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현대시론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2

Share "현대시론"

Copied!
27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현대시론

시와 시적 화자

유지현

2015

(2)

시에서 말하는 사람은 시적 화자(詩的 話者 persona)라고 한다.

서정시는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성향이 강한 장르이므로 대부분 의 경우 시적 화자와 시인이 동일하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대부분 이다.

특히 한국의 시문학 전통에서 시는 학문의 일환이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가다듬고 수양하는 경향이 강하여 시적 화자와 시 인은 동일시되는 경우가 되는 대부분이었다.

시적 화자란 무엇인가

(3)

운격이 청초하고 여윔이 심한 것은 얼음같이 찬서리에 시달린 나머지라, 일찍이 삼첩시로 외람되이 화답하고 백 그루를 시었으나 오히려 성기다네.

우연히 피리 곡조로 들어가기도 하고 벽지의 선비 집에도 매화가 어울리네.

사람들이 더욱더 싫증이 나는 것은 장미와 작약이 잘난 듯이 피려는 것.

-이황, 「詠梅(영매, 매화를 읊다)」,

『퇴계문집독회 역』, 교육과학사

다음 두 편의 고전 시가를 살펴보자

(4)

강호(江湖)에 봄이 드니 미친 흥(興)이 절로 난다.

탁료 계변(濁醪溪邊)에 금린어(錦鱗魚) 안주로라.

이 몸이 한가(閒暇)하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 맹사성, 「강호사시사- 춘사」, 전문인용

다음 두 편의 고전 시가를 살펴보자

(5)

이황의 한시 「詠梅(영매)」는 매화의 성글고 여윈 풍모를 장미와 작약에 견주고 있다. 그러나 장미나 작약이 지닌 화려함 보다 얼음으로 상징되는 고난과 시련의 상황을 견딘 매화의 고고한 내적 아름다움을 훨씬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매화는 단순한 꽃이 아니라 퇴계 이황 의 정신적 지향점을 알려주는 상징물이며 이러한 심경이 시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맹사성의 「강호사시가- 춘사」에는 자연에서 소박하지만 만족스러운 삶을 누리는 시인의 생 활태도와 정감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소박한 삶의 즐거움조차 임금님의 은혜로 돌리는 정서는 조선 초기 비교적 안정적인 정치상황에서 관직 생활을 마친 그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것 이다.

따라서 위의 두 시에서 나타난 시적 화자와 시인은 그대로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시적 화자란 무엇인가

(6)

그러나 현대시에서는 시적 화자와 시인이 시인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자 주 발견 할 수 있다. 현대시사의 앞머리에 놓여있는 김소월과 만해 한용운의 시를 살펴볼 때 시인과 시적 화자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잘 알려진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살펴보자

시적 화자란 무엇인가

(7)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寧邊)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 김소월, 「진달래꽃」, 전문 인용

(8)

잘 알다시피 「진달래꽃」의 창작자인 김소 월과는 다른 여성 화자라고 볼 수 있다. 김소 월은 왜 여성화자를 등장시켰을까?

김소월의 「진달래꽃」 을 읽고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寧邊)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 김소월, 「진달래꽃」, 전문 인용

02 01

「진달래꽃」 에서 말하고 있는 시적 화자는 어떠한 성향을 지녔을까를 시의 문맥에서 추 론해보자

03 시적 화자가 시를 창작한 시인과 동일하 지 않을 때, 작품의 감상 측면에서 시를 읽는 독자는 어떠한 이점을 지니게 될까를 논의해 보자.

(9)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처럼 굳고 빛나던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 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 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일인 것 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10)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어떠한 어조를 지녔는가 생각해보자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을 읽고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 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처럼 굳고 빛나던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 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 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 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 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 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일인 것 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 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 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전문 인용

02 01

이 시에서 나타나는 어조는 시인과 동일한 것인가?

03

만일 어조와 시적 화자가 시인과 동

일한 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불일치는 어

떻게 설명해야할까?

(11)

창작물로서의 시와 시적화자

시적 화자와 시인은 일치할 수도 있지만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발생 한다. 시적 화자는 시인이 시의 주제 전달을 보다 효과적으로 하기 위 한 일종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여성화자는 이별의 슬픔과 고통을 전달하기에 적절한 시적 화자이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에서 보듯이 시적 화자는 이별의 감정을 전달하기에 적 절한 절절한 어조를 가지고있다. 이러한 어조가 바탕이 되어 있기에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는 어조는 독자의 정서에 와 닿을 수 있다.

