으로서 합목적적인 상정을 통해서 동화적인 가치를 엮어내는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영위 하고자 한다. 어쩌보면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 당연한 것이 왜곡을 동시에 가져왔다. 이 왜 곡에 관한 이야기를 1장과 함께, 혹은 1장을 읽기 이전에 다루어야 한다. <종교문화의 이해>1장은 "

물음과 해답"이라는 키워드로 종교를 다룬다. '물음'과 '해답' 이 둘은 서로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 가? 일상적으로는 '물음'이 먼저다. 이 물음이 요구하는 방향대로 대답이 주어져야 아귀가 맞는다. 일 상생활에서 대체로 우리는 이렇게 '물음'과 '해답'을 경험한다. 헌데, 인간과 종교의 관계에서도 그러한 방식으로 관계맺어지는가? 좀더 나아가 '물음'과 '대답'의 관계는 과연 시간적으로, 논리적으로, '물음' 이 먼저인가? 이것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철학적인 반성을 거쳐야 한다.

근대 철학까지는 물음이 먼저고 대답이 나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로 넘어오게되면서 더 이상 물음과 대답의 관계는 물음이 무조건 먼저고 대답이 나중인 방식으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어떻게 그렇 게 되었을까? 물음이 나오는 정황을 생각해보자. 물음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고, 땅에서 무색무취, 투명한 전제에서 발생하지도 않는다. 현대에 접어들어 실존철학과 현상학이 등장하고 이런저런 사유적 운동적인 실험을 거쳐서 오늘날 철학의 큰 지류로 자리잡고 있는 해석학이 제시하는 '물음'과 '대답'의 가장 일차적인 도식은 "순환"이다. 이것은 순서의 앞뒤를 설정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해석학에서는 한 요체로부터 물음과 대답이 나오는데, 이 요체가 무엇인고 하니 한 실재, 혹은 한 삶이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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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이것은 비단 해석학 뿐 아니라 현대철학이 초점을 맞추며, 현대철학이 새로운 장르로 펼쳐내는 일종의 지평이라 할 수 있다.

철학사를 잠시 살펴보자. 고대부터 중세까지를 지배했던 고전적인 철학을 형이상학이라 한다. 형이상 학은 무릇 '있는 것'들로부터 ‘있음’을, 있는 것들은 각자 삼라만상의 개별적인 존재자들이지만 그 존재 자들의 존재 즉 ‘있음’ 자체를 탐구하는 것이다.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그렇다. 형이상학 중 가장 대표 적인 것이 바로 존재론이다. '있음'에 대한 탐구가 존재론으로 다듬어지기 전에 서양 최초의 철학자인 탈레스로부터 이어진 자연철학자들이 개진한 우주론이 있다. 이것이 다듬어져서 존재론으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서 신론으로 나아갔다. 우주론에 종사했던 사람은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 낙시메네스 등 밀레토스 학파와 그것과 대립각을 세웠던 피타고라스 학파 등이 있다. 서양 철학의 첫 출발은 우주론, 우주를 보고 우주의 뿌리를, 그리고 그 뿌리를 통해서 ‘있음’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었 다. 우주론은 ‘있음’을 우주 너머, 초자연에서 구하지 않았는데, 자연의 뿌리를 초자연에서 구한 것은 신화다. 우주론이 시작된 이후로, 삼라만상의 근원을 우주 안에서, 자연 안에서 보기 시작했는데, 이것 이 바로 Mythos에서 Logos로의, 신화로부터 이성으로의, 신화로부터 철학으로 전환이 되는 기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학문이 시작된다.

