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G.를 이용한 통일신라시대 경주의 경관요소 특성 연구를 통한 경관정체성 규명을 중심으로-
A Study on identity of scape for Historical city, Gyeongju II
- With a characteristic of landscape elements of Gyeongju in unified Silla period by Computer Graphic -
홍 사 철 Hong, Sa-Chul
정회원, 서라벌대학 건축리모델링과 교수, 건축학박사
Abstracts
Urban scape of Gyeongju is overlapped by periods. So, a study of each Periodical urban scape is required to understanding the present urban scape. All it requires study is on account of different a characteristic and the meaning of the scape. Especially, unified Silla period was most flourished in all time, has Abundant image of urban scape, heavily influences present urban scape.
The research was proceeded through the classifying the concept of Urban form and the basic ideology and adopting the representative landscape at that time with the literatures and maps, on Unified Silla Period. And then tried to find out the identity of landscape with the link between the concepts of the representative landscape and that of Urban form in chronological order. The identity of historical landscape in Gyeongju on Unified Silla Period from the result of research has been influenced on by the connection with natural environment, urban form revealed by grid, space organized by vigorously heading up the inside, and Buddhistic ideology and esthetics.
Keywords
Identity of scape, Gyeongju, Historical landscape, Representative landscape 키워드
경관정체성, 역사도시 경주, 역사경관, 대표경관
1. 서 론
1.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현재 경주가 보여주는 실제 모습과 함께 사람들이 상상하는 이미지는 신라시대의 유적들과 함께 느껴진 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경주의 역사 속에서 신라시대 의 이미지가 가장 강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 시부족시대에서 발전하여 고대 신라시대를 거치면서 도시의 틀을 구성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면서 삼국 의 통일에 대한 자부심과 규모가 커진 나라 살림을 다스리기 위한 수도의 역할이 필요하게 되고 이에 따 라 경주의 규모는 매우 크게 확대되기 시작하였고 중 심부에 중요한 건축물과 사찰, 주택들이 구성되기 시 작하여 경주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통일신 라시대에 완성된 경주의 모습은 그 뒤 고려, 조선시대 를 거치면서 축소되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에는 천년을 지켜온 도시구조가 일부 파괴되기도 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따라서 경주의 경관정체성의 파악은 도시 최고의 발달시점인 통일신라시대의 경관을 이해 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정체성의 위기가 야기되고 있는 경주의 현재 상황에 서 경관정체성 확립은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새로운 전성기로 가기위한 준비가 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의 목적은 경주의 역사 경관정체성 을 확립하여 도시이미지를 제고하려는데 있다. 가장 번성한 시기의 경관에 대한 연구는 역사도시 패러다 임에 맞는 경관정체성을 정립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역사도시 경주의 도시경쟁력을 높이기 때문이다.
1.2 연구의 방법과 범위
연구의 방법은 앞에서 연구된 고대 신라시대의 경 관정체성 파악하는 방법과 동일하게 통일신라시대의 대표경관을 규명하고 당시의 도시형태 특성의 파악과 함께, 이면에 숨어있는 당시 도시조성자의 의도나 실 제 거주자의 반응 즉, 인간이 경관에 부여한 의미와 가치를 동시에 파악하여 역사도시 경주의 도시경관 정체성을 규명하려 한다. 연구의 세부적인 방법은 1.
도시에 대한 관념인 조성 의도나 의미를 파악하고, 저 반에 깔려있는 문화와 사상 등을 파악한다. 2. 이 관 념이 형상화된 실제 도시의 모형이 된 도시형태의 의 미 및 실제 사례를 파악해야 하며, 3. 그 시대의 대표 경관을 문헌이나 고지도 등을 통해 파악하여 선정한 다. 4. 실제적으로 도시경관을 느끼는 시민들의 뇌리
에 인식된 도시이미지나 장소성을 가진 공간을 파악 하는 것이다.
