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 INFORMATION FOR CHEMICAL ENGINEERS, Vol. 33, No. 5, 2015 …
593
특 별 기 고
저자 서광계(徐光啓; 1562~1633; 자는 子先, 호는 元扈)는 상해에서 출생하여 明 말에 천주교도가 되 었으며, 천문학자, 농업과학자로서 중국과 서양 사 이의 문화교류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明 만력 (萬曆) 24년(1596) 광동성 소주에서 서방전교사(기독 교 선교사)를 사귀어서,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와 서 양 과학지식에 관하여 듣고 알게 되었고, 후에 마테 오 리치(利瑪竇; Matteo Ricci; 1552~1610; 명 만력 9 년 광동에 와서 포교하고 중국 최초의 교회를 세움) 의 “산해여지도(山海輿地圖)”를 읽게 되었다. 다음 해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3년 뒤에는 과거시험 보려 고 북경에 가는 길에 남경에서 리치 신부를 만나고, 서방 과학지식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 다시 2년 뒤 에 남경에서 포르트갈 예수회 선교사 Jean de Rocha(
罗如望; Luo Ruwang)의 전도를 공손히 듣고, Ricci의
“천학실의(天學實義)”를 읽었다. 결국 “天學(천주교)”
를 받아 들이고 바오루(保祿)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만력 32년(1604) 42세에 진사에 급 제하고 시험에 뽑혀서 한림원서길사라는 관직을 받 았다. 직무의 여가가 생길 때 마다 리치 선교사에게 학문을 배우고, 그와 함께 Euclid의 “기하원본” 6권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45세에 부모상을 당하여 귀향 하면서 관직을 떠났다. 부모상 중에 그는 “주비산경(
周髀算經)”과 “구장산술(九章算術)”을 참고하여, “중
국의 측량법의(測量法儀)”를 중국과 서양말로 서로 통할 수 있도록, 보태고 정리하여 ”측량이동(測量異 同)”과 “구고의(勾股義)”를 저술하였다.
중국에서 서양 기독교가 전파된 역사(이미 당나 라시대에 경교가 전래되었다.)는 길지만 서광계가 활동하던 당시의 기독교 전교 상황과 선교사들의 전 도 전략은 특이하다. 마태오 리치를 비롯한 선교사(
전도사)들은 중국의 사대부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쉽 지 않음을 인식하고, 먼저 서양 과학기술 지식으로 중국인의 주의력을 끌었다. 그 중 서광계와 리치는 서로 스승되고 친구되는 관계를 발전시켜 유클리드 의 “기하원본(Euclid’s Elements)”을 함께 번역하였다.
이 책이 전교사들이 중국에 와서 번역한 첫 번째 책 이다. 중국말 성경책의 번역은 그 후에 이루어 졌다.
서광계는 46세에 이태리 예수회선교사 궈쥐정(郭 居靜; 원명 조사 못함)을 상해에 초청하여 전도하고 자기집에 교당을 설립한 후, 거기서 교인들을 모았 는데, 소작농가 중심으로 교도들이 늘어 났다. 이것 이 천주교가 상해에 전해진 시초이다.
3년 후 북경에 돌아가서 “한림원검토”의 직을 맡 았다. 마침 흠천감에 들러서, 일식의 추산이 정확하 지 않은 것을 알고, 바로 전교사와 합작하여 “천문 의기”를 연구하였다. 이때 서방 천문학술을 번역하 여 배울 것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황제가 이 일을 중
중국명저 60부 중 과학 기술 관련서적 15종 소개(15);
농정전서(農政全書) - 17세기 중국농업백과전서 —
강석호 역주
594
… NICE, 제33권 제5호, 2015특 별 기 고
요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을 곧 그만두었다. 만 력 40년 이태리 예수회선교사 슝산파(熊三拔; 원명
??)에게서 서양 水利학을 배웠다. 서광계가 숭정 원 년(1628) 예부시랑의 직을 다시 맡았고, 이때 농서를 처음 준비했던 규모로 작성하였으나, 관직에 임명된 후 달력서를 수정하는 일을 맡아서 바빴기 때문에 농서의 마지막 원고정리를 염두에 둘 시간이 없었는 데, 서광계는 임직 중에 아쉽게도 사망하였다. 후에 이 책은 그의 문하생인 陳子龙 등이 수정하여 서광 계가 사망한지 6년 만에 각판 인쇄되었으니, 숭정 12 년 1639년이고, 이때 처음으로 책 이름도 “農政全書”
라고 정해졌다. 일생 동안 그는 많은 책을 저술하였 다. 번역저서로 “기하원본”, “측량法義”, “측량異同”, “구 고의” 등이 있고, 력법 분야에서 편역 작업을 주관한
