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1.
1)
연구목적 및 의의 1)
오늘날 인간의 가장 중요한 삶의 터전인 도시 지역은 인간과 환경 간의 상호 작용이 가장 분명 하게 드러나는 장소이다 어떤 지역의 자연 환경은. 그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의 생활양식과 삶의 질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며 도시화로 인한 인구의 성장, 과 거주 지역의 확대는 다시 자연 환경에 영향을 준다. 이와 같이 인간문화자연 환경 사이에는․ ․ 끊임없이 피드백(feed back)이 일어난다(Detwyler and Marcus, 1972).
대체로 도시는 촌락과는 달리 자연 환경의 영향 을 크게 받지 않으며 인문사회적 요인에 의해, ․
만들어진 생활공간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도시의 입지나 도시 성장의 가능성 및 그 한계는 자연 환경의 제한을 받으며 그 중에서도 특, 히 지형 조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과학기술이 고. 도로 발달한 현대에도 불리한 지형 조건을 극복하 기 위해서는 경제적 비용을 감수해야 하며 이는 지, 속적으로 도시 성장의 속도와 방향에 영향을 준다.
도시의 입지 및 시가지 확대 과정을 세밀히 살 펴보면 도시화가 오로지 사회적 요인만이 작용하, 여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도시화가 이. 루어지려면 지형적 여건을 중심으로 한 지표환경 이 사회적 배경에서 야기되는 도시화 압력을 수용 해 주어야 한다 예를 들면 서울이 원래 입지했던. , 사대문 내부 지역을 벗어나 오늘날과 같은 대도시 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사대문 밖의 구릉지와
* 고척고등학교 교사(Teacher, Gochuk High School)([email protected])
서울의 시가지 확대와 지형적 배경
김 동 실*
The Expansion of Urbanized Area and Geomorphic Environments in Seoul
Dongsil Kim*
요약 요약 요약
요약 본 연구에서는 서울의 입지와 시가지 확대 과정을 지형 환경과 관련시켜 살펴보고자 한다 시기별로 시가지 범: . 위를 추출하여 지형조건과 관련시켜 분석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서울의 시가지 발달은 청계천 분지에. 서 시작되어 청계천 분지 밖 구릉지와 하천주변의 저습지로 확대되었다 저습지 개발은 일제강점기에 한강지류 주변의. 저습지가 개발되기 시작되어 본류주변의 저습지 개발로 확대되었고 마지막으로 한강 본지류가 만나는 합류점 부근, ․ 의 대규모 저습지가 개발되었다 그런데 저습지 개발에는 발달된 토목기술과 많은 자본투자가 필요하므로 저습지는 상. 대적으로 개발시기가 늦을 뿐만 아니라 개발된 이후에도 침수피해방지에 많은 비용이 추가되고 있다 이는 서울과 같. 은 대도시에도 시가지 확대에는 지형환경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으며 지형환경의 영향은 과거에만 중요했던 것이 아, 니라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주요어주요어
주요어주요어 지형환경 시가지 확대 청계천 분지 구릉지 저습지: , , , , Abstract
Abstract Abstract
Abstract This study is to review the site of Seoul and its urbanized area expansion in relation with a geomorphic: environments. Surveying on the urbanized area of Seoul by period and related geomorphic conditions found the following conclusions. Seoul urbanized area had been expanded from the cheonggyecheon drainage basin to its surrounding hills and marshland. The marshland development began during the Japanese period from around the tributaries of the Hangang river and expanded to the areas by the main stream of the river. The extensive marshland at the point where the main stream and its tributaries of the river join has been developed relatively new. The marshland development, which took advanced engineering skills and a huge investment, is comparatively later and also involves large additional expenses to keep the areas from food damages. Judging from the above findings, this study concluded that the urbanized area expansions in a big metropolitan city such as Seoul, are greatly influenced by geomorphic environments and the importance of geomorphic conditions still hold true even today when scientific and technological developments have reached unprecedented heights.
Key Words geomorphic environments, urbanized area expansion, cheonggyecheon drainage basin, hills, marshland:
한강 및 이에 합류하는 샛강의 저습지가 도시화 압력을 수용해 주었기 때문이다 오경섭( , 2001).
도시는 그 지역의 자연 환경 속에서 각 시대의 이념이나 기술문화정책에 따라 형성되고 발달․ ․ 되며 변형된 것이 누적되어 이룩된 복합적인 산물 이다 따라서 현재의 도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 해서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인간이 어떻게 자연 환경에 적응해왔고 인문사회 환경의 변화에 따, ․ 라 어떻게 변형시켜왔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결. 국 한 도시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 과 환경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포괄하는 종합적, 입장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본 연구에서는 서울의 형성과 시가지 확대 과정을 지형환경과 관련시켜 살펴보고 지형조건을 고려하여 시가지 확대의 양, 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서울 지역의 지. 형 환경과 관련하여 도시화가 진전된 양상을 파악 하려는 점에서 서울 지역의 지역지리 연구 및 학 습을 위한 기초 자료를 제공하는 의의를 지니며, 현장 지리 교육에 있어서 서울 지역의 지역화 학 습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연구방법 2)
본 연구를 수행하기 위하여 일련의 실내 작업 과 답사를 병행하여 실시하였다 지형 환경을 파. 악하기 위해 수치 지도를 이용하여 음영 기복도 를 제작분석하였고 지질도와 지형도 (Hillshade) ․ ,
를 비교분석하였다 또한 시가지 확대 과정을 파․ . 악하기 위해 고지도와 문헌 자료 지형도 및 인공, 위성영상을 시기별로 수집하여 분석하였다.