경관의 변화는 도시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던 시기 를 기준으로 분류하는데 다음과 같다. 1. 고대 신라시 대(삼국시대), 2. 통일신라시대, 3. 고려, 조선시대(중 세), 4. 일제강점기(근대) 까지를 역사경관 시기로 분 류하여 적용하고, 그 이후를 현대 경관시기로 분류한 다. 이번 연구의 시간적 범위는 통일신라시대가 된다.
연구의 범위의 공간적인 한계는 신라왕경의 중심이었 던 경주의 도심이며, 주 관점은 건축, 도시계획적인 측면에서 접근이 주가 될 것이다.
2. 본 론
2.1 신라왕경의 도시형태
신라왕경이 그 모습의 완성을 보인 것은 삼국통일 이후가 될 것이다. 삼국 통일 후 신라의 문화는 삼국 의 문화를 집대성하고 중국 당나라의 앞선 문화를 받 아들여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이게 된다. 또 한 불교 일변도에서 왕권의 한 차원 높은 경영을 위 해서 유교를 연구하게 되는데 이러한 문화와 제도의 변화는 통일 이후에 세계적 도시의 하나로 성장하기 시작한 신라 왕경의 조성에 있어서도 새로운 규범을 필요하게 하였을 것이며, 이 규범은 중국의 봉건적 도 시조성의 전범이었던 주례고공기로 보고 있고1), 구체 적인 참고사례는 당의 장안성이라고 말하고 있다.2)
삼국시대에는 남산을 뒤로하는 반월성이 도시의 중 심을 이루는 이른 바 역풍수의 구조를 보였으나, 중국 의 직간접적 영향으로 통일신라 이후에 이르러 도시 형태를 전면적으로 중국식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주된 변화의 내용은 본격적인 조방제의 도입과 함께, 유사 한 시기 중국의 도성인 북위의 낙양이나. 당의 장안과 같은 북변궁성형의 도시형태를 만들어 나가게 되었다 는 것이 정설이다.
신라 중기-후기의 신라왕경은 주례의 원칙을 따르 는 중앙궁궐형의 정방형 도시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통일이후 장안의 도시형에 영향을 받아 북변에 새로 이 궁궐을 조성하고 원래의 궁성인 반월성 및 동궁지 와 이 북궁을 잇는 주작대로 및 왕경지구를 조성하여 도시형태를 완성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전체
1) 민덕식, 신라왕경의 도시계획에 관한 시고(상,하), 사총
제35,31-74 36집 pp.1-57, 고려대학교 사학회, 정리 인용
2) 윤무병, 신라왕경의 방제, 두계 이병도박사 구순기념논
문집, pp.41-55, 1987
왕경의 주축가로는 주작대로였을 것이나 이에 수직하 여 부축으로서 분황사 윗길이 조성되었으며, 이에 따 라 공간구조도 명확히 네 부분으로 구분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림 1. 당의 장안성
2.2 신라왕경의 성립과 전개그림 2. 신라 왕경의 공간범위와 규모
신라왕경을 광의로 보면, 왕경육부(王京六部)를 지 칭하는 것으로 현 경주시 행정구역과 대체로 일치한 다. 하지만 흔히 신라왕경은 협의의 개념으로 동(東) 으로는 명활산성, 서(西)로는 서형산성, 남(南)으로는 남산신성의 좌우지역까지, 북(北)으로는 백률사가 있 는 금강산을 경계로 하는 동서남북 직경 약 5km 내 외의 경주분지를 일컫는다. 이를 田中俊明은 육부왕경 (六部王京)과 조방제왕경(條坊制王京)으로 구분한다.