“숭정역서(崇禎曆書)”가 있으며, 저서로는 ”서씨포언 (徐氏庖言; 서씨의 주제넘은 말들)”, “병사혹문(兵事 或問; 병사에 관한 몇 가지 물음)”, “선련백자괄(选練 百字括; 선택하여 다듬은 100자 모음)”, “선련조격(选 練條格; 선택하고 다듬은 질서와 품격)”, “둔염소(屯 塩疏; 비축 소금을 통용함)”, “종죽도설(種竹圖說; 대 나무 재배 그림책)”, “의간령(宜墾令; 마땅히 개간하 라는 명령)”, “农政全書” 등이 있는데, “농정전서”가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중국에서 明, 淸 시기는 봉건사회가 크게 동요하 는 시대였다. 계급간 모순, 민족간 모순이 모두 예민 하고 복잡하게 표출되었다. 경제 영역에서, 특별히 상품경제가 번창했던 강남지구에서는 자본주의가 싹 트기 시작하였는데, 수공업, 상업, 및 농업에서 나타 났다. 서광계가 출생한 上海 松江府는 농업과 공, 상 업이 발달한 지구로서 그는 어려서부터 농업생산에 종사하였고, 관리로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후에는 각종 행정업무에 매우 바빴다. 그러나 단 한시도 농 업이 근본임을 잊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명나라 가 다스리는 세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 여러 차례에 걸쳐서 국가의 근본이 농업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서광계 사후에 “농정전서”가 정리되면서 “내용중 문구를 삭제한 것이 대략 10중 3이고, 보탠 것이 10 중 2”라고 한다. 완성된 책은 모두 12目, 60卷, 약 50 여 만 字로 되어있다. 12목은 다음과 같다; 農本3권, 田制2권, 农事6권, 水利9권, 农器4권, 樹木6권, 蝅桑 4권, 蝅桑廣類2권, 種植4권, 牧養1권, 制造1권, 荒政 18권 등이다. 그 중에서 기근을 구제하는 정책인 荒 政목의 분량이 책 전체의 1/3 정도에 이르는 것은 매 우 주목할만하다.
“농정전서”는 내용을 농업정책과 농업기술의 두 부분으로 대별할 수 있다. 농정정책 부분은 책 전체 의 요점을 정리한 것이고, 농업기술 부분은 강령적 인 기술과 대책을 논한다. 책에서는 개간, 수리, 황정 등 평범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으나, 책 전체의 절 반을 차지하며, 앞선 시대의 농서로서 선명한 내용 들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황정” 중에는 대대로 내 려오는 기근 대비책과 국가정책을 종합적으로 서술 하고, 수해, 한해, 충해의 통계를 포함하고 있다. 또 재해 구율 조치와 그 조치에 대한 이점과 폐단을 분 석하였으며, 끝으로 초목 야채 등 기아 대책으로 도 움이 될 수 있는 작물 414종을 부록으로 실었다. 수 리에 관한 1개 항목은 9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책 의 분량은 두 번째로 많다. 서광계는 水利야 말로 농
그림 1. 서광계 초상(문헌 3)
NEWS & INFORMATION FOR CHEMICAL ENGINEERS, Vol. 33, No. 5, 2015 …
595 중국명저 60부 중 과학 기술 관련서적 15종 소개(15); 농정전서(農政全書) - 17세기 중국농업백과전서 —
업의 근본이고 “물이 없으면 논밭도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의 정황을 보면, 중국의 서북 방면에는 광활한 황무지를 버려두고 경작하지 않은 곳이 많았다. 또한 북쪽의 인구 많은 도회지와 군대 에서 필요한 양식을 남쪽 양자강으로부터 운반해 왔 으므로 식량 낭비도 많았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 기 위해서 저자는 북방지역에 둔간(주둔병이나 농민 들이 집단으로 개간하는 일)할 것을 제창하였다. 屯 墾에는 수리가 필수적이므로, 그는 天津에서 황무지 를 개간하여 경작지로 만드는 시험을 실시하고, 남 쪽 식량을 북쪽에 조달하는 방안을 탐색함으로써, 국방을 공고히 하고 인민 생활을 안정시키려고 하였 다. 이것이 “농정전서”에서 개간과 수리 문제를 전문 적으로 토론하는 출발점이 되었는데, 어떤 의미에서 말하자면, 이것이 서광계가 “농정전서”를 저술하게 된 목적이라고 하겠다. 그는 자기가 다년간 시험 농 사에 종사하여 얻은 경험을 기본으로 삼고, 고대 농 서중의 농업기술 내용을 최대한도로 풍부하게 포함 시켰다. 예를 들면, 면화 재배기술의 총괄적 서술 같 은 것이다.