우선1:5,000 수치 지도를 이용하여 음영 기복도 를 제작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지형의 기복을 효과. 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북서방향에서 빛을 비추어 그림자 효과를 내고 높이에 따라 색상변화를 주었 다 이렇게 제작한 음영 기복도를 통해 연구지역의. 거시적 지형윤곽과 기복을 파악하였다 또한. 1:50,000 지질도를 통해 연구 지역의 기반암 분포를 파악하 고 이와 관련된 지형환경 특색을 살펴보았다 이, . 와 같은 분석 과정을 통해 연구 지역의 지형 경관 을 거시적 시야에서 미시적 시야까지 규모를 연계
시켜 파악하였다 (scale linkage) .
한편 서울의 시가지 확대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조선 시대는 고지도와 문헌 자료를 통해 취락발달 지역을 파악하고 시가지 범위를 추정하여 지도화, 하였다 실측된 지형도가 만들어진 일제 강점기부. 터는1:50,000지형도(1915 , 1957 )년 년 를 이용하여 시가지 범위를 추출하였다 시가지 확대가 본격적. 으로 이루어진 1970년대 이후는 인공위성 영상자 료를 토지피복 분류하여 시가지화 지역의 범위를 파악하였다 본 논문에 사용된 위성영상자료는. 1973 년Landsat MSS자료, 1985년과1992년의Landsat
자료 년의 자료이다 영상
TM , 2001 Landsat ETM . 분류방법은 감독분류 방법(Supervised classification) 가운데 최대우도법(Maximum likelihood classifier) 을 사용하였고 훈련지역은, 1:50,000지형도를 이용 하여 위성영상과 비교하여 선정하였다.
답사는 서울의 시가지 확대를 수용해준 주요 지 형요소인 분지 구릉지 및 하천주변 저습지를 중심, 으로 지형 경관의 특징과 시가지 발달 양상을 비 교 관찰하였다 특히 한강 본지류 주변 지역의. ․ 답사에서는 시가지 확대 과정에서 지형적 요인이 어떻게 관련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인근 구릉 지와 저습지의 지리적 특성과 토지이용상황을 관 찰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서울의 시가지가. 오늘날과 같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지형적인 조건 이 어떻게 관련되었는지를 종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서울의 지형 환경 2.
서울은 전국적인 시야에서 볼 때 산계, (山系)와 관련해서는 광주산맥 내에 자리 잡고 있으며 수계, 와 관련해서는 한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다
(水系) .
거시적으로 보면 한강은 북동 남서방향의 광주산- 맥을 동서로 가로질러 나가며 산지를 폭넓게 해체 시키고 있다 따라서 서울은 광주산맥에 속하는 산. 들과 이들 사이에 발달한 한강 본류 및 지류의 하 곡이 제공하는 지형환경을 바탕으로 도시화가 진 전되어온 지리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적 규모에서 보면 서울은 도봉산과 수락 산 불 암 산 아 차 산 대 모 산 구 룡 산 우 면 산 관․ ․ ․ ․ ․ ․ 악산봉산응봉북한산․ ․ ․ 등의 산들이 외곽을 둘 러싸고 있는 서울분지 내에 입지하고 있다 그림( 1).
분지 중앙에는 북악산인왕산남산낙산으로․ ․ ․ 둘러싸인 작은 분지인 청계천 유역분지가 형성되 어 있다 동서방향으로 흐르는 한강본류는 분지중. 앙을 관통하고 있으며 한강의 지류인 불광천중, ․
랑천탄천안양천은․ ․ 남북방향으로 흘러 한강본 류에 합류한다 이들 산지와 하천 사이에는 산각과. 저산성 구릉 및 작은 분지가 발달해 있으며 하천, 주변은 저지대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서울지역을. 도봉산
도봉산도봉산
도봉산 수락산수락산수락산수락산
북한산 북한산 북한산 북한산
불암산불암산 불암산불암산
인왕산 인왕산 인왕산
인왕산 낙산낙산낙산낙산 아차산아차산아차산아차산
남산남산남산 남산 북악산 북악산 북악산 북악산
청계산청계산청계산 청계산 관악산
관악산 관악산 관악산
우면산 우면산 우면산
우면산 대모산대모산대모산대모산 응봉
응봉 응봉 응봉 봉산봉산 봉산봉산
왕왕 왕왕 숙 숙 숙 숙 천 천 천 중 천
중중 중 랑 랑랑 랑 천천천 불 천
불 불 불 광 광 광 광 천 천 천 천
탄 탄 탄 탄 천 천 천 천 안
안 안 안 양 양 양 양 천 천 천 천 굴굴
굴굴 포 포 포 포 천천 천천
그림 1. 음영기복도
구성하는 주요 지형요소는 산지와 구릉지 분지, , 하천주변의 저습지라고 할 수 있다.
산지 1)
서울은 경기편마암 복합체에 관입된 대보화강암 지대에 걸쳐있기 때문에 기반암이 주로 편마암과 화강암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림( 2). 서울의 산들 중 에서 도봉산(739m)․북한산(836.5m)․북악산(342m) 인왕산(338m)관악산(629m)수락산(687.8m)
․ ․ ․ ․
불암산(508m)․아차산(348m)은 화강암 산지에 속 하고, 우면산(290m)․구룡산(283m)․대모산(293m) 은 편마암 산지이다 그런데 산지는 기반암이 화강. 암이냐 편마암이냐에 따라 산지사면의 발달 양상, 풍화층의 두께 식생의 종류 및 밀도 등이 다르며, , 이에 따라 토지용도도 다르게 이용되고 있다.
