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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신파극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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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의 연극사 (1910 - 해방전)

중급연기 2 13주차

(2)

(1910-1919) 신파극 시대 (1920-1929) 학생극, 토월회

(1930-1939) 극예술연구회, 동양극장 (1940-1945) 조선연극협회

현대의 연극

(3)

-일본에서 들어온 신파극 양식이 우리 극계를 주도했던 시기 -창극은 계속되는 일제의 탄압으로 위축,

-그런 가운데 일본 거류민을 따라 들어온 신파극이 일인 전용극장에서 활발히 공연되면서 우리 극 계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신파극은 우리 극계의 주류로 발전.

-따라서 수백 년 동안 흘러온 재래의 전통극은 중앙무대를 잃고 변두리로 밀리면서 급속히 퇴조.

-우리나라 최초의 신파극단은 1911년 12월에 조직된 임성구의 「혁신단」

1910년대 – 신파극 시대

(4)

혁신단

-1911년 임성구 창립.

-우리나라 최초의 신파극단.

-1911년 11월 창립공연 「불효천벌」

-1912년 1월 「육혈포 강도」 등의 레퍼토리로 대성황.

-1921년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파극단으로 군림.

-임성구 사후에 그의 동생 임용구가 극단을 이끌면서 주로 연쇄극 공연.

-민중계몽의 수단으로 연극을 이용, 다수의 자선 공연.

-서울과 지방을 오가면서 공연 활동을 펼쳐 연극의 대중화에 기여.

-모든 활동의 중심이 임성구 1인에게만 국한되어 있어서 공연 자체의 발전적 면모는 거의 눈에 띠 지 않음.

-레퍼토리의 부족과 영화의 발달로 1920년 이후에 급격히 쇠퇴.

(5)

1920년대 – 학생극 활동 활발

-3 · 1운동 이후 한국 민중 속에 광범위한 근대적 자각이 일어나자 연극계에서도 신파 극에서 벗어나 신극을 지향하기 시작.

-현철(玄哲)의 배우 학교 창설과 연극 평론활동 -학생들이 중심이 된 소인극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

-토월회 (전문극단으로 발전한 사실주의 연극을 시도한 예술단체)

-민족운동의 성격을 띤 계몽운동으로 전개 → 풍속개량이라든가 신교육 사상고취, 또 는 종교를 통한 사회개선 등의 관념적 차원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물산장려나 기아구 제, 수재민 구호사업 등의 실질적인 면으로 방향을 돌리기도 하였음.

-소인극 운동은 20년대 연극전반에 민족의식을 강하게 투사함으로써 연극을 단순한 오락이 아닌 사회 변혁의 기능이 되게 함.

(6)
(7)

-1923년 5월. 박승희 외 7명 창립. (동경대 유학생모임)

-무대예술 지망의 박승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연극과는 거리가 멀어 처음 에는 예술전반에 걸친 문예서클로 시작 .

-정통적인 서구근대극(사실주의연극)을 시도.

: 1923년 7월 4일에 조선극장에서 제1회 공연, 연기, 무대미술이 주목을 끔.

-사실적 무대장치 → 획기적.

-일본의 삼류 신파극을 못 벗어나던 기성연극계를 물리치고 혁신을 가져오 도록 함 .

토월회 (1923-1946)

(8)

토월회

-정통극을 국내에 처음 도입한 극단 ‘토월회’ 창립동인들. 맨왼쪽이 박승희다.

무용가 최승희(오른쪽 사진)는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9)

1930 년대 – 신극운동 본격화

-해방 전 연극사에 있어서 우리 무대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

-「극예술연구회」가 창립되면서 신극운동이 본격화 되기 시작.

-대중극 활발.

: 1910․20년대의 신파를 극복하고, 동양극장이라는 최초의 전문 공연장을 가짐으로써 기술적인 면에서 세련되게 발전해 나간다.

기술면에 있어 당대 어느 연극 부류에도 뒤지지 않았던 대중극은 이를 바탕으로 신극 과 대중극의 조화를 모색함.

(10)

극예술연구회

-본격적인 근대극운동으로서 리얼리즘 극이 자리를 잡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며, 많은 유능한 극작 가를 배출.

(1): 해외문학파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시기 (1931.7 - 1935.10) 서양연극의 소개와 번역극 공연이 중심을 이룬다.

(2): 유치진이 주도권을 잡은 시기(1935.11 - 1938.3) 창작극 공연의 강화와 전문화 단계

공연장도: 소극장 위주 → 흥행성을 고려한 대극장 위주로 전환 계속되는 당국의 압력과 스스로의 통속화로 인해 1938년 해산.

(3): 「극연좌」 (劇研座) 로 이름을 바꾸고 공연활동을 재개한 시기 (1938 - 1939.5) : 상업화가 더욱 노골화

(11)

극예술연구회 창간호 표지

1932년 극예술연구회의 공연

(12)

-1930년대 전반기의 대중극은 신파적 색채가 농후했고 관객들의 말초적 호기심을 충 족시키는데 급급했다.\

-1935년 11월 「동양극장」이 생기면서 대중극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전용 상설극장. 스텝진과 배우진을 갖추고 기술적으로 잘 만들 어진 연극을 대량공급.

:동양극장의 설립은 연극 종사자들에게 전문적인 직업인의 위상을 갖게 했다. 또, 동 양극장의 연극은 초기 신파에 비해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연기 면에서 신파조를 지 양하고 사실적인 무대를 표방.

-30년대 대중극 소재: 화류비극이나 가정비극이 주류. =개인적 욕망에만 주류.

대중극

(13)

-1935년 동양극장의 모습 / 1970년대 영화관으로 변모한 동양극장의 모습.

임선규 ‘사랑에 속고 돈에울고’

동양극장 전속극단 청춘좌에 의해 1936년 7월 23일부터 31일까지 초연됨.

‘30년대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면서 대중 신파 극의 상징이 됨.

(14)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되자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최악으로 치 닫게 됨.

-한국내에서 노골적인 친일극이 나타나는 것은 1939년 「협동예술좌」의 활동을 통해서이다. → 연 극인들을 널리 모으고자 여러 극단들과 교섭을 벌여 끌어들인다.

-1940년 12월 「조선연극협회」 결성.

-한편 극작가들은 협회 산하에 따로 「극작가동호회」를 조직하였는데, 회장에 유치진, 회원에 박영 , 함세덕.

- 일제는 국민연극경연대회를 개최, 수상작은 유치진의 <대추나무>.

-국민연극운동은 해방 직전까지 게속됨. 1939년 이후 약 5년 간에 걸쳐 이 연극운동은 일제가 필요 로 했던 ‘전체주의적 신체제’를 달성하는데 기여.

1940년대

(15)

-1940년 12월 22일 일제가 연극에 통제를 가하기 위하여 ‘연극의 향상과 지도 및 연극 인의 보호’라는 명분 아래 강제로 결성한 단체.

회원들에게 회원증을 발급해주며 많은 혜택을 줌.

-이 협회는 9개 극단체 3백여명을 흡수하였는데, 이는 가입하지 않은 단체는 전국 어 디에서도 무대공연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의 대표적 국민연극 단체는 유치진이 대표로 있었던 「현대극장」.

-이 극단의 구성원에는 前 토월회, 극예술협회, 동경학생예술좌의 회원들과 일부 상 업극단,영화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연극협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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