플라톤 이전의 고대 철학자들은 자연적 이미지로 삼라만상의 뿌리를 설명하려했다. 하지만 그들의 시 도는 아르케를 찾는 것이 직접적인 사유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종결되었고 다음 단계 작업 으로 넘어갔다. 우주론 다음의 단계는 존재론이다. 존재론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대립으 로 알려졌는데,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를 이야기했고 헤라클레이토스는 생성을 말했다. 하지만 그것만으 로도 뿌리를 찾는 것이 한계에 부딪히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신론이 등장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우주론과 존재론을 합성하고 그 위에 신론을 세우는 입체적 인 방식(우주-존재-신-론)으로 고대 형이상학, 그리스 형이상학을 완성했다. 이 작업은 중세 시대에 전 해져 신학 탐구의 작업으로도 이어졌는데, 이 기간 내내 철학과 신학은 함께 가는 두 개의 수레바퀴처 럼, 분리 불가능할 정도로 얽혀있었다. 형이상학은 학문의 역사 2500년 중 고대와 중세, 이천년을 지 배했다. ‘있음’ 지배의 역사였던 셈이다.

그러나 근세에 접어들면서 획기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이는 형이상학이 아닌 형이하학에 의해서 열렸 는데 형이하학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과학'이다. 과학은 자연을 관찰과 실험의 방식으로 직접 다룬다. 과학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서양 문명권은 엄청난 전환을 이룬다. 연대기적으로 보면 종교개혁 이 자연과학의 태동과 같은 시기에 펼쳐졌고, 그것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서의 인식론이 7,80년 뒤에 펼쳐졌지만 근세라는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은 자연과학이라 할 수 있다. 근세에 등장한 인식론에서는 더 이상 형이상학이 작업했듯이 ‘있음’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있음’의 문제를 아 무리 탐구해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종지부를 찍지 못하는 한계에 봉착했는데 새로운 돌파구가 형이하 학으로부터, 자연과학에게서 형이상학이 가르침을 받으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한다. 어떻게? ‘있음’

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앎'을, '앎'의 문제를 전면에 끌어내서 ‘있음’과 견주고 ‘있음’과 밀접하게 연 관시켜서 다루는 것이다. 인식론은 이 앎의 문제를 다루며, 근세는 앎을 집중적으로 탐구한 시대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다룬 내용은 1장과 2장과 연관이 된다. 학문이 등장하기 이전에 단계가 바로 신화이고, 신화 이전의 단계가 예술, 예전, 제의이다. 그런데 2장에서 다름과 의미라는 것은 무엇인가? 다름의 틈새에 서 의미는 읽혀지고, 공감이 되는 것으로, 그 곳이 바로 의미의 자리였다. 다름과 의미는 사실 내내 종 교로부터 예술로, 예술로부터 신화로 진행되어왔던 과정인데 학문의 단계에 와서 그 다름과 의미는 초 기 단계부터 억압되고 말살되었다. 형이상학이 구가한 ‘있음’, 인식론이 구가한 ‘앎’, ‘있음’과 ‘앎’의 결 론은 무엇인가? 형이상학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이 자체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겠다는 성찰조 차 못하다가 자연과학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정신문화가 펼쳐지면서 거기로부터 힌트를 얻었다.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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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과학혁명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철학계 내에서의 자생적인 작업이 인식론이었다. 여기에서 ‘앎’

이 등장했다. 이것을 크게 보자. 있음에서 앎으로의 전환이 근세 전기에 이루어졌고, 중기에 칸트가 등 장했으며 근세 말기에 이르러서는 형이상학과 인식론의 결합이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있음'과 '앎' 이 같다",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이었다. 이 결합을 이루어낸 사람이 바로 헤겔이다. 전통이, 고대 중세 와 근세 전체가 헤겔에 의해 마무리 된다. "‘있음’과 ‘앎’의 같음"으로서의 절대 정신! 물론 지금 우리가 사는 일상생활이 '같음'은 아니다. 세계는 '다름'으로 계속 충돌한다. 헤겔은 이 '다름'에 진지하게 주목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다름'들을 끌고 올라가서 '같음'으로 봉합시켰다. 이러한 면에서 헤겔은 현 대의 시작이 아니라 전통의 마지막 주자가 된다.