(12)

창작물로서의 시와 시적화자

시는 하나의 창작물이다. 시인의 개인적인 일기와는 구분되는

것이다. 시가 내면적이고 고백적인 어조를 취하고 있다 하더라도

시인은 시를 창작할 때 시의 주제를 전달할 수 있는 시 속의 목소

리 즉 화자를 염두에 두고 있기 마련이다. 하나의 창작물로서 시의

화자는 시속에서 말하는 사람이며 이는 창조된 목소리와 창조된

화자로 나타날 수 있다.

(13)

극화된 화자

시 속의 화자가 시의 상황과 주제를 잘 전달하기 위해 마치 드라 마의 주인공처럼 극화된 화자로 등장할 수 있다.

교재 68면의 시 서정주의 「추천사」 를 살펴보자

(14)

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 듯이 香丹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벼갯모에 뇌이듯 한 풀꽃뎀이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조 내어밀 듯이, 香丹아

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다오

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다오!

西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波濤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香丹아.

- 서정주, 「鞦韆詞―春香의 말 壹」, 전문인용

(15)

서정주 「추천사」

이 시는 널리 알려진 고전 소설<춘향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를 살펴보면 시의 화자는 춘향이고 시 문맥 안에서 춘향의 말을 듣는 사 람은 춘향의 향단인 것을 알 수 있다. 시의 작품 안에서 말하는 사람 즉 화자 는 춘향이고 듣는 사람 즉 청자는 향단이다.

시 인

춘 향

독 자

(내적화자)

향 단

(내적청자)

작품

(16)

이 시의 시적 화자와 청자를 살펴보면 마치 연극의 구조를 보는 듯하다. 시 작품을 연극 무대라고 가정하면 연극무대에서 말하는 사람 춘향과 듣는 사람 향단을 설정해 볼 수 있다.

시인은 왜 이러한 극적인 상황을 시에 넣어 독자에게 들려주는 것일까를 생 각해보자.

서정주 「추천사」

시 인

춘 향

독 자

(내적화자)

향 단

(내적청자)

작품

(17)

시인은 왜 ‘춘향’이라는 널리 알려진 시적 화자 를 선택한 것일까 생각해보자

서정주의 「추천사」 를 읽고

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 듯이 香丹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벼갯모에 뇌이듯 한 풀꽃뎀이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조 내어밀 듯이, 香丹아

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다오

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다오!

西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波濤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香丹아.

- 서정주, 「鞦韆詞―春香의 말 壹」, 전문인용

02 01

이 시에서 춘향은 향단에게 말 건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내적 청자와 내적 화자의 설 정은 어떠한 효과를 발휘할까를 생각해보자.

03 <춘향전>을 모르는 외국 독자에게 이 시를 설명 한다고 가정하고 이 시의 상황과 화자와 청자의 상황을 풀어서 설명해보자

04 이 시의 화자가 지니는 극적인 요소를 생각해 보자

(18)

말을 들어보니

우리는 약소민족이라드군

낮에도 문 잠그고 연탄불을 쬐고 유신안약(有信眼藥)을 넣고

에세이를 읽는다드군

몸 한구석에 감출 수 없는 고민을 지니고 병장 이하의 계급으로 돌아다녀 보라 김해에서 화천까지

방한복(防寒服) 외피(外皮)에 수통을 달고 도처철조망(到處鐵條網)

개유검문소(皆有檢問所) 그건 난해한 사랑이다 난해한 사랑이다

전피수갑(全皮手匣) 낀 손을 내밀면 언제부터인가

눈보다 더 차가운 눈이 내리고 있다.

- 황동규, 「태평가」, 전문 인용

(19)

이 시의 화자의 특색을 어조 위주 로 살펴보자

황동규의 「태평가」 를 읽고

말을 들어보니

우리는 약소민족이라드군

낮에도 문 잠그고 연탄불을 쬐고 유신안약(有信眼藥)을 넣고

에세이를 읽는다드군

몸 한구석에 감출 수 없는 고민을 지니고 병장 이하의 계급으로 돌아다녀 보라 김해에서 화천까지

방한복(防寒服) 외피(外皮)에 수통을 달고 도처철조망(到處鐵條網)

개유검문소(皆有檢問所) 그건 난해한 사랑이다 난해한 사랑이다

전피수갑(全皮手匣) 낀 손을 내밀면 언제부터인가

눈보다 더 차가운 눈이 내리고 있다.