농정사상에서 출발하여, 서광계는 새로운 작물의 시험과 보급에 비상한 열정을 쏟았다. 예를 들면, 복 건성 민월(福建省 闽越)지방에서 고구마가 생산된 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 포전(莆田)地方으로부터 고 구마 종자를 가져와서 시험 재배에 성공하였다. 바
로 이어서, 자기의 경험에 근거하여 상세한 생산 지 도서인 “감서소(甘薯疏; 고구마 통용)”를 저술하여, 고구마 재배를 확대시키는데 사용하였다. 후에 그는 이 책을 정리하여 “농정전서”에 포함시켰다. 그 외에 도 그는 새로운 작물을 포함시키고, 농작물의 재배, 가공기술의 지식 모두를 누락됨이 없이 상세하게 찾 아 모아서, “농정전서”가 명실상부한 농업 백과전서 가 되도록 하였다.
농정전서에는 목화 재배에 관한 기술 내용도 풍 부하다. 명대의 왕상진(王象晉)이 저술한”군방보(群 芳譜)”에는 “면보(綿譜)” 항목이 있는데, 약 2,000여 자이다. 그것보다 약간 뒤늦게 발간된 “농정전서”에 는 6,000여자로 길게 서술하였는데, 뒤졌던 사람이 앞섰다고 가히 말할 수 있겠다. “농정전서의 면보”는 장강(양자강) 삼각주 지역의 면화재배 경험을 계통 적으로 소개해두었다. 그 내용은 면화의 재배 제도, 토양경작, 생산을 풍부하게 하는 조치 등이 언급되 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멋진 내용은 다음 한자 14글 자로 면화(목화) 농사를 요약한 것이다. 즉, “정간핵 (精揀核;씨를 잘 고르고), 조하종(早下種; 일찍 파종 하고), 심근(深根; 깊이 심고), 단간(短干; 줄기는 짧 게), 희과(稀科; 드문드문 심고), 비옹(肥壅; 북돋우고 거름을 주라)” 등이다.
“농정전서”는 기본적으로 고대 농업생산과 인민 생활의 각 방면을 모두 망라하였고, 책 전체에 걸쳐 서 일관된 기본 사상, 즉, 서광계의 치국 치민하는
“농정” 사상이 깔려있다. 이러한 일관된 사상이 바로 전대의 대형 농업서적과 구별되는 특색이다.
책 전체를 통하여 “농정전서”가 앞 사람들의 농서 와 관련이 있는 농업 문헌에 대하여 기계적으로 발 췌하여 편집하고 번역 서술한다는 기초 위에서, 자 기의 연구성과와 터득한 경험을 보태어 저술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서광계는 농업문헌적 연구를 매 우 중요시하였음을 다음 문장에서 볼 수 있다. “크게 는 경륜을 가지고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책, 작게 는 농업과 잠업의 자질구레한 일 까지, 문헌 고찰을
그림 2. 서광계의 “농정전서” 표지와 내용 일부 (문헌 3)
596
… NICE, 제33권 제5호, 2015특 별 기 고
그림 3. 마테오리치(좌)와 서광계(우), (문헌 1)
그칠 수가 없고, 붓을 놓을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책 전체에 인용된 문헌은 모두 225종 으로서, “온갖 것을 여러 전문가로부터 모았다”고 가 히 말 할만하다. 서광계는 前人들의 문헌을 대량으 로 발췌 인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실천 경험 과 數理지식을 결합하여 독자적인 경지의 견해를 제 출하였다. 예를 들면, 이 책에서 서광계는 많은 실제
사실을 이용하여, “유일풍토론(唯風土论; 기후와 토 질이 농사에 유일하게 영향을 준다는 논리)”에 대하 여, 예리한 비판을 가하고, 風土论이 중요하지만, 풍 토론만 유일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능동성 있게 정확한 관점을 발휘하여 농사에 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기 존의 기후와 토지 조건 아래서, 새로운 작물을 도입 하고, 신품종을 널리 보급하여서, 농업에 중대한 영 향을 끼치고, 농업발전에 매우 큰 추진력을 발휘하 였다.
“농정전서”를 읽을 때는 고대 농업과 관련되는 백 과지식을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고대 과학자가 빈틈없이 실사 구시하는 대가의 용모와 재 능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백과지식을 파악하는 것뿐만 아니라 실사 구시하는 근엄한 학풍을 독자들 은 체험하고 학습할 수가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1. 姚丽萍, 顔朝輝편, “影响中学生一生的 60部中国名著”, 中 国戏剧出版社, 2005, p. 226
2. 서광계, “농정전서(農政全書); 1~10”, 臺灣, 商務印書館, 1968
3. 邪濤, 紀江紅 편, “影向世界的100位名人成才故事(中国卷)”, 北京出版社,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