화강암은 조암광물 입자가 불규칙하게 배열되어 있으며 공극율이 낮고 기계적화학적으로 강한․ 암석이기 때문에 절리밀도가 낮을 경우에는 풍화 에 강한 저항력을 보여 석산을 이루며 암괴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한다 기근도( , 1999).북한산의 인수봉 처럼 기반암이 거대한 도움의 형태를 이루며 노출 된 경우도 있다 화강암 산지에서는 풍화물질이 조. 립질인 왕모래이기 때문에 수분보유력이 낮고 피 복두께가 얇아 식생이 매우 불량하며 식생은 척박, 한 산성토양에서도 자랄 수 있는 소나무 등의 침
엽수가 주종을 이룬다.
편마암은 풍화에 약한 암석이어서 일정 두께까 지는 쉽게 풍화되지만 이 과정에서 생성된 많은 미립물질이 수분의 통로를 막아버려 심층풍화되지 는 않는다 민석규( , 2003). 그 결과 편마암 산지는 일정두께의 풍화토가 덮인 토산을 이룬다 편마암. 산지는 풍화토층이 발달되어 있고 풍화물질이 미 립물질이어서 수분보유력이 높기 때문에 식생발달 이 매우 양호하며 활엽수가 잘 자란다.
구릉지 2)
일반적으로 구릉지는 산지와 평지의 점이적인 지 형으로 정의되는데 자연지리학사전편찬위원회( , 1996), 산지에 비해 규모와 기복이 작으며 산지가 해체되 어 가는 과정에서 산록대가 구릉지로 발달해 가는 경향이 있다.
한강이북의 대보화강암 관입지대는 차별침식으 로 형성된 평지와 배후산지 사이에 화강암 구릉들 이 발달해 있으며 구릉과 구릉 사이에는 소곡지를, 이루고 있다 도봉산 북한산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 - 산줄기 동사면과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의- - 서사면은 중랑천의 지류들에 의해 해체된 산지의 산록대가 구릉지로 발달해 있다.
서울의 편마암 지역에는 낮은 산지와 미기복의 구릉지가 발달해 있다 강북의 편마암 지대인 서부. 지역과 안산과 남산의 남사면은 낮은 산지와 구릉 으로 해체되어 있다. 연희산(104.3m)․성산(66m)․ 노고산(106m)․와우산(101m)은 높이가 100m내외 에 불과하며 남산의 남사면도, 100m 미만의 낮은 산록대를 형성하고 있다 강남의 편마암 지대는 우. 면산(290m)․구룡산(283m)․대모산(293m)처럼 높 이가 300m도 채 안되는 낮은 산지를 이루거나 강 남구 일대처럼 미기복의 구릉지대(concave-convex
를 이루고 있다 hills) .
분지 3)
분지란 평야 또는 평지가 산지로 둘러싸인 지형 을 의미한다 장재훈. (2002)은 지질적으로 볼 때 화 강암이 편암이나 편마암 등 심층풍화에 대한 저항 도가 큰 암석으로 둘러싸여 있을 경우 화강암 지
0 5 10 Kilometers
석 석석
석 회회회회 암암암암 충충충충 적적적적 층층층층 편
편 편 편 마마마 암마암암암 화
화화 화 강강강강 암암암암
한 강 한 강 한 강 한 강
그림 2. 지질도
역은 다른 암석지역보다 화학적 심층풍화를 빨리 받아 두꺼운 풍화대가 형성되고 그로인해 차별적 인 침식이 진행되어 침식분지나 분지성 지형을 이 루게 되는데 반해서 편암이나 편마암등 변성암류 암석은 화강암 지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고지를 이루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침식분지는 암. 석의 종류가 서로 다른 지역에서만 발달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화강암 지역일지라도 절리의 발달 차. 이와 지형적 차이로 인해서 화학적 심층풍화가 차 별적으로 진행된 곳에서는 차별적인 침식이 진행 되어 분지가 형성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청계. 천 유역분지는 주변의 화강암 산지에 비해 절리의 밀도가 높아 차별적인 침식이 이루어져 형성된 분 지이다.
하천 저습지 4)
저습지란 범람원이나 하중도와 같은 하천 충적 지 삼각주나 석호와 같은 해안 충적지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본 논문에서는 침수의 위험이 있으나 인 간의 치수능력으로 개발이 가능한 저지대를 말한 다 서울에서 하천 주변에 발달한 대표적인 저습지. 는 범람원과 모래톱(sand bar)․하중도 등이다.
한강하류 지역에 여름철 강수가 집중할 때 만조 가 겹치면 한강이 역류하여 배수를 방해하기 때문 에 물이 빠지지 못하여 한강 지류는 자주 범람한 다 또한 한강처럼 본류와 지류사이에 하천규모의. 차가 클 경우 지류의 유수가 본류양안에 형성된 자연제방에 막혀 곧장 본류로 유입되지 못하기 때 문에 지류주변에는 배수가 불량한 저습지가 매우 넓게 발달한다.
년과 년 지형도에서 하천저습지를 추출 1918 1957
한 것이 그림< 3>과 그림< 4>이다 이를 보면 한. 강의 지류인 중랑천안양천탄천 주변에는 범람․ ․ 원이 넓게 발달해 있고 한강본류 주변의 노유동과, 자양동 부근 반포지역 이촌동과 서빙고동 부근에, , 는 모래톱이 발달해 있다 그리고 한강 본류에는. 잠실도저자도여의도난지도․ ․ ․ 등 비교적 큰 하 중도들이 발달해 있다. 1950년대는1910년대에 비 해 안양천 하류의 범람원이 크게 축소되어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안양천유역 저습지 개발이 있 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시가지 확대 과정 3.