- 황동규, 「태평가」, 전문 인용

작품이 창작될 당시의 시대적 정황 을 조사해보고, 시대적 상황을 알려 주는 시어들과 어조는 어떻게 연관되 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이 시의 제목은 시적 어조와 어떠 한 연관을 지니는가

02 01

03

(20)

실타래 뭉치하고

백옥 실패 하나씩 갖고 태어나지.

그 실마릴 놓치지 않으려고

빈주먹 옹송그리고 탯줄 벌겋게 우는겨.

엉키고 꼬이는 실마릴 요모조모 풀다보면

그 끝자락에 무슨 값나가는 옥패가 나올 것 같지만 아무것도 없어. 그냥 실마리 푸는 재미지.

뭔 횡재하려고 욕심부리면 안 되는 겨.

실 꾸러미 속에 아무것도 없다 해서 생긴 말이

실속없다는 말이여. 실속 없는 게 그중 실속 있는겨.

다 살고 나면 빈손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게 돼 실패가 없으니 다시 감고 맺힐 일도 없잖아.

너 한번 살아봐라, 하느님이 욕이야 하겄어?

실속 챙기려다 실 뭉치에 갇힌 놈들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하는겨.

-이정록, 「실패」, 전문인용, 『어머니학교』, 열림원

(21)

이정록의 「실패」 를 읽고

실타래 뭉치하고

백옥 실패 하나씩 갖고 태어나지.

그 실마릴 놓치지 않으려고

빈주먹 옹송그리고 탯줄 벌겋게 우는겨.

엉키고 꼬이는 실마릴 요모조모 풀다보면

그 끝자락에 무슨 값나가는 옥패가 나올 것 같지만 아무것도 없어. 그냥 실마리 푸는 재미지.

뭔 횡재하려고 욕심부리면 안 되는 겨.

실 꾸러미 속에 아무것도 없다 해서 생긴 말이

실속없다는 말이여. 실속 없는 게 그중 실속 있는겨.

다 살고 나면 빈손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게 돼 실패가 없으니 다시 감고 맺힐 일도 없잖아.

너 한번 살아봐라, 하느님이 욕이야 하겄어?

실속 챙기려다 실 뭉치에 갇힌 놈들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하는겨.

-이정록, 「실패」, 전문인용, 『어머니학교』, 열림원

시의 화자는 누구이며 누구에게 말 건네는 구조 를 지니고 있는지 설명해보자

02 01

제목 ‘실패’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보자

03 이 시의 어조는 일상적인 어조에 가깝고 사투 리가 쓰이고 있다. 이러한 시적 화자의 D조에 대 하여 논의해보자

04 시의 화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무엇인가 를 생각해보고 ‘다 살고 나면 빈손이 얼마나 고마 운지 알게 돼’에 담긴 반어적 의미를 생각해보자

(22)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多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송수권, 「산문에 기대어」, 전문 인용, 시집 『산문에 기대어』, 문학사상사

(23)

송수권의 「산문에 기대어」 를 읽고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多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송수권, 「산문에 기대어」, 전문 인용, 시집 『산문에 기대어』, 문학사상사

이 시는 내적 화자와 내적 청자를 구분지 어 설명해보자

02 01

내적 청자로 ‘누이’를 선택함으로써 시의 정서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생각 해보자

03 ‘누이야’라는 부름과 ‘-는가’의 어조는 어 떻게 조응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24)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전문인용,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메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25)

시적 화자는 ‘우리’로 설정되어 있다. 개 별적 자아가 아닌 ‘우리’로 시적 화자를 설정 한 이유는 무엇이며 작품의 주제와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살펴보자

김광규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를 읽고

02 01

이 시의 시적 화자가 서술하는 시간을 구 분해서 설명해보자

03 이 시에서 나타난 각기 다른 두 개의 서술 시간 중 대조를 이루는 시어를 찾아보고 각 각의 대칭적인 의미를 생각해보자.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메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전문인용,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학과 지성사