대부분 왕경연구는 협의의 왕경에 해당하며, 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자비왕대의 기록처럼, 5 세기 후반 언제부턴가 북위의 수도였던 평성(平城) 또 는 효문제에 의해 494년에 옮긴 수도인 낙양(洛陽)의 도성제를 받아들여 바둑판과 같은 격자형으로 도로를 조성한 뒤 그 내부에 방리(坊里)로 설명되는 주거공간 을 마련한 계획도시를 완성한 것으로 추정하거나, 경 주분지 내에서 5세기 말부터 6세기 초의 관련 유적이 발견되지 않음으로 해서 본격적인 방리제의 시행은 황룡사가 창건되는 6세기 중엽전후이며 8세기 후반 왕경전역으로 확대된 것으로 추정한다.3)
(1) 왕경의 공간범위와 규모4)
방제가 도시전체에 투영된 흔적을 발견하고자 하는 실측 조사결과 삼국사기 지리지의 기록에는 남북 5400여m, 동서 5300여m 규모로 되어있으나 실제 항 측도와 지적도를 정밀조사하면 남북 5800여m, 동서 5200여m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왕경의 복원 원형을 어느 한시기로 정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신라 의 방제와 통일신라 이후의 방제가 시기별로 다르게 만들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공통적이다.
왕경의 공간 경계를 북으로는 백률사, 남으로는 삼 릉, 동으로는 명활산 인근, 서로는 서천을 경계로 보 고 있다. 동측 경계 역시 대체로 두 가지 경우인데 하 나는 복원 원형을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주작대로에서 서천 경계까지의 거리를 반복하여 동일한 간격으로 펼쳐지는 낭산 부근으로 보는 견해와 다른 하나는 명 활산 인근까지 보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따라서 왕경의 공간 전체범위는 대체로 남북 5800 여m, 동서 5200여m 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 중 집중 적으로 왕경이 실현된 부분은 월성과 북궁을 중심으 로 하여 남북 4,300m, 동서 5,000m 지역으로 나타나 고 있다. 왕경이 차지하는 면적은 3,000여ha 정도로 추정된다.
(2) 공간구조와 조성방식
5)
신라왕경의 공간구조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는 성 곽, 궁궐의 입지, 주작대로와 교통망, 사지와 시장의 입지 등에 의해 구조가 결정되고, 신라왕경은 중국의
3) 이근직, 신라왕경의 성립과 전개, 건축역사연구 제15권 4호, p191에서 재인용, 2006.
4) 김경대, 신라왕경 도시계획 원형탐색과 보존체계설정 연 구, 서울대학교 박사논문, p.56, 1997.
5) 김경대, 신라왕경 도시계획 원형탐색과 보존체계설정 연
구, 서울대학교 박사논문, p.57, 1997.
번 호 사용
한자 출현
회수 우선순위 대표적용례
1 寺 617회 17번째 黃龍寺 26회, 芬皇寺 10회 2 山 458회 23번째 南山 24회, 三山 4회, 吐含山 4회 3 城 181회 105번째 月城 8회, 京城 5회, 金城 3회 4 宮 103회 189번째 龍宮 7회, 龍宮南黃龍寺 5 塔 82회 237번째 黃龍寺塔 9회, 塔塔雁行
표 1.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경주도시경관 관련한자 출현빈도
장안성과 달리 외곽성인 나성을 쌓지 않고 주변의 산성으로 나성을 대신하였으므로 왕경내부 공간의 확장 은 자유로웠을 것이며, 황룡사의 배치가 정 동서남북 을 가리키고 있어, 방의 골격이 정방향으로 되어 있어 서 왕경 외곽 산의 형상과 봉우리가 계획의 지표가 되었을 듯하다.
신라왕경의 공간구조는 중앙의 주작대로를 중심으 로 북쪽의 전랑지에 북궁으로 추정하는 정궁이 위치 하고 남쪽에는 반월성과 임해전지(동궁)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왕궁의 인접해서 고분군이 위치하고 도시의 곳곳에 사찰이 존재하고 있는 구조였다.