청계천 유역분지와 주변 구릉지의 시가지화 1)
(1) 서울의 입지와 청계천 유역분지 내 시가지 발달 서울은 수도로서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고 인구, 천만을 부양하며, 600년 이상의 사회경제적인 변․ 화를 수용할 수 있는 지리적으로 잠재력이 큰 도 시이다 이러한 잠재력은 일차적으로 서울의 절대. 적상대적 위치의 중심성과 산지와 하천의 조화․ 에 바탕을 둔 천혜의 자연환경적 조건에서 제공되 었다고 할 수 있다.
한강 하류에 입지한 서울은 해안과 인접하고 있 어 수로로 전국과 연결될 수 있으면서도 직접적으 로 외해와 접하지 않기 때문에 폭풍우 등에 보호 될 수 있는 좋은 위치이다 성효현( , 1994). 그리고 동서방향의 교통이 불편한 우리나라에서 남한강과
0 5 10 Kilometers
범범 범범 람람람람 원원원원 하 하 하 하 중중중중 도도도도
그림 3 1910 . 년대 하천 저습지
0 5 10 Kilometers
범범 범범 람람람람 원원원원 하 하 하 하 중중중중 도도도도
그림 4. 1950 년대 하천 저습지
북한강의 두 지류를 가진 한강은 국토의 중심부를 동서로 깊숙이 연결시켜 주는 통로의 역할을 해 주었다 또한 청계천 유역분지밖에 발달한 소규모. 분지와 곡지 그리고 낮은 구릉지와 하천주변의 저, 습지는 도시의 성장과 더불어 시가지 확대를 수용 해 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조선 태조가 나라를 세운 후 새 수도로 선정한 지역은 북악산 남쪽의 청계천 유역분지였다 분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지들의 능선을 따라 도성 이 축성되었고 산능선의 가장 낮은 지점에 개의, 8 성문이 세워졌다 이들 성문은 성곽으로 폐쇄된 도. 성안과 외부를 연결하는 관문의 기능을 하였을 뿐 만 아니라 도성내의 시가지가 확산되는 출구의 역, 할을 하였다.
청계천 유역분지 내 시가지 형성은 주거지로서 지형적 조건이 가장 좋은 북악산 산록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북악산 남측 산록대는 배산임수. (背山 하고 북고남저 하여 배후의 산지가
) ( )
臨水 北高南低
북풍을 막아주고 주택이 남향하게 되며 배수가 양, 호하여 집터로서 매우 좋은 지역이다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꼽히는 곳에 먼저 궁궐 종묘 사직단이, , 자리 잡았고 북악에서 응봉을 연결하는 산록대에, 는 권문세가들의 저택이 입지하여 소위 북촌이라 불리우는 양반촌을 형성하였다 남산의 북사면은. 양반의 자손이기는 하나 권문세가가 아니거나 현직 에 있지 않은 양반들이 주로 거주하여 남촌을 이루 고 있었으며 인왕산 동측 산록대도 양반계층이 거, 주하여 우대라 하였다 이와 같이 분지주변의 산록. 대는 일찍이 양반들의 거주지역이 되었다 그림( 5).
이에 비해 지대가 낮아 주거조건이 열악한 청계 천 남쪽의 을지로 일대에는 평민과 노비계층이 살 고 있어 하대라 하였으며 청계천 북쪽의 종로일대, 는 하천에서 약간 떨어져 있어 침수의 위험이 적 은 평지였기 때문에 시전행랑이 건설되어 있었다.
행랑은 상가로서 뿐만이 아니라 정부의 여러 관서 에 딸린 문서보관서 따위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종로일대에는 중인이나 상인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었다 범람이 잦았던 청계천 주변은 조선 전기에. 는 주민들이 거주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피폐된 농촌의 유민들이 서울로 들어 와 열악한 주거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청계천 주변 에 정착함으로써 서민들의 주거지역이 되었다.
청계천 유역분지 밖 구릉지로 시가지 확대 (2)
조선시대 한성부는 도성과 성저십리(城底十里)를 관할구역으로 하였는데 도성밖 성저십리 지역은 산림보호의 목적으로 개발을 제한하였기 때문에 조 선초기에는 거주하는 자가 적어 인구밀도가 아주 낮았었다 동국여지비고에 기록된 세종 때 한성부. 인구를 보면109,372명으로 이중94.5%인103,328명 이 도성내에 거주하고 성밖 성저십리에는 5.5%인
명만이 거주하였다 표 6,044 ( 1).
그러나 조선초기부터 도성내는 이미 인구가 조 밀하여 집터가 부족하였다 따라서 도성내에 집터. 를 분양받지 못한 사람들은 도성에서 가까운 성저 십리 지역에 모여 살았다 태조 때 이미 경중구역. 으로 포함된 서대문 밖의 반송방(盤松坊)과 서소문 밖의 반석방(盤石坊)을 비롯하여 세종때 동대문 밖 의 숭신방(崇信坊)과 인창방(仁昌坊), 수구문 밖의 예성방(禮盛坊)과 성신방(誠信坊)은 성저지역임에 도 공식적으로 집터가 분배되었다 박경용( , 2000).