고대, 중세, 근세에 걸친 사유의 흐름의 결론으로서 "있음과 앎의 같음", 여기서 '다름'은 억제된다. 그 리고 '의미'는 지엽적인 것, 개별적인 것으로 내몰려진다. 중요한 것은 개별이 아니라 보편이기 때문이 다. 학문의 과정은 보편화의 과정인데 그 보편성은 헤겔의 체계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학문을 있 음과 앎의 같음,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으로 귀결시켰다. 여기에서 '다름'은 내내 변두리로 내몰리고, 결 국 같음을 위해서 봉사하는, 지양되어야할 수단적인 계기의 가치만을 지닌다. 쉽게 말해서 밟고 올라 서는 중간 단계라는 것으로 취급받았던 것이다. 더 높은 같음, 더 높은 같음을 향해 더 올라가야 한다.

이것이 헤겔이 말한 세계사의 자기 실현과정이다.

이러한 전통에 대한 반동이 150년 전, 19세기 중엽에 일어났다. 구체적으로는 유물론의, 실존주의의, 실증주의의 반동이 일어넜다. 이제 관념이 아니라 물질이다! 본질이 아니라 실존이다! 허무맹랑하게 진위판정이 불가능한 사변적인 말장난은 진도 아니고 위도 아니다! 이것은 진리로서의 아무런 가치가 없다. 진위판정이 가능한 검증, 반증이 가능한 것들이 진리다. 즉 실증이다! 이것이 유물론, 실존주의, 실증주의가 각기 전통에 대해 비판을 가하면서 내놓았던 선언들이다.

유물론은 동부 유럽에서, 실존주의는 서부 유럽에서 나왔고, 실증주의는 영미에서 나왔다. 버전은 다르 지만 이들을 꿰뚫고 흘러가는 공통적인 범주, 지평 차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있음’도 아니고 ‘앎’도 아니며, 있음과 앎의 같음으로 결코 묶여질 수도 없는 ‘삶’이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삶'이다. 삶이라는 지평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있음’과 ‘앎’의 같음이라는 토대에서 옹호되어왔던 보편성, 객관성, 보편타 당성이라는 진리 이미지가 와해되기 시작한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진리의 보편타당성, 객관성에 대 한 향수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삶'의 '다름', 다를 수밖에 없는 삶의 현실 속에서는 불가능한 환상이 고 허상이다. 이제는 진리의 보편성, 객관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그것이 타당한 것은 ‘있음’과 ‘앎’의 얽 힘이라는 차원에서 이다. 삶이라는 지평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것은 ‘있음’

이 그 자체로서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앎’이 ‘앎’ 자체로 무가치하다는 것이 아니다. ‘삶’이라는 터전 위에서 그것을 비추어봤을 때 어떤 의미를 지니냐는 것이다. "'있음'과 '앎'의 같음"으로부터 '삶'의 '다 름'으로의 전환, 전통으로부터 현대로의 전환은 사실과 의미 사이의 관계를 역전시킨다. 작고, 지엽적 이고 개별적으로 골방에 있고 보편의 자리에서 명함을 내밀 수도 없을 것처럼 치부되던 개별적인 의 미, 삶의 쪼가리들이 이제는 다를 수밖에 없는 '삶'이라는 지평 위에서 사실과 마주한다. 오히려 의미 이전에 사실이 어떤 식으로 있을 수 있겠는가 라는 레디컬한 해석학적 질문까지 등장시켜가면서 사실 과 의미의 관계를 완전히 역전시키는 재구성의 과정이 현대에서 일어났으며, 또 일어나고 있다.