6)
그림 3. 신라 왕경의 공간구조
(3) 방(坊)의 구성과 가로망7)
1방의 공간규모는 방의 조직에 의해 다르게 나타난 다. 대체로 160m 규격의 가구가 4개 모인 큰 방이 도 로 15.5m 크기의 가로에 의해 구분되고 이들 작은 4 방은 약 5.5m 가로에 의해 구분된다. 작은 1방은 대체 로 동서 160m, 남북 140m 크기로 되어 있고, 옥사조 의 기록에 의한다면 남북방향으로 진골의 주거일 경 우 약 20간의 건물이 될 수 있는 폭이다. 방 내부는 주로 회랑형 건축물로 되어 있다.
실제로 방의 크기를 조사하여 보면 남북의 크기가 약간 다른 방들이 발견되어진다. 이는 외방의 건설에
6) 이근직, 신라 왕경의 성립과 전개, 경주대학교 문화재학 부, 건축역사연구 제15권 4호 통권 48호, p.195, 2006. 10.
7) 김경대, 신라왕경 도시계획 원형탐색과 보존체계설정 연 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p.58, 1997.
있어서 방의 크기가 약간씩 굴절되었다는 것을 의미 하고, 시기별로 달리 조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황룡사는 작은 방 4개에 내접하며, 황룡사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증축을 하였지만 공간의 크기는 넓어지지 않고 남문지만 약 10여m 확장된 것을 본다면 방의 구 획이 이미 544년경에는 밀집하여 개발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탑의 높이는 80여m 이고 그 북으로 금 당간의 간격이 10여m 여서 금당은 영구음영지역이 되 기 쉽다. 그럼에도 증축의 흔적이 없다는 것은 이미 황룡사 주변이 건물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방을 구성하고 구획하는 도로의 크기는 동서 도로가 넓고 남북방향의 도로는 좁게 되어 있다.
(4) 주작대로의 위치와 규모
주작대로는 고대도성제를 채택한 국가의 수도에서 는 보편적인 것으로 당 장안성이 150m, 일본의 평성 경은 85m, 발해의 상경용천부는 110m로 되어 있으며 신라왕경도 율령국가체제 아래 건설되었으므로 주작 대로의 폭이 꽤 넓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먼저 주작대 로의 위치는 대체로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일본학 자는 안압지와 황룡사 사이로 보고 있으며, 주작대로 의 폭은 대체로 120m 규모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좌우경의 방이 이 부근에서 좁고 그 폭이 120m 정도 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작대로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경주고 서편과 전랑지가 접하는 곳을 발굴 하여 문제를 발견하면 주작대로의 위치와 폭에 관한 것은 쉽게 해결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3. 통일신라시대 경주의 대표경관 3.1 역사서에 나타난 경주의 대표경관
김한배의 ‘우리 도시의 얼굴 찾기’에서 제시하는 신 라시대 경주의 대표경관은 삼국사기(1145년)와 삼국유 사(1285년 경)의 두 가지 사서에서 등장하는 경관요소 를 지칭하는 문자 출현빈도의 상대순위로 나타내었다.
그 표는 다음과 같다.8)
6 鷄 46회 415번째 鷄林國, 鷄林土內客水二條
7 陵 43회 생략 陵在瞻星臺西南
8 瞻 21회 생략 練石築瞻星臺
9 坊 6회 생략 1360坊, 芬皇寺上坊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경주의 대표적 도시경관 은 절과 탑이 지배적인 것이었다. 삼국유사에서의 ‘절 들은 하늘의 별처럼 벌려있고, 탑들은 기러기떼 같이 널려있다’는 유명한 문장에서 보이듯이 절과 탑으로 치중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한 경주 도시의 가장 중심적 대표경관은 ‘사찰’과 ‘산’이 며, 그 다음으로 ‘궁성’과 ‘탑’이 2차적인 대표경관요소,
‘계림’과 ‘고분(능)’이 3차적 경관요소로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황룡사(탑)’(절과 탑 합 35회)와 ‘남산’(24회),
‘월성(반월성)’(8회)과 ‘용궁’(7회)이 대표적으로 많이 등장하는 구체적 경관요소였다. ‘산’은 ‘남산’이외에도
‘삼산’(4회), ‘토함산’(4회), ‘명활산’과 ‘선도산’이 각각 2 회씩 언급되어 ‘남산’을 중심으로 하는 ‘선도산’과 ‘명 활산’의 ‘삼산구조’가 고려조에도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남산’과 ‘계림’은 신라시조의 근거지 로서 신성시되었던 것 같으며 심지어 ‘계림’은 국호로 까지 사용되었던 나라 전체의 대표경관이었다.