성저십리 지역에서 먼저 집터로 분배된 지역들 은 지형적으로 취락형성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지역이었다 성저지역중 처음. 5부에 편입된 반석방과 반송방은 안산에서 시작하여 아현 대현, , 청파로 이어지는 구릉성 산지의 동쪽에 해당하므 로 성저십리에서는 주거조건이 가장 좋은 지역이 다 이현군( , 1997).이에 비해 동대문밖의 숭신방과
연도 성내 성외 합계
호 인구 호 인구 호 인구
세종 년 10 년
(1428 ) 16,921 103,328 1,601 6,044 18,522 109,372 정조 년 13
(1789) 22,094 112,371 21,831 76,782 43,929 189,287
출처 양옥희: , 1991,서울의 인구 및 거주지 변화: 1394 1945, p.23.~표 1. 한성부 성내외 호구분포의 변화 ․
인창방 수구문밖의 예성방과 신성방 일대는 청계, 천이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유입하는 지역으로 지형이 낮고 습하여 취락발달에는 불리하지만 하 천 충적지는 토양이 비옥하여 농사가 잘되고 소비 지인 도성에서 가깝기 때문에 일찍부터 근교농업 을 하는 취락이 발달하였다.
한편 조선후기에 한강을 이용한 상업과 유통이, 발달하면서 한강변의 나루터를 중심으로 주변 구 릉지에 취락이 크게 번성하였다 홍수의 위험이 있. 는 강변에서 살아야하는 나루터 취락들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점포는 배가 닿는 강변에 지었고 집, 과 창고는 범람에 안전한 뒤편의 구릉지에 지었기 때문이다 도성 밖 외방도로변에도 비록 규모는 작. 지만 취락이 발달하게 된다 서울 북쪽 도봉산 기. 슭에 있는 누원(樓院)이나 홍제연서구파발로․ ․
이어지는 도성 북서쪽의 취락 밀집 지역은 서울을 중심으로 지방을 연결하는 간선 도로상에 발달한 시가지였다 양재는 서울과 삼남지방을 연결하는. 도로의 결절점에 위치하여 번성한 역원취락이다.
이상을 정리해보면 서울은 청계천 유역분지가 가장 먼저 시가지화되었고 성문 밖 성저십리의 구, 릉지로 시가지가 확대되었다 조선후기에는 한강의. 양안에 발달한 나루터를 중심으로 한강변 구릉지 에 취락이 크게 발달하였으며 외방도로변에도 소, 규모 역원 취락이 발달하였다. <그림 6>은 조선시 대 시가지 범위라고 추정되는 부분을 음영기복도 위에 표시한 것이다
청계천 유역분지 밖 한강변으로의 시가지 확대 2)
그림 7. 1910 년대 시가지범위 그림 8. 1950 년대 시가지 범위 그림 5. 도성내 도시구조
경복궁경복궁경복궁 경복궁 창경궁창경궁창경궁창경궁
창덕궁 창덕궁창덕궁 창덕궁 종묘 종묘 종묘 사직 종묘
사직 사직 사직
북 촌 북 촌 북 촌 북 촌
남 촌 남 촌 남 촌 남 촌
하 대 하 대 하 대 하 대 시 전 시 전 시 전 시 전 우 대
우 대 우 대 우 대
숙청문 숙청문숙청문 숙청문
혜화문혜화문 혜화문혜화문
흥인문흥인문흥인문 흥인문 광희문광희문 광희문광희문 숭례문숭례문
숭례문숭례문 돈의문 돈의문돈의문 돈의문 소의문 소의문 소의문 소의문 창의문 창의문 창의문 창의문 인인 인인 왕왕 왕왕 산산 산산
낙낙 낙낙 산산 산산
남 산남 산 남 산남 산 북 악 산
북 악 산북 악 산 북 악 산
응 봉 응 봉응 봉 응 봉
청 계 천 청 계 천 청 계 천 청 계 천
그림 6. 조선시대 시가지 범위
누원누원 누원누원연서 연서연서 연서 홍제 홍제홍제 홍제
뚝섬뚝섬뚝섬 뚝섬
양재양재양재 양재 구파발구파발
구파발구파발
양화진양화진 양화진양화진
노량진 노량진노량진 노량진
두모포 두모포 두모포 두모포
동작진동작진 동작진동작진 마포 마포 마포 마포서빙고서빙고서빙고서빙고
일제강점기때 일본인과 농촌 유민의 서울 유입 이 늘고 교통수단의 혁신과 토목기술의 발전으로, 시가지는 청계천 유역분지를 벗어나 크게 확대되 기 시작하였다 청계천 분지 밖 구릉지의 본격적인. 시가지 개발이 이루어졌으며 저습지 매립에 의한, 공장부지나 주택지 증설이 이루어지면서 시가지의 외연확대가 두드러졌다.
남산산록에 형성된 일본인 주거지역 (1)
일본인의 한성부 거주가 허용된 시기는1885년 으로 처음에는 일본공사관이 입지해 있던 진고개 일대 즉 오늘날의 중구 예장동주자동에서 충무, ․ 로 1가에 이르는 지역이 일본인 거류구역으로 설 정되었다 차츰 일본인의 이주가 늘어나면서 도성. 내 일본인 거주지역은 확산되었다 그런데 주거공. 간으로 도성내에서 최상의 입지인 북촌지역은 당시 한국인 상류층이 거주하고 있어 일본인들이 진출하 기는 어려웠다 그러므로 초기에는 사대문 내에서. 비교적 땅값이 저렴하고 토지매입도 용이한 남산 북측산록과 북서산록이나 조선시대에 서민들의 주 거지역이었던 을지로 일대를 주로 공략하였다.