짧게나마 철학사적인 맥락을 짚었는데, 이는 2장 끝부분과 연관된다. 2장 끝부분에 나오는 궁극을 사 는 삶은 문화적 계보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순서를 정확히 보라. 학문에서 시작해서 거슬러 올라간다. 신화를 사는 삶, 이것은 학문 이전의 단계이다. 제의를 사는 삶은 신화 이전의 단계이다. 다 름과 의미를 사는 삶, 이것은 예술 이전의 종교의 단계이다. 우리는 학문 이후의 세대다. 성-미-선-진 으로 이어지는 문화사적 계보에서 우리의 '진' 이후의 세대다. 우리는 진을 기준으로 성, 미, 선을 본 다. 그래서 우리에게 진, 선, 미, 성 이라는 순서가 더 익숙하다. 문화의 가치계보적인 진화과정은 정확 하게 거꾸로, 성, 미, 선, 진의 방식으로 이룽져 왔다. 우리는 진의 눈으로 보기에 보편성을 말한다.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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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같음'이다. 삶은 '다름' 투성이다. 신의 문제를 들어볼까. 내가 제대로 된 동 아줄을 붙잡고 있는지, 썩은 동아줄을 잡고 있는지 모른다. 신이 여럿이면 내 신이 더 센 신인지, 다른 친구가 믿고 있는 신이 더 센 신인지, 그 신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등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가 야기된 다. 이것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은 무엇인가? 바로 그것들이 서로 같아야하며, 더 나아가 '하나'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동일성이 등장한다. 이렇게 되니 이런 질문까지 나온다. 신의 동일성인가, 동일 성의 신인가? 더 나아가('동일성'은 복수를 전제하므로, 이러한 전제자체를 불경스럽다한다면) 하나여서 신인가? 신이어서 하나인가?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 명제는 주어-술어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을 다음과 비교해보자. 철수는 학교에 간다. 철수는 밥을 먹는다. 철 수는 친구와 논다. 이 문장들에은 모두 철수라는 주어 다음에 여러 가지 술어가 온다. 학교에 가지 않 아도, 밥을 먹지 않아도, 친구와 놀지 않아도 철수는 철수다. 자, 그러면 다시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문장을 두고 생각해보자. 여기서 사랑이 아니어도 하나님은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완전하다'라는 문장 은 어떠한가? 완전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하나님인가? 하나님이라는 주어 뒤에 많은 술어를 붙이는데 그 술어를 부정해도 그 주어가 주어로서 성립하는가? 인간의 언어에서는 주어가 술어보다 무게가 있 다. 주어는 술어를 취하든 취하지 않든 간에 주어다. 그렇게 보면 주-술 관계는 주어에 무게가 있는 비대칭적 관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주술구조를 신에게 적용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하나님은 사랑이다'라 했을 때 무게를 지니는 것은 술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에서 '사랑'이 아니면 하나님이 아니다. 주어가 주도권을 지니고 있던 것이 술어가 주도권을 지니고 있던 것으로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전환과 물음과 해답 사이의 순환성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감이 잘 오지 않는다면 이걸 생각해보라. 우리는 대답을 먼저 전제하고 물을 수 있다. 기독교를 생각 해보자. 인간과 종교의 관계를 물음과 대답의 관계로 일차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과연 2000년 동안 엮 어진 기독교 현실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가? 과연 우리가 질문을 가지고 모르면 묻고 그리고 그 물 음에 대한 대답을 구하는 과정들이 우리가 종교적 인간에서 크리스찬이 되기까지의 과정 속에 암암리 에 깔려 있었는가? 적잖은 경우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기독교는 그 동안 물음을 별로 허용하지 않아왔다. 물음과 대답의 공식을 들이대면 물음보다 대답이 먼저 있었다. 아니 묻기 전에 대 답부터 먼저 했다. 교리문답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물음과 대답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여기서 물음은 그 무엇인가를 대답으로 모시기 위해 있는 것, 대답으로 나올 것을 잘 모시기 위해 맞추어진 물음이 다. 그것을 비껴난 다른 물음, 삐딱한 물음은 허용되지 않는다. 물음보다 대답이 먼저 있다. 이것이 그 릇된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답이 먼저 있는 것은 삶의 구조 때문이기도 하는데 오늘날 해석학적 순환은 바로 이러한 질문과 답의 선후문제 자체를 문제삼고 있다. 문제는 무엇인가? 현실 기독교는 해 석학적 순환 이전에 이미 대답이 먼저 있다고 못박는다. 여기서 물음은 결코 답보다 먼저 올 수 없다.