3.2 왕궁
통일기의 왕궁은 현재의 전랑지에 있었던 북궁으로 추정한다.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반월성과 임해전지 등 의 왕성은 통일시대 경주의 대표경관이다.
그림 4. 통일신라시대 경주의 왕궁
8) 김한배, 우리도시의 얼굴 찾기, 태림문화사, 1998, p.88
3.3 고분
도시가 계속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경주 도심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벗어난 이 시기의 왕릉은 주변의 산 과 어울려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린 경주의 대표적인 경관이다.
그림 5. 통일신라시대 경주의 고분
경주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거대한 규모의 고분들은 경주 도시경관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경주 도심 중 심부와 신라왕경을 중심으로 사방의 외곽지역에 위치 하고 있어 경주 어느 곳에도 이 고분들을 인지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경주의 도시이미지를 구성하는 매 우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고분들은 개별적, 집합 적 구성되어 도시경관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림 6. 경주 고분 분포 특성
이 고분들은 앞에서 밝힌 오악과 만다라의 개념으 로 나타나는데 이는 가장 중요한 것들은 중앙에 모으 는 개념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도시의 규모가 확대되 고 중앙에 모인 고분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면서 고분 들은 신라왕경의 외곽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신라 의 태동기에는 오릉에 입지하기 시작하여, 반월성 가 까이에 왕릉이 밀집하여 구성되는 초기 신라의 시대 를 지나고 신라의 국력이 커지고 당나라의 영향을 받 아 왕경의 규모가 커지면서 더 이상 왕경 내에 왕릉 이 위치하기 힘들어지면서 서악과 낭산, 보문, 배반 등의 왕경 외곽에 왕릉이 위치하기 시작하여 진행되 다가 신라 말기에는 남산의 삼릉에 말기 3왕이 안치 되었다. 김유신 장군묘는 사후 왕으로 추대되어 조성 된 묘로 십이지신상의 조상이 특색이 있으며, 동해 봉 길의 문무왕의 수중릉과 서양인의 모습을 한 석상의 괘릉도 특색이 있다.
3.4 사찰
더욱더 많은 사찰들이 경주에 세워지게 되어 삼국 유사에서의 절들은 하늘의 별처럼 벌려있고, 탑들은 기러기떼 같이 널려있다는 비유가 어울리는 도시의 대표적인 경관이 되었다.
그림 7. 통일신라시대 경주의 사찰
사찰건축과 조각으로 대표되는 신라의 불교문화는 경주에서 왕실의 보호와 적극적인 권장아래 10세기 전반에 이르는 400년이라는 장구한 기간에 걸쳐 화려 하게 꽃을 피운다. 그리고 이들 사원은 고대국가일수
록 일반 백성들의 주거지와는 달리 궁성과 함께 최고 의 위상을 가진 건축물의 하나였다. 따라서 국가에서 창건한 사찰은 건물 그 자체가 지배자의 권력과 권위 를 상징하는 것이자 중앙집권을 지향하는 국가 이데 올로기의 상징물이었다.