(26)

시끄럽고 뜨거운 한 철을 보내고 뒤돌아본 결실의 과수원에서

사과나무 한 그루가 내게 말했다 오랜 세월 지나가도 그 목소리는 내 귀에 깊이 남아 자주 생각난다 -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땅은 내게 많은 것을 그냥 주었다 봄에는 젊고 싱싱한 힘을 주었고 여름에는 엄청난 꽃과 향기의 춤 밤낮없는 환상의 축제를 즐겼다

이제 가지에 달린 열매를 너에게 준다남 에게 줄 수 있는 이 기쁨도 그냥 받은 것, 땅에서, 하늘에서, 주위의 모두에게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 내 몸의 열매를 다 너에게 주어 내가 다시 가난하고 가벼워지면

미미하고 귀한 사연도 밝게 보이겠지 그 감격이 내 몸을 밝게 씻어주겠지 열매는 음식이 되고, 남은 씨 땅에 지면 수많은 내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구나 주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이 되는구나

- 마종기, 「과수원에서」, 부분 인용,

『이슬의 눈』, 문학과 지성사

(27)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사과나무로 되어 있 고 내적 청자는 나로 설정되어 있다. ‘내 귀 에 깊이’ 남은 ‘그 목소리’를 기억하는 회상 의 구조로 되어있다. 회상의 구조가 지니는 특징은 무엇일까를 논의해보자

마종기의 「과수원에서」 를 읽고

시끄럽고 뜨거운 한 철을 보내고 뒤돌아본 결실의 과수원에서 사과나무 한 그루가 내게 말했다 오랜 세월 지나가도 그 목소리는 내 귀에 깊이 남아 자주 생각난다 -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땅은 내게 많은 것을 그냥 주었다 봄에는 젊고 싱싱한 힘을 주었고 여름에는 엄청난 꽃과 향기의 춤 밤낮없는 환상의 축제를 즐겼다

이제 가지에 달린 열매를 너에게 준다 남에게 줄 수 있는 이 기쁨도 그냥 받은 것, 땅에서, 하늘에서, 주위의 모두에게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 내 몸의 열매를 다 너에게 주어 내가 다시 가난하고 가벼워지면 미미하고 귀한 사연도 밝게 보이겠지 그 감격이 내 몸을 밝게 씻어주겠지 열매는 음식이 되고, 남은 씨 땅에 지면 수많은 내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구나 주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이 되는구나

- 마종기, 「과수원에서」, 부분 인용, 『이슬의 눈』, 문학과 지성사

02 01

시적 화자를 ‘사과나무’라는 점에서 시의 주제를 전달하기에 어떠한 이점을 지니게 되 는지 발표해보자

참조

관련 문서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 인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 타카야나기 리사부로: 우시마츠에게 출신 을 약점으로 삼아 선거를 도와달라고 하지 만 거절당하자 우시마츠의 출신을 학교에 알리고 이노코를 죽임.. 우시마츠가 학교를

러시아 형식주의자는 일상 언어란 사물을 지시하고 의사를 전달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반면에, 시적 언어는 지시와 전달이 라는 일상 언어의 기능에 의존하면서도 그

이러한 은유의 의미전이가 적절히 성립되었기에 다음 행의 ‘나는 그대 흰 그 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 뱃전에 부서리’라는 시상이 적절히 어울리게 된다.. 만일 이 시

문제를 가진 사원이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흉금 없이 털어 놓도록 허용했을 경우 그는 필시 치료가치를 경험할 것이다.. 그가 청원한 모든 것을 해결 해주라는

⑤ 필요한 때는 교육과 훈련을 실시하여야 하고, 때에 따라서는 전직, 승진 등 재배치와 같은 조직의 재조정작업을 함으로써 적정배치의 가능성을 높여야

우리나라 기업이 해외에 진출할 때에 진출하는 국가의 이질적인 문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기업의 경쟁우위가 우리나라 특유의 문화에서

과학의 언어와 시의 언어가 이와 같이 좋은 대조를 보이는 것은 그 양자가 언어 전달의 양극단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지 과학의 언어 를 포함한 보통의 언어와 시의 언어를 엄연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