한일병합이후 일본인의 이주가 급증하자 일본인 거주지역은 사대문밖의 구릉지대로 거주지역을 넓 혀나갔다 남대문 밖에서 후암동 남영동 청파동. , , , 원효로에 이르는 남산 서사면 구릉지와 장충동 신, 당동 옥수동에 이르는 남산 동사면 구릉지 동대, , 문밖 창신동 보문동 안암동으로 이어지는 구릉지, , 에 주로 거주하였다 일본인 거주지역은 도성에서. 가장 먼저 도로 개수공사가 실시되고 상수도 시설 을 갖추었으며 전차도 연결되어 일본인들의 생활 에 편의를 도모하였으며 일본식 주택이 밀집해 있, 어 한국인들의 시가지와는 구별이 되었다.
저습지 개발에 의한 시가지 확대 (2)
주거조건이 양호한 산록대나 구릉지만으로는 밀 려드는 일본인을 수용할 수 없게 되자 홍수의 피 해가 잦은 하천유역의 저습지까지도 진출하게 되 었다 한국인들은 산자락이나 구릉지대를 선호하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저지대를 매립하여 일본인 주 거지역을 확보하였다 한일병합이후 일본은 발달된. 기술과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본격적인 한강 제 방공사를 하였다 제방공사로 홍수의 위험이 없어.
지게 됨으로써 그동안 농경지로 이용되거나 습지 로 남아있던 저지대를 택지로 이용할 수 있게 되 었다 대표적인 예로 만초천 유역의 저습지는 일본. 인 거주지역인 신용산으로 개발되었고 안양천 유, 역의 저습지는 영등포 공업지대로 개발되었다.
만초천 유역 개발은 한강의 남북을 이어주는 교 통로 확보와 관련이 있다. 1900년 한강교량을 준공 함으로써 경인선은 한강이북의 서대문까지 노선이 연장되었고 한강철교와 한강 인도교가 준공되어, 전차가 운행됨에 따라 신용산과 노량진은 한강의 남과 북이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 었다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 1996). 이에 일제 는1923년부터 1925년까지 만초천에 제방을 축조 하고 저습지를 개간하여 택지를 조성하였으며 새, 로 개간된 지역으로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본격적 으로 확산되어 일본인 취락 밀집지역이 되었다 이. 곳이 조선시대 나룻터 취락이었던 구용산에 대해 신시가지인 신용산이다.
일본은1931년 만주침략을 감행하면서부터 한반 도를 대륙침략의 병참기지화(兵站基地化)하기 위해 서 한국의 공업화가 불가피했다 그리하여. 1930년 대 와서는 소위 농공병진정책(農工竝進政策)으로 전환하였으며 일본의 자본이 진출하여 공업화가, 진행되었다 이에 필요한 공업용지와 주택용지의. 확보를 위해 일제는 하천주변의 저습지를 개간하, 여 공업용지로 조성하였다 범람이 잦았던 안양천. 에 제방을 쌓아 홍수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되 고 당인리 발전소에서 전기를 공급하게 됨으로써, 영등포 일대는 경성부 최대의 근대공업지역으로 발전하였다.
년 지형도에서 시가지 부분을 추출 1915 1:50,000
한 것이 그림< 7>이다 도성 주변지역이 시가지화. 되었으며 특히 남대문밖으로의 시가지 확장이 두, 드러져 마포용산 일대의 한강변까지 시가지가․ 발달하였다 동대문밖으로는 청량리까지 길게 시가. 지가 연결되었고 뚝섬일대도 시가지화되었다 한, . 강이남에서는 영등포역 주변지역에 시가지가 발달 되었다.
서울의 시가지가 동대문 밖으로 확대된 것은 전 차부설과 관련이 깊다 일제 강점기동안 대표적인. 도시내 대중교통수단은 전차였으며 전차는 버스나, 철도에 비해 시가지 확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
다. 1899년 서대문에서 청량리간의 운행을 시작한 전차는 편리한 대중교통수단으로 시민들의 호응을 얻어 노선연장과 복선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전차 노선이 연장되어감에 따라 시가지도 노선을 따라 발달하였다 즉 동대문에서 청량리 방향 을. , 지로 가에서 왕십리간 종로 가에서 돈암동간 서6 , 4 , 대문에서 마포 노량진에서 신길동을 따라 전차정, 거장을 중심으로 신시가지가 형성되었다 서울시사( 편찬위원회, 1996).또한1930년에 부설되어 동대문 에서 뚝섬까지 운행되었던 궤도차는 뚝섬일대의 시가지발달을 촉진시켰다 이혜은임덕순김연옥( ․ ․
이은숙양보경, 1994).
․ ․
한강이북 산지사면과 하천 상류주변의 시가지화 3)
해방된 후에도 우리나라는 좌우의 대립과 일․ 제통치 잔재의 후유증으로 혼란이 거듭되고 있었 으며 서울은 무질서와 불법으로 무허가 건물이 난, 립하였다 이를 채 정비하기도 전에 한국전쟁이 발. 생하여 서울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따라서. 60년 대 초까지 서울은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기에 여념 이 없었고 급격한 인구증가로 인해 무분별한 시가, 지 확장이 이루어졌다.