9)
따라서 일정한 규모를 가진 사찰들 대부분이 국찰(國刹)임에서 알 수 있듯이 엄격 한 통제와 계획 하에 창건되었다. 사찰의 창건연대를 시기별로 살펴보면 크게 세 단계를 거치면서 왕경지 역 전반에 걸쳐 불교문화를 완성하고 있다.경주 왕경내에 창건된 사찰은 왕경이 완성되기까지 인 中古期(514-654)와 中代(654-780)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창건된 사찰의 분포는 현재 경주시 전역에서 보이는 불교 유적의 이유를 설명해 준다. 마지막 시 기, 즉 왕경이 완성된 이후인 8세기 말부터 10세기 전 반에 이르는 기간에 창건된 사원의 대부분이 토함산 과 남산 그리고 왕성을 벗어난 지역에 집중되고 있다.
현재 경주 도심의 곳곳에서 보이는 불교관련의 유 적들은 앞에서 설명한대로 신라의 왕경이 완성되기 전에 건립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금은 당시의 목 조 건축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으나 석조 건조물인 석탑과 당간지주, 주춧돌과 석대 등이 남아 옛 사찰의 규모와 신라의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4. 통일신라시대 경주의 경관 4.1 삼국통일시대 경주의 가로 장소성
삼국통일시대 경주의 가로 장소성은 다음과 같이 예상할 수 있다.
1.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한반도 유일의 통일국가인 신라의 중심인 왕조의 궁성인 반월성과 북궁, 임해전 지(동궁)가 모여 있었다. 전국의 사람들이 모여들고, 많은 사람들이 왕래를 하고, 왕족과 정부의 관리들이 거주하고, 외국의 사신들이 오고가는 이곳의 장소성은 경주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였을 것이다.
2. 역대 왕들의 고분군들은 전시대 보다 영역을 확 대하여 분포하면서 오랫동안 경주의 중요한 가로 장 소성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 고분군은 지금까지도 경 주의 중요한 대표경관이다.
3. 주작대로와 분황사를 연결하는 동서도로는 주작 대로를 제외하고 경주의 가장 번화하고 주요한 거리 였을 것이다.
9) 이근우, 신라의 도성과 일본의 도성, 신라문화 26집 동
국대 신라문화연구소, p.18, 2005
4. 전시대부터 중요한 도로로서 장소성을 가지고 있 었던 도로로 여러 사찰들이 모여 있고 영천에서 경주 의 왕궁으로 접근하는 도로인 가로의 장소성도 매우 중요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림 8. 통일신라시대 경주의 가로장소성
4.2 통일신라시대 경주의 경관체험
문헌과 유적을 토대로 구성된 신라왕경의 모습을 CG로 구성하여 통일신라시기의 신라왕경의 시뮬레이 션을 하였다. 이는 그 당시의 경관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지만 대략적인 경관체험은 경관정체성을 확립하 는 연구에는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된다.
그림 9. 체험 지점 설정
(1) 첨성대에서 조망
그림 10. 첨성대에서 황룡사쪽으로 조망
(2) 주작대로에서 조망그림 11. 북궁에서 반월성쪽으로 조망
(3) 분황사 앞길에서 조망그림 12. 명활산쪽으로 조망
(4) 낭산에서 조망그림 13. 낭산에서 도심쪽으로 조망
(5) 남산에서 조망
그림 14. 남산에서 도심쪽으로 조망
(6) 선도산에서 조망그림 15. 선도산에서 도심쪽으로 조망
(7) 명활산에서 조망그림 16. 명활산에서 도심쪽으로 조망
(8) 경관 시뮬레이션의 결과로 본 경관특성
시가지와 높은 고지에서의 조망으로 통일신라시대 의 경주의 경관을 체험하였는데 나타난 경관의 특성 은 다음과 같다. 시가지에서의 경관 특성은 분지에 입 지하고 있는 도시의 특성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어 느 곳에서 조망하더라도 배경에는 산이 나타난다. 특 히 의미가 있는 삼산(남산, 선도산, 명활산)이 배경이 되고 있다. 건축물 배치가 정방향을 취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산들이 기준이 되었음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또한 황룡사 탑과 고분들이 경관 체험 시각에 많이
들어오는 결과로 보면 황룡사 탑과 고분이 도시의 랜 드 마크가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반월성과 북궁 도 규모와 높이로 주요 경관요소로서 역할을 하고 있 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산이라는 강력한 변형된 비스타와 고분과 황룡사 탑의 랜드 마크 비스타로 중 첩된 시각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첨성대는 예상보다 규모가 작아서 랜드 마크로서의 역할보다는 초기의 기준으로서의 역할과 의식상의 도 시의 중심 역할을 했던 것으로 예상된다.