여기에는 해석학적 순환이 적용되지 않는다. 꼭 기독교만 그런 것인가? 오늘날,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개신교가 중뿔나게 그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종교 언어는 물음표를 허용하지 않는 다. 무조건 마침표가 먼저고, 좀 더 나아가면 느낌표가 더 자주 쓰인다. 이것은 종교 언어의 특징이다.

인간과 종교의 관계가 물음과 대답의 관계라는, 종교학에서는 가장 일차적인 성찰조차 현실에 들이대 면 문제가 녹록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인간과 종교의 관계가 물음과 대답의 관계라는 문장은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우선 이것은 인간 과 종교의 관계가, 혹은 물음과 대답의 관계가 일방적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물음과 대답 의 관계"라는 현실 기독교의 예를 들어, 혹은 다른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단순 공식으로 치환시키거 나, 그렇게 각색 포장하거나, 그리하여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된다. 크리스챤은 종교적 인간을 넘어서야 한다. 종교적 인간은 자기 물음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대답을 구한다. 인간과 종교의 관계를 물음과 대답의 관계로 놓는다는 것을 정직하게 실현시킨다면 종교는 욕망충족체계라는 것, 곧 포이어바흐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하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크리스챤의 모습은 포이어바흐의 논의로 귀결되지 않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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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성찰이 현실 기독교에 던지는, 종교 일반에 던지 는 성찰꺼리를 놓쳐서도 안된다. 이 성찰을 놓고 볼 때 더 이상 물음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 삶이라는 지평이, 물음 없는 답, 아니 답만이 존재하는 종교현실이, 그 답을 도그마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는 기독 교의 모습이, 문제가 드러난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2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2장에서 언급되는 '다름' 과 '의미', 이 두 가지 키워드를, 그리고 이 키워드들이 나오게 된 배경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의미' 이야기를 하자니, 사실과 의미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 둘은 어떠한 방 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일단 '의미'라는 '해석'이라는 말로 대체해보자. 이렇게 대체해 놓고 보면 '하나의 사실이 있고 수많은 해석이 있다'는 통속적인 말이 떠오를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에 여 러 개의 의미가 있다'는 말로도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의미와 저 의미는 충돌할 수 있고 심지어 모순일 수도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는 이러한 모순 관계가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래서 '삶'의 ' 다름'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참을, 眞을 찾기 위해서는, 진위판정을 하기위해서는 어떤 의미에, 해석에 손을 들어야 주어야 하는가? 우리의 삶은 이런 모순을 끊임없이 겪기에, '삶'의 '다름' 을 말한다. 그래도 참이려면, 진이려면, 어떤 편을 손을 들어주어야하는가? 이럴 때 편을 들어줄 수 밖 에 없는 것은 '사실'이라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허나 이것은 '의미 이전의 사실' '해석 이전의 사실' 이라는 것이 성립할 때에만 타당함을 지닌다. 과연 '해석 이전의 사실'은 성립가능한가?

분명 '사실'은 있다. 그러나 '사실 그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다. 이것은 다름아닌 20세기 과학 에 의해 밝혀졌다. 19세기 말은 과학주의 시대였다. 여기에서 "~주의"라는 말이 지닌 뉘앙스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모든 형태의 ~주의는 환원주의다. 환원주의는 전체를 부분으로 축소하는 것 이다. 그 부분 안에 담기지 못하는 전체의 또 다른 부분은 그 환원에 의해 다 억압되고 왜곡되고 굴절 되고 채색된다. 전체를 망라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결국 경계지을 수 없는 것은 한 부분으로 싸잡아서 규정될 수 밖에 없다. 모든 규정은 부정이며, 어떤 방식으로든지 규정은 환원이란 방식을 거칠 수 밖에 없다. 그 규정 안에 담기지 못하는 것을 제껴내는 부정의 방식을 통해서 환원이 이루어진다. 모든 형태의 "~주의"는 총체적인 부분의 일부분만을 잡아낸 환원주의일 수 밖에 없다. 그 렇다면 '과학주의'라 할 때 이것은 곧 과학의 눈으로 모든 것을 싸잡아 안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세 전기에 자연과학은 과학혁명을 일으키면서 종래의 고대, 중세를 지배하던 종교를 제껴낸 뒤 그것을 대 체하기 시작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과학이 종교의 자리를 확실하게 대체하면서 모든 학의 중심으 로 등극했는데, 이 때 바로 '과학주의'가 시작된다. 그런데 곱씹어볼만한 것은 근세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 과학주의가 절정에 달했을 때, 그 이면으로 허무주의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과학주의가 득세하던 시절, 과학은 이 문명,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해결할 수 없는 삶의 현실이 끊임없이 출몰하면서, 허무주의라는 과학주의의 그림자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러 한 측면에서 과학주의와 허무주의는 19세기를 특징짓는 동전의 양면이었고 그 결론은 데카당스였다.