산지사면과 하천변에 불량주택지역 형성 (1)
광복 후 해외에서 귀국한 동포들 한국전쟁으로, 인한 월남인과 피난민, 50년대 농촌의 피폐로 인한 이농민들의 서울 유입으로 서울의 인구는 급격히 늘어났다 도시로 유입된 이들 빈민층은 하천변이. 나 산비탈에 무허가로 판잣집이나 천막집을 짓고 불량주거지를 형성하였으며 기존 시가지내 미개발, 지뿐만 아니라 시외곽에도 정착함으로써 시가지가 시경계를 넘어 확장되었다.
청계천과 정릉천중랑천 주변이나 한강연변의․ 이촌동처럼 주거지역으로 부적합한 상습수해지역 과 남산의 해방촌이나 아현동신공덕동만리동․ ․ 처럼 도심지 부근의 산지사면에 무허가 판자촌이 들어섰다 이들은 일거리가 주로 도심지역에 있었. 기 때문에 도심에서 멀리 벗어날 수가 없었다 따. 라서 인왕산이나 낙산처럼 암석이 드러나 주거지 로 매우 부적합한 화강암 산비탈까지도 판잣집이 들어차서 영천동과 창신동낙산동숭인동과․ ․ 같
은 달동네를 형성하였다.
하천 상류 부근의 구릉지대로 시가지 확대 (2)
급격히 증가하는 서울의 인구를 수용하고 도심, 지역내의 불량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 로운 택지개발이 시급해졌다 서울시에서는 우선. 개발이 용이한 강북의 미개발지인 하천상류의 구 릉지대를 개발하여 국민주택단지를 조성하였다. 50 년대 말부터 60년대 초까지 불광천 상류의 구릉지 에 해당하는 불광동갈현동 지역에 신규주택단지․ 가 조성되었고, 70년대 들어서는 근교농업을 하던 논과 밭까지도 모두 주택지로 변모하여 역촌동․ 대조동갈현동불광동․ ․ 지역은 단독주택 중심의 전형적인 주택지역으로 개발되었다.
중랑천의 지류인 우이천과 중랑천 상류 사이의 구릉지대도 일찍이 주택지로 개발되었다. 60년대 중반에 수유동창동도봉동 지역은 도심의 인구․ ․ 분산을 위한 신흥 교외주택지로 조성되었다 중랑. 천 동쪽의 망우동면목동중곡동 지역은 교통이․ ․ 불편하고 용마산과 아차산이 인접해 있어 개발이,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나 도심지와 연결되는 순환. 도로와 외곽도로가 건설되어 교통이 편리해지자 년대 말부터 택지조성사업이 실시되었고 중랑천 60
동쪽의 구릉지는 시가지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년에 측지한 지형도에서 시가지 범 1957 1:50,000
위를 추출하여 지도화한 것이 그림< 8>이다. 1910 년대 시가지 <그림 7>과 비교해보면 시가지 범위 가 배 이상 확대되었다 특히 한강 이북의 구릉지2 . 대는 대거 시가지로 변하였다 남서쪽으로 안산과. 남산의 구릉지대인 마포와 용산 일대는 빈틈없이 시가지화 되었고 동쪽으로는 성북천 주변의 구릉, 지대까지 시가지가 발달하였다 그리고 한강이남에. 서는 영등포일대의 시가지가 크게 확대되었으며, 한강변의 노량진에서부터 흑석동상도동 방면의․ 구릉지대에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전체적으로 북동.
남서방향으로 길게 시가지가 이어져 있다
- .
년 이전까지 대표적인 대중교통수단이었던 1950
전차는 제한된 노선과 역을 중심으로 토지이용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가지형성에 제약이 컸다 이. 에 비해 자동차 도로 건설은 지형적 제약을 적게 받으므로 버스나 합승택시와 같은 자동차 교통수 단은 전차가 메우지 못하는 공백지구의 시가지화
를 촉진시켰다. 1950년대 들어 버스의 운행이 본격 적으로 이루어지고 버스이용이 전차를 능가하게 되면서 간선도로를 따라 시가지의 평면적 확장이, 이루어졌다 신시가지 개발과 버스노선의 연장은. 연쇄적으로 시가지의 평면적 확장을 가져온다 먼. 저 저렴한 택지를 개발하기 위해 변두리 지역에 새로운 주택지가 조성되고 이에 따라 인구유입이 늘어나면 새로 개발된 신시가지까지 버스노선이 연장되고 다시 더 저렴한 토지매입을 위해 더욱, 변두리지역이 개발되는 방식으로 시가지는 연속적 으로 확장되었다.
강남개발과 한강주변 저습지의 시가지화 4)
년대 후반부터 서울은 경제개발과 더불어 1960
이촌향도현상에 의한 인구유입으로 공업용지와 주 거용지의 수요가 급증하여 대규모 택지개발을 서 두르게 되었다 개발이 용이한 강북의 구릉지는 이. 미 60년대에 대부분 개발되었으므로 70년대에는 한강을 건너 강남지역 개발과 하천 주변의 저습지 개발이 이루어진다.
강남 구릉지의 시가지화 (1)
한강이남지역 개발은 개발이 용이한 구릉지대부 터 택지개발사업이 실시되었다 가장 먼저 택지조. 성이 시작된 곳은 안양천 서쪽의 구릉지대인 화곡 동 지역이다 안양천 서쪽의 봉제산 북사면에. 1960 년대 후반기 화곡동 지역 주택지 조성사업으로 10 만 단지 주택이 조성되었고 이를 거점으로 남쪽, 구릉지에 30만 주택이 조성되면서 화곡동 지역은 본격적으로 시가지화 되었다 건설부( , 1994).봉제산 을 둘러싼 화곡동 지역에 주택지가 형성되고 난후 남쪽으로 신월동에 영세민을 위한 대단위 연립주 택이 건립되고 서쪽으로 우장산 산록의 발산동에, 이르기까지 주택지가 형성되어 안양천 서쪽 강서 구릉지대는 완전히 시가지화 되었다.