주작대로를 제외한 남북도로는 장소성이 매우 약하 게 나타나고 있으며, 동서도로가 강력한 장소성을 나 타내고 있다. 정형의 도시구조를 가지고 있으나 성곽 이 없는 이유와 산과 자연스럽게 가로가 만나는 관계 로 정방형의 구조는 갖추지 못하고 있다. 남북 보다는 좌우에서의 시각구조가 명확하게 읽혀지는 도시구조 를 가지고 있다. 가로의 구조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 으로 보아 현대도시의 도시계획 개념으로 관리되고 있는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5. 결론 - 경관특성으로 보는 역사경관 정체성
5.1 도시경관에 따른 입지형식 및 도시형태
초기 읍락도시 상태에서 출발한 경주는 샤머니즘과 음양오행적 배치를 통한 삼산중심의 도시 입지 형식 을 보이면서 규모를 점차 확대해 나갔다. 이 후 규모 와 외국과의 교역이 늘어가면서 선진문물의 도입으로 도시조직의 구성에도 주례고공기와 당의 장안성의 형 식을 받아들여 격자형의 도시 형태로 발전 하였다.
고대국가에서의 도시경관 형식의 주요 개념은 종교 와 정치적인 것으로, 양대 개념이 종합적으로 도시경 관에 표현되었다. 도시의 중심이 왕궁과 밀접한 거리 이며 제정일치의 개념에서 제단의 자리인 첨성대가 경주의 중심이 되었을 것이며 이 중심은 경주의 도시 형태를 구성하는 개념인 음양오행과 만다라 삼산중심 개념 모두에 적용되는 위치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중 심은 신라시기 내내 도시의 중심역할을 했을 것이다.
경주의 이 도시 입지형식 및 방형 도시형태는 통일 신라시대의 지방 거점도시였던 구주와 오소경의 도시 들도 왕도를 모방하여 육부제와 방제를 실시하였으며, 이러한 오소경과 구주에 해당했던 도시들의 입지와 평면 형태는 경주와 거의 유사하게 역풍수의 삼산구 조와 방향의 도시내부에 경자형 가로망을 갖는 것이 었고 현재까지도 그러한 가로패턴이 남아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들 도시들은 최초의 지 방계획도시로서 한국도시의 형태적 원형을 보여준다.
5.2 도시경관구조
신라왕경은 중국의 장안성과 달리 외곽성인 나성을 쌓지 않고 주변의 산성으로 나성을 대신하였으므로 왕경내부 공간의 확장은 자유로웠을 것이며, 황룡사의 배치가 정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어, 방의 골격이 정 방향으로 되어 있어서 왕경 외곽 산의 형상과 봉우리 가 계획의 지표가 되었을 듯하다.
이와 같은 도시공간구조는 도시경관에 공간의 깊이 를 만들어 냈다. 공간의 깊이란 경주의 도시 생성에서 시작하는데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외부의 침략으로부 터 방어의 목적을 위해서 도시 주변에 산을 품고 계 획을 한다. 즉 경주는 지형에 반하여 도시 내부를 만 들기 보다는 이용하여 만들었다. 따라서 둘러싸인 산 들 주위에 유기적인 도시의 모습과 중앙에 궁궐의 모 습을 통해서 여러 레이어를 만들고 몇 겹의 층을 만 들게 된다. 따라서 도시의 여러 건물의 레이어와 함께 마지막에는 멀리 산이라는 강력한 경계가 도시의 공 간을 인식시켜주는 경관을 만들어 낸다.