이 데카당스 후에 새로운 시대인 현대로 넘어오는데, 이 시점에 이르면 과학은 자기 스스로 한계가 있 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그 대표적인 예로 빛이 입자냐 파장이냐 라는 것을 결정하는 문제를 들 수 있다. 이 문제를 거칠게 표 현하면 빛이 딱딱한 고체냐, 흐르는 액체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이 어떻게 났을까? "보기 나름"이 었다. 고체가 사실이면 액체가 아니어야 하고 액체가 사실이면 고체가 아니어야 하지만 그것은 "보기 나름"으로 결정된 것이다. 이것은 즉 보기에 따라 관찰자의 해석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객관성은 와해되고, 보편타당성은 부분적으로만 타당한 것으로 밝혀져서 개별타당성으로 바 뀐다. 어찌 생각해보면 이는 환원주의의 불가피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환원이란 전체를 부분으로 축소시킨 것일진데, 그러한 방식을 통해 입증된 타당함은 개별타당성 이상의 지위를 획득하지는 못하 는 것이다. 객관성이라는 것은 신화로 밝혀졌다. 이 객관성이 도전받자 한세대 뒤에는 이성 자체에 대 한 비판이 일어났는데, 이 흐름에서는 이성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이성도 사실은 신화라는 주장을 했다.

이러한 주장들은 불확정성의 원리, 불확실성의 원리, 카오스등과도 연결된다. 오해하지 말자. 사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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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의 관계에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 이전의 사실 가능성에 대해 비판이 일어난 것이 다. 사실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보여진다. 즉 해석되는 사실만 있다. '삶'의 '다름'은 그 렇게 의미의 영역을 넓힌다. 이제는 사실에 견주어 의미가 초라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다.