강남지역 강남구와 서초구 은 한남대교 건설과( )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토지구획정리사업을 계 기로 시가지 개발이 촉진되었다 손정목( , 2003). 강 남지역은 높은 산이 없는 평지와 낮은 구릉지로 이루어져 비교적 개발이 용이하였다. 1968년 시작 된 영동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이라는 대규모 택지
개발을 통해 농경지와 임야가 대단위 주택지로 변 모하였다 특히 낮은 구릉지대는 주로 고급 단독주. 택지역으로 개발되었고 평지는 대규모 고층 아파, 트단지로 개발되었다.
지형이 저평한 강동지역은 서울의 근교농업지역 으로서 60년대까지도 전통적인 농촌경관을 나타내 었다. 70년대 들어 강동지역에도 택지조성사업이 시행되었는데 가장 먼저 개발된 곳이 천호동 구릉 지대였다. 80년대에는 명일동 고덕동 암사동 등, , 저지대가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었다 현재. 는 자연녹지로 용도지정되어 있는 강일동과 상일 동의 일부지역만이 농경지로 남아있을 뿐 대부분 의 지역이 시가지화 되었다.
인공위성 영상을 이용한 토지피복 분류 결과를 보면 70년대 이후의 시가지 확대를 알 수 있다 그( 림9). 1973년도에 시가지로 분류된 곳은 거의 한 강이북이고 한강이남 지역은 대부분 농경지로 분 류되었다 한강이남에서 시가지화된 곳은 안양천. 동쪽의 영등포와 노량진일대가 넓게 시가지로 분 류되었고 안양천 서쪽에서는 화곡동과 경인로 부, 근의 개봉동 일대가 시가지로 분류되었다 강동지. 역에서는 구 천호동 중심지가 좁게 시가지로 나타 난다.
년도에는 년도에 농경지로 분류되었던 강 1985 73
남의 구릉지대가 대부분 시가지로 변화하여 농경 지는 대폭 축소되었다 한강이북에서는 중랑천과. 당현천이 합류되는 저지대인 상계동 일대와 묵동 천 유역 그리고 불광천 하류의 수색지역만이 농경 지로 남아있고 한강이남에서는 강동구의 고덕동, 일대 송파구 수서동 일대 그리고 강서 공항동 일 대가 농경지로 분류되어 있다
한강지류 주변 저습지의 시가지화 (2)
서울의 택지개발은 주거조건이 좋고 개발이 용 이한 구릉지대부터 시작하였으나 구릉지만으로는 늘어나는 토지수요를 감당할 수가 없게 된다 이에. 년대 이후에는 막대한 자본투자와 대규모 토목 70
공사를 바탕으로 하천 주변의 저습지를 개발하게 되었다 저습지 개발에서 초기에는 비교적 치수가. 용이한 한강 지류주변의 소규모 저습지부터 개간 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농경지로 이용되었던 안양. 천과 중랑천 하류주변의 저습지를 개간하여 공업
용지와 주택용지로 이용하였다. <그림 9>를 보면 년도에 이미
1985 안양천 하류지역의 구로동 일대 와 중랑천 하류의 장안평 지역 그리고 양재천탄․ 천 주변은 시가지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난다.
안양천 하류의 저습지는 감조권에 해당하므로 배수가 불량하여 개간에 어려움이 많은 지역이다.
안양천변의 저습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게 된 계 기는 구로동지역에 한국수출공업단지가 들어서면 서부터이다. 1965년 구로동과 가리봉동이 한국수출 공업단지로 지정되면서 안양천 서쪽의 구릉지대와 저지대는 공업지역과 주거지역으로 개발되기 시작 하였으며 점차 안양천 본류주변의 저습지까지도, 공장지역으로 변모하면서 시가지의 범위가 급속히 확대되었다.
중랑천 하류의 범람원인 장안평은 해발고도가 내외에 불과한 저지대로 상습침수지역이었다
10m .
년대 중반까지도 채소재배가 활발하였던 장안 1970
평 지역은 1976년부터 시작된 장안평 토지구획정 리사업으로 시가지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양재천과 탄천 유역은 침수의 위험이 있기 때문 에 구릉지대인 영동지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발 이 늦었다 특히 양재천과 탄천이 합류하는 지점인. 대치동은 강물이 자주 범람하여 농사조차도 잘 안 되는 지역이었다. 1979년 탄천과 양재천에 제방이 축조된 후 개포동과 대치동 일대는 고층아파트 중 심의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었다.
중랑천 상류부는 극심한 홍수피해지역임에도 불 구하고 하천연안을 따라 무허가 불량주택이 산재 되어 있었다. 1985년에 상계동과 중계동 일대가 택 지개발 예정지구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인 시가지개 발이 시작되었다 산재해 있던 다수의 군사보호시. 설이 해제되었고 갈대밭과 농지에 불과하였던 지 역이 초대형 규모의 주택단지로 변모하였다. 1992 년에는 하계동번동과 창동을 개발하는 제 단계․ 2 사업이 완성되어 중랑천 유역은 거대한 신시가지 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3) 한강지류와 본류 합류점 일대 저습지의 시가지화 년
1973
시가지 농경지 산 림 수 계
년1992 2001년
년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