왕경의 중심지에 북궁과 반월성, 안압지 등의 왕궁 과 정치 기능의 건물들, 국가의 중요한 사찰이 입지하 고, 이 건물들 주변을 강력한 권력을 지닌 왕족과 귀 족들의 주거가 입지하고, 다시 다른 주거 기능의 건물 들이 이 건물들을 에워싸고 입지하고, 산이라는 강력 한 마지막 경계가 도시의 깊이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5.3 도시경관 시각구조
신라왕경은 북궁과 반월성, 동궁등의 왕궁을 중심으 로 구성되고, 왕궁 가까이에 거대한 왕릉들이 존재하 고 있는 구조였다. 여기에 사찰이 도시 전체의 대표적 경관 양식이 되었다. 왕경 내에 많은 사찰이 건립되어 있었으며 이중 국가에서 창건한 황룡사와 같이 규모 가 크고 높은 탑을 가지고 있었던 사찰은 도시경관의 중요한 랜드 마크가 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신라왕경에서 랜드 마크의 역할을 하는 요 소는 왕궁과 사찰의 높은 탑과 거대한 규모의 왕릉으 로 서양의 도시와 같은 방법으로 강력한 비스타를 인 식함으로써 도시 공간을 인식해 나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삼국통일을 염원하면서 만들어진 황룡사의 9 층 목탑은 80m(추정)의 높이를 보이며 왕경의 중심부 에 위치하여 신라왕경의 강력한 랜드 마크로 왕경 어
디에서도 인식되고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탑을 통해서 도시의 중심부에서는 도시 공간 안에 어느 부 분에 위치하는지를 알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전통도시와는 다른 방식으로 신라왕경 의 도시경관이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도시는 비스타적인 도시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 이런 형태에도 불구하고 왕경의 각각의 끝에는 강력한 랜 드 마크인 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런 비스타적인 시 각의 끝에 파노라마식의 경관인 산의 모습이 어디에 서든지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비스타적인 인식과 함 께 다른 형식의 도시 공간 인식의 요소인 변형된 산 지의 비스타가 공존하고 있는 시각구조인 것이다
신라왕경은 미리 정해 놓은 경계 안에서 도시를 구 성하는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하지만 중국이나 일본, 서양의 경우와는 달리 신도시로서 조성된 것이 아니 기에 읍락도시를 기반으로 시기별로 차츰 조성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각 가구들이 필요에 따라 유기적인 형 태로 각각의 장소성올 만들어 가면서 도시의 규모가 확대되었을 것이다. 초기에는 왕궁의 경우도 질서정연 하고 확연하게 배치와 규모가 결정된 것이 아니라 필 요에 의해 가구를 개발하여 구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도시의 조직이 매우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밖 에 없었다. 이는 거리보다는 장소성을 우선으로 하는 공간구조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삼국을 통일한 후 신라왕경의 계획을 엄격 하게 적용하면서 현재의 도시계획과 같은 관리가 이 루어졌던 것으로 나타난다. 최근 발굴된 월성 해자의 목간에 第八巷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이는 도로 의 순서를 매기는 명칭일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백제 도 5부 5항으로 되어 모두 25항이 있다는 연구가 있 어서 그 유사성을 뒷받침하여 준다.
10)
이 당시 신라 왕경의 구성이 진골 중심의 귀족들로 엄격하게 제한 되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서양이 거리의 이름으로 도시를 인식하는 것과는 같게 경주의 왕경 도 거리의 이름으로 인식하였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는 현대적 개념의 도시형식을 갖춘 도시였을 것이다.참고문헌