조금 이야기를 틀어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 을 사실과 의미, 사실과 해석 사이의 관계와 연결시킨다면 어떨까.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겟 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를 한다. 제자들에게 깨어있으라 했지만 제자들은 다 자빠져 잤다. 그 날 밤 예수는 한 제자의 밀고로 체포된다. 그리고 금요일 아침 이후 그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로마 지도자 사이를 오간다. 마침내 빌라도가 처형을 선언하고, 오전 아홉시, 그는 십자가에 달리고 6 시간 후인 오후 세 시에 "다 이루었다" 라 말한 뒤 숨을 거둔다. 그리고 만 사흘, 즉 아직 72시간도 안된 시간에, 새벽에 여인 둘이서 무덤에 갔더니 돌문이 열려있었고 그의 시체는 없었다. 이른바 "빈 무덤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른 새벽을 6시경으로 본다면 그 사건은 4시경에 이루어졌다고도 할 수 있으며, 그가 새벽3시에 부활했다면 그것은 정확히 36시간이다. 이 36시간을 사이에 두고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일어났다. 복음서는 이러한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사건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복음서가 전해주는 예수 처형은 예수가 예수 자신의 죄로 죽은 사건이다. 어떠한 죄목이었나? 당대 유태인들의 관점에서는 신성모독의 죄, 자기가 하나님 의 아들이라고 한 죄이고, 정치적, 로마제국의 관점에서는 민중선동의 죄다. 여기서 그 죄가 실제로 타 당했냐 타당하지 않았냐는 중요하지 않다. 인혁당 사건을 아는가? 인혁당 사건에서 잡혔던 이들은 판 결된지 18시간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과거사 진상 위원회에서 그 사실을 드러내고 판결을 뒤집었지 만 이미 희생된 사람들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죽음, 정치적 민중선동과 종교적 신 성모독의 죄로 예수는 처형당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예수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우리, 기독교 인은 예수가 자신에게 덧씌워진 죄목 때문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는, 대속 의 죽음을 당했다(혹은 택했다)고 본다. 그런데 십자가 처형 장면을 기록한 복음서 기사에는 대속 이 야기가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물론 대속으로 풀 만한 구절들이 더러 있기는 하다. 그러나 십자가 처형을 대속으로 적극적으로 해석해낸 것은 바울서신이다. 바울에 이르러서 기독교 신앙의, 기독교 복 음의 핵심은 바로 예수의 죽음, 곧 대속의 죽음이며 이 죽음은 예수 자신의 죄목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선포된다(죄 때문에 죽어야 한다, 죄에 대해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죄와 벌 사이의 인과관계, 이 인과율이 과연 복음이냐 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따로 잘 생각해보기 바란다). 예수 의 죽음 사건을 두고 복음서 기자는 예수가 자기 죄목으로 죽었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쭉 열거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의 죽음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이후에 등장한 바울의 해석을 통해 그 죽음의 의미를 찾는다. 자기 죄목에 의해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에 인류의 대속이라는 의미가 입혀졌고, 이것 이 교리로 정착되고 기독교의 유구한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여기서 사실은 지극히 작고, 의미는 엄청나게 크다.

그런데 죽음 이후, 즉 36시간 이후에 벌어진 부활 사건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바울의 해석을 바탕으 로 오늘날 우리에게 자리잡고 있는 부활 신앙은 사실에 기대는가, 의미에 기대는가? 우리는 부활이 제 자들의 마음 속의 부활 정도로 생각된다면 그들이 선교나 순교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 렇게 보면 부활은 그 힘이 미약하다. 부활한 예수는 문이 닫혀 있는데도 쑥 들어오지만, 동시에 생선 도 먹을 수 있다. 또한 엠마오에서 제자들이 알아보지도 못하며, 하늘에 올라가기도 한다. 인간의 차원 에서는 이러한 모습은 이해불가다. 그리하여 부활이 사실이 아니고서는 이 비밀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을 하게 된다. 그 분은 가셨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 영원히 계시다는 '의미'가 대다수 기독교인들에게는 빈약하게 다가온다. 따라서 십자가에서의 죽음과는 사뭇 다르게 부활에서 사실은 엄청나게 크고, 의미 는 그에 비하면 작다. 36시간을 사이에 두고 그 간격으로 벌어진 사건을 두고 하나는 의미에, 하나는 사실에 무게를 두고 싶어한다. 일관적이지 않은 것이다. 십자가 처형의 사실만 가지고는 "자기 죄목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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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죽었는데 나와 무슨 관계야"라며 의미가 더 중요하다 생각하고 부활에 대해서는 "부활을 마음 속 에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거 가지고는 택도 없지. 그 모습이 어떤지 우리는 감잡을 수 없지만 승천도 하니까, 그러나 눈앞에 보이고 생선도 보이는, 아무튼 그 무엇인가의 형태로의 사실이야. 의미는 파생적으로 파생기는 것이지"라고 생각한다. 사실과 의미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비일관성을 우리의 신앙행태는 가지고 있다. 이 비일관성을 꿰뚫고 흘러가는 일관성이 무엇인지 는 여러분이 생각해보라.

이렇듯 사실과 의미의 관계를 우리의 기독교 신앙 현실에 들이대면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단도직입적 으로 대입이 되지는 않는다. 물음과 대답의 순환적인 관계를 우리의 신앙 현실에 바로 들이댈 수는 없 다. 때문에 우리는 일단 기독교 현실을 종교 일반의 차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사실의 의미화에 대한 종교학적 명제, 해석학적 명제로 우리가 기독교 신앙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벌어지는 현실에 대한 감을 잡을 필요가 있다. 그것이 기준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 이다.

우리는 여자로서 남자를, 남자로서 여자를(동성애가 있지만, 동성애에도 일정한 역할 구분이 있으므로 일단은 이렇게 표현해보자) 만나 연애를 한다. 연애관계를 형성하는 한 커플을 생각해보자. 여자가 모 든 남자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보편타당성과 객관성을 충족시키는 기준을 정립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녀는 일등남자로부터 꼴등 남자로 쭉 한 줄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정말 약육강식으 로 아수라장, 법칙이 없는 세상으로 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조물주는 오묘하게 제 눈에 안경, 서로 다른 눈을 다 만드셨다. 여기에 1등, 2등이 어디 있는가? 나에게 있어 가장 맞는 상대는 내가 원하는 상대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삶의 원리는 사실 이상인 의미의 가치를 보여준다. 가장 적합한 상대방, 상대방의 최적합성의 기준은 나라는 것, 그 '나'는 남과 다르다. '삶'의 '다름'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사실적으로, 그래서 이질적으로 어떤 판정 기준도 설정할 수 없을 만큼 최적합성의 기준은 이미 나에 게 있다. 우리는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먹고 그렇게 싸고 그렇게 자 고, 그리하여 그렇게 산다. 그래서 '같음'이 아니라 '다름'이고, '사실'이 아니라 '의미'다. 여기서 사실이 아니라고 할 때 '아니다' 라는 것은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화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의 미 이전의 사실은 불가능하다. 왜? 우리가 이미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서구 문명사에서 '다름'이 반동을 일으킨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 반동이 처음 일어난 것이 150년 전의 일이라면, 대중적으로 보급된 것은 길어야 최근 50년이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라는 형태의 다양한 사조 안에서 '다름'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런 현실을 살고 있다. 아 니, 사실 우리 조상들도 그런 현실을 살았는데 내내 그것을 '같음'으로 어떤 식으로든지 모아야만 우리 를 둘러싸고 있는 불안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척박한 자연환경을 생각해보라.

원시밀림을 생각해보라. 거기서 '다름'을 구가하기 쉬웠겠는가. 문명이 상당한 발전을 거치고 '다름'을 억압해온 경험을 축적해온 역사를 뒤로 하고 거기에 대한 반동이 나올 만큼 인류는 성숙하게 된 것이 다.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한대로 이 세계는 "성숙해진 세계"다. 성숙해진 세계는 종래의 임기응 변적인 신, 기계로부터 끌어내는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계신, Deus ex Machina는 쉽게 말해 복 덕방망이다. 그것은 미숙한 세계의 신이다. 그런데 성숙해진 세계에서 임기응변의 신을 말하는 것은 계몽주의의 비판에 의해 주저앉을 수 밖에 없다. 바로 이 신에 대하여 업데이트시키자. 성숙한 세계와 조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신을 업데이트시키자고 라고 본회퍼는 주장했지만 더 이야기를 미처 끌어나 가지 못한채 히틀러 암살 사건에 뛰어들어 처형당했다.

무조건 낙관적으로만 볼 수는 없겠지만 성숙해진 세계는 '다름'에 대한 용기가, '다름'을 아우성칠 수 있고, '다름'의 자유를 호소할 수 있는 세계다. 헌데 유달리 교회 안에서만은 왠지, 아직도 '같음'에 대 한 향수에 젖어 있다. 동일성의 원리, 다름이 아니라 같음, 의미가 아니라 사실 등에 대한 향수에 가장 진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종교다. 그래서 가라앉는 것이다. 문화는 진도를 나가는데 종교는 그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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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다. 문화와 종교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는 것이다. 서구에서는 이미 벌어졌고, 한국 역시 그러한 전철을 서서히 밟아가고 있다. 이 이야기가 유행 따라 종교를 열심히 업데이트 시키자는 이야기로 들 리지 않기를 바란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현실 속에서 종교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할 수 있는지 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은 여기서 줄이겠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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